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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전
제 4 부 가정과 사회
제21장 지도력과 거버넌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력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제도를 주관하신다. 따라서 지도자의 제일 원리는 천법에 따라 정부가 운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국민을 통치해야 한다. 지도력은 공적 신뢰인, 곧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발휘하는 역량이다. 따라서 한 나라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영적 가치를 중심하고 국가를 운용해야 한다. 국왕이나 대통령은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뢰를 저버린 지도자에겐 단호하게 벌하신다. 또한 지도자는 하나님이 인간사에 동참할 수 있는 상위법을 설정하고 그것에 따라 운용할 책임이 있다.
종교경전
야곱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바위 되시는 이가 나에게 말씀하셨다.1 “백성을 정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왕 노릇 할 자, 그는 아침에 터져오는 햇빛, 구름이 걷힌 아침의 해 같아, 이슬을 머금은 푸성귀가 땅에서 이 빛을 받아 자란다.”
사무엘하 23.3-4 (기독교)
오, 다윗이여! 우리(하나님)는 너를 지상의 대리자로 만들었느니라. 그러니 진리로 사람들을 판결토록 하라. 그리고 욕망을 따르지 말거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너를 하나님의 길로부터 그릇되게 인도할 것이니라.
꾸란 38.26 (이슬람)
하늘의 듣고 봄은 우리 백성들의 듣고 보는 것으로부터 하는 것이며, 하늘이 선한 자를 밝게 드러내 주고 악한 자를 두렵게 하는 것이 우리 백성들의 밝게 드러내주고 두렵게 하는 것으로부터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위와 아래 상하에 통달하니 공경할지어다, 땅을 소유한 군주들이여!
서경 2.3.3, 고요모(皐陶謀) (유교)
통치자가 지고지순하신 하나님을 경외하여 선정을 베푼다면, 그에게 커다란 보상이 내리리라. 그렇지 않다면 응보가 그에게 되돌아올 것이라.
무슬림 하디스 (이슬람)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하여 감히 멋대로 안일하지 말며
하늘의 변함을 공경하여 감히 멋대로 행동하지 말지어다.
넓은 하늘이 매우 밝으시어 그대와 더불어 나가고 왕래함에 미치시며
넓은 하늘이 매우 밝으시어 그대와 더불어 유유히 놀러 다님에 미치시느니라.2
시경 254 (유교)
인간적인 것을 훌쩍 뛰어넘어 신의 말을 택해서 그대의 지도력을 확립하라.
아타르와 베다 7.105 (힌두교)
만일 그대의 왕국이 명성이나 욕망이 아니라
교의를 위하여 있다면, 그것은 아주 훌륭한 결실을 맺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결실은 불행할 것이다.
나가르주나, 보의 화환 327 (불교)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자리를 잡으면, 이내 주변에 있는 모든 민족들처럼 왕을 세우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너희는 반드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골라주시는 사람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 같은 동족을 임금으로 세워야지, 동족이 아닌 외국인을 임금으로 세우면 안 된다.
그러나 왕이라고 해도 군마를 많이 기르는 일만은 하지 못한다. 백성을 이집트로 다시 보내어 군마를 많이 얻어오게 해도 안 된다. 너희가 그리로 되돌아가지 못하리라고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일러두시지 않았느냐? 왕은 또 많은 후궁을 거느리지 못한다. 그러면 마음이 다른 데로 쏠릴 것이다. 은과 금을 너무 많이 모아도 안 된다.
그는 왕위에 오른 다음에도 레위인 사제를 시켜 이 가르침을 두루마리에 베껴 평생 자기 옆에 두고 날마다 읽어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를 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 가르침에 담겨 있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성심껏 지키며 그 모든 규정을 실천하여야 한다. 마음이 부풀어 올라 제 동족을 얕잡아보는 일도 없고 이 계명을 어기는 일 또한 털끝만큼도 없어야 한다. 그리하면 그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도 이스라엘 왕위에 오래도록 앉게 될 것이다.
신명기 17.14-20
왕이여, 그대는 법에 의지하고, 법을 존경하고, 법을 존중하고, 법을 숭상하고, 법을 예배하고, 법을 공경하고, 법을 깃발로 하고, 법을 상징물로 하고, 법을 스승으로 삼아서, 그대의 군대와 백성들과 가신들과 바라문들과 장자들과 읍과 지방민들과 종교계와 짐승들과 새들을 법답게 살피고 감싸고 보호하라. 그대의 영토에서 법답지 못한 행위들이 퍼지지 않게 하라. 그대의 영토 안에 가난한 자들이 있으면, 그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라.
디가 니카야 3.60-61, 차카바티 시하나다 숫탄타 (불교)
말씀 선집
여러분은 자신이 어디가 부족한지를 압니다. 자기가 잘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하나님은 자기입니다. 자기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대신 자리에 그림자같이 있는 내가 그 하나님을 중심삼고 상대적인 대상체로 완전히 하나 되어야 어디서든지 리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얼굴을 들고 큰소리칠 수 있습니다.
(237.144, 1992.11.13)
지도자는 하나님을 대신하고 천륜을 대신하여 그 뜻을 지상에 이루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11.172, 1961.07.09)
세계 질서는 정치주권이 도덕적․영적․사상적 가치와 별개로 작용해서는 공익과 평화가 보장되기 어렵습니다. 신의 이상에 기초하고 우주공법과 통하는 영적․도덕적 고차원의 지도력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정치력이나 그 어떤 힘도 신과 천리 위에 설 수는 없습니다.
(359.321, 2001.11.08)
원래는 정부의 대통령으로부터 상하의원까지 전부 다 기독교의 정상적인 합격자들이어야만 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십니다. 의회나 대통령까지도 하나님이 컨트롤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물어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정교(政敎)를 분립하는 하나님이다. 종교만을 위하는 하나님이다’ 그러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기독교들이 전부 정교분립을 하다가는 앞으로 완전히 망하기 때문에,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기독교 전체가 종파주의를 타파해 버리고 완전히 합해서 유엔으로부터 통일운동, 하나 되는 운동을 하면 세계가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종파주의를 타파해 버리고 기독교가 하나되어 운동을 해야 됩니다. 유엔도 기독교가 미는 가운데서, 미국도 기독교가 미는 가운데서, 전 세계가 하나되는 운동도 기독교가 미는 가운데서 전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93.81-82, 1977.05.15)
이제 종교가 세상에서 그 지도력을 발휘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도력이란 맹신적이거나 편협에서 오는 오만하고 독선적 태도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참된 지도력은 하늘의 뜻에 나를 종속시키며 이타적일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은 이 시대의 상황과 여러 비리들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고 깊은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이제까지 종교인들은 사랑의 실천에 본 되지 못했고, 자기 개인의 구원이나 종파 이익에 급급한 나머지 온 세상 구원을 위해서 진력하지 못한 것을 뉘우쳐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믿음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 요구되고 있는 때입니다.
(234.273, 1992.08.26)
좋고 나쁜 것을 무엇으로 정합니까? 무엇을 표준으로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 대통령도 아니요, 민주세계의 책임자도 아니요, 공산당의 책임자도 아닙니다. 역사를 지배하고 이 천지를 움직이고 있는 어떤 주인이 있다면 그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주인에게 가명을 붙여서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좋습니다. 그 이름은 아무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104.206, 1979.05.06)
의로운 지도력
지도자의 필수적 자질 가운데 하나는 의로움이다. 의로움은 자신의 이익에 관계없이 오직 공공복지에 헌신하는 것이다. 의로운 지도자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도 위축되지 않는다. 그는 공적 정의를 세우고 그것에 책임을 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투여하며 그것을 구현하는 데 따르는 어떠한 장애물도 극복하는 자이다. 그는 공적 업무 성취에 있어서 자신은 물론 자신의 동료에게도 희생이 요구된다는 것을 안다. 그는 결코 동료들의 고통을 당연하다고 생각지 않으며 그들이 극복해야 할 역경에 대해 각별하게 걱정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그 역경에 기꺼이 동참한다. 그는 미래 세계의 비전을 제시하고 현실적 과제를 과감하게 수행한다.
개인적 수준에서 의로운 지도자는 정직성을 담보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직무로부터 이득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떤 유형의 공금도 오용하지 않는다. 부정부패에는 어떤 독성을 함유하고 있으므로 그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것을 회피한다.
1. 정의의 열정과 열렬한 애국심
종교경전
만일 하나님께서 다른 자들로 일부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으셨다면 이 땅은 부패하였을 것이니라.
꾸란 2.251 (이슬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파라오에게 가서 히브리인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고 이렇게 전하여라. ‘나의 백성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라.’”
출애굽기 9.1 (기독교)
유대 사람의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데, 성전 뜰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비둘기파는 사람에게는 “이것을 거둬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2.13-16 (기독교)
너희 중 누구든 하나님이 금하신 행위를 보거든 그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고치도록 하라.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 자신의 혀로, 그래도 아니 될 경우에는 그 자신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도록 하라. 그것은 가장 미약한 믿음이니라.
알 나와위 하디스 40선 34 (이슬람)
오, 지혜의 주여! 선한 마음으로 당신의 의롭다고 언명하신 그 뜻을 이루고자 힘을 다하여 분투하는 사람들, 그들은 만인을 위한 미래의 구세자들입니다. 광포한 자들을 무찌르도록 택함 받은 자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베스타, 야스나 48.12 (조로아스터교)
나의 임무는 사도시대의 임무와 같도다. 나는 불경과 부정을 없애고, 정의롭고 진실된 통치와 인도적이고 천국과 같은 정권을 수립할 때까지 분투하리라. 맹세코! 꾸라이쉬족이여, 내가 누구인지 잊었느냐? 나는 그들이 신앙이 없었을 때, 그들과 싸워 그들을 패배시켰도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포악하고 부정하며 믿음이 없는 통치를 제거하기 위해 그들과 싸우리라. 현재의 나는 성 사도 생존 시의 나 자신보다 더욱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노라. 나의 용기와 결의는 줄어들지 않았도다.
나흐줄 발라가, 설교 38 (시아파 이슬람)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충성한다면 깨우쳐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논어 14.8 (유교)
우리의 스승 모세가 그러하셨듯이, 우리는 자기가 속한 사회의 고난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탈무드, 타닛 11a (유대교)
내가 바라보니 너희는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 놓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못할 짓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쉽사리 여호와께서 분부하신 길을 버릴 수 있었느냐? 내가 그 판 두 개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내던져서 부수어버리는 것을 너희는 똑똑히 보았다. 나는 전과 같이 다시 사십 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여호와 앞에 엎드려 있어야 했다. 너희가 저지른 모든 죄 때문이었다. 너희가 여호와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여 속을 썩여 드렸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크게 노하시어 마침내 너희를 없애버리실 것 같아 나는 두려웠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다시 한 번 나의 애원을 들어주셨다.
신명기 9.16-19 (기독교)
말씀 선집
진짜 대장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죽음이 가로막아도,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소화하겠다고 하는 사람만이 대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고 먹지 못하더라도 가야 됩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그 장면을 보면서도 가야 됩니다. 죽는 일이 있더라도 가야 됩니다. 현재 나와 관계되는 이익은 없다 하더라도, 미래의 세계와 하나님과 관계되는 이익이 있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118.41-42, 1982.05.02)
환경에 끌려가지 말고, 내가 환경을 끌고 가야 한다.
(뜻길, p.77)
선을 들고 나가는 사람의 길은 평탄한 길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남다른 선의 인격을 추구하는 개인이 환경을 가려가고자 할 때, 그 개인을 환영하는 사람은 이 땅에 많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선한 개인이 선의 가정을 그려 나가는 데 있어서도 환경이 환영해 주지 않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선의 가정이 선의 종족을 그리면서 가는 길 앞에 있어서는 더더욱 어려운 악의 여건이 그 환경을 에워싸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선의 종족이 선의 국가를 그리며 간다 할진대 더욱 엄청난 악의 세력이 반기를 들고, 그 종족이 가는 길을 막으려 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선의 나라가 있어서 선의 세계를 추구해 나간다 할진대 이 세계가 선한 세계가 못 되기 때문에 악한 나라들이 그 선의 나라가 가는 길을 협조하는 것이 아니라 백방으로 반대하고 나설 것이 틀림없습니다.
