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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는 현상의 것과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을 동시에 잡을 수 있을까요?
이 물음 속에 목사가 세상정치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사람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양쪽을 동시에 모두 추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서로 함께 공존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하기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관심이 사라지게 되어 있고, 반면에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가치를 두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현상의 세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세계를 믿으며 소망으로 지향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보이는 이 세상의 현상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점차적으로 포기(삭제)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자가 점점 더 성숙되어져가면 갈수록 보이는 이 세상의 가치는 점점 삭제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이 믿음이 신자 안에 내주함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보여진 세상의 가치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부인되어져 감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성숙되어지면 되어질수록 별 볼일 없는 배설물로 여겨져서 점진적으로 삭제당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한 하늘로부터 온 이 믿음은 세상과 전혀 반대인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만을 바라보게 하고 그리로 지향해 가길 요구받고 있기 때문에 이 믿음을 가진 신자는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하늘을 소망하고 추구하며, 그것을 바라보고 지향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기독교신자들이 보이는 이 세계와 보이지 않는 그 하늘의 세계를 동시에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양쪽을 동시에 모두 추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늘날 기독교 신자(목사)들이 비록 천국을 말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말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영생이나 영원한 천국이나 하나님의 나라와는 무관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들 자신들의 태도에서 그 하늘의 것들은 더 이상 관심을 끄는 대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에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독생자 되신 아들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내어 주심으로써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지만 정작 우리들은 예수님의 그 십자가 죽으심이라는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는 부족하다며 끊임없이 다른 사랑, 세상의 다른 것들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만으로는 안 되고, 다른 것이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천국만으로는 안 되고, 다른 것이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영생만으로는 안 되고 다른 것이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하늘의 것만으로는 안 되고 다른 것이 더 있어야 한다는 요구를 가슴에 품은 채 하나님을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과연‘예수님만으로’라는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혹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상한 심령으로 애통해 하면서(자기부정, 자기부인의 자리에서서) 오직 예수님 한 분만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며 기도하고 있느냐? 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오직 예수님만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이 세상의 가치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라는 울타리를 이용하여 그걸 자기 수단과 방법으로 자기 행복을 위한 삶을 지향해 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결국 이 차안의 세계, 이 유한 한 피조세계, 땅의 세상에서 자기 행복만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에, 그 하늘의 가치만을 추구하게 하는 예수님만으로는 만족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이 원하는, 그들이 원하는 그런 행복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영생이라는 그 행복의 조건이, 그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스스로 정치 운운하면서 되려 세상 정치 하면 뭐가 나쁘냐고 반문합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영생이 주어졌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것은 사실은 말뿐이지, 진심으로 내 가슴에 머무는 기쁨과 감사가 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맥락에서 보면 보편적인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이 원하는 행복은 현상적으로 이 땅위에서 누리는 것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 역사 속에서 누리는 것으로, 그것이 곧 나의 행복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목사가 나서서 정치를 해야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 계획과 작정하신 뜻대로 그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이 역사를 구속사의 한 방편과 수단으로 삼아 이 세상 역사를 주관해 가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위정자들을 세웠다, 라고 나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걸 인정하기 싫으니까, 그 위정자들이 내 마음에 안드니까? 결국 목사인 내가 스스로 정치에 간섭하여 영향력을 끼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목사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세상정치는 힘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힘이 있어야 정치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그 힘이 어디서 오겠습니까? 당연히 다수의 사람들의 세력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사회적 동물로 집단생활을 지향해 가는 성향을 띠고 세력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단과 집단이 만나면 반드시 그 힘으로서 상대와의 우열을 가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가리켜 정치 행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일컬어 정치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정치적인 동물이라 함은 힘의 원리로 살아가는 즉 동물처럼 약육강식의 방식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민주주의 또한 다수결의 원칙으로 다스려집니다. 다수결이란 무얼 말합니까? 사람의 수로 의사결정권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사람의 수(數)는 곧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하기에 정치는 힘이고 그 힘은 곧 사람의 수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어느 집단이고 사람의 숫자를 더 많이 확보하고자 경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 세상이 경계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의 정치적인 일들이 교회 안에서 그대로 통용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것도 사람의 수(數)에서 힘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사람의 수를 동원하여서 예수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권세를 상징하는 빌라도도 결국 사람의 수를 동원하여서 일으키는 민란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빌라도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내가 너를 놓아줄 권세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 권세는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말한 이 권세는 사람의 숫자로 저울추가 기울어졌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저울추가 기울어졌다 함은 힘이 한 쪽으로 쏠렸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숫자로 힘이 한 쪽으로 쏠린 것을 권세라고 합니다. 결국 세상에서는 사람의 수가 곧 권세이고 힘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반면에 예수님은 전혀 다른 힘, 다른 권세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힘, 권세는 사람의 숫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의 숫자와 상관이 없다는 말은 곧 사람에게서 나온 권세가, 힘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권세 즉 힘을 잘 모릅니다.
