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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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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북부권문화 스크랩 의성김씨 만회고택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300 12.03.12 10: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의성김씨 만회고택(義城金氏 晩悔古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485
(원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485)
건 축 주 :  김건수(金建銖)
중건시기 :  1850년(철종 1) (명월루)
소 유 자 :  김정진(金正鎭)(관리자 : 김정진)
문 화 재 :  중요민속자료 제169호(안채 제169-1호, 사랑채 제169-2호), 1984-01-10 지정, 5동

건축 구성
의성김씨 만회고택은 사랑채, 안채, 좌우의 연결채, 행랑채 등 다섯 건물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사랑채가 중심 건물이다. 사랑채에는 3개의 현판이 있다. 의성김씨 만회고택·청풍헌·명월루이다. 의성김씨 만회고택은 사랑채에 속한 이름이 아니라 이 집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청풍헌은 사랑채의 마루, 명월루는 사랑채의 누각을 부르는 이름이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누각은 그 동남쪽 끝에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로 튀어나와 있다. 사랑채 건물의 서쪽 제2칸은 방, 동쪽 1칸은 마루방이다.

행랑채는 사랑채 서쪽으로 붙어 있다. 앞마루 넓이만큼 뒤로 물러서서 사랑채와 일선으로 배치되어 있는 구조이다. 이 두 건물 사이는 반 칸 정도의 공간이 남는데, 이 부분은 4분의 3 정도 높이를 나무판으로 차단하여 연결시켜 놓고 있다.

현판
만회고택(晩悔古宅)
권돈인의 중후한 필체 명월루 현판‘만회고택’ 현판은 사랑채에 게시되어 있다. 힘차고 날카롭고 경쾌한 느낌이 풍기는 글씨이다.
명월루(明月樓)
‘명월루’ 현판은 사랑채의 마루방에 게시되어 있다. 권돈인의 글씨라고 한다. 임자초춘(壬子初春)이라는 작은 글씨 아래 권돈인의 인장이 뚜렷하다. 둔중한 힘이 느껴지는 글씨이다.
청풍헌(淸風軒)

‘청풍헌’ 현판은 사랑채 건물에 게시되어 있다. 힘차고 단정한 느낌을 풍긴다.

문중 이야기
- 독립운동의 산실 명월루
명월루는 해저마을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곽종석 계열 유림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심산 김창숙은 성주 사람이었다. 성주는 원래 이들 해저마을 의성김문의 출발지이기 때문에, 상호 긴밀한 종족적 유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김창숙은 해저마을 사람들을 독립운동 대열에 동참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또는 해저마을 사람들의 유형·무형의 지원을 받기 위해 해저마을에 들어와 활동하기도 하였다. 김창숙은 해저마을에 왔을 때 명월루에서 거처하였다. 그러므로 의성김씨 만회고택의 명월루는 해저 독립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관련유물
- 유물링크