(36.52, 1970.11.15)
책임자가 되려면, 설 자리를 닦아야 되고 환경을 주관하여야 한다.
뜻의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 선두에 서야 된다.
수에서는 져도 전체를 생각하는 데는 이겨야 한다.
먹기 전에도, 자기 전에도 그들을 생각해 주고 기도해 주어야 한다.
그들이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들을 위하여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하늘이 주신 것 위에 내가 플러스시켜 주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뜻길, pp.75-76)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찾아가신 것은 그들과 세운 맹세를 그들은 배반했어도 하늘은 배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맹세가 이루어질 때까지 지도자는 책임을 놓지 못한다.
(뜻길, p.76)
현재만 생각하고 미래는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나라가 없고, 그런 지도자가 없다고 봅니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는 여러분들 국민이 참고 고생하라. 고생하라’ 이렇게 지도하는 것이 나라의 위대한 지도자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미국 청년들! 선생님의 말을 이해합니까?
(97.88, 1978.03.01)
지도자는 눈물 없이 지도할 수 없다. 닥쳐올 민족의 고난과 시련을 알고 여기에 대비할 수 있는 고통을 주며 시련을 주어서 연단을 시키는 자가 참된 지도자다.
(뜻길, p.69)
2. 지도자의 원리적 생활과 자기희생
종교경전
공자가 말하길 “이익에 의거하여 행동하면 원한이 많다”고 하였다.
논어 4.12 (유교)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길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이다”고 하였다. 경공이 말하길 “좋습니다! 진실로 만일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은들 내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논어 12.11 (유교)
이후 알라께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받는 자는 공정한 통치자이며, 알라께 가장 멀고 가장 미움 받는 자는 호전적이고 부정한 통치자니라.
투하피트 알 아후아지 1327 (이슬람)
왕은 하필 이익(利)을 말씀하십니까? 또한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하시면, 대부들은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내 집안을 이롭게 할까 하며, 선비와 서인들은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까 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얽히어 서로 이익(利)만을 추구한다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만승(萬乘)의 나라에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천승(千乘)의 집안이요, 천승의 나라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백승의 집안이니, 만승에 천승을 취하며 천승에 백승을 취하는 것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만일 의(義)를 뒤로하고 이익(利)을 앞세우면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질면서 그 어버이를 버리는 자는 있지 않으며, 의로우면서 그 군주를 뒤로하는 자는 있지 않습니다. 왕께서는 또한 인(仁)과 의(義)를 말씀하실 따름이니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맹자 I. A.1 (유교)
고종이 부열(傅說)을 정승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부열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아침저녁으로 가르침을 주며 나의 덕을 보좌하라. 만약 쇠라면 그대를 숫돌로 삼을 것이며, 만약 큰 내를 건넌다면 그대를 배와 노로 삼을 것이며, 만약 어떤 해에 큰 가뭄이 든다면 그대를 장맛비로 삼을 것이다. 그대는 오직 내 뜻을 가르쳐서, 만약 술과 단술을 만들거든 그대가 누룩이 되고, 만약 간을 맞춘 국을 만들거든 그대가 소금과 매실이 되라.”6
서경 4.8.1-3 (유교)
말씀 선집
어떤 사람을 인격자라고 합니까? 어떤 사회의 제도 가운데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설 수 있는 사람을 인격자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동네에 존경을 받는 인격자가 있다고 하면 그는 그 동네 안팎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중심적인 작용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야만 그가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국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도 역시 국가의 대표자, 즉 하나의 인격자를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인격자를 중심으로 국민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실체적인 조직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범위가 넓은 세계에도 역시 하나의 중심적인 인격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29.125, 1970.02.26)
나무가 커지면 커질수록 뿌리는 땅 속으로 깊이 박혀 들어간다. 뿌리가 나타나는 나무는 마르든지 바람이 불 때 뽑힐 것이다. 지도자는 뿌리와 같은 것이다.
(뜻길, p.75)
나라에서 제일 힘든 것을 내가 했다고 해야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세계에서 제일 힘든 것을 내가 했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113.111, 1981.05.01)
희생하는 자는 반드시 중심자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 있어서 효자는 보다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의 애국자는 보다 희생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라의 중심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인 중에서도 보다 희생하는 성인이 성인 중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리이기 때문입니다.
(113.326, 1981.05.10)
지도자의 부족을 보강해 주고 키워 주어라. 지도자를 평하는 자는 가인이다. 지도자의 흠, 결점을 품고 책임지려고 하는 자는 어느 한 날에는 아벨의 자리에 서게 된다.7
(뜻길, p.69)
제일 문제가 정치 문제입니다. 정치가들이 사기 칠 수 없습니다. 관리체제로 넘어갑니다. 법으로 보장된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돈 관리입니다. 먹고사는 데 있어서 누가 좋은 것을 먹고 누가 좋은 것을 갖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좋은 것을 서로 갖겠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전체를 위해서 주고, 중 이하의 것을 내가 바라고 이렇게 나가면 자동적으로 평준화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제일 문제가 뭐냐 하면 공금 활용입니다. 이게 제일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는 인사 조치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인사 조치를 자기 계열을 중심삼고 해 가지고 민주주의니 무슨 주의니 해서 야당 여당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그러니 국가의 상처가 얼마나 커요? 지금까지 하던 일에 숙달된 사람들이 꺾어져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잖으면 중간에 꺾어져서 거기서 그 이상 못 올라갑니다. 그 자리에서 돌면서 내려가지 올라가지 못합니다. 정치가 없어지고 관리체제가 되는 것입니다. 모두 관리하는 겁니다. 돈을 분배해서 잘 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것을 관리하는 체제로 되는 것입니다.
(324.253-254, 2000.06.24)
3. 정의의 지도자는 부패를 멀리함
종교경전
개인적 이익을 취하려 높은 자리에 앉는 자는 자기 쾌락만 위해 여성의 몸을 탐하는 자와 같다. 주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거룩한 이로 불리듯 너희 또한 거룩할지니라. 내가 가진 성품을 닮지 못하면 지도자의 자리에 있을 수 없다.”
페식타 라바티 111a (유대교)
권력의 자리를 요구하지 말라. 만약 너희의 요구에 의해 그 자리에 올랐다면 너희는 스스로 그 직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라. 그러나 너희의 요구 없이 그 직이 주어졌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리라.
무슬림 하디스 (이슬람)
반드시, 정당한 사유 없이 공금을 사취하는 관료는 누구든지 최후의 심판일에 그것에 대해 묻는 그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
무슬림 하디스 (이슬람)
뇌물은 온갖 종류의 죄악이 오는 문이다. 뇌물로 사는 사람들은 자기 어머니의 젖가슴을 잘라낸다.
소마데와, 니티바크야므리타 17.184 (자이나교)
큰길(大道)은 매우 평탄한 것이건만 백성들은 좁은 길을 좋아한다.
조정이 매우 잘 다스려지는데, 밭은 심히 황무지가 되고, (백성들의) 창고는 심히 비어 있다.
문채가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날카로운 칼을 차고, 음식을 실컷 먹고, 재화가 여유가 있다면, 이를 일러 도둑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도가 아니다.
도덕경 53 (도교)
말씀 선집
종교지도자이건, 정치지도자이건 가장 큰 결격사유는 이기주의일 것입니다.
(299.106-107, 1999.02.06)
두 사람 가운데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 이상의 것을 중심삼고 위를 위해서 보다 위하겠다는 사람은 선편의 자리에 서는 것이고, 자기를 위해 보다 낮은 것을 따라가겠다는 사람은 악 편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관직에 있는 사람이 나라를 위해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가정만을 위하면 악이 되는 것입니다.
(170.176, 1987.11.15)
공금을 약취하지 말라! … 공적인 환경을 파괴시키는 것은 국가재산 약취와 마찬가지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아무리 잘 되려고 해도 안 됩니다.
(347.85, 2001.07.03)
자기의 사적인 물질을 공적인 물질보다 더 중요시하는 사람은 천도에 위배되는 사람입니다. 사적인 자기의 인격을 공적 인격보다 더 중요시하는 자리는 뜻에 위배되는 자리입니다. 공석에서 내가 비판하는 것은 그런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입니다. 사적인 인격은 내가 들이 까는 것입니다. 창피하면 안 하겠지요. 그렇지만 공적인 인격은 다르게 대하는 것입니다.
(51.291-292, 1971.11.28)
영계에 가면 제일 무서운 죄가 뭐냐? 공금을 잘못 쓴 게 첫째입니다. 둘째는 공적인 자리에서 공적 임무를 다해야 되는데 임무를 몰라보는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그 다음 셋째는 원리원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대 죄입니다.
(97.155-156, 1978.03.12)
자기를 중심삼고 전체를 이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늘 생각하고 절대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교회에 찾아올 때나 혹은 여러분들이 전도를 할 때에 ‘이 사람이 헌금을 많이 할 것이냐’ 하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3.164, 1970.08.11)
전형적 지도력
최고의 지도자는 덕성과 의로움의 모범이다. 한 사회의 정예 구성원인 정치인, 교수, 저명인사, 그리고 스포츠 영웅들이 정직, 성실과 도덕성의 본보기가 되어야 함을 자신의 의무로 인식할 때 그 사회는 축복받을 것이다. 그들이 역할 모델이 될 때 보통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본보기 모습을 따를 것이다. 우리는 모범적인 지도력을 세 측면으로 식별할 수 있다.
첫째, 지도력은 가정에서 시작된다. 지도자가 자신의 배우자와 자녀를 배려하고 가정을 다스리는 방식은 더 넓은 영역의 통치와 사회적 책임 분야에서 담당할 자신의 일에 대한 출발점이 된다.
둘째, 가슴과 마음을 자극하고 통치하는 것이 지도력이다. 중국에서는 공자와 그의 추종자들이 법치주의자들의 관점에 반대하면서 모범적인 지도력의 이상을 표명하였다. 법치주의자들은 법과 법의 강력한 시행, 즉 마오쩌둥이 후에 말했던 것처럼 ‘총알에 의한 힘(권력)’으로부터 지도력이 흘러나온다고 가르쳤다. 공자는 만일 지도자들이 부패한다면 모든 국가 권력은 불만을 떨쳐버리지 않을 것이고 이와 반대로 국민들은 다만 폭력과 억압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맞섰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준 성현과 종교적 스승들에게서 모범적인 지도력의 본보기를 볼 수 있다. 나사렛의 예수는 단지 그의 설교 말씀뿐만 아니라 희생적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르쳤다.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무엇을 하려 했는가!’를 묻고 그렇게 한다고 한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원수를 사랑했다. 이는 우리가 따르기 어려운 본보기이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그 이후 기독교인의 신앙의 토대가 되었다. 정치 지도자들이 이 성현들의 모범을 따를 때 그들은 의심 없이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모범적인 지도력의 자질은 문선명 선생의 가르침에서 3대 주체사상으로 요약된다. 지도력의 표준은 ‘참부모, 참스승, 그리고 참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지도자는 주인으로서 이 세계를 감독하고, 깊은 부모의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을 돌보며, 우리를 참다운 생명길로 계속 교도해 가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 곧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한다. 그러나 아직도 이 가르침을 모르는 지도자들이 너무도 많다.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닌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1. 모범적이며 덕망 있는 개인생활
종교경전
자기 자신(윗사람)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그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한다 하더라도 따르지 않는다.
논어 13.6 (유교)
국왕이 정직하지 못함에 어느 백성이 정직할 수 있겠는가? 국왕이 의롭지 못함에 어느 백성이 의로울 수 있겠는가?
소마데바, 니티바크야므리타 17.183 (자이나교)
세계의 유지와 복리를 고려해서라도 그대는 마땅히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귀한 자들이 행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른 사람들이 또한 그것을 따라 행하는 법이다. 그가 세운 모범을 세상은 따라가느니라.
바가바드기타 3.20-21 (힌두교)
소들이 떼 지어 들판을 지나갈 때 우두머리 황소가 길을 벗어나면 그를 따라 다른 소들이 길을 벗어나듯, 백성들 가운데 수승하다고 여겨지는 이가 그릇되게 행하면 다른 대중은 이보다 더하며, 만백성의 우두머리가 의롭지 못하면 온 나라가 비탄에 잠긴다.