그러하기에 인간들은 이 세상의 힘이 곧 자기를 지켜주는 능력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힘을 축적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게 창세기 바벨탑 사건으로 잘 나타났습니다.
바벨탑이 뭔가요? 인간들이 힘을 하나로 모아서 탑을 쌓은 것입니다. 탑은 인간의 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탑을 쌓습니까? 그 이유는 그 그늘에서 자신을 보호 받고자 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급기야는 그 탑을 하늘에까지 침노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모습이라고 하시면서 바벨탑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바벨탑 사건은 인간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면 인간이 힘을 가지면 그 힘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결국 죄인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게 인간들의 어리석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사람의 수가 힘이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힘만 생기면 하나님을 배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이처럼 배도란? 하나님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걸 멀리서 찾지 마시고 우리 자신들에게서 찾아보세요?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멀리 합니까? 힘이 있을 때입니다. 힘이 없을 땐 하나님과 가까이 하다가도 힘만 생기면 떠납니다. 등 따습고 배가 부르면 떠나고 배고프고 아프면 찾습니다.
쉬운 말로 돈 많고 건강하면 하나님을 잊고 살다가 돈 떨어지고 병들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백수로 살 때는 교회에 진을 치고 살다가도 직장을 얻으면 교회도 안 나옵니다. 바빠서 못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은 힘을 축적하지 못하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구약의 역사입니다.(신8:3) “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인간들의 힘을 빼앗을까요? 이는 인간들이 힘을 가지면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란?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범사에, 자신의 일상을 통해 하나님을 실체화하여 사는, 믿음으로 장악되어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시는 그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대로 끌려가는, 다스림을 받는 삶의 자리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잊지 않고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와 반면에 불신앙이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삶을 일컬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믿지 않을까요?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자기가 의지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 힘은 곧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촉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를 아시고 자기 백성들에게 힘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을 빼앗아 가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를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시청각교육적인 교부재로 오고가는 모든 세대들에게 너무도 잘 보여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제 타락하던가요? 힘을 가졌을 때입니다. 먹고 배부를 때입니다. 그 이야기를 신 31:16-17절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노래를 하나 지어서 부르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노래가 무슨 노래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배도한다는 노래입니다.
먹고 배부르면 배도한다는 말은 곧 힘을 가지면 하나님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어떤 식으로 배도하는가 하면 이방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땅에 들어가면 이방신을 음란히 섬긴다고 합니다.
음란히 섬긴다는 말은 즐긴다는 말입니다. 바꿔 말하면 간음한다는 말입니다. 간음이란? 다른 남편을 좇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남편을 따라갑니까? 잘 해주기 때문입니다.
다른 남편이 어떤 남편인가요? 그 땅에 신 즉 가나안 민족들이 섬기는 신을 말합니다.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신은 땅에 신이기 때문에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는 신입니다. 육신을 편하게 해 주는 신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일을 주리실 때 찾아와서 자기에게 절만 하면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제의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누가복음 4장 5-7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자기가 원하는 자들에게 천하만국의 권세를 주겠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준다고 합니까? 자기에게 절하는 자에게 준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잘 살려면 마귀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신을 섬긴 것도 가나안 땅에서 등 따습고 배부르고 싶어서입니다. 가나안에서 잘 살려면 가나안 신을 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신은 바알과 아세라 신으로 땅에 복을 주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쉽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를 아시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배도하는 노래를 지어서 시청각교육적인 목적으로 직접 부르게 한 것입니다.
결국 당시 이스라엘은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모세의 예언대로 배도하고 맙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가나안 신을 섬겼습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우상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여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의지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을 어길 것이라고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본능적으로 등 따습고 배부름을 좇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자기 몸뚱이를 이길 장사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몸뚱이는 신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신이란? 결국 자기 육신을 편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인간에게 있어 신은 배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자기 배를 위하여 하나님을 배도하고 언약을 어겼듯이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기 배를 위하여 이용하는 자들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 이야기가 빌립보서 3장18-19절입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神)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바울이 여러 번 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여러 번 말하면 들으면 되는데 그런데도 안 들었습니다. 안 들으니까 여러 번 말하는 겁니다. 이건 말을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 너희는 하나님 말씀을 안 들어 쳐 먹는 종자란 뜻입니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말과 같습니다. 저희 신은 배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몸뚱이란 뜻을 지닌 먹고 사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란 의미입니다.
