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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바디페인팅 한 파일럿>의 줄거리:
뉴질랜드 항공사의 45초짜리 광고가 있습니다. 주제 카피는 Nothing to hide입니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참으로 솔직하게 고객에게 서비스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이 뜻을 전달하기 위해 모든 직원이 바디페인팅으로 유니폼을 입고 나타납니다. 이 바디페인팅 파일럿의 상태! 이것이 바로 천국 말씀의 실상에 대한 비유입니다.
바디페인팅 한 파일럿
(막4:21-25)
2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바디페인팅 한 파일럿>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바디페인팅 한 파일럿’
2009년 뉴질랜드의 항공사에서 45초 동안 TV를 통해 방영한 광고가 있습니다.
그 광고의 카피가 뭐였나 하면 "Nothing to hide", 즉 ‘어떤 것도 숨기지 않는다’라는 것이었습니다.
45초 동안 그러한 주제 아래 만들어진 광고의 내용은, 뉴질랜드 항공사에 소속된 모든 직원들, 그러니까 공항에서 티케팅 해주거나 짐을 카터에 실어서 비행기화물칸으로 옮기는 사람, 비행기 안에서 일하는 승무원들, 비행기를 조종하는 파일럿 등 모든 사람이 다 몸에 바디페인팅을 하고 승객들에게 서비스를 하는 그런 내용이 영화처럼 만들어져서 광고가 되었습니다.
이 바디페인팅을 한 파일럿을 모양을 보면 아주 기가 막히게 정교합니다.
맨몸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건데, 아마 모자는 진짜로 쓴 거겠지요?
그런데 넥타이며 와이셔츠의 단추며, 또 한 사람은 와이셔츠에 넥타이만 매고 가방을 메고 공항을 걸어가고, 그 옆에 다른 조종사는 자켓을 입고 가슴에 비행마크까지 달았는데, 와이셔츠도 자켓도 견장도 그리고 옷소매에 있는 노란 띠도, 가슴에 하고 다니는 금색 벳지까지 다 몸에다 그린 거예요.
그런데 정말 혼란스러울 만큼 진짜 옷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정교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얼른 보면 그냥 옷을 입고 오는 것이고, 여자 승무원도 음료수를 가득 담은 카터를 끌고 오는데 목에 묶은 스카프는 진짜로 스카프를 맨 것 같지만 실은 목에서 가슴 쪽으로 그려놓은 겁니다.
여기서 착각해서 그게 몸에다 그린 그림이 아니라 진짜 입은 옷이라고 생각해서 ‘어, 이 스카프 참 멋지네요!’ 하면서 만지면 여승무원 목을 만지는 게 되는 겁니다.
파일럿이 피곤해서 잠을 잘 때 벳지가 멋지다고 가위를 가지고 도려내려고 했다가는 그 사람의 살을 자르는 게 되는 거예요.
그건 장식도 옷도 아니고, 사람의 살이에요.
바로 이 바디페인팅을 하고 있는 파일럿의 모습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말씀의 실상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천국말씀의 실상이 어떤 것이냐?
바로 바디페인팅을 한 파일럿의 이 상태와 같다 이겁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익히 아는 아주 낯익은 내용들입니다.
등불의 비유는 우리가 마태복음 산상수훈 때 봤어요, 그런데 의미가 다릅니다.
같은 말인데 의미가 달라요, 이게 바로 복음서의 묘미 같아요.
그리고 뒷부분에서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도 ‘너희가 남을 비판하지 말라, 남에게 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다’ 이것도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씀이고,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마는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똑같은 말을 썼는데 그 의미를 완전히 다르게 적용을 시켜서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 재미있지요, 성경처럼 재미있는 게 없다고 봐요.
자, 그러면 이게 무슨 말일까요?
등불의 비유는 여기서는 어떤 의미로 쓰였느냐 하면,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공생의 사역의 일성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그러니까 복음은 바로 천국을 너희가 가질 수 있다는 내용을 전하는 것이고, 그 천국을 내 것으로 삼기 위한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게 되면 천국이 내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에서 등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천국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천국을 등불로 비유하시면서, 특별히 등불에 정관사를 붙였습니다.