소들이 떼 지어 들판을 지나갈 때 우두머리 황소가 바른 길 가면 그의 길이 바르므로 다른 소들이 더불어 바로 가듯, 백성 가운데 수승하다고 여겨지는 이가 의롭게 살면 다른 이들도 또한 그를 따르며, 만백성의 우두머리가 정의로 굳게 서면 온 나라가 태평성가를 부른다.
앙굿타라 니카야 2.75 (불교)
의로운 이가 마을에 있으면 그는 마을의 빛이요, 위엄이요, 영광이다. 그러나 그가 마을을 떠나면 그것들도 떠나버린다.
창세기 랍바 68.6 (유대교)
정령으로 인도하고 형벌로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이 면할 수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덕으로써 인도하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부끄러워하고 또한 선(善)에 이를 것이다.
논어 2.3 (유교)
계강자가 정치에 관해서 공자에게 물었다. “만약 무도한 자를 죽여 없애고 백성들로 하여금 도를 따르게 하면 어떻겠소?” 이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은 정치를 하겠다면서 어찌 살인을 하려고 하십니까? 당신이 선을 원하면 백성들도 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으며 소인의 덕은 풀과 같습니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나부끼고 따르게 마련입니다.”
논어 12.19 (유교)
시경에 이르기를 “근엄하신 문왕이여! 아! 계속하여 빛나며 경건하게 머문다”고 하였으니, 다른 사람의 군주가 되어서는 어진(仁) 상태에 머물고,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서는 경건한(敬) 상태에 머물고, 다른 사람의 아들이 되어서는 효성스러운(孝) 상태에 머물고, 남의 아버지가 되어서는 자애로운(慈) 상태에 머물고, 나라의 사람들과 더불어 사귐에 있어서는 믿음 있는(信) 상태에 머물렀던 것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저 기(淇) 강의 모퉁이를 보니 푸른 대나무가 무성하구나! 문채 나는 군자여, (그 인격이 도야됨이) 잘라 놓은 듯하고, 민 듯하고, 쪼아놓은 듯하고, 간 듯하다. 엄밀하고 굳세고, 밝게 드러나니, 문채 나는 군자여! 끝까지 잊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잘라 놓은 듯하고 민 듯하다는” 것은 배우는 것을 말하고, “쪼아놓은 듯하고 간 듯하다는” 것은 스스로의 행실을 닦는 것을 말하고, “엄밀하고 굳세다는” 것은 조심스러워하는 것을 말하며, “밝게 드러나는” 것은 위엄이 있는 행동을 말하여, “문채 나는 군자여! 끝까지 잊을 수가 없다고” 한 것은 그 무성한 덕과 지극한 선함을 백성들이 잊을 수 없는 것을 말한 것이다.
대학 3.3-4 (유교)
실로 너희에게는 하나님과 최후의 날을 염원하고 하나님을 잘 기억하는 하나님의 예언자가 훌륭한 모범이니라.
꾸란 33.21 (이슬람)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뒤에 옷을 입고 식탁에 다시 앉으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요한복음 13.12-15 (기독교)
바로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21 (기독교)
말씀 선집
전체를 위하는 사람은 전체 운행에 맞추어서 생활이나 일이나 언행심사(言行心事)의 모든 면에서 본이 되니만큼 자동적으로 윗사람으로 존경받는 것입니다.
(318.147, 2000.03.05)
무엇이 선이냐는 하는 것입니다. 나쁜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요, 좋은 것은 찾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 말은 좋은 것을 갖고 중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중심자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의 하나의 표준이 되어서 그들이 따라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중심자는 그것과 관계된 모든 것과 격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것을 관리하고 보호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보호해 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심자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따라가려고 하고 그를 표준삼고 가려고 합니다.
(118.38, 1982.05.02)
스스로 자신의 인격을 숭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만물을 대해서도 부끄럽지 않게 숭배 받을 수 있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 다음에 ‘나를 본 받아라’ 하고, 그 후에 상대적인 세계를 바라보아라.
(뜻길, p.190)
지도자가 되려면 경제문제를 다룰 줄 알아야 되고, 외교를 할 줄 알아야 되고, 대중을 설득시킬 수 있는 웅변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85.263, 1976.03.03)
하나님이 성자나 선지자들을 지상에 보낸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라시는 인격과 생활의 본을 보이면서 하나님의 참사랑의 뜻을 만민에게 교육하는 것입니다. 특히 위정자나 지도자들에게 천도를 교육하고 실천케 함으로써 마음의 세계와 몸의 세계가 하나님의 참사랑의 뜻을 중심하고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219.110, 1991.08.27)
2. 참부모, 참스승, 참주인이 되기 위한 지도자의 노력
종교경전
감독은 책망 받을 일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않으며, 난폭하지 않고 너그러우며, 다투지 않으며, 돈을 사랑하지 않으며, 자기 가정을 잘 다스려서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아주 공손히 복종하게 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자기 가정을 다스릴 줄 모르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디모데전서 3.2-5 (기독교)
천지는 만물의 부모이고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다. 진실로 총명한 자가 훌륭한 군주가 되고 훌륭한 군주는 백성의 부모가 된다.
서경 5.1.1: 태서(泰誓)(유교)
이른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반드시 그 집안을 안락하게 하는 것’이라 함은 그 집안을 가르치지 못하고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도 나라에 가르침을 이루는 것이다. 효도는 군주를 섬기는 것이고, 형에게 공경하는 것은 장관(長官)을 섬기는 것이며,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백성을 부리는 것이다.
대학 9.1 (유교)
말씀 선집
우리의 3대 소원이 하나는 참된 부모, 참된 스승, 그리고 참된 주인입니다. 여러분도 출세해서 미국의 주지사가 되고 싶고,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것이 되기 전에 집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전통을 상속해서 선조를 대신할 수 있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주인의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모든 가정과 나라가 존경하는 것입니다.
(205.20, 1990.07.15)
보다 위해서 사는 그러한 부모가, 모든 부모들 가운데 자녀를 위해서 사는 부모가 참부모이며, 어떠한 스승보다도 보다 위하겠다는 스승이 참스승이고, 어떠한 대통령보다도 보다 위해서 희생하겠다는 대통령이 참입니다.
(285.226, 1997.03.19)
중심존재는 책임을 져야 됩니다. 책임을 질뿐만 아니라 보호해 줘야 됩니다. 보호뿐만이 아니라 육성해 줘야 됩니다.
(210.98, 1990.12.01)
여러분은 전부 부모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승, 선생을 갖고 있고, 대통령이라는 나라의 주인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부모가 있어야 하고, 선생이 있어야 하고, 그 나라의 주인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는 어떠한 부모이고, 스승이면 어떠한 스승이고, 나라의 주인이면 어떠한 나라의 주인입니까?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부모가 되고 싶습니까? 어떠한 학교, 어떠한 레벨에서의 스승이 되고 싶습니까? 예일, 하버드, 프린스턴과 같은 아이비 리그에 속한 대학이라든가, 영국의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에는 훌륭한 선생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을 진짜 참된 스승이라 할 수 있습니까?
최근에는 가정에서 부모를 믿을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선생을 믿을 수 없습니다. 아들이 부모에 대해서 믿지 못하니 그 부모를 중심삼고 보면 그것이 누구의 책임입니까? 부부끼리 하나 못 되어 있기 때문에 아들이 부모를 못 믿게 되고, 부부끼리도 서로 못 믿고, 형제끼리도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바라는 자랑하고 싶고, 갖고 싶었던 이 3대 중요한 주체가 전부 참이라는 기준을 중심삼고 합격될 수 있는 어느 하나가 있느냐 말입니다.
(285.214-215, 1997.05.19)
여러분들이 진짜 부모 자식 관계의 사정을 안다면 모든 걸 할 수 있습니다. 경영철학으로 보게 된다면 고용주와 피고용주 관계입니다. 공산주의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사이 투쟁을 원칙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부자관계의 심정적 인연인 것입니다. 참부모란 부자관계의 사랑만이…. 기업주 될 수 있는 입장은 부모의 자리요, 고용자 입장은 자식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해 간여하듯 해야 됩니다. 부모님이 돈을 아껴 가지고 싸 두는 것은 자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나중에 자식에게 상속해 주기 위해서 그런 놀음 한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116.121, 1981.12.27)
하나님은 여러분이 참된 부모가 되고, 참된 스승이 되고, 참된 주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세계 최고의 타입, 그 모든 모델의 중심이 누구인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누가 참된 부모와 참된 스승, 참된 주인의 최고 절대적 모델입니까? 레버런 문입니까?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부모 중의 부모요, 스승 중의 스승이요, 왕 중의 왕입니다. 영원한 부모이고, 영원한 스승이고, 영원한 주인입니다. 그래,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같은 부모가 되어야지요? 하나님과 같은 스승의 길을 가야지요? 하나님과 같은 주인이 될 수 있는 길을 가야지요? 문제는 하나님입니다.
(285.224, 1997.05.19)
국민을 위한 정부
정치의 주된 관심사는 시민복지이다. 세계의 경전은 통치자는 자기 자신의 필요에 앞서 국민의 요구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확언한다. 이것은 통치자의 명칭들에서 잘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그들의 통치자를 ‘목자’로 불렀고, 예수는 왕국의 통치자를 ‘종’으로 불렀으며, 중국 전통에서는 황제를 ‘백성의 어버이’로 보았다.
지도자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개인적 친절, 그들의 실수에 대한 관용, 사태에 대한 인식 부족, 무지, 배신 등도 확실한 신뢰성으로 배려해야 한다. 지도자는 고위직의 허례와 과시를 배제함으로써, 그리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 소박하게 살아감으로써 추종자들의 어려움과 함께함을 보여줄 수 있다. 경전들은 경기 침체기의 세금 감면, 일자리 창출을 위한 투자, 국민에의 주인의식 함양을 위한 권한 부여, 빈민 복지를 위한 준비 등을 위시한 자애로운 통치정책을 격려한다(제20장 ‘경제’의 참조).
자애로운 규칙을 추구하여 만들어진 정부의 교령은 거의 보편화되어 있다. 그래서 고대 군주제 시대에 기록된 교령들이 전승되어 오늘날에도 그것이 유효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현대 민주주의에 관한 몇몇 문헌들이 소개된다. 현대에 ‘국민의, 국민에 의한’ 정부가 ‘국민을 위한’ 정부를 창출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의 극악무도함을 야기했다. 프랑스혁명이 그 사례다.
민주주의 배후의 자유선거와 대의정치의 활기찬 정신은 자유의 축복과 전체주의적 폭력 사이의 모든 차별을 만들 수 있다. 서양의 경험론적 기독교 가치에 세워진 민주주의는 물질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것으로 보인다. 문선명 선생님에 따르면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미국의 민주주의에서도 여러 차원에서 결점이 드러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는 민주주의의 토대는 참사랑의 정신이라고 공표한다.
1. 봉사하는 지도력
종교경전
군왕의 행복은 백성들의 행복에 놓여 있다. 그의 복지는 그들의 복지에 놓여 있다.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선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하며, 백성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카우틸리야, 아르타 샤스트라 1.19 (힌두교)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해주니 백성의 기쁨이 다함이 없다. 위로부터 아래에 낮추니 그 도가 크게 빛난다.
역경 42 (유교)
성인은 백성들 윗자리에 서고자 하면(다스리고자 하면), 반드시 말로써 그들 아래에 서고,
백성들 앞자리에 서고자 하면(이끌고자 하면), 반드시 몸으로써 그들 뒤에 둔다.
성인은 위에 자리하되 백성들은 무겁게 여기지 않고, 앞에 자리하되 백성들은 해롭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하가 즐겁게 그를 추대하면서도 싫다고 하지 않는다.
도덕경 66 (도교)
큰 나라 다스리기를 마치 작은 생선 지지듯 해야 한다.
도덕경 60 (도교)
대다수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백성들에게 지우지 말라.