관련이야기
- 심산 김창숙이 독립운동 조직을 위해 묵었던 집
의성김씨 만회고택은 사랑채, 안채, 좌우의 연결채, 행랑채 등 다섯 건물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사랑채가 중심 건물이다. 사랑채에는 3개의 현판이 있다. 의성김씨 만회고택·청풍헌·명월루이다.
의성김씨 만회고택은 사랑채에 속한 이름이 아니라 이 집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청풍헌은 사랑채의 마루, 명월루는 사랑채의 누각을 부르는 이름이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누각은 그 동남쪽 끝에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로 튀어나와 있다. 앞쪽 반 칸의 넓이는 마루이다. 이 부분은 앞으로 돌출된 누각의 뒤편에까지 이어진다. 그러므로 누각 건물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측면 1칸 반 정도의 넓이를 갖는 것이라고 하겠다. 누각의 뒤편에서 앞마루는 20cm 정도 더 높아진다. 이 높이는 누각 마룻바닥의 높이와 같다. 사랑채 앞마루의 양쪽 끝은 나무문틀이 달려 있다. 나무문을 달을 수 있는 구조이지만, 나무문짝은 달려있지 않다.
사랑채 건물의 서쪽 제2칸은 방이다. 그 제1칸의 처마 밑으로는 의성김씨 만회고택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제3칸은 마루이다. 제 3칸의 마루와 건물 전체의 앞마루 사이에는 문지방이 가로놓여 있어서 두 공간을 구획한다. 이 마루방의 문지방 위로는 청풍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동쪽 1칸은 마루방이다. 큰 사각형 문살을 이리 저리 겹쳐 만든 대범한 구조의 방문에 의하여 봉쇄되어 있다. 특별한 용도로 쓰이는 방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모습이다. 이 방의 남쪽 문 위로 걸려 있는 것이 명월루라는 현판이다. 명월루는 이 방에 붙여진 이름이라기보다는 그 앞에 돌출되어 있는 누각에 주어진 이름이다.
누각은 서쪽으로 앞마루와 연결되는 부분만을 제외하고는 세 방향의 벽이 다 나무문틀과 거기에 달린 2쪽의 나무판 문으로 막혀 있다. 북쪽 부분은 앞마루 넘어 사랑채의 동쪽 끝 방의 남면하고 있는 방문과 벽으로 또 막혀 있다. 세 방향의 나무문짝을 열면 차단은 사라지고, 세 방향의 나무문짝을 닫으면 차단된 좁은 공간이 나타난다. 명월루는 누각인 만큼 2층으로 올려 세워져 있다. 누각 바닥면의 높이는 사랑채 건물 앞마루의 높이와 같다.
사랑채 건물은 높은 대좌 위에 올라앉아 있다. 명월루는 그 대좌만큼의 높이를 기둥으로 올려 세웠다. 사랑채 건물의 앞쪽 기둥과 누각의 네 기둥은 원형이다. 나뭇결의 무늬가 잘 살아있는 기둥이다. 누각의 동·남·서 세 방향으로는 밖으로 아주 좁은 쪽마루가 돌아가고, 그 바깥쪽으로는 낮은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이러한 구조는 사랑채 동쪽 끝 방의 동쪽 1칸 부분에까지 이어진다. 가장자리에 난간이 가설되어 있는 누각의 좁은 쪽마루 높이도 사랑채 앞마루 높이보다 20cm 정도 높다.
행랑채는 사랑채 서쪽으로 붙어 있다. 앞마루 넓이만큼 뒤로 물러서서 사랑채와 일선으로 배치되어 있는 구조이다. 이 두 건물 사이는 반 칸 정도의 공간이 남는데, 이 부분은 4분의 3 정도 높이를 나무판으로 차단하여 연결시켜 놓고 있다.
행랑채 동쪽 끝은 중문 영역이다. 통상의 경우보다 훨씬 큰 2쪽 나무문이 가설되어 있다. 그 서쪽으로 2칸이 벌려 서 있다. 중문으로 들어가면 ㄷ자를 엎어 놓은 것 같은 형상의 안채 건물군이 나타난다. 안채는 동 서 연결채와 지붕 높이가 다르다.
동 서 연결채는 사랑채와 높이가 같다. 사랑채와 동쪽 연결채는 반 칸 정도 떨어져 있는데, 그 사이를 메워 연결시키고 아래쪽으로는 이 반 칸 영역의 지붕을 따로 처마를 달아 처리 하였다. 동 서 연결채의 높이도 통상의 경우 보다는 조금 높다. 동 서 연결채는 북쪽 건물의 지붕 아래쪽으로 밀고 들어간다. 두 건물의 지붕은 북쪽 건물의 동 서편 끝 칸에서 서로 겹쳐진다. 동 서 건물채의 지붕 위쪽으로 북쪽 건물채의 지분이 이중으로 되는 것이므로 북쪽 건물채의 지붕은 통상의 경우보다 1배 반은 높다.
관련인물
- 배출 인물

