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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집 원고>
대팻밥
글 德田
동지가 지나면서 양의 기운이 점점 온 누리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동지부터 이듬해 하지까지 낮이 노루꼬리처럼 길어지면서 앞산의 그림자 또한 키다리가 되어 내 발목을 어루만진다. 낮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활동시간이 또한 많아진다. 낮이 길어지니 예전 보릿고개처럼 배고픔이 밀려와 봄의 들판을 유영하며 얼마나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바빴으리.
새들이 알을 낳는 봄철에 집짓기가 한창이다.
고향집을 그려본다. 처마를 마주 할 만큼 지척인 이웃에 목수 내외가 살고 있었다. 예전에는 끈 떨어진 호박처럼 어디 정을 붙이지 못하고 동가식서가숙하던 나그네가 우리 마을에 닻을 내린 연유는 무엇일까? 아저씨는 북에서 도편수는 못되어도 대목(梓匠)으로 배를 두드리며 고복경양(鼓腹擎壤)하며 지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시지만, 그 흰소리를 누가 알아준단 말인가! 어머니를 누님누님하며 허물없이 가까이 지내시던 목수 아저씨가 내 생애 뒤늦게 조명된다.
봄갈이가 시작되던 어느 날이었다. 수양누님 결연식을 한다고 떡을 빼오며 법석을 떨더니 그날부터 아저씨 조카 사이가 되었다. 내 인성에도 담뿍 영향이 끼친 것은 분명한데, 당시는 왜 그렇게 싫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저씨는 능청맞다. 지천명이 넘으셨는데도 수시로 들락이신다. 새벽 눈이 뜨자마자 첫 출근이시고, 식사 때도 아랑곳 하지 않고 거침없이 드나든다. 이슥한 밤중에도 생뚱맞게 찾아와 자는 식구를 깨워놔, 식구 중 특히 누나들이 눈살을 찌푸리곤 했지만 어머님은 한결 같으셨다.
뒤늦게 아들 하나 딸 하나 건진 아저씨는 그래서 더욱 외로우셨나보다. 한여름 소나기 비바람이 몰아칠 때면 허겁지겁 달려와 내 일처럼 비설거지를 해주신다. 고추 널던 멍석을 둘둘 말아 뒤란 골목에 세우고 냇가에 황동구라지를 달려가 끌고 오신다.
많은 식구라 늘 음식이 풍족하지 못하지만 그럴 때도 아저씨는 눈치 없이 닁큼 봉당에 오른다. 온 식구 눈총이 얼마나 따가울까? 결국 누님인 어머니 몫의 범벅을 축내고서야 일어선다. 식구들에 밉상이었지만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고향 떠나 오죽 외로움에 허기졌으면 누추한 집을 자주 찾느냐고 하시며 피난살이를 종종 회억하시곤 했다.
우리 집 헛간을 새로 지을 때였다. 대패로 기둥을 다듬는데 평소 보던 아저씨와 달라 보였다. 목수 가방에 전문 도구가 즐비하다. 끌, 망치, 톱, 곡척(曲尺), 먹줄을 치는 먹통, 접자, 주걱칼, 기역자 쇠자, 나무망치 등 낮선 도구들에 놀랐다. 아저씨는 늘 콧노래를 부르며 오른쪽 귀엔 궐련 절반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옛 속담에 아래로 먹고 위로 싸는 게 뭐냐는 수수께끼가 있다. 정답은 대패다. 대팻날을 망치로 조정하여 깎을 정도에 따라 고정시키고, 대팻날을 뺄 때도 대패 머리를 툭툭 치면 넙죽한 대패 날이 이내 허물어진다.
아지랑이 아롱거리는 긴긴 봄날, 집 짓는 아저씨 곁에서 논다. 크고 작은 나무토막들이 즐비해 훌륭한 블록 장난감이다. 아저씨는 대패질을 하다가 하얀 속살이 나올 때는 언제나 나를 불러 귀한 보물처럼 챙겨 준다. 우수한 목수는 대팻밥을 거의 내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필경 아저씨는 내게 선물하려고 좋은 대팻밥을 자꾸 깎으셨나보다.
