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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리하 동아리 5월1`2일 활동보고
일시 : 2012년 5월 12일(토) 오전 10시~12:30
참석자 : 김대원, 위영범, 김어령, 김어진, 김연준, 송희섭, 장정후, 송건희, 윤희수 등 9명
활동장소 : 광나루 한강공원(바위절터~광진교~광진교8번가~광나루터~상부암석불입상)
활동장소에 대한 내용
바위절터
고덕수변생태복원지부터 바위절터까지는 약 1.6km의 길로 오르막입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오르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목에 강동구 암사아리수정수센터취수장 진입로 왼쪽으로 삼국시대에 세워졌다고 하는 바위절터를 알리는 표석이 서있습니다.
구암정 정자가 서 있는 오른편으로는 건물터임을 알리는 초석들이 남아 있어 옛 모습들을 상상해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이곳은 신라 시대 때 9개의 절이 있어서 구암사(九岩寺)라는 명칭이 붙게 됐습니다. 그런데 절이 광나루에 있는 뱃참인 하진참* 동쪽 강변바위에 위치해 바위절이라 불렀습니다. 현재, 절은 소실되고 지금은 바위절터만 남아 있습니다. 조선 초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백중사(伯仲寺)는 하진참(下津站) 동쪽에 있다’고 했으므로 구암사는 백중사로 고쳐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바위절로 인해 암사동이란 지명이 유래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위절은 언제 훼손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기 1667년(현종 8) 이곳에 구암서원(龜岩書院)이 세워졌습니다. 이 지역의 유생들은 여기에서 유교적인 학식과 교양을 쌓아 과거에 응시하여 관료로 입신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배출된 구천면 유생들은 둔촌 이집(李集)을 향사하고 1697년(숙종 23) 구암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이집(李集), 이양중(李養中), 오윤겸(吳允謙), 임숙영(任叔英), 정성근(鄭誠謹) 등이 배향되고 노론의 색목*이 강하였습니다. 유생들은 구암서원 건립을 중심으로 하여 향약을 조직, 유교적 마을 공동체를 조직하였습니다. 하지만 구암서원은 1871년 고종 때 전국의 서원철폐와 함께 사라지고, 1986년 서울시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벌인 ‘한강변 문화유적조사’를 통해 발굴되어 1898년 이를 기념하기 위한 유허비와 주춧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한강변의 작은 암자마저도 정수장 건설 때 도로를 내면서 사라졌습니다. 그 규모는 현재 중부고속도로 진입로와 암사아리수정수센터취수장의 건설 때문에 크게 훼손되어 잘 알 수 없지만, 현 발굴지와 절벽 밑 취수장 진입로 등에서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오늘날 구암정을 건립하여 이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배향된 인물들을 살펴보면
1) 이집(李集, 1327∼1387)
고려 후기의 학자·문인.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遁村). 광주 향리 당(唐)의 아들입니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1368년(공민왕 17)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가족과 함께 영천으로 도피하여 고생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전야(田野)에 묻혀 살면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시에는 꾸밈과 우회보다는 직서체(直敍體)에 의한 자연스럽고 평이한 작품이 많습니다. 그는 당시 임심문(任深文)을 비롯한 60명에 달하는 많은 인물들과 시로써 교유*하였습니다. 특히,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과의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문집 부록에 실린 삼은(三隱)의 기(記)·서(序)·서(書)는 그와 삼은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게 하여줍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그가 조선조에 벼슬을 지냈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1611년(광해군 3) 8대손인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주청*이 받아들여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바로잡혀지게 되었습니다. 저서에 ≪둔촌유고≫가 있습니다.
둔촌 이집(李集) 선생은 바위절 근처인 둔촌동 산 328번지의 1호에 일시 살았으므로 그의 호를 따서 둔촌동이란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지역에 이집 선생과 관련된 얘기가 전해오는데, 그는 고려 말 공민왕 재위 때 신돈을 탄핵하였고, 신돈은 이집을 처형하려고 포살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이집은 부친 이당(李唐)을 등에 업고 남쪽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이집은 천신만고 끝에 경상도 영천에 사는 친우 최원도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최원도는 이집이 부친과 은신하겠다고 부탁하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기 방 다락에 숨겨 주었습니다. 당시 최원도의 집에는 제비라는 계집종이 있었습니다. 최원도가 밥을 세 그릇 씩 먹고 방에서 용변을 보는 등 미치광이 행세를 하기 시작하자 집안 식구들은 놀랐고, 최원도의 부인은 제비에게 그의 동정을 살피라 하였습니다. 다락 속에 두 사람을 숨겨 이를 밖에 알리지 않으려고 최원도가 미치광이 짓을 벌인 것을 알아낸 제비는 그 두 사람이 이집과 그의 부친 이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원도는 2년 동안 다락에 이들을 숨겨놓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미치광이 행세를 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부인은 제비가 외부에 누설하지나 않을까 우려했고, 영리한 제비는 그 모습을 눈치 챘습니다. 이에 제비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사약을 내려달라 청하였습니다. 부인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제비가 애걸하자 그의 갸륵한 마음씨에 감동하여 돌아앉은 다음 사약을 내렸습니다. 이처럼 최원도의 우정과 의비 제비의 절의로 무사히 은거했던 이집은 공민왕 20년(1371)에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복직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옵니다.