천국이 등불이 된다는 것을 비유로 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게 뭐냐 하면, ‘내가 지금 천국을 전하고 있는데 왜 너희가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느냐, 너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게 어떤 행위에 비유되는지 아느냐? 천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깜깜한 방에서 등불을 켜서 그 등불을 침대 밑에 두는 것과 같다, 깜깜한 방에서 등불을 켜서 그 등불 위를 됫박을 갖다 씌워놓는 것과 같다’
깜깜한 방에서 등불을 켜놓고 왜 침대 밑에 깊숙하게 집어넣느냐?
왜 깜깜한 방에 등불을 켜놓고 그것을 큰 됫박으로 갖다 뒤집어씌워버리느냐?
그거 안 된다는 얘기에요.
주님이 보실 때 지금 우리는 깜깜한 방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부 암중모색이에요.
사업을 해도, 부부생활을 해도, 자식을 키워도, 부모를 공경해도, 장사를 해도, 공부를 해도, 인생의 꿈을 갖는다고 해도 전부 암중모색입니다.
깜깜한 방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등불을 켜는 일 아닙니까?
그런 것처럼 ‘너희가 이 세상에서 돈 버는 일이 급하고 장사하는 일이 급하지만, 너희 건강을 돌보는 일이 급하지만, 그건 깜깜한 방이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 등불을 켜야 되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그 등불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그 등불을 기껏 켜 갖고는 그걸 침대 밑에 넣으려고 하고 있다, 천국을 천국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깜깜한 방에서는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제일 먼저 등불을 켜듯이 그렇게 천국을 제일 먼저 받아들이면, 돈이 급하고, 건강이 급하고, 자식문제가 급하고, 모든 게 급하지만 제일 먼저는 불을 켜야만 움직일 수 있으니까, 너희가 천국을 받아들인다고 그러면, 너희가 답답해하고, 궁금해 하던 모든 것이 다 보이게 될 것이다’라는 얘깁니다.
오늘 본문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말이 참 어렵지요?
‘드러내려 하지 않고’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그 물건을 갖다가 숨기지 않는 한 등불을 켜면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 다음,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의도를 갖고 뭔가를 나타내려 하지 않으려고 막 뒤로 숨기지 않는 한 등불을 켜기만 하면 다 보인다는 얘깁니다.
지금 내가 돈을 많이 벌었습니까?
그런데 몰라요, 암중모색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의 기준을 가지고 좋다고 하지만 그 속에 무슨 뜻이 숨겨있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자식이 공부를 못합니다, 이건 모른다는 거예요.
그런데 천국을 등불을 켜듯이, 자식문제 돈 문제 건강문제 때문에 걱정하기 전에, 첫 번째로 천국을 마음에 딱 받아들이고 그 천국의 빛 아래서 보면 모든 삶의 현장과 삶의 사건과 일들이 그 비밀을 다 드러낸다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를 다 알게 되고 내가 무엇을 해야 될지 어떻게 해야 될지 다 알게 된다는 거예요, 지금 주어진 상황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래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다 보인다는 거예요.
그리고 잘못된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잘못된 거 같습니다, 또 세상의 기준으로 잘된 것 같습니다.
그게 다 틀린 얘기에요.
등불처럼 천국을 제일 먼저 받아들이고 나면, 그렇게 문제가 되었던 자식을 보고 ‘아, 이게 문제가 아니었구나!’ 내가 무엇을 해야 되고 어떻게 해야 될지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안 해요, 이걸 안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이걸 왜 안 하는가 봤더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절에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거 왜 마태복음에서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이 말씀을 천국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올바르게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이 맥락에서 쓰고 계십니까?