먹고 사는 것이 삶에 목적인 자들을 일컬어 자기 배를 위하여 사는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 목적은 먹고 사는데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귀가 찾아 와서 천하만국의 부귀영화를 준다고 하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한 것입니다. 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산다는 말입니다. 이게 인간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런데도 안타깝게도 인간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 죄가 하나님의 뜻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능적으로 자기 몸뚱이 챙기는 식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몸뚱이를 챙기는 것을 가리켜 땅에 일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몸뚱이만을 챙길 수밖에 없는 흙에서 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흙에서 난 몸은 흙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흙의 것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결국 바울의 이러한 말씀이 곧 우리를 고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린 바울의 이러한 고발을 통해서 죄인으로 폭로되어지고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육신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런 육신의 한계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우리를 그냥 자기 몸뚱이를 챙기며 살도록 그냥 방치 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가만 두지 않으시고 간섭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상한 심령이(자기부인)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걸 기뻐하십니다. 그걸 가리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라고 하신 것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 때 즉 자기부정, 자기부인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연약함을 날마다 깨닫게 하시는 작업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약할 때,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성향으로 지향되어지는 상하고 통회하는 산제사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찾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도무지 살 수가 없을 때 하나님을 가까이서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몰아가시는 것입니다. 이걸 바울서신 고후 12:7-1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
바울은 하나님께 자기 몸에 사단의 가시를 빼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 은혜가 족하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의 몸에 사단의 가시를 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몸에 있는 사단의 가시를 성경학자들 중에도 의견이 분분한데 어떤 사람들은 눈병이라고도 하고 어떤 분들은 간질병이라고도 합니다.
간질병으로 이해하고 생각을 해 보세요? 바울이 어떤 사람인가요? 각양의 병자를 고치고 귀신도 좇아내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린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도 정작 본인 스스로는 간질병을 안고 살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창피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그러겠죠? 남에 병을 고치려 하지 말고 자기 병이나 좀 고치라고 비아냥거리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바울을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폄훼하는 인간들이 수두룩한데! 그런데 거기다가 말도 어눌하면서 한 번씩 지랄병을 일으켰단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조롱거리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자기 몸 좀 고쳐달라고 합니다. 세 번 씩이나 기도했다는 말은 그만큼 바울에게는 큰 문제였고 절실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언지하에 거절을 합니다. 그만하면 됐다고 합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 능력은 너의 약한데서 온전해진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능력은 바울의 연약함 속에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약할 때 나타나는 능력이 곧 하나님께서 일하심의 증거라는 뜻입니다.
역설적으로 바울이 잘나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잘 났으면 사람들이 바울이 하는 일을 보고서 바울이 잘나서 한 일이라고 생각 할 것이 아니냐? 라는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네가 못나면 못날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너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몸에 사단의 가시를 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께 사단의 가시를 빼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야! 이놈아! 네가 잘 나면 날 의지 하겠느냐! 네가 못 나야지 날 의지 할 것이 아니냐! 내가 너를 약하게 한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너에게 머물게 하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이에 바울이 깨닫고 아~ 내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는구나! 내가 능욕당하고 궁핍하고 핍박당할 때가 가장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때라는 것을 알고 도리어 자신의 연약함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도는 우리가 늘 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만 뜨면 우리를 강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힘을 달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응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것을 성경에 기록하여서 지금 우리에게 들려주고 계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울을 대하듯이 대하시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우리의 거울이고 자화상인 것입니다.