종이가 귀한 시절, 지금도 도시 음식점엘 가야 대패 삼겹살이 있다. 쉴 참이면 아저씨는 곁에 와서 연필처럼 나무 꼬챙이를 만들어 먹물에 찍어 손수 대팻밥에 그림을 그려준다. 사람 얼굴, 새, 박수근 그림 같은 나무들을 그려 주시던 아저씨-.
행랑채를 짓던 내내 나는 대팻밥을 실컷 가지고 놀았다. 미취학이라 처음 그린다. 대팻밥을 주섬주섬 주워 그림을 종일 그려도 재미있다. 대나무를 연필처럼 깎아 아저씨 먹통에 먹물을 자주 찍어 그리다가 옷에 묻어 어머니께 혼쭐도 났지만, 먹물로 그린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미농지처럼 얇은 대팻밥-,지금도 길을 가다가 대패로 잘 다듬어진 목재를 보면 언제나 먹물로 그리던 기억이 어김없이 떠오른다. 인형극에서 줄로 조정하는 사람 팔다리처럼 그리던 아저씨 보다 내 그림이 더 잘 그렸다고 웃어대던 식구들 때문에 우쭐대던 유년기 시절이었다.
대팻밥에 그림을 그리던 고향을 어제 다녀왔다. 사관(四關)도 잘 놓으시고 얘기책도 잘 읽으시던 아저씨네 집터는 고향 장조카의 농기구 창고로 변신하고, 디룽디룽 매달려있던 아저씨 전유물인 망태기도 간 곳이 없다.
인생 2막 -. 오늘도 한손에는 문학과 다른 한손에는 그림을 그리며 살아간다. 지난해는 틈틈이 준비한 80여점을 KBS특별 전시실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두 마리의 소로 쟁기질하는 농부처럼 겨리로 살찌운다. 유년기를 다시 돌아보고 대팻밥에 그림을 그리게 해준 천상의 아저씨야말로 재능을 키워준 은인임을 뒤늦게 깨닫고 감사드린다.(끝)
이 또한 지나가리라
글 德田 이응철(수필가)
한해로 접어들면서 못다한 꿈들을 이루기 위해 저마다 성취의 꿈을 한 삽 힘차게 퍼 올리던 2월! 바이러스 코로나19의 영향은 실로 놀랍다.
WHO가 뒤늦은 3월 팬데믹(pendemic) 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했다. 1929년 세계공황에 버금간다니 놀랄 뿐이다. 하계 올림픽이 연장되고 영국총리가 양성으로 죽음직전에서 살아나고 이웃나라 일본은 개인적인 추적조사나 전체 조사를 생략하며 소극적으로 일관하더니 급기야 곪아 터져 아우성이다.
요즘은 사회적인 존재와 자신의 존재가 무(無)처럼 느껴진다. 개인의 면역력과 대한민국의집단 회복력을 높여 사회를 보호해야 하는데 참으로 지난하다.
거산巨山의 가택연금된 느낌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안에 묶여 뒤척이다가 겨우 인근 재래시장이나 새벽시장 애막골을 한번 돌아오는 게 전부다. 마스크도 습관이 안되어 썼다벗었다를 하면서 다녀보면 매기조차 바닥이다.
차가 있으니 메모지를 보고 시장을 본다. 드라이브 스루-. 시금치를 사고 보통 계란을 산다. 단골주인은 반색을 하지만 군상들은 소극적이다. 구입메모지에 따라 가급적 빠른 시간에 구입해 서둘러 귀가하는 게 상책이다. 많은 종업원이 들락이던 제과점엔 다문화 아줌마 혼자 핵이 터진 자리 쑥처럼 우두커니 자리 지키기를 한다.
세월 빼고 모든 것이 멈추었다. 산업이 멈추고, 사회가 멈추었으며 우리 일상 또한 멈춤이었다. 행사 모임, 예술가 전시, 고전반, 실버교육장 모두 그대로 멈춰라 이다.