자, 맨 처음에 등불을 켜듯이 천국을 첫 번째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천국이 내 첫 번째 현실이 되기만 하면, 모든 게 다 밝혀지고 모든 게 다 제자리로 돌아가고 천국의 빛에서 보면 감사하지 않을 게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천국이 이 땅에도 이루어지는데, 왜 천국을 안 받아들이느냐 하면, 무엇을 들을 때 조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듣는가 삼가라’ 여기에 아주 기가 막힌 포인트가 있는 겁니다.
너희가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듣는 중에 무엇을 듣는지 똑똑히 정신 차려 들으라는 겁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천국은 말씀으로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전달이 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천국은 4차원의 실재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그런 4차원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이 세상 보이는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채 그 4차원의 천국에 계십니다.
그래서 그 4차원의 천국이 우리에게 전달이 되었는데, 이제 때가 가까이 왔어요.
그 4차원의 천국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삶의 현실로 느끼고 일상적으로 생활화 할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졌는데, 문제는 그 4차원의 천국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간의 언어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다는 얘깁니다.
마치 뉴질랜드 항공사의 파일럿이 자기의 맨몸을 드러내지 않고 거기에 바디페인팅을 해버린 것처럼.
천국이 파일럿의 몸이라고 하면 천국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언어, 비유든지 뭐든지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 말씀하신 이 말씀은 천국이라는 바디에 페인팅을 한 거라는 얘기에요.
자,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천국이 인간의 언어로 전달이 되니까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면 그냥 말뿐인 걸로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4차원의 천국을 그대로 우리가 느끼도록 드러내 놓으면 믿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인간의 언어 속에 담아서 천국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언어 속에 전달이 되고 있으니까 말 속에서 4차원의 실재가 전달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말로 이루어져서 말로 전달이 되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그냥 말뿐이라고 생각해버린다는 얘깁니다.
현실적으로 내 자식이 살아있고 내 남편이 살아있는 것처럼 이런 현실로 느끼지를 못한다는 거예요, 천국을.
그러니까 사람들이 천국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이렇게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천당 밑이 분당이다’, 분당이 그렇게 살기가 좋다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또 제가 밴쿠버에 있을 때는 밴쿠버가 자연환경이 아름답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밴쿠버는 재미없는 천당이고 서울은 재미있는 지옥이다.
그리고 또 밴쿠버를 천당과 비교해서 999당이라고도 얘기해요.
천당에 하나 모자라는 999당이라는 거죠.
자, 이게 다 무슨 얘깁니까?
천국, 천당, 이런 이야기들을 심리학적 차원에서 충족된 상태를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합니다.
‘아, 이게 천국이지! 당신과 함께 있으면 천국이야’ 이런 식으로 사용해버려요.
그리고 학자들은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그냥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그 단순한 그 정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실지로 4차원의 천국이 일상화될 수 있도록 때가 찼고 가까이 왔다는 얘기에요.
그런데 말로 전해지고 있다고 해서 천국을 이렇게 취급해버리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현실감을 부여하지를 않습니다.
마치 뉴질랜드 항공사의 파일럿이 바디페인팅을 하고 걸어가고 있을 때 사람들이 와서 파일럿이 맨 넥타이를 보통의 넥타이로 생각하는 것처럼, 천국을 담고 있는 천국 말씀을 그냥 말뿐인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바디페인팅 한 파일럿을 볼 때 조심해라, 그 넥타이가 좋다고 그 넥타이를 만졌다가는 그 사람의 살을 만지게 되는 거야, 그 넥타이는 분리할 수가 없어, 옷이라면 벗어버리면 그만이지만, 내가 지금 천국을 전달할 때 너희들이 쓰는 언어로 전달이 된다고 해서 마치 그것이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천국이라는 단어를 현실감을 전혀 부여하지 않고 대했다가는 너희 큰일 난다, 너희가 천국 말씀을 들으면서 천국이 어떤 거다라고 생각하는 그 판단과 헤아림으로 그대로 너희가 판단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씀으로 전달되는 천국이라고 해서 너희가 그 천국에 현실감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천국 안에서도 너는 현실이 아니야!’