탈무드, 바바 바트라 60b (유대교)
자기 자신을 책망하기를 무겁게 하고, 다른 사람을 책망하기를 가볍게 한다면 원망이 멀어질 것이다.
논어 15.14 (유교)
어진 사람은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고, 자기가 통달하고자 한다면 남도 통달하게 한다.
논어 6.28 (유교)
통치자가 준행해야 할 지상의 의무는 백성을 수호하는 일이다. 자신의 지위에서 오는 권익을 탐닉하는 통치자는 그 의무에 속박될 뿐이다.
마누법전 7.144 (힌두교)
[최고 통치자이며 신의 지상 대리인인] 칼리프란 백성을 보살피는 목동과 같으니 그의 백성들에 관해 질문을 받게 되리라.
부카리 및 무슬림 하디스 (이슬람)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통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
마태복음 20.25-28 (기독교)
하나님의 자비로 네가 그들에게 관대할 수 있었느니라. 만일 네가 냉혹하고 몰인정했다면 네 주변으로 흩어졌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용서를 빌어주고 사안을 그들과 협의하라.
꾸란 3.159
임란의 모세 자손이 말했다. “주여, 당신 생각에 당신의 중복 중 가장 훌륭한 자가 누구나이까?” 그가 대답을 듣기를 “권좌에 앉아 있을 때 용서를 하는 자이니라”였다.
바이하키 하디스 (이슬람)
보호란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는 것이다.
니카족의 격언 (아프리카 전통종교)
말씀 선집
무한히 줄 수 있는 사람이 무한히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천만 사람에게 좋게 쓰이는 재료가 되자.
(뜻길, p.189)
남을 지배하고 싶은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이 지배당해 보아야 한다.
(뜻길, p.70)
따르고 있는 사람들이 원치 않는 곳에서 명령하는 지도자는 망한다.
(뜻길, p.69)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낮은 사람을 잘 수습해야 됩니다.
(34.250, 1970.09.13)
주권자는 백성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백성과 하나 되어 가지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나라는 번영합니다.
(30.88, 1970.03.17)
우리는 남을 위하여 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생활은 타인을 불쾌하게 하는 것은 물론, 천도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하는 삶은 곧 하나님을 닮는 실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상속받아 가정과 사회, 국가와 세계를 사랑함은 우주의 기본질서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참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인격을 완성한 참사람․참부모․참스승․참주인이 됩니다. 이래야 평화를 이루는 주체가 됩니다. 남을 위하는 삶은 평화로 향하는 첫 관문이 됩니다.
(356.276, 2001.10.20)
자기를 중심삼은 사람은 아무리 대학을 나오고 학위를 갖고 있고 교수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책임자가 못 됩니다. 중심자가 못 됩니다. 그렇지만 다 갖추어 가지고 전체를 위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전부 다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선거할 때도 그렇습니다. 책임자를 정할 때는 개인주의자는 싫어하는 것입니다. 전체를 위하는 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사회에 있어서 역사를 존속시키는 한 방법이요, 한 공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102.139-140, 1978.12.10)
처음 대하는 사람이 잘못했을 때는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주었고, 무엇을 투입했나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야 실수해도 용서해 주는 천리를 거기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주체자로서 반갑게 대해 주고 반색하기를 바라야지 그러지도 않고 반색하기를 바라는 것은 도둑놈입니다.
(81.305, 1975.12.29)
만일 나쁜 것이 있으면 나쁜 것을 당장에 처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쁜 것이 있더라도 그 나쁜 것을 중심삼고 좋을 수 있는 조건을 찾아가면서, 좋은 것이 나쁜 것보다 작더라도 작은 것을 보고 나쁜 것을 보류해 가지고 처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됩니다.
(72.313, 1974.07.14)
책임자는 알고도 속아 줘야 되고, 모르고도 본을 보여 줘야 됩니다.
(324.202, 2000.06.24)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사리(事理)가 밝아야 됩니다. 우둔하면 안 됩니다. 사리에 밝다는 것은 이치에 맞다는 말입니다. 전후좌우를 살필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둔해서는 안 됩니다. 상하, 전후, 좌우를 가릴 줄 알아야 됩니다. 다음에 그것을 포괄(包括)할 수 있는 것은 정입니다. 정의 보자기는 다 싸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싸고, 애기도 싸고 다 싸는 것입니다. 이론의 보자기는 일방적이지만 정의 보자기는 포괄적입니다. 그러기에 선생님은 팔십 난 할머니도 좋아하고 어린 애기도 그렇고, 사랑의 보자기로 싸면 전부 좋아하는 것입니다. 서로 움켜 가지고 깨지 않고 영원히 잠들어 쉬고 싶고 자고 싶은 곳이 사랑의 보자기 안입니다. (81.328, 1975.12.29)
2. 가난한 자들에의 배려
종교경전
윗사람이 풍요한 가슴을 가진다면 모든 사람들이 젖을 먹을 수 있다.
아칸족의 격언 (아프리카 전통종교)
정부는 보호자를 갖지 못한 국민을 위한 보호자이도다.
하디스(이슬람)
닌토쿠 천황이 높은 산에 올라 사방의 국토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고을에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아니함은 백성들이 모두 가난한 탓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삼년간 국민들의 조세와 부역을 전부 면제하라”고 하셨다. 이로 인해 궁전은 파손되어 전부 비가 새었으나 천황은 일체 수리를 하지 않고, 새는 빗물을 그릇에 받으며 비가 새지 않는 곳으로 옮겨 피하였다. 그 후 국내를 돌아보게 될 때 고을 곳곳에 밥 짓는 연기가 가득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이 풍부하게 됨을 알고 이제 괜찮겠다고 하여 조세와 부역을 부과하였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백성은 번영하고 부역에 시달리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 치세를 칭송하여 성제의 치세라고 한다.
고사기 110 (신도)
망하리라. 양을 돌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너희가 젖이나 짜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워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 주어야 하며, 상처 입은 것은 싸매 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그들을 다만 못살게 굴었을 뿐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먹히며 뿔뿔이 흩어졌구나.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
그러니 목자들아! 이 여호와의 말을 들어라. 내가 맹세한다. 나의 양떼는 마구 잡혀갔고, 나의 양떼는 목자가 없어서 들짐승에게 찢겼다. 그런데도 내가 세운 목자들은 나의 양떼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제 배만 불리고 양떼는 먹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목자들아! 이 여호와의 말을 들어라. 주 여호와가 말한다. 목자라는 것들은 나의 눈 밖에 났다.
에스겔 34.2-10 (기독교)
그제야 네가 부르짖으면 여호와가 대답해 주리라. 살려 달라고 외치면 ‘내가 살려 주마’ 하리라. 너희 가운데서 멍에를 치운다면, 삿대질을 그만두고 못된 말을 거둔다면,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자에게 나누어주고 쪼들린 자의 배를 채워 준다면, 너의 빛이 어둠에 떠올라 너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 오리라.
이사야 58.9-10 (기독교)
하나님, 임금에게 올바른 통치력을 주시고, 임금의 아들에게 정직한 마음을 주소서. 당신의 백성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리고, 약한 자의 권리를 세워 주게 하소서.
그는 하소연하는 빈민을 건져주고, 도움 받을 데 없는 약자를 구해 주며,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가난에 시든 자들을 살려 주며, 억울한 자의 피를 소중히 여겨 억압과 폭력에서 그 목숨 건져 주리이다.
시편 72 (기독교)
말씀 선집
길거리를 가다가 불쌍한 사람을 보면 자기 몸을 억제하지 못하는 충격을 받아서 정신을 수습하고 보면 전선주를 붙들고 흐느끼고 있는 그런 심정에 사무칠 수 있는 지도자는 발전하지 말래도 발전하는 것입니다.
(160.197, 1969.05.12)
대통령이 관저에 사는 것보다도, 모래사장 위에 모래집을 짓고 일대, 일대 허물어 가지고 살겠다고 하는 그 나라는 부흥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백성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하십니다.
(382.149-150, 2002.06.21)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은 자기로 끝나는 것이요, 남을 위해 사는 것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이 존속하는 방법은 내가 주체의 자리에 서더라도 전체의 대상권을 위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 인물이 되겠다는 욕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계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계적 인물이 된다면 그는 세계적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권을 밟아 치우는 세계적 주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세계적 주체는 세계적 상대의 형을 빛내기 위한 주체가 돼야 합니다.
(57.63-64, 1972.05.28)
정치세계는 관리체제이며, 정책이란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원리적 관점에서 평화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국가를 위해서 전체 앞에 본보일 수 있고 위하는 관리체제지, 지도체제가 아닙니다.
그 관리체제를 통해서 경제적 문제, 곧 사람이 먹고사는 생활을 자동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에서 상․중․하의 3계급으로 나누어서, 상급은 생활 기준이 얼마이며, 중급은 얼마이며, 하급은 얼마인가를 알아봅니다. 이걸 중심삼고 평준화하는 것입니다. 중급을 중심삼고 연결시켜서 평준화를 해야 됩니다. 그러려면 세계는 반드시 유엔에 하나되어야 됩니다. 정비관리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정책을 잘못 세우게 되면 경제 관리체제를 파탄시켜 버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집안 생활과 같은 계획을 세워 1년에 얼마, 전 세계의 예산이 얼마 들어간다는 것, 상은 얼마이며, 중은 얼마인가 하는 정확한 통계가 나와야 됩니다. 그리고 상은 될 수 있는 대로 중을 중심으로 내려가면서 하를 끌어올려서 평준화시켜 맞춰 나가야 됩니다. 그런 체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324.253-254, 2000.06.24)
후진국들의 빈곤을 해방하고, 강대국들은 발전도상에 있는 새 민주주의 국가들을 희생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각 국가 정책이 이기주의를 지양하는 그 자체가 큰 혁명입니다. 그 방법은 우리 모두가 부모의 자리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국가가 형제로 보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부모 아래 한 형제 국가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219.120, 1991.08.28)
3. 민주주의
종교경전
민주주의 이상을 표방하는 위정자, 그의 통치는 영원하리라.
아디 그란트, 마루, M.1 (시크교)
폐하, 폐하의 영토는 공격을 당하며 약탈되고 있습니다. 마을과 성읍을 약탈하는 강도들이 있으며, 길을 불안하게 하는 노상강도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세금을 올린다면 폐하는 실로 잘못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폐하께서는 '나는 곧 이 도둑의 무리를 죽이거나 포박하거나 재산을 몰수하거나 꾸짖거나 추방하거나 하여 처벌하리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그들의 악행을 멈추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처벌에서 살아남은 무리들은 계속하여 왕국을 약탈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무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제 왕국 안에서 목축과 농사에 전념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에게나 음식과 씨앗을 제공하십시오. 왕국 안에서 상업에 전념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에게나 밑천을 제공하십시오. 폐하의 왕국에서 공무에 전념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에게나 음식과 보수를 주십시오. 이처럼 자신의 직업에 전념하는 자들은 결코 왕국을 약탈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불어 폐하에게는 큰 세입이 있을 것입니다. 나라는 안정이 되고 편안해질 것이며, 백성들은 아이들을 안고 춤을 추며 서로 기뻐하고 행복할 것이며, 집의 문을 열어놓고 살게 될 것입니다.
디가 니카야 1.135, 쿠타단타 숫타 (불교)
말씀 선집
인류역사의 종말을 고하는 이 마지막 때에 있어서, 천륜은 드디어 재물이나 땅이나 사람을 빼앗아 가지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 온 역사의 단계를 지나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띠고 이 땅에 찾아왔다.
(원리강론, 종말론 2.3)
예수님의 시대만 하더라도 사람의 목숨은 권력자 앞에 파리 목숨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정자나 권력자들이 원한다면 언제나 파리가 잡히듯 잡혀 죽임을 당하는 무법천지의 제도 하에서 태어났습니다. 근본적인 인간혁명을 부르짖으신 혁신적인 예수의 말씀이 그 사회제도 밑에서 용납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것은 당시의 제도 하에서는 피치 못할 사정이었다 하겠습니다. 이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메시아가 다시 오시는 재림 시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사람을 함부로 잡아 죽일 수 없는 정치제도인 것을 아십니다.