어디 그뿐인가? 미풍양속으로 세세연년 전해오던 모든 애경지사도 단절이다. 웃고 떠들며 인정을 나누던 관습도 일시적이라지만 엿가락처럼 끊어졌다. 멈추었다가 오픈된 새벽시장도 예전 같지 않다. 푸성귀, 장에 박아놓은 무장아찌, 파라다이스라고 선전하는 어느 농원의 주인장, 그리고 김밥재료를 갖추고 찾아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내외 표정 또한 초점을 잃고 있다. 무력(無力)의 힘이다.
멈춘 내 마음을 흔들어 깨운다. 스스로를 위로한다. 잠시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갑자기 느랏재를 오르고 싶다. 대룡이 뿜어낸 기(氣)라도 흠뻑 취하고 싶다. 오늘따라 강풍 예보가 훼방을 하지만, 무의미한 가로막기라 용기를 추스른다. 지친 마음에 의식을 일깨운다. 아내의 쓴 소리도 귀박이다.
대룡산 느랏재를 넘어 절반 이상 내려가면 이정표가 반긴다. 곡우가 지났건만 산은 아직 인색하다. 물론 입하인 여름의 절기부터 잎의 계절이라 그때쯤 온통 국토를 녹음방초로 만들겠지만 -. 골마다 찬바람이 송백(松柏)을 마구 휘몰아친다.
5년 전 가을 이곳 오지마을과의 첫 만남이었다. 참다래 덩굴이 반기던 이곳엔 바람소리만 거세다. 쓰러진 거목을 껴안고 있는 참다래 싹들이 새끼돼지처럼 등걸에 붙어 정겹다.
사실 2월만 해도 이 전염병은 금방 지나가리라 믿었다. 마치 여우비처럼 비를 뿌리다가 해가 나 사람들이 나오면 다시 비를 뿌리며 삶을 제멋대로 헝클어 놓지 않았던가!
평촌리-. 화전민이 살던 곳, 집 서너 채가 전부다. 집안에만 틀어박혀 다리마저 후들거린다.
고들빼기가 해맑게 길섶에서 반긴다. 앞산은 화전했던 곳으로 송백(松柏)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울울창창이다. 며느리는 소가 되고 시아버지는 쟁기를 끌며 가파른 화전 밭을 일구며 근근이 살아가던 화전민 마을, 새참을 먹으며 어렵게 아들 하나를 키우던 청상과부의 삶을 깨 털던 할머니가 몇 년 전 실감나게 전해주던 곳이다. 한국동란으로 백여 호의 마을이 초토화된 얘기는 점점 설득력이 적다.
사냥을 하려던 취나물은 아직 여리다. 곡우에 비가 내려서인지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가 힘차다. 소멸 되어가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불식시키고 모처럼 나들이를 한 날, 예전 가을에 왔을 때 저 아래 돌담집서 깨 털며 손짓하던 할머님마저 없다.
-年年歲歲花相似 연년세세 화상사
-歲歲年年人不同 세세연년 인부동
해마다 피는 꽃은 비슷하건만 사람의 얼굴은 같지 않더란 싯귀절이 떠오른다.
인생무상에 설상가상으로 인간의 발목을 옥죄는 전염병이 좀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잔인하다. 천만다행으로 상노인처럼 쇠잔한 몸에 면역주사라도 한차례 맞은 오늘, 고봉준령 위로 햇솜 같은 구름장이 스친다, 남정네는 땔나무를 하고, 여편네는 동이로 물을 채우며 살던 예전 화전마을 그때가 부럽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얼마나 강변했는지 부비동염인지 이젠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끝나는 느랏재 터널, 바이러스 터널은 언제 끝나려나!(끝)
첨부>
0,1997. 수필과 비평(27호), 96.강원일보 신춘문예 동화입상
0.저서 수필집 어머니의 빈손 外 3권, 시화 개인전 1회
0.수상 강원수필문학상,춘천시민상, 백교문학상
0. 교직 42년, 제 14대 강원수필문학회장,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위원
0.주소-24300 춘천시 후석로 326번길 13, 202-1106,
0.이메일- lecheol@ hanmail.net 핸드폰 010-8798-2175
<번역원고>
모 심는 날
글 德田 이응철(수필가)
엊그제 고향 논배미를 산책했다. 한창 모내기철인데 조용하다. 비가 오지 않아 하늘을 원망하며 어린 모종을 한 폭이라도 꽂으려는 타들어 가던 농심인 60년대가 떠오른다.