너의 연약함이 곧 내 능력이 너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 된다고 하십니다. 네가 약할 때가 곧 강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강하면 하나님을 찾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힘이 없고 약할 그 때가 곧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머물러 있는 때이므로 그 때가 가장 강할 때가 되는 것입니다. 아주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인간은 힘이 있을 때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데 인간에게 힘은 곧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단초가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힘을 주는 식으로 일을 하시지 않고 도리어 힘을 빼앗아 가시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육신을 안고 사는 일평생을 이러한 역설적 간섭하심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것을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세상의 가치로 살지 않는 방식으로 간섭을 당하게 되니까 고난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이 역설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힘만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힘을 의지 합니까? 이는 우리에게 힘이 없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힘 없음이 곧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힘 없음을 복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힘 있음을 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엉터리로 신앙생활 하는지 아셔야 합니다. 자기 식으로 신앙생활 하고 있음을 고발당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저주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여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할수록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감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힘을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눈만 뜨면 우리 힘을 빼앗아가는 일을 하십니다. 이게 야곱의 얍복 강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간사하고 약삭빠르게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꿈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꿈을 박살내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꿔치기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야곱은 자기 꿈을 이루고자 하는 자이지만! 반면에 새로운 이름을 받은 이스라엘은 자기 안에 우상과 싸우는 자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가나안 신인 우상과 싸워야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가나안 신이 있습니다. 우리 몸은 땅을 지향하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린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세상에 유익을 구하는 수단으로 섬긴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건 하나님을 가나안 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몸뚱이가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정과 욕심을 날마다 죽이는 싸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좋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과는 반대로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이 세상의 땅에 기운을 받고 땅에서 붙박이처럼 살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땅에 정착하지 못하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정 때라고?
그러니까 우리를 이 땅에서 빼내는 식으로 간섭합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살아 갈 곳은 이 땅이 아니고 하늘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이게 우리의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일컬어 믿음이 조상이라 함은 우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다루시는 것이 곧 우리를 다루시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간섭하십니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십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이란? 근거를 말합니다. 의지할 대상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아브라함이 믿고 의지할 근거를 허무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의지할 것을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약속의 땅은 믿음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이 말씀을 쫓아갔다고 합니다.
말씀을 쫓아갔다는 말은 약속을 믿고 갔다는 말도 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말씀이, 믿음이 아브라함을 이끌고 갔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 그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고 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가셨듯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힘으로 삼고 의지 하던 곳으로부터 빼내십니다. 이걸 언약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빼 내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행위를 힘으로 삼고 살던 율법 아래서 행위가 힘이 되지 않는 약속이 있는 은혜 안으로 빼내주신 것입니다.
어떤 약속이 있는 곳인가 하면 새 언약이라는 약속이 있는 곳입니다. 새 언약이라는 동네는 우리 행위로 의가 주어지는 곳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의가 거저 주어지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새 언약 안에서는 우리 행위가 힘으로 행사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은혜가 왕 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힘을 축척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 안에서의 힘은 오직 은혜일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성도는 행위를 힘으로 행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와 반면에 자기 행위가 힘이 되는 자는 아직까지 본토 친척 아비 집에 머물러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 은혜가 왕 노릇하는 사람은 본토 친척 아비 집으로부터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법과 은혜는 두 힘의 축으로 작용합니다. 법이 왕 노릇하느냐? 아니면 은혜가 왕 노릇하느냐? 우리는 평생 이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우리 안에서 우리 행위를 힘으로 삼으라 하고 촉구하며, 반면에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으로 삼으라고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 몸을 병기라고 한 것입니다. 불의에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의에 병기로 드리라고 한 겁니다. 불의란? 인간의 행함을 힘으로 삼는 것이고! 의란? 하나님의 은혜를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시대에도 이러한 일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처럼 사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 권세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기에 저울추의 무게중심을 두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그 세상 권세 위에 하나님 권세가 통치하고 있다는 것에 무게중심의 저울추를 두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살아가는 가치관이 다릅니다.
이걸 우리 삶에 적용해 보면 이렇습니다.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 것을 얻고자 거기에 집중하여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잠시 거처 갈 외국인처럼, 나그네처럼, 거류민처럼 하늘나라를 지향하며 소망하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떤 자세로 사느냐? 를 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의 삶이 곧 그 사람의 신앙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입으로 하늘나라가 있다고 떠들어도 땅을 지향한다면 그것은 땅에 속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도 땅에 것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것을 부러워하고 세상 것을 좇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반면에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가치관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가치관은 죽고 하늘에 가치관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들이 무가치하게 보이고, 배설물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나기 이전의 가치관이, 그러한 땅의 물질적 사관에서 하늘의 영적 사관으로 이제 점차 바뀌어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이제 그러한 세상적인 가치 기준은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성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믿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증거하며 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거져주시는 그 구원을 삶으로, 몸으로 증거하며 사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하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적 가치로부터 자유하고 사는 것입니다.