이를 위하여 2천 년 동안 땀 흘려 준비하신 제도가 곧 오늘날의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인권을 존중하는 제도입니다. 민주주의는 소수파도 다수파 속에 끼어 살아남을 수 있는 제도입니다. 민주주의는 곧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입니다. 그 자유가 곧 언론의 자유요, 종교의 자유요, 결사의 자유요, 출판의 자유요, 집회의 자유입니다. 그 민주주의의 대표라 볼 수 있는 미국의 헌법을 보면, 자유 가운데 가장 절대적인 자유가 종교의 자유이며, 미국 의회와 정부는 종교를 규제할 수 있는 어떠한 법도 만들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100.245-246, 1978.10.19)
혁명으로 인하여 인권선언이 공표됨으로써 불란서의 민주주의는 수립되었었다. 그러나 불란서혁명으로 인한 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가인형의 인생관을 세우기 위하여, 유물사상으로 흘러간 계몽사상이 절대주의사회를 타파하면서 출현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가인형의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몽사상의 주요 인물들도 그러하지만, 불란서혁명의 사상가 디드로(Diderot 1713-1784)나 달랑베르(d’Alembert 1717-1783) 등도 무신론 또는 유물론계의 학자들이었다. 이 혁명의 경위를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불란서의 민주주의는 개성의 자유와 평등보다도 전체주의에로 바뀌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실현된 민주주의는, 불란서의 대혁명으로 인하여 실현된 민주주의와, 그 발단부터가 다르다. 후자는 가인형 인생관의 소산인 무신론 및 유물론의 주창자들이, 절대주의 사회를 타파하는 것으로써 실현한 가인형의 민주주의였음에 반하여, 전자는 아벨형 인생관의 결실체인 열광적인 기독교 신도들이, 신교의 자유를 찾기 위하여 절대주의와 싸워 승리함으로써 실현한 아벨형의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원리강론,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 3.1.1-2)
민주주의는 형제주의라는 것입니다. 다 평등이라고 했지요? 세계의 인류는 자유를 중심삼고 평등이라고 했습니다. 자유 가지고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중심삼은 자유에서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201.73, 1990.03.01)
만약에 민주주의라도 사랑을 모체로 한다면 세계가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모체로 해 가지고, 세계가 사랑으로 하나 되기를 주장하는 그런 민주주의라면 그건 세계적인 민주주의가 될 것입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참된 사랑을 위주로 한 공산주의라면 그것도 세계를 하나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숙청이라는 말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90.311-312, 1977.01.15)
그런 관점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를 가만 보게 되면, 어떤 면에서는 척 보면 좋아하기 쉽지만, 근본적으로 파고 들어가게 되면 좋아하기 힘듭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민족주의 색채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아직 고립되어 있습니다. 하나 못 되어 있습니다. 법과 인권이 조화되어야 됩니다.
(90.304, 1977.01.15)
민주주의 세계가 얼마나 가겠느냐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세계는 개인주의 세계입니다. 여기는 부부 관계라든가 무슨 관계가 없습니다. 전부 자기 위주로 다 돼 있습니다. 이 세계는 관계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부 관계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되었으면 그 다음에는 대응 관계를 이루고, 이렇게 해서 세계는 하나의 핵을 중심삼고 서로 일치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가정이 하나되어 있으면 그 다음에는 부락과 하나돼야 합니다. 가정이 하나 되어 그 부락과 대응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구성해 가지고 하나의 연결적인 체제를 만드는 데 불가피한 원칙이 되는 것입니다.
(228.8, 1992.03.01)
법과 벌
정부는 시민을 보호하고 범법자를 제재하며 공공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법을 제정하고 집행한다. 하나님은 법의 근원이다. 그분이 과학적 법칙에 따라 기능하는 우주를 창조하였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양심을 개별 인간의 마음에 심어주셨다. 한 나라의 법을 구성하는 헌법과 법령은 천법과 비슷하다. 이것이 우리가 양심의 지시에 따르는 이유이다.
법은 사악함을 제재하도록 한다. 바르게 행동하고 악한 것을 피하도록 명령하는 양심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옳은 것과 그른 것, 즉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 사이를 예리하게 분별하는 법에 의해 제재를 받는다. 양심적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사람들은 법에 거의 저촉되지 않고 살아간다.
범죄 억제책으로, 정의 수호를 위해서 법령은 범법자를 형벌로 처벌한다. 형량을 결정하는 정부는 정의의 최종 분배자인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지옥이란 영계의 거대한 감옥으로서 하늘 영역을 유린하는 범법자를 제재하기 위한 곳이다. 죗값을 치르는 범법자의 형벌은 하나의 계기, 즉 ‘탕감’으로 무화시킬 수 있다.
범법자를 징벌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체제에는 항상 자비의 요소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범법자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삶의 방식을 새롭게 전환해야 한다. 문선명 선생님은 감옥의 주된 목표는 원상회복의 교육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수감자들의 참혹한 감옥소를 원상회복을 위한 교육장소 ‘교도소’로 개조하려는 21세기 선진화 운동의 핵심 개념이다. 이처럼 정의와 자비의 양극은 사형선고 등 윤리적 이슈를 성찰하는 관점을 새롭게 형성한다.
1. 법의 고결한 목적
종교경전
창조자는 탁월한 형식, 법칙을 투사했다. 이 법칙은 군주를 통제하는 자이며, 따라서 그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그래서 심지어 약한 사람도 마치 우리가 왕의 도움으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 법칙을 통해 강한 사람을 쳐부수고자 희망한다.
브리하드아란야카 우파니샤드 1.4.14 (힌두교)
군주와 장관으로써, … 그대는 법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어서,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되 오직 문왕(文王)의 경건함과 조심함으로 하여 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말하기를 “나는 문왕의 수준에 미침이 있다”고 한다.
서경 5.9.3.8 (유교)
참된 심판에 수긍하는 자가 하나님의 동업자이다.
메킬타, 출애굽기 18.13 (유대교)
임금이 정의로 다스리면 나라가 튼튼히 서지만.
잠언 29.4 (기독교)
만일 형벌이 합당한 고려 후에 적절하게 가해진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러나 숙고 없이 형벌이 가해진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파멸시킨다.
만일 왕이 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을 벌하는 데 게을리 하면,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마치 쇠꼬챙이에 꽂힌 물고기처럼 불에 구워 버린다. 그러면 모든 위계가 무너질 것이며, 형벌과 관련된 실수의 결과로 모든 사람들이 서로 격노할 것이다.
그러나 검은 색조와 붉은 눈을 지닌 형벌이 죄인들을 멸하며 감시하고 있는 곳에서는, 그것을 부과하는 자가 잘 분별하는 한 백성들이 혼란에 빠지는 일이 없다.
마누법전 7.20-25 (힌두교)
악행과 선행을 분별하고
업의 결과들을 보여주는 이,
그는 왕이라 불리네.
신들의 무리에 의하여 축성되었으므로
그 신들이 그를 두고 기뻐하네.
자신 또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자기 나라의 의로움을 보존하며,
자기 영토에서 악한들과 범죄자들을
징벌하는
그와 같은 왕은 만일 필요하다면
자신의 생명과 왕국도 포기하리라.16
금광명경 12 (불교)
말씀 선집
법이 뭐냐는 것입니다. 자체적으로 보호되어진 것을 파괴하려고 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 법입니다. 우주법이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형태에 박자를 맞춰서 국가법도 그 적응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준법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18.198, 1982.06.01)
한 나라를 중심삼고 볼 때 국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선을 지탱하기 위한 목적에서 법을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의 헌법을 보나 국가 관리 체제의 법을 보더라도 전부 다 좋을 수 있는 면을 옹호하기 위해서 되어 있지, 이것을 파괴하기 위해서 만들어져 있는 법은 없습니다. 만약 이 원칙에 어긋나게 될 때는 어떻게 됩니까? 어느 나라에나 감옥이라는 것이 있어 가지고 제재를 합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주권자에 따라서 선의 기준이 달라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교육을 받지 않아도 모든 선한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양심은 제일 선한 편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양심은 무엇이 선한지 악한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자기 주체성을 지니고 자기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216.306, 1991.04.15)
국가의 형성이라든가 국가의 법은 그것을 지주로 하고 그 외의 것을 제재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위주로 하고 외적인 육을 중심삼은 모든 것은 전부 다 제재예요. 가면 갈수록 좁아지는 것입니다.
(105.15-16, 1979.07.08)
순수한 양심에 일치될 수 있는 보편적인 사회체제를 형성하려니 법령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인륜은 어디에 근거를 두느냐? 천륜에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33.44, 1970.08.02)
좋고 나쁜 것은 언제나 경계선이 있어야 됩니다. 미국도 헌법을 중심삼아 가지고 좋고 나쁜 것의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잖습니까? 그런데 공적인 일을 제재하는 그런 법은 없습니다. 공적인 것은 얼마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무한정으로. 그것을 제재하는 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얼마든지 환영한다 그 말입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중심삼은 제안은 ‘하지 말라, 하지 말라’ 제재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을 때 법이 문제시합니다. 자기 욕심을 중심 삼으면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파괴하는 것입니다. 파괴하는 것을 문제시합니다. 공공건물을 파괴하는 것은 전부 다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사람에게 나쁜 말을 해 가지고 아프게 상처를 주는 것도 법에 걸리는 것입니다.
(111.239, 1981.02.22)
법이 세워지면 법대로 해야 됩니다. 하늘나라 가정의 법이 없었고, 하늘나라 종족의 법이 없었고, 하늘나라 국가의 법, 가정의 법, 종족의 법, 민족의 법, 국가의 법이 없습니다. 헌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류를 전부 내버려놓고 자유분방하게 해서 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손을 못 대고 나온 이유입니다. 사탄이 주인 돼 있으니까 하나님이 찾아오려고 해도, 그 질서의 원칙이 이렇게 되어 있으니, 이것은 안 되었으니 이것은 이리 속한다고 가릴 수 있는 법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렇지 않습니다. 통일교회에서 제멋대로 산 사람들은 용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356.315, 2001.10.22)
타락은 악이 먼저 출발하여 올라간 것이므로 악을 끌어내리고 선을 끌어올리는 작전을 해야 됩니다. 이 작전을 하는 데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걸 알아야 됩니다. 먼저 교만을 때려잡아야 됩니다. 타락은 하나님을 제쳐놓고 자기가 높아지고자 한 데서 되었습니다. 사탄의 본성이 거기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높아지겠다는 것, 환경이야 어떻던, 질서야 어떻든, 법도를 무시해 버리고 자기만을 주장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거기에는 의리도 없고 법도도 없습니다.
법도를 따라 법대로 사는 사람을 어떻다고 합니까? 그렇게 사는 사람을 정직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정직은 바를 정(正)과 곧을 직(直)입니다. 바르고 곧다, 똑바르다는 것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똑바른 것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과 악은 무엇으로 가르느냐? 법으로 가르는 것입니다. 교만은 법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법도를 무시하고 위치와 환경을 무시하며 행동하는 것을 꺾어 놔야 합니다. 교만을 제어하고 겸손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37.130, 1970.12.23)
하늘나라의 헌법은 뭐겠습니까?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랑의 힘, 사랑의 생명력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헌법의 일종인데 이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모든 법이 활용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11.171, 1981.02.15)
2. 정의로운 행정
종교경전
너희가 사람들을 재판할 때는 정의롭게 재판하여야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가르침은 참으로 훌륭하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들으시고 모든 것을 보시니라.
꾸란 4.58 (이슬람)
동시에 나는 너희의 재판관들에게 이렇게 지시하였다. ‘너희 동족들 사이에 소송하는 일이 있거든 잘 듣고 난 다음에 본국인들끼리의 사이뿐 아니라 본국인에게 몸 붙여 사는 외국인과의 사이도 공정하게 재판해 주어야 한다.
재판할 때에 한 쪽을 편들면 안 된다. 세력이 있는 자이든 없는 자이든 똑같이 들어주어야 한다. 재판이란 하나님께서 몸소 하시는 일이니 아무도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판결하기에 벅찬 사건은 내가 들어줄 터이니 나에게 올려라.