고향이 그리워 논둑에 선다. 모든 곡식의 마지노선이 절기 망종이다. 비가 인색하던 예전 농부들은 모심기를 못한다. 천수답에 의존해 하늘만 바라보며 웃자란 모를 보며 새벽 밤중으로 하늘만 보며 단비를 기다린다. 지금이야 이양기로 모를 심지만 예전에 모심는 날은 품앗이로 온 동네가 경사였다. 예전 만이양모를 내기위해 중학시절 조퇴까지 맞고 와서 못줄을 잡던 구남매의 젖줄 황새배미를 찾아 간다.
어머니는 농사철이 되면 더욱 여위어 가셨다. 모내기철이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품앗이로 남의 모를 심기 위해 일찍 출근(?)하신다. 어쩌다 일요일이면 오늘은 동구 밖 홍씨네 모를 심을 테니 그 곳에 와서 놀다가 밥 먹으러 오라고 신신당부하신다.
부드러운 갈을 꺾어 논에 펴고 써레질을 한다. 전날 논을 평평하게 헷살미를 칠 때면 제비들은 진흙을 물어 집짓기에 한창이다. 살구골 논둑에 서니 예전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모를 심으며 노동요도 부르고 춤도 추니 그야말로 온 동네 축제였다. 소리소리 지르며 한 줄로 서서 모를 꽂고 못줄을 넘긴다. 주인은 사전에 삼태기에 무엇을 훌훌 뿌리며 토양에 힘을 얹는다.
하루 세끼를 먹는다. 오전 새참, 점심, 오후 새참을 먹으며 넓은 평수가 푸르게 변한다.모를 심을 때면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저마다 시집 간 애들 사는 얘기가 흥미롭다. 겨릿소 두 마리가 써레를 끌고 이랴-마랴 하며 모 심을 곳을 종횡무진 한다.
문전옥답이 아닌 경우 밥을 해서 동네 아낙들이 머리에 이고 나온다. 온 동네 남녀가 모두 그 집에 일을 도우니 주인은 우쭐해진다. 일꾼들은 한번 모를 꽂고 허리를 편다. 선창을 하면 소리도 따라 하면서 배가 출출하면 새참(제누리)이 오나하고 산모롱이를 보고 또 본다.
농사는 밥심이다. 큰 함지에 광주리에 담아 이고 아낙네들이 한 줄로 서서 논으로 나올 때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하던 일꾼들-. 모심는 날 반찬이 화려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반찬이 꽁치조림과 빨갛게 버무린 오징어 마른 반찬이다. 예전 모 심을 시기 바닷가엔 꽁치가 만선이었나보다.
살찐 꽁치조림이 눈에 선하다. 정강이에 개흙도 터는 둥 마는 둥 논둑에 둘러앉아 줄레줄레 먹는다. 모밥이 참 맛있다. 조미료 없던 시절, 널브러진 양념으로 마음껏 손맛을 더하던 어머니 반찬 솜씨는 동네에서도 일품이셨다.
어머니가 일러준 모 심는 근방에서 논다. 지천이던 개구리를 잡고 찔레순도 꺾으며 호시탐탐 식사 때를 기다린다. 악식만 먹다가 기름진 모밥을 챙기려는 어머님의 자식사랑이 눈물겹다. 빙 둘러앉을 때면 어머니 곁에 가서 맛있는 반찬과 생선으로 배를 채우고 돌아오곤 했다. 우리 어머니는 바느질도 잘 하시지만, 농주 담는 솜씨도 동네서 호가 나셨다. 맷돌에 콩을 갈아 벌겋게 두부찌개며, 김치는 일꾼들은 유별나게 입맛을 다시던 찬(饌)이다.
