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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집현진은 왕립학술원이었다. 당대 최고학자들이 학문을 연구하던 연구소였다.
그 가운데 박팽년, 성삼문, 유성원, 이개, 하위지, 신숙주가 뛰어났다.
박팽년은 문장은 물론 시와 그림에도 능했다. 가야금도 잘 타고 즐겨 타서
호가 취금헌(醉琴軒)이었다. 별명은 집대성"成이었다
세종이 죽고 병약한 문종도 요절했다. 세자 이홍위가 왕위에 올랐다.
열한 살이었다. 너무 어렸다.
그 사이를 제대로 파고든 사람에 문종의 동생, 유(瑈)였다.
수양대군이라 불리던 이 사내는 1453년 계유년 정적 김종서를 철퇴로 때려죽이더니
2년 뒤 조카 홍위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왕이 되었다.
1456년 6월 2일 신숙주를 제외한 집현전 최고 학자 5명과 무관 유응부가 단종복위를
계획 했다. 거사 당일 함께 거사를 꾸몄던 김질이라는 자가 세조에게 고자질을 했다.
피바람이 불었다. 동참한 유성원은 그날 집에서 목을 칼로 찔러 자살했다.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반란이다. 세조가 이들 학자들을 직접 심문했다.
생육신 남효온이 쓴 『추강집』과 「세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세조가 박팽년에게 말했다.
"나를 섬기라."
박팽년이 답했다.
"한 번도 나으리를 섬긴 적 없소이다.”
세조가 물었다.
"내 녹을 먹는 신하(臣)라 칭하지 않았더냐."
박팽년이 대답했다.
"그런 적 없소이다.”
박팽년 집과 사무실을 수색해 보니 충청 관찰사 시절 그가 작성한 서류에는
신하 ‘신(臣)'자 있을 자리에 클 ‘거(巨)’자가 적혀 있었다.
다락방에는 세조 정권이 준 월급봉투가 쌓여 있었다.
박팽년은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날 밤 세조가, 변절자 김질 손에 술상을 들려 옥으로 보내 다시 회유했지만 소용없었다.
다른 역모자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처벌은 신속했다. 나흘 뒤인 6월 6일 역신들의 아지트 집현전이 폐지됐다.
다음날 박팽년이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모진 고문으로 이미 살 가죽이 칼로 벗겨진
무관 유용부는 배를 지져대는 인두가 식자 “다시 달궈서 지지라”면서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유응부는 나으리 차원을 넘어, 세조를 ‘족하(足下)라 불렀다. ‘자네’라는 뜻이다.
그 다음 날 반역자들이 수레에 묶이고 소에게 사지를 묶여 찢겨 죽였다.
이미 줒은 사람들도 사신이 한 번 더 처형됐다. 여자들은 노비로 끌려갔다.
문집은 모두 불태웠다. 삼족이 멸 했고 삼대가 멸했다.
일주일 뒤 우의정 이사철이 찬미가를 불렀다.
"전하께서는 천년의 운수를 타고나고 덕은 백왕(百王)의 으뜸이시라"
사건은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 사육신의 부활
조선 왕실은 사육신의 비극을 큰 부담으로 안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선조 때 경상도에서 기적 같은 소식이 올라왔다.
박팽년의 손자가 있다는 것이다.
정조 때 실학자 이덕무가 쓴 『청장관전서』에 따르면 임신 중이던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가 친정이 있는 경상도 달성 관비로 내려가 아들을 낳았다.
마침 여종 또한 아이를 낳았는데 딸이었다. 여종은 자기 딸과 이씨 아들을 바꿔
‘비’라 이름하고 비밀리에 키웠다.
박비는 죽음을 피해 지금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동에 숨어 살았다.
그러다 성종 때 이모부 이극균이 경상 관찰사로 부임해 이 사실을 알고 자수시켰다.
이덕무에 따르면 ‘성종은 크게 기뻐하며 일산(一珊)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일산은 ‘구슬’이라는 뜻이다.
박일산의 손자가 바로 사육신 꿈을 꾼 박계창이다. 훗날 1691년 숙종 17년
사육신 6명은 모두 관직을 회복하고 명예를 회복했다. 왕실 정통성에 큰 흉터였던
사육신 사건은 그리 봉합되었다.
사육신 사당은 박팽년 후손이 모여 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동에 있다.
여섯 사내를 기리는 비석은 육각기둥이고, 비석을 받치는 귀부는 머리가 여섯이다.
서울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묘는 생육신 중, 하나인 김시습이 시신들을 수습해
묻었다는 묏자리에 만들어졌다.
역사는 가끔 영화처럼 굴러가기도 한다. 더 영화 같은 역사는 지금부터다.
충주로 다시 가본다.
- 박팽년 사우와 임경업 사당
1707년 숙종 33년 박팽년의 10세손 박경여가 충청도청안 현감으로 부임했다.
청안은 박팽년의 고향 회덕과 가깝다. 박경여는 박팽년의 사당을 임지에 세웠다.
지금 충주 땅이다. 사우 외삼문에는 박팽년과 아들 박순, 손자 박일산을 기리는
충신 정려문이 서 있다. 현재 주택가에 숨어 있다.
충주는 무속에서 신으로 떠받드는 장군, 임경업의 고향이기도 하다.
병자호란 이후 무장 임경업에게 적은 청나라뿐이었다. 오로지 청을 적으로 삼다가
명으로 망명한 뒤 간신배의 모략에 걸려 조선으로 압송돼 곤장을 맞고 죽었다.
청을 배신하고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다. 1646년에 일어난 일이다.
그가 죽고서 전국에 사당이 세워졌다. 서해안 어부들은 그를 신으로 모셨다.
고향 충주에도 사당 충렬사가 있다. 박팽년 사우에서 차량으로 30분
정도 거리다.
중심을 지킨 두 사 내의 사당이 지근거리라는 사실도 기이 하지만, 그 배경은
더욱 기이하다.
수양대군을 끌어내리려던 충신들은 모사꾼의 변절로 죽었다.
변절자 이름은 김질이다. 그리고 190년 뒤 우직한 장군·임경업이 한 간신배의 모략에
누명을 쓰고 죽었다. 이 간신배가 바로 유자광, 임사홍과 함께 조선 3대 간신으로 꼽히는
김자점이니 사육신을 배신한 모사꾼 감질의 현손(玄孫 증손자의 아들)이다.
충신무리와 간신배 무리가 200년 만에 만난 것이다.
제멋대로 굴러가는 듯 보여도, 이렇듯 역사는 법칙이 있다.
- 박종인 저, ‘땅의 역사’에서
첫댓글 이 글이 실린 책도 잘 읽고 있습니다. 황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