천국에서 내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천국 바깥에 있다는 얘기이고, 천국에는 없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지요.
직장동료들끼리 식사를 하면서 심술궂은 부장에 대해서 험담을 합니다.
‘그 박 부장만 없으면 내가 정말 살겠는데…’ 그러니까 다른 친구가 ‘야, 내가 한번 들이 받아볼까?’ ‘어이구, 자네가? 자네가 박 부장님께 들이 받으면 내가 100억 주지!’
그러니까 ‘에이, 그러게 말이야!’ 그러고 맙니다.
이때 이 100억이라는 말이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100억이 담겨있지가 않아요.
그냥 말뿐입니다.
‘너희가 내가 천국이라고 말할 때, 내가 백억 줄게, 하는 말에서의 백억으로 알아듣느냐? 말 따로 백억 따로 있는 걸로 알고 있느냐?’
‘백억은 은행에 들어있고, 백억이라는 말은 말뿐이다, 그래서 이 말을 듣고 내가 백억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
‘내가 지금 천국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으니까 천국이라는 실체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천국의 실재가 진짜 내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백억을 얘기할 때처럼 천국이라는 말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리고 너희 앞의 현실감이라는 것은 지금 돈을 벌어야 된다는 현실감, 건강을 보살펴야 된다는 현실감, 자식을 돌봐야 된다는 현실감, 그런 현실감 밖에 현실이 아니지?’
‘내가 천국을 갖고 온 것은 너희들의 삶 전체를 밝혀줄 등불인데, 그 등불을 침대 밑에 넣어두는 미친 사람들처럼 너희가 말로 전해지고 있는 천국이 말로 전해진다고 해서 그것에 현실감을 전혀 부여하지 않으면 천국 안에서 너희가 비현실이 될 것이다’
‘너희 존재가 천국 안에서 없을 것이다’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천국은 4차원의 실재입니다.
그런데 그게 말로 전해지고 있는 거예요, 말로 전해지니까 그것을 이 삶의 현실 속에서 내가 살아야 될 현실로 생각하지를 않는 겁니다.
주님의 천국말씀은 천국이라는 바디에 페인팅을 한 것으로서 천국의 실재와 주님의 천국말씀이 분리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천국말씀을 하시면, 그것이 때가 찼고 가까이 왔다고 그러시면, 바로 내가 지금 돈 벌었다는 현실보다 더 앞서서 느껴야 되는 현실이라는 거예요.
‘내가 백억 줄게’ 이렇게 말했는데, 그게 바로 친구가 아니라 주님이 하신 말씀이라는 겁니다.
‘네가 십자가에서 죽기만 하고, 내가 갖고 온 천국을 진짜로 믿는다면 내가 천국을 네게 줄게!’ 그 말 속에 천국이 들어있다는 거예요, 천국이 실제로.
바디페인팅이라는 거예요, 그걸 천국의 실재와 분리시켜서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모든 세상의 말은 실제와 같을 수도 있고, 실제를 담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는 그 천국의 실재 4차원의 세계가, 이상하죠? 그냥 입에서 나오는 그 말, 글로 써있는 성경의 말씀 속에 4차원의 실재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이 4차원의 실재를 실재로 믿고 내 것으로 삼고 싶으면, 십자가에 매달려서 이 세상에 대해 죽으라는 얘깁니다.
세상에 대해 죽으라는 얘기는 깜깜한 밤중에 제일 먼저 등불을 켜야 되는 것처럼 제일 먼저 천국을 켜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천국이라는 바디에 그려져 있는 페인팅으로서의 천국말씀을 십자가 붙잡고 들은 다음에 곧바로 천국의 실체를 손으로 만지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천국의 4차원적 실재가 말씀을 통하여 전달되지만 그 말씀과 천국이 따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로 말로 전해지고 있지만 4차원의 실재가 그 안에 담겨있음을 우리가 알게 해주셔서 그 말씀을 통해 전해지는 4차원의 실재가 내 삶의 현실로 되어 가는 기가 막힌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