김유정작가는 개동부터 다섯 끼를 먹는다고 썼다. 조반, 점심 세침(겨누리), 점심, 저녁겨누리, 저녁, 오월의 산골짜기에 보면 쇠기 전 부랴사랴 갈 꺾는 글도 나온다. 논둑에서 밥을 먹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부른다. 이 논 저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와서 새참을 함께 든다. 아름다운 인정이 꽃 피던 예전 농촌이다. 지금은 어떤가?
며칠 전 다녀온 살구골 논둑이 온통 새빨갛다. 어찌나 제초제를 무더기로 살포했던지 논둑이 숨도 못 쉬고 신음하고 있다. 어디에 하소연해야 할까! 소리없이 지나가는 모 심는 절기 밥 차리고 송화 따던 아낙네가 산에서 손짓하는 것만 같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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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97. 수필과 비평(27호), 96.강원일보 신춘문예 동화입상
0.저서 수필집 어머니의 빈손 外 3권, 시화 개인전 1회
0.수상 강원수필문학상,춘천시민상, 백교문학상
0. 교직 42년, 제 14대 강원수필문학회장,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위원
0.주소-24300 춘천시 후석로 326번길 13, 202-1106,
0.이메일- lecheol@ hanmail.net 핸드폰 010-8798-2175
<신작특집 원고>
석반(夕飯)
글 德田 이응철(수필가)
-쌀을 골고루 익히기 위해 소량의 육수를 반복적으로 부어가며 되직하게
저어 주어야 합니다.
시연(侍宴) 메뉴인 가지 리조또와 송이버섯을 바닥이 넓은 냄비에 끓이며 계속 나무 주걱으로 젓는 통역사는 바쁘다.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리조또는 주식인 쌀을 이용한 서양요리다. 동서양 요리는 물과 불의 모순을 조화시키는 것이라 했다. 처음 접하는 이태리 갈라 디너에 초대되니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최고의 음식과 유러피안 앙상블 연주와 전통 멕시코 악단의 공연을 담은 갈라 디너에 초대된 것은 극성을 부리던 폭염이 마지막을 고하는 말복(末伏) 다음날이었다.
-세계 3대 진미의 하나인 썸머 트러플(Truffle)을 맛본다.
직접 시연하는 서양 정식 5코스 메인요리사는 누구인가? 요리의 정통성을 보존하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가 정통요리사에게 수여하는 이탈리안 마스터 세프 작위를 보유한, 마리오트 싱가포르 총 주방장인 셰프 살보(Chef Salvo)이다.
300석이 일찌감치 매진된 곳은 청산이 전후좌우로 호위라도 하듯 둘러싸인 K랜드 컨벤션 홀이다. 처음 접하는 서양요리 갈라 디너에 내자와 자리한 곳은 S석 9번 앞좌석으로 다른 곳보다 고가였다. 얼마나 영광인가! 이태리 음식은 스파게티, 피자, 담백한 빵, 파스타인 국수 정도가 고작인데, 가까이 다가와 접하니 설레임과 생소함에 두렵기까지 했다.
안경을 올리며 다섯 가지 서양 정식을 읽어 내려간다. 영어에 한글로 적힌 메뉴는 단어 자체가 생소해 무슨 요리인지 난감했다. 시연이 끝나고 드디어 요리가 나온다. 무슨 요리일까? 서양 정식 5코스란다. 뷔페식인 줄 알았는데 아뿔싸! 6명 테이블에 까만 정장의 웨이터들이 첫 코스부터 일일이 날라온다.
하우스 와인 잔에 첫 번째 화이트 와인이 채워진다. 이어 개인 접시에 토마토가 꽃잎처럼 여덟 잎으로 장식된 그 위에 도다리, 두부크림, 아보카드 어린잎에 뿌려진 여름블랙 트러플이 전부다. 처음 접하는 요리다. 시장기가 배가되어 향이 더 드높다. 생소한 자리인데다 몇 시간씩 달려와 허기까지 겹쳐 아내는 이내 저녁 굶은 시어머니 상이다. 식욕에 비해 모든 것들이 푸짐하지 않아서인지 나 역시 성에 차지 않는다.