둔촌은 그의 자손에게 가훈으로 이르기를
독서는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느리라.
시간을 아껴서 부지런히 공부하라.
늙어서 무능하면 공연히 후회만 하게 되는니,
머리맡의 세월은 멈추지 않고 쏜살같이 흐르도다.
자손에게 금을 광주리로 준다 해도
경서 한권 가르치는 것만 못하니라.
이 말은 비록 쉬운 말이나
너희들을 위해서 간곡이 일러둔다.
고 가르치니, 오늘날에도 광주 이씨의 정훈으로 받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강동구 둔촌동이라는 지명도 둔촌 이집이 이 지역에 은거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났으며, 둔촌동 뒤의 ‘굴바위’와 ‘둔굴’은 그가 은거했던 곳이라 합니다.
2) 임숙영(任叔英, 1576∼16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초명은 상(湘). 자는 무숙(茂淑), 호는 소암(疎庵).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열(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창락찰방* 숭로(崇老)이고, 아버지는 감역* 기(奇)이며, 어머니는 승지 정유일(鄭惟一)의 딸입니다.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합니다. 1601년(선조 34)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10년 동안 수학, 논의가 과감하였으며 전후 유소(儒疏)*가 그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1611년(광해군 3) 별시문과*의 대책(對策)*에서 주어진 이외의 제목으로 척족*의 횡포와 이이첨(李爾瞻)이 왕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존호*를 올리려는 것을 심하게 비난하였습니다. 이를 시관* 심희수(沈喜壽)가 적극 취하여 병과로 급제시켰는데 광해군이 대책문을 보고 크게 노하여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습니다. 몇 달간의 삼사*의 간쟁*과 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장으로 무마, 다시 급제되었습니다.
그 뒤 승문원정자*·박사를 거쳐 주서*가 되었다. 1613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무옥*이 일어나자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곧 파직되어 집에서 지내다가 외방으로 쫓겨나 광주(廣州)에서 은둔하였습니다. 인조반정 초에 복직되어 예문관검열*과 홍문관정자·박사·부수찬*을 거쳐 지평*에 이르렀습니다. 고문(古文)*에 힘썼으며, 중국 육조(六朝)의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났습니다. 그가 지은 <통군정서 統軍亭序>는 중국학자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3) 오윤겸(吳允謙, 1559∼1636)
추탄 오윤겸에 대해서는 이미 가래여울마을 이야기 때 전했으므로 생략하고 만년에 재상의 자리에 10여 년 간 있을 때 백성의 편의를 위해 연해 공물(沿海貢物)의 작미(作米)와 대동법*의 시행을 추진하고 명분론의 반대를 물리치면서까지 서얼의 등용을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사림을 아끼고 보호해 어진 재상이라 불렸습니다. 성혼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4) 정엽(鄭曄, 1563∼16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 희년(熙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璇)이고, 아버지는 진사* 유성(惟誠)입니다.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증찬성* 언태(彦台)의 딸입니다.