신명기 1.16-17 (기독교)
서둘러서 일을 잘 처리한다고 해서 정의로운 자는 아니다. 의와 불의 이 둘을 잘 분별하는 이가 지혜로운 자이다.
법구경 256-257 (불교)
도둑은 머리를 풀고 왕에게 달려가서 “제가 이런 짓을 했습니다.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참회 후) 도둑에게 벌이 부과되든 방면되든, 그는 도둑질한 죄를 벗는다. 그러나 만일 왕이 그를 벌하지 않으면 도둑질한 죄는 왕에게 돌아간다.
마누법전 8.314, 316 (힌두교)
너희의 선조를 망친 것은 그들 중 높은 신분에 있는 자가 도둑질을 했을 때 그를 내버려둔 것이며, 그들 중 약한 자가 도둑질을 했을 때 그에게 규정된 처벌을 가한 것이라. 나는 맹세코 나의 딸 파티마가 물건을 훔친다 하더라도 그 손목을 잘라 버리리라.
부카리 및 무슬림 하디스 (이슬람)
도둑이 어떤 물건을 훔치려 한다면 그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서약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서약이 어떤 것을 훔치려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까?
이갈라족의 격언 (아프리카 전통 종교)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
출애굽기 20.16 (기독교)
과오 또는 죄를 저지르고 그것을 무고한 사람에게 던지는 자는 명백한 거짓말과 죄를 저지르는 것이니라.
꾸란 4.112 (이슬람)
어떤 나쁜 짓이든 어떤 잘못이든,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증언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지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고소할 수 있다.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해로운 증언을 하는 자가 나타날 경우에는 소송 중인 두 당사자는 여호와께로 나와 사제들과 그때에 일보는 재판관들에게 재판을 받아야 한다. 재판관들은 잘 조사해 보고 그 증인이 동족에게 거짓 증언을 한 것이 드러나면 그가 그 동족에게 하려고 마음먹었던 대로 그에게 갚아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런 나쁜 짓을 너희 가운데서 송두리째 뿌리 뽑아야 한다. 그리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이런 나쁜 짓을 하는 자가 너희 가운데서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신명기 19.15-20 (기독교)
말씀 선집
한 국가의 형법도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어서 그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원상대로 유지하게 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원리강론, 후편 서론 1.1)
원리원칙과 질서를 떠난 자유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법 중에 제일 최고의 법이 뭐냐? 사랑의 법이요, 심정의 법입니다. 자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법도 없고, 아무 질서도 없는 것은 파탄입니다. 멸망입니다. 국법을 어기면 형무소에 가야 됩니다. ‘미국은 자유의 나라인데 형무소가 왜 있어, 집어치워라’ 해서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벌거벗고 달리거나 무엇을 하거나 전부 자유인데 말입니다. 호모섹스가 있고 별의별 것이 다 있는데 말입니다. 여자고 남자고 마음대로 사창굴에서 창녀 행각하면 어떻습니까? …
그래서 형무소는 하늘나라의 법으로 보면 하늘나라의 형무소가 있어야 되고, 지상의 법으로 보면 지상의 형무소가 있어야 되고, 학교의 법으로 보게 되면 학교의 형무소가 있어야 됩니다. 가정의 법으로 보면 가정의 형무소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112.73-76, 1981.04.01)
만일 어떤 검사가 개인적으로 사람을 죽이게 했다면 천법에 의해서 그 검사가 사형장에 나가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상을 주는 것이요, 죽인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 것입니다.
(93.111, 1977.05.21)
3. 정당하고 자비로운 처벌
종교경전
남을 때려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만일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겨주어 그리 된 것이면 그런 사람이 피신할 곳은 내가 정하여 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악의로 흉계를 꾸며 이웃을 죽였을 경우에는 그가 나의 제단을 붙잡았더라도 끌어내어 죽여야 한다.
출애굽기 21.12-14 (기독교)
왕은 지나친 형벌을 부과하지 않아야 한다.
맛시야 푸라나 220.10 (힌두교)
군자는 세심하게 성찰하고 옥사와 의논하여 죽임을 늦춘다.
역경 61 (유교)
오, 믿는 자들아! 너희에게는 살해에 대한 동형동태 형이 정해졌다. 자유인에게는 자유인, 노예에는 노예, 부인에는 부인으로.17 그러나 그(가해자)에게 (피해자의) 형제로부터 경감 신청이 있을 경우 (가해자는) 공정하게 따르고 성의를 가지고 보상하라. 이것은 너희의 주님으로부터의 경감이며 자비이니라.
꾸란 2.178 (이슬람)
내(이맘 알리)가 죽어야 하리까! 광범위한 보복이 없음을 보라. 칼을 빼들고 배회하지 말며, 나의 경쟁자와 적들을 살해하지 말라. 보라! 오직 한 사람, 나의 살해자만이 살인죄로 처형되리라. 그리고 그 누구도 괴롭힘을 당하거나 피해를 입거나 시달리지 않으리라. 살인을 시도한 자의 처벌은 그로 인한 상처로 내가 죽게 될 때 집행되리니, 그에 대한 처벌도 단칼에 그의 생명을 끊는 것이어야 한다. 그는 죽기 전에 고문을 당해서는 아니 되며, 손발이 잘려서도 아니 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성 사도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의 손발도, 심지어 물어뜯는 개의 다리라도 자르지 말지어다.”
나흐줄 발라가, 편지 47 (시아파 이슬람)
오, 왕이여, 심지어 소름끼치는 죄를 지은 몸 가진 존재들에 대해서도, 당신은 자비로써 그들을 돕겠다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특히 그 죄가 무시무시한 살인자들에 대하여 자비심을 내야하며, 타락한 본성을 지닌 사람들은 자비를 담는 그릇들이며 이로 인하여 그들의 본성이 위대해집니다.
하루 또는 닷새 후에 병약한 죄수들을 풀어주시고, 다른 이들도 결코 풀려나서는 안 된다고 여기지 마소서.
죄수들이 갇혀 있는 동안 그들은 이발, 목욕, 음식, 음료, 약품과 의복에서 안락해야 합니다.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자는 의도에서 쓸모없는 아들을 벌주는 것처럼, 징벌은 자비로써 내려져야 하며, 증오에서 또는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부과되지 않아야 합니다.
일단 분노한 살인자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그들의 처지를 인정한 후에 당신은 그들을 죽이거나 또는 고문을 가하지 않고 유형에 처해야 합니다.
나가르주나, 보의 화환 331-337 (불교)
말씀 선집
죄를 지은 사형수는 나라가 죽입니다. 그렇지만 나라는 죄에 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계를 위해서 갈 수 있다는 공약 밑에서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는 공약 밑에 있기 때문에 그런 논리가 성립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88.298, 1976.10.03)
성자는 천국에 있어서의 국민법과 황족의 법이 되는 궁중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일본의 일반 국민들은 궁중과 관계없이 육법전서 가운데 자기가 속하는 하나의 방향만 지키면 되지만, 왕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왕궁의 법과 육법전서의 내용을 전부 다 적용해서 하나도 어김이 없다고 존경받을 수 있는 센터가 되지 않으면 왕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거 심각한 것입니다.
(306.62-63, 1998.08.27)
앞으로 죄를 지으면 사형선고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열 사람을 죽이고 백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가망성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죽을 자리에 갖다 놓는 것입니다. 저 국경지대 북극 남극에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1년 2년 3년, 한 5년쯤 지나서 비행기로 돌아보고 살아 있으면, 죽을 녀석이 곰의 밥이 되고 흙으로 돌아가야 될 것인데, 그래도 정성들여 가지고 하늘이 용서하게 되면 사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서로서로 모여서 무기형과 같이 되어서 지상에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그 사람들을 얼마든지 공짜로 불러다 쓸 수 있습니다. 무슨 노동판, 나라의 공적인 건설 등을 할 때 어느 누구든지 불러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 대한 공임은 70퍼센트든지 30퍼센트든지 전부 나라에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부 ‘죄수’라는 옷들을 입고 몇 급, 몇 급 이렇게 써서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 동네 집집마다 들어가게 되면 자기가 들어갈 집을 찾아가서 ‘내가 할 일 없습니까?’ 하고 물어볼 것입니다. 절대순종·절대사랑·절대복종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투입한다는 것입니다.
저 나라에 가면 범죄자들은 그냥 그대로 못 들어갑니다. 영계의 소생권, 낙원 등, 전부 영계의 감옥을 거치고 거기서 수련해서 다시 분별된 몸 마음을 검증하는 것입니다. 영계에서는 전부 수정체같이 비춰 볼 수 있어서 깨끗이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 감정해서 그 정도의 기준에 가는 것입니다. 다시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감옥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298.234-236, 1999.01.08)
미국이면 미국의 헌법을 중심삼고 법정에서는 용서를 받을 수 있는데, 우주적인 이 헌법을 중심삼고 보면 용서법이 있을까요? 그렇지만 희생하고 봉사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이럴 때는 동정을 받을 수 있고, 삶의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회개하라는 것입니까? 간단합니다. 그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희생하고 봉사해야 할 도리에 어긋난 모든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105.92, 1979.09.30)
4. 법의 목적
종교경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서 13.8-10
말씀 선집
한 나라를 중심삼고 볼 때 국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선을 지탱하기 위한 목적에서 법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세계와 몸을 두고 보면 양심이라는 것은 교육을 받지 않아도 모든 선한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섯 나라가 있다면 다섯 나라의 주권자들이 서로 다르게 헌법을 만들어서 그것이 선한 것이라고 결론지어 가지고 그것에 따라서 치리한다고 하더라도 양심적인 사람은 그 다섯 나라의 주권자들 가운데 어느 주권자가 더 선한 주권자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가 1등인가를 측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섯 나라들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을 고르고 제일 나쁜 것을 고를 수 있습니다. 양심은 그런 것을 판단할 줄 알기 때문에 그 다섯 나라들 가운데 제일 선한 편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216.306-307, 1991.04.15)
법은 자기를 중심삼고 살겠다는 사람을, 개인을 중심삼고 생활하고, 개인을 중심삼고 국가의 일을 하고, 개인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규제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법은 단체면 단체, 국가면 국가, 다 그것을 중심삼고 하지 못하게 하고, 그 경계선을 못 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법은 자기를 중심삼고 살겠다는 사람들에 대한 제어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법에 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남을 위해 살겠다는 사람은 법에 안 걸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에서 해방 받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세상 법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고 자신 한다면 어떻게 해야 걸리지 않습니까? 나를 위해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가는 데마다 걸립니다. 나는 보다 큰 세계를 위해 살겠다고 할 때 모든 법에서 해방됩니다.
(93.301, 1977.06.12)
만일 세계가 참된 가정들로 채워진다면 그곳에는 변호사도, 검사도, 더 나아가서는 판사도 필요 없는 천도와 천법이 다스리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평화신경, 평화 메시지 3.69, 2006.04.10)
예언자와 메신저
이 세상 왕국이 하나님 왕국의 기준에 못 미치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늘의 의를 대표하게 하고 세속적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예언자와 메신저를 세우신다. 그들은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며 더 높은 사회비전을 선포하기 위해 어떤 위험도 무릅썼던 분이다. 그들은 권력자의 양심을 자극하고, 악의 늪에 빠져 있는 통치자를 과감하게 경고하고, 때때로 나라의 참화를 모면하기 위한 하늘의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무함마드 같은 일부의 선지자들이 그렇게 불리었지만, 예언자들의 역할은 하나님의 계시를 세상에 전달하기 위해 특별히 선택된 종교 창시자들에 제한되지 않는다. 여기 예언자들은 모든 시대 모든 문화의 성현과 의인들을 포함한다. 그들은 오래 전에 처음으로 계시된 진리를 자기 당대의 통치자들에게 감히 상기시키려고 고군분투하였다. 그들은 종종 하늘의 메시지를 현대적 용어로 고쳐 말해야 했다. 우리는 그들의 명단에 소크라테스와 맹자를 포함했다. 우리는 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마르틴 루터, 니치렌,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등등 현대 인물들을 추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 인물 중에서 몇몇만을 언급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문선명 선생님은 이미 예언자로 불려왔으며, 따라서 그의 예언의 일부가 여기에 포함되지 않을 수 없다.