단번에 첫 번째 접시를 비우고 메뉴판을 열어본다. 블랙 트러플이 무엇인가? 낯설다. 뿌려진 향기가 고매하고 드높아 마치 마늘 향과 흡사하다고 할까? 곁에 서양조리학과 전공 여학생 둘의 귀엣말에 이해가 간다. 15년, 20년 이상 된 포플러나무 뿌리에서 캐낸 고급 버섯이다. 시연하는 요리사가 둥근 공 같은 트러플을 소중히 선보인다.
땅속에 고급 버섯을 찾기 위해 잘 훈련된 개나 돼지를 이용한다고 한다. 돼지는 곧 먹어버리므로 개를 통해 땅속의 다이아몬드를 사냥한다. 프랑스 송로(松露)버섯과 상통한다. 흑송과 백송을 찾아내 공급 부족의 레스토랑에선 고가이다. 우리 송이 채취와 같으리라. 블랙 트리플을 톱밥처럼 대패로 밀어서 고명으로 뿌려진다. 죽기 전에 먹어야 할 세계적인 음식재료 중 하나라지만 실상 둔감해 와닿지 않는다.
두 번째 코스는 특별히 시연한 세계 3대 진미라는 리조또와 송이버섯이다. 국내산 쌀로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게 짓는다. 찰기가 적어야 쌀알이 뭉치지 않고 낱개 씹는 맛이 특이하다. 일종의 죽에 송이가 서너 쪽 오르고 야채를 고명으로 올려진다. 역시 되직한 죽에 버터와 치즈를 섞어 맛 또한 특이한 고칼로리 요리다.
세 번째 코스는 잠시 입맛을 고르는 시간이다. 창포나 시골 두부모처럼 육각의 투명한 접시에 올려 놓여진다. 입맛을 고른다는 말은 무엇일까? 육각 투명 위에 종발보다 조금 큰 그릇이 가운데 오목하게 둥지를 틀고 있다. 그 속에 바질, 생강, 입맛을 살려주는 셔벳을 티스푼으로 맛본다. 미각이여! 냉한 기운 속에서 발하는 맛을 위해 육각 투명은 창포도 두부도 아닌 얼음덩이다.
선발대인 적포도주가 당도하면서 네 번째 메인요리에 기대가 모아졌다. 로스트한 국내산 한우 안심, 살롯 콩피, 셀러리악 퓨레, 토마토, 인삼소스 사이로 어린 인삼(Baby Ginseng)이 모딜리아니 나부처럼 길게 누워 반긴다. 하트 모양의 빨간 살코기는 정갈하다. 육즙이 풍부했다. 칼질이 부드럽다. 치아가 부실한 내게도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오랜만에 칼질을 하며 아내와 이태리 음식의 진수를 만끽하였다.
마지막 후식으로 초콜릿 비스코트와 쟌두야 크림을 마시고 카라멜라이즈한 헤이즐넛,오렌지 콩피와 오렌지 소르베를 음미한다. 청산의 K랜드에서 야심작으로 올린 갈라 디너는 트러플 향처럼 고매하다.
처음 초대받은 갈라 디너쇼-. 서양 5코스 요리와 우리 음식을 돌아본다. 한 번에 모든 음식을 내오는 공간 전개형 음식인 우리 식탁은 주식과 부식이 분리되어 코스 요리와 대조를 보인다. 유교 영향일까 한상에 올려 식사하는 중 자리를 뜨지 않는 우리 음식문화-. 좋은 음식이 몸에 보약이라는 근본 원칙으로 한약재들을 사랑과 버무려 만든 음식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음식 갈피갈피 서려있다.
당신이 먹는 음식을 보면 당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프랑스 미식가의 말을 곱씹어 본다. 이태리 음식, 요즘 젊은 세대에서 마치 붐처럼 피자를 즐기고 쌀과 작은 파스타를 넣은 야채수프들을 취한다. 피자는 선호하고 우리 떡은 점점 외면한다. 양보다 질인 서양요리라지만 무조건 선호하는 것이야말로 행여 문화사대주의적인 발상은 아닐까?
