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내 생애 언론과의 마지막 인터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구 지역 최고령 독립지사이자 마지막 광복군 출신인 홍재원(87·대구시 달서구 상인2동) 할아버지. 보청기를 끼고도 귀가 잘 들리지 않고 지팡이를 짚고서야 걸을 수 있는 등 병마에 시달리고 있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광복 59돌을 맞아 찾은 홍 할아버지는 파란만장했던 인생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 놓았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수탈에 신음하던 1936년, 춘천농업학교 1학년 신분인 17세의 나이에 고향을 등지고 아버지 친구를 따라 나선 것이 독립운동가로서의 고달픈 삶의 시작이었다. 중국 대륙을 떠돌다 장개석 국민당의 근거지인 시안에 도착, 철기 이범석 장군이 지휘하는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됐다. 홍 할아버지는 "내가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해 많은 동지들의 귀여움을 받았고 이는 힘든 독립운동 과정에서 큰 힘이 되었다"고 했다.
일본군에게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며 2년여에 걸친 공작대 생활을 끝내고 시안으로 귀대하던 홍 할아버지는 일본군 스파이라는 혐의로 중국군에 체포돼 6개월간의 지옥같은 땅굴감옥소 생활을 겪기도 했다. 다행히 당시 러시아 공산학교 교장을 지냈던 이충모씨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광복군에 복귀, 미군으로부터 무기와 정보수집 훈련을 받으며 고국으로 진군할 날을 고대하던 중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아 이범석 장군을 따라 광복군 44명과 귀국했다.
고향인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으로 돌아왔지만 할아버지를 기다린 것은 북한 정권의 탄압이었다. 해방 당시 그곳은 38선 이북에 위치, 북한의 점령 아래 있었던 것. 할아버지는 또다시 고향을 뒤로 하고 어쩔 수 없이 남으로 내려와야 했다.
이후 홍 할아버지는 국군에 입대, 대위 계급장을 달고 북한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수원에서 북한군에 붙잡히기도 했지만 하늘의 도우심인지 청도 교육대 시절 자신이 돌봐주었던 사람이 북한군이 돼 있었고 은혜를 갚으려는 그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61년 중령으로 예편, 고향인 간동면의 면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바깥 세상에 적응하는 것은 녹록치 않았다.
반평생을 조국을 가슴에 품고 독립운동과 군생활을 해왔지만 사회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던 홍 할아버지는 83년 처가가 있는 대구에 둥지를 틀었다. 월세 단칸방에서 어렵사리 살고 있던 중 5공 정부로부터 독립군임을 확인받게 되고 90년 12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홍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함께 하던 동지들이 나를 찾았지만 미처 모르고 있다가 20여년이나 지나 정부로부터 독립투사로 인정받은 셈"이라며 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단칸 월세방을 벗어나 15평 영구임대아파트를 얻고 현재는 매달 150여만원을 지급받고 있지만 자녀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바람에 절반 정도는 그들에게 주고 있는 형편. 홍 할아버지는 "내 자신의 영달을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므로 정부에 많은 것을 요구하고 싶지도 않고 내 젊은 시절을 자랑하며 다니고 싶지도 않다"면서도 "일제 앞잡이들이 독립운동가 행세를 하는 것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이는 정부가 정리해줘야 할 문제이며 그것이 곧 세상을 떠날 내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현재 생존해 있는 독립지사는 전국에 295명이 있고 그 중 대구에 13명, 경북에 16명이 있다. 대구의 독립지사 중 광복군 출신으로는 홍 할아버지가 유일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