3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4세 때 벌써 시를 지어 이이(李珥)와 정유길(鄭惟吉)로부터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지함(李之菡)의 주선으로 송익필(宋翼弼)에게서 수업하고, 성혼(成渾)·이이의 문하에 출입하여 당시의 명류*들과 교유하였습니다. 1583년(선조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을 거쳐 홍문관의 문한직(文翰職)*을 맡았습니다. 1593년 황주판관으로 왜군을 격퇴, 그 공으로 중화부사가 되었고, 1597년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귀국 후 성균관사성*을 거쳐 수원부사가 되었습니다. 삼남대로에 있는 수원은 당시 난을 치르면서 큰 피해를 입고 있었으나, 군민을 잘 다스려 서천군수 때와 마찬가지로 주민들로부터 크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이 권력을 잡아 성혼을 배척하자, 성혼의 문인이었던 그도 종성부사로 좌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학교교육을 크게 일으키고, 때마침 오랑캐 수만 명이 침입하자 계교로 적을 물리쳤습니다. 이 때 피해는 피로자(被擄者) 한 명 뿐이었으나, 기자헌의 농간으로 동래에 유배되었습니다. 1617년에 폐모론이 제기되자 외직을 구해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폐모의 조처가 단행되자 관직을 버리고 여주에 돌아와 지냈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에 나와 학제를 상정하여 성균관을 다시 크게 일으키는 공적을 남겼습니다. 이후 대사헌을 다섯 번 겸하고, 한꺼번에 네 가지 직임을 겸하기까지 하여 격무로 병을 얻어 63세에 죽었습니다. 저서로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와 ≪수몽집≫이 있다.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숙(文肅)입니다.
5) 이양중(李養中, 1549∼159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호(公浩). 강양군(江陽君) 숙(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안수(喜安守) 집(輯)이고, 아버지는 세종의 현손인 금천부수(錦泉副守) 함(珹)이며, 어머니는 김윤장(金允章)의 딸입니다. 집의 성중(誠中)의 아우입니다. 이황(李滉)의 문인입니다. 숙부 순천군 관(順天君 琯)의 뒷바라지가 컸습니다. 1572년(선조 5)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습니다. 그 뒤 병조정랑·사간 등의 관직을 거쳐 승지에까지 올랐습니다.
6) 정성근(鄭誠謹, ?∼150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이신(而信)·겸부(兼夫). 자순(子淳)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대제학 척(陟)입니다. 어머니는 이양몽(李養蒙)의 딸입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입니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습니다. 1481년 부교리로서 승지의 업무를 맡을만한 인물로 추천되었고, 경차관(敬差官)으로 경기도에 파견되어 교동현의 유민(流民)을 진휼하였습니다. 그 뒤 해주목사를 거쳐 1490년 반우형(潘佑亨)·표연말(表沿沫) 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선발되기도 하였습니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수되었으나, 중종 즉위 후에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 되고, 그의 충효로 아들이 녹용(錄用)*되었습니다. 1507년(중종 2)에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정문*이 내려졌습니다. 또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습니다. 광주(廣州)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절(忠節)입니다.
광진교와 광진교 8번가
광진교가 위치하고 있는 광나루는 예부터 충주를 거쳐 동래로 또는 원주를 거쳐 동해안으로 빠지는 요충지로 유명한 나루터였습니다. 1920年代에는 화물차나 버스를 발동기선에 실어 도강할 수 있었으나 홍수로 인해 교통이 두절되면 그 불편함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1930年을 전후에서 교통량이 격증하여 하루에 도강하는 자동차, 우차, 손수레 등이 수백대에 달하게 되어 도로교통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1936年 교량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양주목에 속하였다가 1895年[고종32] 개편되어 한성부 양주군 고양면 광진리가 되었으며 1914年 고양군 독도면 광장리가 되었습니다. 1949年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에 해당되던 광나루 일대가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되었다가 1995年 광진구에 편입되었습니다.
광진교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과 강동구 천호동을 잇는 총연장 1, 056m의 한강 다리입니다. 한강에서 세 번째, 도로 교량 중에서는 두 번째로 1936년에 건설되었으나 노후화 및 교통량의 증가로 1997년에 철거되고 현재 2003년 4차로로 새로 놓인 다리가 들어서 있습니다.
2009년 7월에 걷고 싶은 다리 조성공사를 하여 4차로 中 2차로가 보행로와 자전거 전용도로로 새로이 조성되고 다리 중간부분에 하부 전망대를 설치하여 한강 교량 유일의 걷는 다리와 복합 문화예술 공간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이 다리는 구천면길의 종점입니다.
광진교 8번가는 세계적으로 3개밖에 존재하지 않는 교각하부의 전망대로 상하이 국제 금융센타 100층 전망대와 괌의 수도 아가바에 있다는 아프간 요새 전망대와 함께 세계 3대 전망대 중에 한곳이라고 합니다. 광진교 8번가는 서울 광진구 광진교 8번교각 교부하각전망대라고 합니다. 최근에 TV 연속극 아이리스의 촬영장소로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차도와 자전거도로, 인도가 잘 갖추어져 있어 마술공연, 락앤롤, 재즈콘서트를 관람할 수 있고 한강의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습니다.
