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6장 인간의 타락, 죄, 형벌에 관하여
3항 그들은 모든 인류의 뿌리이기 때문에, 이 죄의 죄책이 전가되었고 죄로 인한 동일한 죽음과 부패한 본성이 정상적인 출생으로 태어나는 그들의 모든 후손에게 전해졌다.
1. 죄의 본질
성경이 말씀하는 죄는 세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합니다. 첫째, 죄는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의 파괴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 주인과 종, 왕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습니다. 이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죄입니다. 종이 주인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고 신하가 왕을 반역한 것이며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효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셨으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죄는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문제라는 걸 인식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죄를 도덕적 법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를 보지 못한다면 다른 모든 관점은 사실상 의미가 없습니다.
둘째, 죄는 도덕적 잘못입니다. 죄는 가상이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실제로 도덕적으로 저지르는 잘못입니다. 하지 말라는 걸 행할 때 혹은 하라는 것을 하지 않을 때 그것은 반드시 도덕적 잘못이 됩니다. 법적인 잘못은 금지를 어긴 것이지만 도덕적 잘못은 금지만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도덕적 잘못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이지만 동시에 도덕적 허물입니다. 그리고 이런 도덕적 잘못은 이미 저질러진 죄이므로 용서가 아니고서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런 점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는 관계 회복의 가장 우선적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죄는 법적인 범과입니다. 정해진 법을 어겼을 때 그에 따른 형벌이 따릅니다. 도덕적 잘못과 법적인 잘못 모두 죄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정죄로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걸 알게 합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형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을 때 아담과 하와는 죄책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저주와 고통 자연악이라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이 세 가지를 통합적으로 고려해야 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죄를 악과 분리해서 악만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악도 중대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죄를 제거한 채 악을 마치 죄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성선설과 성악설과 같은 논쟁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선과 악이 아니라 죄가 본질입니다.
2. 죄의 전가
아담과 하와의 죄는 인류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왜 이들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야 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시도되었지만 가장 적합한 이유는 이들이 인류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대표의 자격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인류에서 가장 탁월한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만한 자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 있습니다. 그는 인류의 뿌리로 모든 열매인 인류가 그 안에서 파생되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대표성의 원리는 지금도 어디나 적용됩니다. 이 대표성의 원리는 연대성에 기반합니다. 이것은 일반 사회나 교회 모두에게 마찬가지입니다. 한 국가의 대표가 한 결정은 전체 국가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보다 훨씬 강력한 연대성은 교회입니다. 참된 교회의 신자로서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 백성이 아닙니다. 가시적인 연대성과 비가시적인 연대성 모두 다 중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연대성과 대표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바른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이들은 교회를 바르게 알지 못해 교회의 지체로서 교회를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고 모든 인류에게 죄는 보편적으로 발견됩니다. 그리고 죄는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죄는 한 사람에게 한정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죄의 결과는 분명 다른 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가계의 저주와 혼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계의 저주란? 조상의 죄로 인해 후손이 저주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겪는 모든 고통의 이유를 조상의 죄로 봅니다. 이런 관점은 이단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씀을 무시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들은 죄를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 대하지 않으며 오로지 현재의 악의 문제에만 집착해서 그것을 없애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거지 나사로는 가계의 저주를 끊지 못했고 바울도 육체의 가시가 있었으니까, 저주를 끊지 못한 것이 됩니다. 욥의 고난은 조상의 죄와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런 이단사상은 주의해야 하지만 죄는 분명 아담에게서 전가되었고 모두가 죄인이 되어 죄를 짓습니다. 이 죄는 다양한 영역과 관계에서 악을 일으키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가해자요, 동시에 피해자가 됩니다.
4항 이 근원적 부패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선을 전적으로 싫어하며 선을 행할 수도 없고 모든 선을 반대하며 모든 악에 치우치는 성향이 있다. 이러한 근원적 부패로 인해 모든 자범죄들을 범한다.
1. 원죄와 자범죄
죄의 전가로 인해 모든 사람은 죄를 지녔습니다. 태어나면 죄를 짓지도 죄를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죄를 중립적인 무엇인가로 보려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죄는 그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죄란 단지 행위만이 아니라 상태도 포함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죄에 치우치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 말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가 들어온 후 죄가 사람의 본성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상태는 죄를 사랑하며 즐기며 기뻐합니다. 그것이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고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마치 배고플 때 길거리의 빵 냄새가 달콤하고 먹고 싶어지는 것처럼 죄는 본성적인 문제이지 기질이나 의지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 상태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납니다. 동물은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면 사람은 죄의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원죄 또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죄의 성향으로 인해 선을 싫어하고 행할 수도 없고 반대하게 됩니다. 전적으로 악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 진리는 중생하지 아니하고서는 자신이 이런 상태라는 걸 절대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 시민의식과 도덕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형식적인 면에서 심지어 매우 훌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은 당연히 칭찬받아야 할 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죄악의 본성이 사라지지도 않거니와 그렇다고 그가 선만을 추구하며 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썩은 음식에 상하지 않은 일부분이 있다고 해서 그 음식이 온전하다고 말하는 이는 없습니다. 이것이 죄가 가져다준 부패입니다.
그래서 이 부패로부터 썩은 냄새가 나고 다른 부분까지도 썩게 만드는 것처럼 사람은 끊임없이 자범죄를 짓습니다. 마치 걸어 다니는 죄짓는 공장과도 같습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게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멀고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것만 합니다. 본성적으로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게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훌륭한 행동을 한다 해도 그 안에 위선과 거짓이 있어 하나님에게 칭찬받지 못하며 도리어 혐오스러울 뿐입니다. 우리도 그런 혐오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잘못을 전혀 뉘우치지 않고 뻔뻔할 때입니다. 그는 다른 면에서 좋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잘못을 돌이키지 않아도 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5항 이 본성의 부패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중생한 자들 안에도 남아 있다. 비록 그 부패함이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되고 억제된다고 할지라도 부패한 본성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행동들은 참으로 그리고 정확히 죄이다.
1. 중생한 자의 죄
이런 원죄와 자범죄는 중생한 자에게는 어떨까? 그리스도안에 더 이상 정죄는 없습니다. 죄는 용서받았고 죄책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안에 죄는 죽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중생한 자는 실존적으로 죄에서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습니다. 죄가 억제될 수 있으나 여전히 부패한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참으로 죄입니다.
삶을 사는 동안 이러한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날마다 죄와 싸워야 하고 피를 흘리기까지 다시 말해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그가 참된 신자인가 아닌가의 중요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이들은 죄를 생각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본래부터 죄로부터 참되게 용서받은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죄를 자각하는 이는 진정으로 용서를 받은 자일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자기 죄를 깊이 자각하고 돌이키는 자만이 용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삶은 자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더욱 죄를 자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용서의 은혜 또한 더욱 커져갑니다.
질문
1. 복음은 죄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복음으로 죄의 어떤 문제들이 해결되었는지 그리고 실존적으로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말해 보세요.
2.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죄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3. 죄에 대한 회개와 죄에 대한 자기 정죄의 차이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