김경한(金景漢),김택동(金宅東),김건수(金建銖),김정진(金正鎭)
- 교유 인물
김창숙(金昌淑)
- 의성김씨 만회고택 계열 사람들


팔오헌의 주손 계열은 팔오헌종택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의성김씨 만회고택이 언제 팔오헌 계열 사람들에 의해 매입되었건 간에, 결국 의성김씨 만회고택을 가장 처음에 적극적으로 이용한 사람은 팔오헌 종계에서 갈라져 나온 김경한(金景漢, 1687~1759)부터라고 하겠다.
김경한은 자가 사장(士章)인데, 통덕랑 벼슬이 주어졌으며, 배위는 완산최씨이고, 후 배위는 완산이씨이다. 김경한은 팔오헌 김성구의 손자이고, 김여건의 2남이다.
김경한의 아들은 김택동(金宅東, 1708~1778)이다. 자는 성서(聖瑞), 호는 일지와(一枝窩)이다. 생원이며, 음직으로 현감을 지냈다. 배위는 숙인 연안이씨이다.
김택동의 아들은 김희성(金熙成, 1741~1804)이다. 자는 성지(成之), 호는 해은(海隱)이다. 문과 출신으로 지평을 지냈다. 배위는 고령신씨로, 신숙주의 후손이다.
김희성의 아들은 김재인(金在仁, 1767~1843)이다. 자는 승천(承天)이다. 배위는 정부인 남양홍씨인데, 부덕으로 칭송되었다.
김재인의 아들은 김건수(1790~1854)로, 오늘날 해저마을의 이 오래된 집이 의성김씨 만회고택이라는 이름을 갖게 한 사람이다. 문과 출신으로 승지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문집이 있는데, 문집 속에는 ?논이양선소(論異樣船疏)?가 보인다.
1846년에 불란서 함선이 홍주 앞바다에 출현하고 3척의 선박, 8백여 명의 병사가 상륙하였다는 보고문을 믿기 어렵다는 생각을 담고 있는 글이다. 대불란서국이란 것은 들어본 적도 없으며, 설령 그 나라가 있다고 하여도 이렇게 먼 지역까지 원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등의 이야기가 길게 기술되어 있다. 배위는 안동김씨이다. 김건수는 의성김씨 세계상 30대에 속한다.
김건수로부터 4대 뒤, 이 계열 의성김씨 세계상 34대인 사람은 김홍기(金鴻基, 1884~1954)이다. 자는 순우(順愚), 호는 창생(蒼生)이다. 심산 김창숙이 이때 명월루 신세를 졌다. 그러므로 김홍기가 독립운동에 관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공으로 그에게는 1977년에 건국공로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집이 있다. 배위는 전주유씨, 정재 유치명의 증손이다. 후 배위는 여주정씨이다.
김홍기의 아들은 김정진(金正鎭)이다. 자는 자극(子克)이고, 1925년생이다. 학생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므로 1963년 3·1절에 건국공로 애족장을 수여받았고, 국민훈장 애족장을 또 받았다. 부인은 여주정씨로 우담 정시한의 후손이다. 그의 아들은 1954년생인 김시원(金始源)이다.

만회헌 김건수선생


성명 : 김건수(金建銖) , 1790년(정조 14)년 ~ 1854년(철종 5)년
본관 : 의성(義城)
: 공립(公立)
: 만회헌(晩悔軒)
분묘지 : 순흥(順興) 우수곡(愚?谷) 오룡동(五龍洞)
입사경로 : 문과(1830년)
내관직 :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장악원 판사, 홍문관 수찬·응교, 승정원 우부승지
외관직 : 현풍 현감, 김해 부사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난 재질을 보이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시원스럽고 준수하였으며, 또래들과 어울릴 때에도 늘 대장노릇을 하였다. 그리하여 할아버지로부터 장차 집안을 일으킬 아이라는 칭찬을 듣곤 하였다. 또한 일찍부터 문장에 소질이 있어 진(秦)·한(漢)에서부터 당송팔대가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문장을 두루 섭렵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 다양한 벼슬을 거치며 국정에 참여하다

1830년(순조 30) 정시(庭試) 문과에 을과 1위로 급제한 후 승문원 정자에 임명되었고, 이어 1834년 명릉 별검(明陵別檢)에 제수되었다. 헌종이 즉위하자 2월에 성균관 전적을 거쳐 예조 좌랑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왕명을 받들어 칙사(勅使)를 영접하였다. 그 뒤 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홍문관 수찬·장악원 판사·현풍 현감 등을 두루 거쳤으며, 1847년(헌종 13) 다시 지평에 제수된 데 이어 홍문관 응교·김해 부사·승정원 우부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경연에 참석하여 성학(聖學)의 도리를 설파하다