제가 복음을 모를 때와 복음을 알고 난 후의 극명한 차이점은 세상에서의 실패와 세상에서의 가치와 세상에서의 판단이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역사 속에서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과 섭리적인 뜻에 따라 하나님 권세가 세상 권세 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직접 주관하시고 다스리시고 섭리적으로 인도해 가고 계신다는 그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이는 것은 안개처럼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힘든 것도 잠깐입니다. 이 또한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주어지는 자신의 환경으로 인하여 일희일비하지 마시고, 그 환경 배후에 계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을 보시고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신자를 돕기 위해서 세워진 것들입니다. 우리가 악한 자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일군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불평과 불만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신자들 주위에 세우신 세상나라의 권세자, 그리고 그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우리 신자들을 돕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일군입니다(롬13장).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보지 않고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삶을 위해서 권세자를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늘 우리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한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국가관을 제시함으로써 복음 선포를 통한 교회의 설립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데 방해받지 않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는 천국백성의 신분으로 동일하게 하나님의 권세를 받은 세상 통치자와 관원들에게 순복할 것을 요구받습니다(롬 13:1-7).
이는 소극적으로 권력자가 하나님의 사역자 곧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권선징악의 대의명분을 수행하기 때문이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자원해 좇고자 하는 선한 양심의 발로 때문입니다(5절). 나아가 복음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평화로운 신앙생활을 보장받기 위함입니다(딤전 2:1-2).
따라서 성도는 천국백성으로서 세상 나라를 나그네와 행인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세상 권세의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성도가 본질상 천상지향적인 가치관에 입각해 살아갈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세상의 권세와 권력이 총체적 관점에서 권선징악의 기본질서를 유지하는 한 이에 적극 순복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 나라의 백성으로서 통치자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공의와 공법에 따라 선정을 베풀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딤전 2:1-2).
설령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한 통치자가 있더라도 폭력적인 투쟁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마 26:52-53). 왜냐하면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박해를 받을지라도 통치자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 5:44).
이는 우리가 고요하고 단정한 가운데 평화롭게 신앙생활을 영위할 뿐 아니라 지속적인 복음전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딤전 2:1-2, 마 28:19-20). 그러하기에 이 세상 나라의 권세는 본질상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편으로 기능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통치권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공의와 공법을 시행해야 하며, 반면에 성도는 국가수반과 관리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생각해 공권력에 순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법과 하나님의 법이 충돌할 때는 하나님 편에서 정당한 절차를 통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으나 폭력적인 방법이 동원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행 4:18-20, 5:28-29, 마 26:52-53).
왜냐하면 그러한 폭력이 하나님의 공의를 대변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설 자리를 잃고 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종교일 뿐, 참된 기독교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역사는 하나님이 자기의 창세전 계획과 작정하신 뜻대로 그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이 역사를 수단과 방편으로 삼아 반드시 성취해 가신다는 그러한 사실을 성도는 성령께서 주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깨달아 인지하며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나라 묵시의 세계, 가장 이상주의 세계, 피안의 세계인 그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오직 거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늘을 지향해 가는 성도(목사)는 국가주의, 민족주의, 세상정치, 이념논쟁, 진영논리, 반공이념주의, 이데올로기 등등, 그런 것들은 성경의 본질이 아니기에 거기에 목적을 두지 않습니다. 그가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맞다면, 그가 진짜 목사가 맞다면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을 끌고 가는 그 목자는 영원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들만이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그 나라가 묵시라는 완료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양은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지독한 근시라 자기 앞에 있는 목자 밖에 못 봅니다. 그래서 오직 한 길 그 목자만 좇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목자의 그 꽁무니만 바짝 좇아가야만 됩니다.
반면에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맹수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항상 멀리 봅니다. 특히 독수리는 수백 미터 상공에서 쥐를 정확히 분별해 냅니다. 그걸 다른 말로 비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맹수들은 반드시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비전을 갖게 되어 있기 때문에 멀리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자신과 가장 가까이에서 강자가 아닌 약자로 서 계신 그 목자를 무시해 버리고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뜻과 소원보다 내 비전, 내 야망, 내 존재가치 챙기기, 내 위상, 내 명예, 내 영광 챙기기, 내 소원을 갖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대로 푸른 초장(시23편)에서만 만족하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16:24절을 통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 했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창세전에 택한 양들은 계 14:4절에 기록하고 있는 말씀처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는 것입니다. ---
그러니까 지금 성도의 현실이 바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반드시 따라가야만 합니다. 안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따라가는 그곳이 비록 금과 옥이 아닌 초가삼간일지라도 거기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가? 를 물어보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