69년-. 첫 발령 받고 영을 넘을 때 어머니께서 깨소금만 넣고 길게 말아 넣어준 김밥과 어렵게 구해 몇 개 싸준 삶은 계란-. 김밥과 어머니 사랑을 함께 취하며 자신있게 낯선 부임지를 당당히 달려갈 수 있던 음식문화가 회억된다.
이탈리아 음식문화에 취해본 석반(夕飯)이 값지다. 주야간 자지러지게 서민을 괴롭히던 폭염도 꼬리 내리던 날, 멕시코 서부 대중악단이 마리아치 공연에서 둥근 모자 홍일점의 청량한 음색으로 부르던 베사메 무쵸(키스 많이 해 주오)란 노래가 아직 귀에서 떠날 줄 모른다. 요리사와 웨이터들 모두 무대에 총 출연한 마지막 인사와 컨벤션을 빠져 나갈 때, 어느새 두 줄로 도열해 환영해 준 뒷맛이 당귀차처럼 오래 잊혀지지 않을 이채로운 초대 석반(夕飯)이었다. (끝)
성전(聖殿) 마삼내
글-德田 이응철(수필가)
공직의 사슬이 풀려 날개를 달았다.
자유인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마치 식도락처럼 입맛에 따라 하루를 유영할 수 있어 좋다. 그 중 호수를 끼고 도시 인근의 마삼내(麻三川)란 작은 마을을 시도 때도 없이 즐겨 찾는다. 젖살처럼 살이 오른 인공 호수가 물안개 숲에 낚시터 수상가옥들을 배(腹) 위에 올리고 재롱을 연출하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솜사탕처럼 아련하다.
활시위처럼 잔뜩 굽은 산자락 아래 감색 수상낚시터에 준비된 낚시도구 없이 단신으로 쪽마루를 찾아, 막 개봉한 뜨거운 사발면을 놓고 정좌한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의 고삐를 대어(大魚)를 낚을 때 풀어주듯, 아니 얼레를 풀듯 뒤로하며 수상낚시터 위에서 한 올의 면을 건져 올리며, 어머님 빗장 또한 올려본다.
도깨비 뿔처럼 솟은 삼악산 정상으로 시선을 던지고 여덟 봉우리들을 천천히 낚는다. 수정처럼 날카로운 정상과 창칼 모양의 조각도 같은 대어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그 아래 백여명이 넘는 박사 마을을 뒤로 줄레줄레 늘어선 산등성이를 따라 시선을 옮긴다. 순간 어디서 갑자기 모터보트가 시야를 가리고 잿빛 두루미 한 쌍이 선회하더니 고기를 낚아 훌쩍 고목에 날개를 접는다.
태초의 강물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스포츠 타운으로 일약 자리매김하면서 한 여인의 분홍빛 삶을 간직하고 있던 마을 마삼내(麻三川)는 도시 발전에 겁탈 당했지만, 이십여 년 전만 해도 그 원형을 고스란히 보전한 어머님의 박물관이셨다.
20년 전, 한가위를 앞두고 모처럼 노모와 두 형님들을 모시고 벌초를 가던 중 마삼내(麻三川)를 지날 때였다. 큰 형님께서 갑자기 차를 멈추라고 급히 청하신다. 뜻밖이었다. 야트막한 산 아래 허름한 집 몇 채가 졸고 있었다.
-아니, 아직도 저 집이….
순간, 상기된 표정으로 놀라시던 어머님-. 그리고 이내 묵비권으로 일관하시며 어서 가자고 채근하시던 내 어머님, 해묵은 밤나무 아래 헐벗은 초가삼간은 한평생 가난의 멍에를 짊어진 한 여인의 둥지였다. 그 후, 어머님이 작고한 뒤에 조상 묘 이장(移葬)으로 다시 이 마을을 찾을 때 예기치 않게 구순의 동네 어른 한 분을 알현했다.
-자네 모친은 외모가 천생 색시였어. 우두댁이라고 불렀지. 새댁은 빈한한 가세를 일으키며 홀시아버님을 모셔 동네에선 효부라 칭송이 자자했었네.