광나루터
광나루는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에 있었던 나루터입니다. 양진, 광장, 광진, 광진도 등의 명칭으로도 불렸습니다. 한강의 중하류에 위치한 광나루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광나루는 부산으로 향하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했고 서울 주변의 중요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백제가 북방 민족과 대치하면서 광나루는 군사 작전의 요충지였고 선진 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외교 ․ 문화의 통로였습니다. 또한 신라가 발전하면서 불교문화가 이 나루터를 통해 수용되었고 철기문화가 이 나루를 통해 전해졌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광나루에 관리를 두어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등지에서 서울로 운송되는 세곡을 관리 ․ 감독했습니다. 한양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문화가 집결되면서 광나루를 오가는 행인들도 많아졌는데 그에 대해 태종 14년(1414)에 관리를 통해 광나루의 관리,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하는 자, 반역을 도모하는 자 등의 출입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그 당시에 광나루는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의 연결 지점일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강폭이 넓고 물이 많아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광나루를 담당하는 관리의 임무는 많아졌습니다. 또한 예전부터 경치가 아름다웠고,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에 왕들은 광나루에서 연회를 자주 베풀기도 했으며 특히 매 사냥을 즐겨보았다고 합니다. 왕들 중에서는 태종이 매 사냥을 보러 광나루를 자주 찾았습니다. 태종은 세종과 함께 매 사냥을 보러 오기도 했으며 문종도 가끔씩 매 사냥을 보러 왔습니다. 태종은 매 사냥을 보고 난 뒤 광나루 근처에 있는 낙천정에 가서 쉬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종 때 개설된 삼전도를 계기로 세조는 광나루의 업무를 삼전도에 분할했고 삼전도의 개설로 광나루의 기능은 상당히 위축되었으나 일반인의 왕래는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광나루에는 4척의 나룻배와 사공들이 있었고 사공들은 국가에서 땅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정치질서가 문란해지면서 양반들이 토지와 배를 빼앗아 광나루는 점점 부실해졌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유지가 되었으나 1936년 광진교가 설치되면서 광나루는 기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현재는 광진교, 천호대교가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주므로 나루터의 기능은 상실하였으나 3번국도와 강변도로가 지나고 있어 여전히 교통이 좋은 지역입니다.
상부암 석불입상
이 불상은 광진구 광장동 상부암에 봉안되어 있는 석불입상으로 원래 불상 전체에 두껍게 호분이 발라져 있었으나, 최근에 호분이 벗겨진 뒤에 원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머리가 큼직하고 신체가 날씬한 석불입상으로 머리가 신체에 비해서 높고 큼직하며, 육계도 유난히 큰 것이 특징이다. 머리와 육계 앞면이 다소 깨어졌지만, 머리칼은 소발(素髮)로 표현된 것을 알 수 있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게 넓지만 양감이 부드럽고 유연하며 눈, 코, 입이 단아하고 미소를 띠고 있어서 원만하게 보인다. 귀는 적당하게 길지만 앞 머리카락 한 줄이 내려와 귀의 중심을 가로 질러 위 귀볼 가장장리를 형성하는 매우 이례적인 모양을 표현하고 있다. 목은 절단된 것을 붙였고, 상체는 짧지만 단아하며 허리가 잘록하고, 하체는 좌우의 다리를 분명하게 나타내어 양감이 매우 뚜렷하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꽃가지를 든 형상으로 주먹을 쥐었고, 왼손은 내려 옷자락을 잡고 있다. 양어깨를 다 덮고 있는 통견의 얇은 법의는 양팔을 돌아 계단식 옷주름을 보이고, 가슴 앞에서 U자형을 이루다 두 다리 사이로 내려와 다시 U자형을 형성하는 이른바 우전왕(優塡王)식 착의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착의법은 짧은 상체에 잘록한 허리, 양감이 두드러진 두 다리 등의 신체와 함께 통일신라 8세기 금동불입상 양식의 수용을 보여주고 있으며, 팔의 형태와 계단식 옷주름은 9세기 불상을 계승한 점도 엿보이고 있어서 이 불상이 9세기 후반 내지 10세초에 조성된 불상임을 추정할 수 있다. 대좌는 둥근 연화문 대좌 위의 앙련이며, 연화좌 아래의 하단은 사각형으로 이루어졌고, 큼직한 복련이 새겨져 있는데 형태상 9세기 연화문과 유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불상은 부분적으로 손상되어 보존상태가 완전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서울지역에서 흔하지 않은 나말여초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모니터링지에 위의 글들을 참고하여 작성해 주시고 사진도 첨부해 주시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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