예언자들은 권력자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도전적인 표현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박해를 당했고 조롱을 받았으며 때때로 처형되었다. 나단과 맹자처럼 어떤 의인들은 통치자의 양심을 바로 세우기 위한 진리를 비유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자기 통치자들의 호의를 계속 수용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그는 자신이 위험스러운 노정을 경륜할 때 그것을 내적 투쟁으로 극복하였다.
예언의 속성은 미래를 미리 알리는 능력이다. 예언자들은 단순한 점술가가 아니다. 그들의 재능은 국가적인 일에 대해 권위를 가지고 전달함으로써 그들에게 확신을 준다.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예언자들의 손에는 국가의 명운이 걸려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의 예언은 정확하다.
1. 예언자의 사명
종교경전
모든 공동체에는 예언자가 있노라. 그러므로 그들의 예언자가 오게 되면 그들은 공평하게 심판받을 것이며 그들은 잘못되지 않으리라. 그들이 말하길, 만일 너희가 진실을 말한다면 이 약속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말하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우가 아니면 어떠한 해와 이득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내게는 없노라. 모든 공동체에는 정해진 시간이 있노라. 그들의 시간이 오면 그들은 한순간도 그것을 늦추거나 빨리 할 수 없노라.
꾸란 10.47-49 (이슬람)
내가 받은 여호와의 말씀은 이러하였다.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아! 여호와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하고 내가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마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 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해야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 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그러시고 여호와께서는 손을 내밀어 나의 입에 대시며 이르셨다. “나는 이렇게 나의 말을 너의 입에 담아준다. 보아라! 나는 오늘 세계만방을 너의 손에 맡긴다.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여라.”
예레미야 1.4-10 (기독교)
칠일이 지난 다음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운다. 너는 나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을 듣고 나 대신 그들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너는 못되게 구는 자들은 죽는다는 나의 선언을 그대로 전하여 깨우쳐 주기만 하면 된다. 못되게 구는 자에게 그 그릇된 길을 떠나 살 길을 찾으라고 일러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제 죄로 죽겠지만, 너도 내 앞에서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못되게 구는 자를 일깨워 주었는데도 그가 못된 생각과 그릇된 길을 버리고 돌아서지 않는다면, 그는 제 죄로 죽겠고 너는 죽음을 면할 것이다.”에스겔 3.16-19
말씀 선집
신이 성자나 선지자들을 지상에 보낸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이 바라시는 인격과 생활의 본을 보이면서 신의 참사랑의 뜻을 만민에게 교육하는 것입니다. 특히 위정자나 지도자들에게 천도를 교육하고 실천케 함으로써 마음의 세계와 몸의 세계가 신의 참사랑의 뜻을 중심하고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마치 양심이 원하는 대로 몸이 따르지 않듯이 많은 위정자들이 성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가르침을 받지 않고 경고를 묵살해 왔습니다. 가치관의 혼란, 도덕적 부패, 마약 중독, 테러, 인종차별 등 현대사회의 참상과 병폐를 그 누가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정치가가 공권력에 의해서 이런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특히 어느 때보다도 다원화된 사회, 또 국제적으로 서로 엉켜 있는 이 시대에 정치가들의 판단과 선택에 수반하는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 것이겠습니까? 위정자들이 중요 사안을 결정할 때는 겸허하게 하늘로부터 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천도를 따라 해결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219.110, 1991.08.27)
이렇게 볼 때 이 세계에는 철학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언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민주주의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예언자들이 주장해서 나왔습니까, 철학자들이 주장해서 나왔습니까? 확실히 대답해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분석해야 됩니다. 공산주의가 예언자에 의해서 제창돼 나왔습니까, 철학자에 의해서 제창돼 나왔습니까?「철학자입니다.」 오늘날 세계인들은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주장을 따라가지만, 우리가 그들의 주장을 완전히 믿고 아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철학자가 주장하는 세계는 날아가 버리고, 예언자가 주장하는 세계가 온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면 철학자는 어디에 있느냐? 대학에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언자는 어디에 있느냐? 종교에 있습니다. 그러면 예언자는 어디에 있느냐? 종교 믿는 사람 가운데에 있지 그 외에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좋아합니까, 학교를 좋아합니까? ‘학교입니다.’ 이런 망할 자식들! 그래 학교에 희망이 있습니까, 종교에 희망이 있습니까? 어디에 희망이 있습니까?「종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계의 유명한 하버드니, 케임브리지니, 옥스퍼드니 하는 대학들보다도 오히려 이름 없는 종교에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라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학 박사가 많습니까, 무식한 사람이 많습니까? ‘무식한 사람이 많습니다.’ … 그것을 볼 때, 일반 사람이 보게 될 때 공부 많이 한 사람을 믿겠습니까, 공부도 안 한 무식한 사람을 믿겠습니까? ‘공부한 사람.’ 그렇게 생각한다면 세상은 그릇된 방향으로 가게 마련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79.334, 1975.09.28)
교회가 가정의 갈 길, 씨족의 갈 길, 나라의 갈 길을 바르게 교육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과거의 모든 예언자들은 그 나라의 책임자를, 군왕이 잘못하면 군왕을 전부 다 끌고 갑니다. 항소해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라는 모체를 중심삼아 가지고 미래의 가정과 미래의 씨족과 미래의 세계의 백성으로, 시민으로 만들자 이겁니다.
(106.35, 1979.11.11)
2. 권력자에게 진실 말하기
종교경전
가장 훌륭한 성전(聖戰)은 부정한 통치자 앞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
티르미디 하디스 (이슬람)
여호와께서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다. 나단은 다윗을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어떤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자였고 한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자에게는 양도 소도 매우 많았지만, 가난한 이에게는 품삯으로 얻어 기르는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 새끼 양을 제 자식들과 함께 키우며, 한 밥그릇에서 같이 먹이고 같은 잔으로 마시고 잘 때는 친딸이나 다를 바 없이 품에 안고 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하나 찾아왔습니다. 주인은 손님을 대접하는데 자기의 소나 양은 잡기가 아까워서, 그 가난한 집 새끼 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을 했습니다.”
다윗은 몹시 괘씸한 생각이 들어 나단에게 소리쳤다. “저런 죽일 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짓을 한 놈을 그냥 둘 수는 없다. 그 양 한 마리를 네 배로 갚게 하리라.”
그때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사울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나는 네 상전의 딸과 아내들까지 네 품에 안겨주었다. 나는 온 이스라엘과 유다의 딸들까지 너에게 주었다. 그래도 모자란다면 어떤 여자든지 더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나를 얕보며 내 눈에 거슬리는 짓을 했느냐? 너는 헷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 죽였다. 암몬 군의 칼을 빌려 그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다. 네가 이렇게 나를 얕보고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으니, 너의 집안에는 칼부림이 가실 날이 없으리라.’”
사무엘하 12.1-10 (기독교)
맹자가 평륙(平陸)에 가서 그 대부에게 일러 말하길 “그대의 창을 잡은 병사가 하루에 세 번 대오를 잃어버리면 버리겠는가, 아니면 버리지 아니하겠는가?” 하자, 대답하길 “세 번까지 기다리지 않겠다.”고 하였다.
맹자가 말하길 “그렇다면 그대가 대오를 잃음이 또한 많다. 흉년에 그대의 백성 중에 노인과 병든 이들은 개천과 골짜기에서 전전하고, 장성한 자들은 흩어져 사방으로 가는 자가 몇 천 명이나 되는가?”라고 하자, 그가 “이것은 거심(距心)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맹자가 말하길 “지금에 남의 소와 양을 받아다가 그를 위해 맡아 기르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위해 목장과 꼴을 구할 것이니, 목장과 꼴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면 그 사람에게 되돌려 보내겠는가 아니면 또한 서서 그 죽어가는 것을 보겠는가?”라고 하자, 그가 말하길 “이는 나[距心]의 죄이다”라고 하였다.
맹자 II. B.4 (유교)
베델의 사제 아마지야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사람을 보내 보고하였다. “아모스라는 자가 우리 이스라엘 한가운데 들어와 임금님께 반란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그자는 이 나라를 망칠 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칼에 맞아 돌아가시겠고, 이스라엘 백성은 사로잡혀 포로의 신세가 되어 이 땅을 떠나리라고 떠들어댑니다.” 그러고 나서 아마지야는 아모스에게 말하였다. “이 선견자야, 당장 여기를 떠나 유대 나라로 사라져라. 거기 가서나 예언자 노릇을 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다시는 하나님을 팔아 베델에서 입을 열지 마라. 여기는 왕의 성소요 왕실 성전이다.”
아모스가 아마지야에게 대답했다. “나는 본시 예언자가 아니다. 예언자의 무리에 어울린 적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목자요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다. 나는 양떼를 몰고 다니다가 여호와께 잡힌 사람이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가서 말을 전하라고 하시는 여호와의 분부를 받고 왔을 뿐이다. 그러니 너는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22 너는 나더러 하나님을 팔아 너희 이스라엘 백성과 이사악의 가문을 치지 말라고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아내는 바로 이 성읍에서 몸을 팔고 네 아들딸은 칼에 맞아 쓰러지며 네 농토는 남이 측량하여 나눠 가지고 너는 사로잡혀간 그 더러운 땅에서 죽겠고 이스라엘 백성은 사로잡혀 고국을 등지고 떠나가게 되리라.’”
아모스 7.10-17 (유대교)
너희 이전의 사람들인 노아, 아드, 사무드의 백성들과 그 이후의 사람들에 대한 소식이 너희에게 도착하지 않았느냐?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그들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들의 예언자들은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그들에게 왔노라.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손을 입 쪽으로 가져가면서 말하길, 우리는 너희에게 보내진 것을 믿지 않으며 너희가 우리를 초대한 것에 대해 심한 의혹이 있소.
그들의 예언자들이 말하길,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너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약속된 기간까지 너희를 유예시켜 주시면서 너희를 부르고 계시노라. 그들이 말하길, 너희는 우리와 같은 인간일 뿐이오. 너희는 우리의 조상들이 숭배했던 것으로부터 우리가 돌아서기를 원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분명한 권력(증거)을 가져오시오.
그들의 예언자들이 그들에게 말하길, 우리는 너희처럼 단지 인간일 뿐이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들 중에서 원하시는 자에게 은총을 베푸시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허락 없이 우리가 너희에게 권력(증거)을 줄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없느니라. 믿는 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하나님에게 맡겨야 하느니라.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믿음을 하나님에게 맡기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너희가 주는 박해를 인내할 것이니라. 그리고 하나님에게 믿음을 맡겨야 하느니라.
믿지 않는 자들이 그들의 예언자들에게 말하길, 우리가 너희를 우리 땅에서 추방하거나 또는 너희가 우리의 종교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자 그들의 주님께서 그들에게 계시를 내리셨노라. 실로 우리(하나님)가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파멸시키리라. 그리고 우리(하나님)는 너희를 그들 이후에 그 땅에서 살게 하리라. 이것은 나의 권위를 두려워하고 나의 경고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함이니라. 그리고 그들(예언자들)은 도움을 청했으며 모든 완고한 자들과 거만한 자들이 멸하여졌노라.23
꾸란 14.9-15 (이슬람)
의롭지 못하고 부적절한 짓을 하는 왕은 대개 백성들로부터 칭송되기 쉽도다. 왜냐하면 그가 무엇을 용서할지 또는 무엇을 용서하지 않을지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네.
그러므로 유용한 것 또는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알기 어렵도다.
만일 유용하지만 즐겁지 못한 말들을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 어렵다면, 한 수행승으로서 나는 위대한 땅의 군주이신 왕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에 대한 나의 애정 때문에 그리고 일체중생에 대한 나의 자비를 통하여, 나는 유용하지만 쓴 소리를 주저 없이 당신에게 말합니다.
오 흔들림 없는 이여,
만일 분노 없이 진언이 말해진다면, 그는 그 진언을 마치 목욕에 적합한 물처럼, 들을 만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지금이나 나중에도 유용한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아시고, 그것에 의거하여 행하소서. 그리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이롭게 하소서.
나가르주나, 보의 화환 301-306 (불교)
말씀 선집
앞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종교인들이 득세할 때가 올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땅 위에 선포하고 인류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할 예언자입니다.