지그시 눈을 감으시며 후손을 바라보시던 분은 마삼내(麻三川) 지주였던 최씨 종가집 어르신이셨다. 일제 때, 초가삼간에서 어렵게 첫발을 내디딘 어머님의 분홍빛 시절 이곳은 석전(石田)이었다. 적수단신(赤手單身)으로 낙향한 선대(先代)의 삶은 가난의 대물림이었다.
귀동냥으로 들었다. 이른 봄이면, 송암 고개 마루터 보리밭에 똥장군으로 거름을 퍼나르시던 어머님. 긴긴 밤이면 호롱불 아래 감투할미와 세요각시를 다독이며 한 땀 한 땀 가난의 파고를 넘으시던 내 어머님-.
설핏한 석양을 등지고 접동새 우는 저녁이면 갈대숲을 바라보시며 홀연히 천고(千苦)의 시름을 인고(認苦)하시던 작은 여인이셨다. 물안개 피어나는 강가에 한 마리 물총새가 되고, 강변에 조약돌과 하많은 얘기들을 나누셨으리라. 아니 인천서 소금을 싣고 정기적으로 샘밭까지 거슬러 오르던 발동선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건너 마을 친정이 그리워 얼마나 눈물을 적시었을까!
우후죽순으로 모텔이 즐비한 마삼내 마을이다. 입구엔 퐁퐁 솟는 샘터가 있다. 삼경이면 몽당 실 한 올 입에 물고, 사립문 열고 조롱박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셨으리라. 다시 좌정해 잠든 애들 이불 덮어주며 반짇고리 열고 밤을 지새우시던 어머님-, 풀 먹인 한복, 두루마기에 시침질과 동정을 달고 인화부인을 달래며 잿빛 새벽에 당도하셨으리라.
구겨진 어머님 표정이 호수에 선연하다. 삶의 주름을 펴나가시느라 며느리로 아내로 얼마나 선잠을 이루셨을까! 높이 나는 새는 뼛속까지 비워야 한다고 했다. 얼마나 탐하고 싶던 분홍 시절의 욕구들을 비워야 했던 어머니-. 높이 날기 위해 몸부림치셨던 어머니의 터에서 무덤덤으로 일관했던 나란 존재는 또 무엇인가!
두리번거려 본다. 침식은 되었지만 백 여 년 전 삼악산(三岳山) 역시 눈물짓던 한 여인을 기억하리라. 사계절 깊고 푸른 산과 호수, 나무와 풀 한 포기 아니 작은 돌멩이 하나 모두 내겐 소중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백사장 사이로 유유히 흐르던 소양강은 어머니의 지친 마음을 하염없이 달래 드렸으리라! 열여섯 어린 나이에 홀시아버님을 괴던 엄니-. 당시는 다 그렇겠지 하다가도 그동안 생전에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해 드린 자식이 아닌가! 허기진 배를 졸라매고 바느질감과 밤새 워 씨름하던 분은 남의 어머니가 아니다. 가혹한 삶을 흐르는 강물에 띄워 보내시지 않고 강한 모성애를 하나하나 쌓으시며 인고하시던 한국의 어머님이시다.
어서 가자고 등을 밀던 생전의 내 어머님-. 두 번 다시 기억조차 떠올리기 싫은 아리고 쓰린 고약한 마삼내-. 모진 폭풍에서도 구남매를 훌륭히 키워낼 수 있던 원동력이라고 왜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지 못했을까! 회한이 돌풍처럼 인다. 삶의 지혜가 고뇌에서 생긴다면, 고뇌의 터전인 이곳이야말로 지혜로 무장한 어머니의 성전(聖殿)이 틀림없다.
-아저씨! 문 닫을 시간인데요.
주인아주머니가 행주치마 어깨끈을 내린다. 예-. 나 역시 어머니 성전에 빗장을 내리고 새댁인 어머님과 작별을 한다. 어렵던 시절 금생(今生)에서 구남매를 인간으로 만드시고 상선(上仙)이 되신 그 터 마삼네가 가까이 있어 고맙다. 어머님 옥색치마가 보인다. 통한의 눈물이 물안개 되어 스멀거린다.(끝)
*註;마삼내(麻三川)- 춘천시 삼천동 옛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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