헌종 때 홍문관에 근무하면서 경연에 여러 번 참석하여 군주가 근검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성군이 되는 도리는 올바른 치국의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부지런히 실천하는 데 그 요체가 있음을 말하면서, “성인의 도는 본래 배움과 실천에 있으니, 배움이란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요, 실천이란 그렇게 깨달은 것을 구체적인 일에 적용해가는 것이다. 따라서 배움의 내용이 박학한 것보다 그것을 실천으로 간추려내는 것이 한층 더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밖에 중농정책과 교육의 진흥 등에 대해서도 수시로 의견을 상주하였다.
지방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다


현풍 현감으로 재직할 때 창녕·청도·양산·영산의 4군을 함께 다스렸다. 당시 이들 군에서는 세금으로 내는 쌀인 세미(稅米)를 밀양에 속해 있던 삼랑포로 운송하여 한양으로 가는 운반선에 실었는데, 수로로 쌀을 운송하던 다른 군들과 달리 현풍과 청도 두 군은 지리적인 장애 때문에 육로로 운송하였다. 이 일을 빌미로 밀양 군수가 잇속을 챙기려는 생각에서 두 군의 세미에 대해 종종 시비를 걸고는 하였다. 이 사실을 안 김건수는 바로 삼랑포로 달려가 담당 관리를 혼내고는 감영에 직보를 하여 일을 바로잡았다. 이 일로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나,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문을 닫고 독서에만 몰두하였다.

가   족

: 김희성(金熙成)
생부 : 김재인(金在仁)
: 남양홍씨(南陽洪氏)
조선 중기의 유학자 김우굉을 선조로 두다

동생인 문정공(文貞公) 김우옹(金宇?)과 함께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두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이름을 떨친 조선 중기의 유학자 김우굉(金宇宏)의 후손이다.
상락김씨와의 사이에 2남을 두다

상락김씨(上洛金氏) 김장진(金章進)의 딸과 결혼하여 슬하에 김일영(金一永)과 김달영(金達永) 두 아들을 두었다.

학   문

학파 : 퇴계 학파
과거장에서 문장으로 명성을 떨치다

20세에 과거 시험장에 나아가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이에 여러 선비들이 다투어 먼저 사귀고자 하여 늘 어지러웠다. 평소에도 문장을 좋아하여 진한고문(秦漢古文)에서부터 장자·사기·당송팔대가 등 고금의 문장 가운데 섭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책을 쓰는 것도 좋아하였는데, 문장의 기세가 깊고 활통하였다.
배운 것을 정치의 장에서 구현하다

관직에 있으면서는 평소 공부한 성리학의 도리에 입각하여 이를 설파하고, 홍문관에 근무할 때에는 경연에 여러 번 참석하여 군주가 근검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고금의 치란(治亂)의 이치를 묻는 왕의 물음에 일일이 답하면서, 성군이 되는 도리는 올바른 치국의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부지런히 실천하는 데 그 요체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만회헌문집』의 내용

문집인 『만회헌문집』은 6권 3책이다. 5대손인 김정진(金正鎭)이 쓴 후기에 따르면 원래 8권 4책이었으나 뒤에 6권 3책으로 정리된 듯하다. 대체적인 구성은 다음과 같다.
권1~2: 모두 시이다.
권3: 시와 소(疏)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 가운데는 1846년(헌종 14) 6월 홍주(洪州)에 정박했던 이양선에 대해 논한 글이 포함되어 있다.
권4: 소(疏)에 속하는 경연강의(經筵講義) 1편을 필두로 서(書)·상(狀)·교(敎)·전문(箋文)·송(頌)·서(序)·기(記)로 구성되어 있다.
권5: 발(跋)을 비롯하여 명(銘)·부(賦)·상량문(上樑文)·잡저(雜著)·전(傳)·논(論)·축문(祝文)·제문(祭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6: 애사(哀辭)와 묘지명·묘갈명·비명 그리고 부록으로 되어 있다. 부록의 내용은 김건수 본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다른 사람들의 만사(輓詞)와 뇌사(?辭)·제문·행장·묘갈명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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