(참가정과 세계평화, p.470, 2000.01.22)
남북왕조분립시대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성전이상에 배치되는 입장에 서게 될 때마다, 하나님은 계속 4대선지와 12소선지를 보내시어 그들을 권고하여 내적 쇄신운동을 일으키셨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들의 권고에도 회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애급, 갈대아, 시리아,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등 이방인들에게 부쳐 외적 확청의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이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동서왕조분립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교황청이 부패하매 토마스 아퀴나스, 성 프란체스코 등 수도원의 인물들이 그들을 권고하여 내적인 쇄신운동을 일으켰었다. 그러나 그들도 회개하지 않고 더욱 타락과 부패에 흘렀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인들에게 부쳐 외적인 확청의 섭리를 하셨던 것이니, 이것이 곧 십자군전쟁이었다.
(원리강론, 섭리적 동시성으로 본 복귀섭리시대와 복귀섭리연장시대 4.3)
하나님주의는 과거에도 변치 않고 현재에도 변치 않고 미래에도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예언자를 통해서 나라의 주권자들이 잘못하게 되면 공격하게 했습니다.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충성을 다해 가지고 그 말을 생명시하고, 그 말로 치리하는 주권자가 있는 나라는 번성했습니다.
또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시대가 되면 예언자가 나와서 새로운 시대를 각성하도록 하늘의 사자를 중심삼고 그 시대의 주권자들에게 충고하는 것입니다. 그 충고를 듣고 따라가면 그 시대적 국가는 흥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중세까지는 그랬지만, 중세 이후에는 정교분립이다, 예언자든 무엇이든 정치와는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망할 징조였습니다. 하나님과 예언자에게서 갈라진 것입니다. 이때부터 사탄이 비수를 가는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레버런 문이 미국이면 미국의 정치문제, 카터 정부면 카터 정부에 대해 비판을 합니다. ‘이것은 틀렸다’ 하면서 공격을 합니다. 내가 미국의 닉슨과 손잡은 것은 닉슨을 내가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미국 국민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닉슨과 손잡은 것입니다. 닉슨이 내 말을 들었으면 저렇게 안 됐을 것입니다. 미국이 이렇게 안 됐을 것입니다.
또 월남이 저렇게 안 됐을 것입니다. 내가 월남이 긴급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티우 대통령을 만나 가지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이러다간 오래지 않아 망한다고 강력히 충고한 것입니다. 1974년에 만나 이제라도 강력한 체제를 가지고 전체 국민이 희생을 각오하고 총공격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미국을 믿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작전, 하나님의 역사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변치 않습니다. 예언자를 시켜 주권자를 교육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도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내가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를 바로 지도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레버런 문의 사상입니다.
내가 미국에 와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밥 먹기 위해서입니까? 욕먹고 싶어서 이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레버런 문은 그렇게 어리석은 사나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위정자들이 말을 안 듣더라도 앞으로 이 나라를 계승할 젊은이들이 레버런 문의 말을 들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모여든 것입니다.
(93.83-84, 1977.05.15)
3. 예언자는 반대와 박해를 감내해야
종교 경전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저버리는 것을 보고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생각하여 가슴에 불이 붙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는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고 찾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9.14
“무슨 소리냐? 그런 말은 지껄이지도 마라”고 한다만 이 치욕이 너희를 떠날 성싶으냐? “야곱 가문이 저주를 받다니, 여호와께서 참을성이 없으시어 그런 일을 하신단 말이냐?” 하고 말한다만 너희가 올바로 살지 못했는데도 좋은 말씀을 내리시겠느냐?
너희는 내 백성을 원수같이 다루었다. 평화롭게 사는 백성을 덮치고 마음 놓고 지나가는 백성을 전쟁 포로인 양 옷을 벗겼다. 내 백성 중 부녀자를 보금자리에서 몰아내었다. 그 어린아들에게 패물을 달아주었더니 너희는 그것마저 빼앗아갔다. 어서 떠나가라.
여기는 너희 안식처가 아니다. 이미 더러워진 이 땅, 불쌍하게도 망할 수밖에 없다. “내 입에선 포도주와 소주가 나온다.” 신들려서 이런 흰소리나 하며 이 백성의 예언자들은 돌아다닌다.
미가 2.6-11 (유대교)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도벳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는 여호와의 집 마당에 돌아와 버티고 서서 온 백성에게 이렇게 선언하였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고집이 세어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 이제 이미 말하였던 온갖 재앙을 이 도읍과 여기 딸린 모든 성읍에 내리리라.”
당시 여호와의 성전 총감독은 임멜의 아들 바스훌 사제였는데, 예레미야가 전하는 이 말씀이 그의 귀에 들어갔다. 바스훌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차꼬를 채워 여호와의 성전 위쪽에 있는 베냐민 대문에 가두어두었다.
“여호와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습니다. 서로 때려잡는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며 주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거립니다. ‘저자야말로 사면초가다. 고발하자, 고발하자.’ 저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도 모두 제가 망하기를 바라 모의합니다. ‘걸어 넘어뜨리고 잡아 족치자. 앙갚음을 하자.’ 그러나 제 곁에는 힘센 장사처럼 여호와께서 계시기에 저를 박해하다가는 당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것입니다. 뜻을 이루지 못하여 부끄러움으로 머리도 들지 못하고 길이길이 잊지 못할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사람의 뱃속을 아시고 심장을 꿰뚫어 보시는 공정한 감시자여, 저들을 고소하는 이유를 밝히 말씀드렸사오니, 이제 이 백성에게 제 원수를 갚아주십시오. 이 눈으로 그것을 보아야겠습니다.”
예레미야 19.14-15, 20.1-2, 20.7-12 (기독교)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히브리서 11.36-38 (기독교)
말씀 선집
예언자들은 전부 다 비정상적인 사람들입니다. 뜻을 찾아 나가는, 아벨의 길을 가는 사람은 비정상적인 예언가들입니다. 비정상적인 놀음을 하는 그런 예언가들이 전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나, 신약성경을 보나 예언가는 전부 다 비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손가락질 받고, 반대 받고, 핍박받고 그러는 것입니다.
(89.129, 1976.11.01)
정의의, 진리 체제에 속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완전히 천운이 보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반대하게 되면 천운이 쳐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국 같은 나라, 아무리 소련 같은 나라라도 내가 진짜 하나님을 중심삼고 상대돼 가지고 완전히 일체권 내에 들어갈 때에는, 여기에 반대 되면 소련을 쳐버리고 미국을 쳐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알았기 때문에 문총재는 대담한 것입니다.
(214.194, 1991.02.02)
지금까지 하나님의 섭리역사 가운데서 예언자들이 주권 앞에 종이 되었습니다. 생사지권을 넘어서 공격당하고 얼마나 희생당해 왔습니까? 그러한 전체 희생의 열매로서 대표적으로 아벨적 왕자의 자리에 선 것이 재림주입니다. 참부모가 졸장부가 돼서는 안 됩니다.
몇 천 년, 몇 세기를 지나오면서 어려울 적마다 예언자들이 얼마나 목이 잘리고 피를 흘렸겠나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그 열매를 거두어야 할 선생님이 세상이 무서워서 할 말을 못 하겠습니까? 감옥을 여섯 번이나 갔다 왔습니다. 언제나 일선에 서는 것입니다.
(343.263, 2001.02.17)
아버지께서 원수의 세계를 대하던 심정을 느끼면서 슬픔의 자리를 저는 체험해 나왔습니다. 양지에서 살아 나오시지 못한 아버지의 슬픔을, 음지에서 역사하신 아버지의 사정을 저는 알았습니다. 오늘날까지 그런 생활 속에서 어느 한때 아버지를 반박하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자식이 될까봐 초조해하면서 나왔습니다. 또한 당신께서도 초조한 입장에서 그런 저를 찾아오신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제가 서러운 이상 더 서럽고, 제가 괴로운 이상 더 괴로운 자리에서 당신의 책임을 느끼면서 갈 길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몰리고 쫓기는 자리, 쇠고랑이 양손을 죄는 영어 살이, 노예의 신세, 종의 신세를 거치더라도 절망하거나 아버지께 낙심을 가져다 드리지 않겠다고 결의했습니다. 그렇게 결의한 그 시간부터 오늘날까지 죽지 않고 아버지 앞에 남게 해주신 은사를 감사드립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세우시기 위해, 아버지,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제가 가야 할 길을 위해서 얼마나 희생하셨습니까?
아버지께서 그 이상 일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는 자다가 눈을 떠도 죄인인 양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빌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밥을 먹다가도 숟가락을 멈추고 눈물로써 아버지께 과거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사옵고, 피로한 몸을 가누지 못해 자리에 누울 적마다 당신을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불쌍한 분은 아버지입니다. 아무리 통일교회 문 아무개가 불쌍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30.270, 1970.03.29)
4. 예언자의 미래 비전 제시
종교 경전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속을 털어놓지 않으시고는 주 여호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
아모스 3.7 (유대교)
여호와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가 받은 말을 누구나 알아보도록 판에 새겨두어라. 네가 본 일은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 끝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쉬 오지 않더라도 기다려라. 기어이 오고야 만다.”
하박국 2.2-3 (유대교)
오, 주여! 당신의 권능은
모든 다른 힘보다 위대합니다.
당신의 영도 아래 있는 우리는
어떤 두려움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예언자적 힘을 주시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 분은 바로 당신입니다.
딩카족의 기도 (아프리카 전통 종교)
지극히 정성된 사람은 앞날의 일을 먼저 알 수 있다. 국가나 집안이 장차 흥성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 국가나 집안이 장차 망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흉한 징조가 있다. 이러한 징조들은 점복이나 사람들 몸의 동요로도 나타난다. 재난이나 복이 장차 이르는 때는 그것은 미리 알 수 있는데, 좋은 것이 이르는 것도 반드시 먼저 알며 좋지 않은 것이 이르는 것도 반드시 먼저 안다. 그러므로 지극히 정성됨은 신(神)처럼 신통하다.
중용 24 (유교)
시체로 가득 찬 이 도성에 앉아 나나크가 주를 찬양하며 이와 같은 가르침을 펴는도다. 일체 만유를 생겨나게 했으며 지극한 기쁨으로 이를 행하였던 그가 홀로 앉아 이를 굽어보고 있도다.
거룩한 자가 주요, 그의 정의는 거룩하여라. 그가 내리는 판결은 참되어라. 의복이 갈가리 찢어질 때, 인도가 내 말을 기억하리라. ‘78년에 그들이 오고, ‘97년에 그들이 떠나가느리라.
또 다른 영웅이 문득 일어나리라. 나나크가 진리의 말씀을 전하도다. 그가 진리를 설하도다. 시대가 진리를 부르는 도다.24
아디 그란트, 텔랑, M.1, p. 722f. (시크교)
말씀 선집
선생님이 50년 전에 꿈같은 얘기를 한 것이, 세계가 하루 생활권에 들어간다고 얘기했던 것인데, 그거 미쳤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다 미쳐 떨어지게 됐습니다. 문 총재는 50년 전 생애를 통해 세계적인 모든 흥망성쇠를 예언했다는 예언자의 대표자, 교육자의 대표자, 사랑하는 부모의 대표자, 주인의 대표 자리에 올라오고 있습니다.
(397.154, 2002.11.17)
레버런 문도 수만 수천 사람들을 대했기 때문에 척 보면 압니다. 사람 볼 줄 알기 때문에 미국이 어떻고, 아시아가 어떻고, 세계가 어떻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보다도 미래에 필요한 것을 하다 보니 여러분들이 따라오기가 힘들고 믿기가 어렵고 행동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치가 높아집니다. 그래서 한국이, 레버런 문을 전부 다 반대하던 한국이 이제 와서야 달라졌습니다.
(103.111, 1979.02.11)
1954년에 선생님은 공산주의가 73년 이상을 못 간다고 가르쳐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모슬렘 세계에 대해서…. 공산주의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끝난 다음엔 모슬렘을 포함한 종교권이 문제가 됩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싸움을 누가 말리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벌써 50년 전에 내가 말씀한 것입니다.
(225.19-20, 1992.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