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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C. 605년, 1차 바벨론 유수幽囚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바벨론은 성전 기구들과 함께 유력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제사장Buzi의 아들로 태어난 그Ezekiel는 그로부터 약 2년이 지난 후, 성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성전은 물론 나라와 민족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제사장 훈련에도 참여했습니다. B. C. 597년, 2차 바벨론 유수幽囚가 이어졌습니다. 바벨론은 다시 성전 보물과 금으로 된 기구들을 약탈했습니다. 레위인으로서 한참 성전의 직무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배워가고 있었던 그도 포로가 되어서 끌려갔습니다.
성전은 물론 나라와 민족의 회복이라는 간절한 소망은 물거품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산산이 흩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단 한 가지도 없었습니다. 절대 절망이었습니다. 불가항력이었습니다. 너무나 무기력했습니다. B. C. 593년, 하늘이 열렸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3:17)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소명과 비전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던 그를 제사장이 아니라 선지자 곧 파수꾼으로 세워주셨습니다.
당신이 성민 이스라엘을 위해서 계획한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계시해주셨습니다. 파수꾼의 삶은 그야말로 외로웠습니다. 고독했습니다.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 가운데 누구도 그가 외치는 하나님의 뜻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기 때문이다.”(겔3:26)라는 증거에 따르면, 급기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대신해서 성민 이스라엘을 깨우치라는 사명을 맡기신 그의 입을 무려 칠년 반 동안이나 굳게 닫아버리셨습니다.
가르침을 청산유수처럼 쏟아놓아도 모자랄 판에 아예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백성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것들은 눈이 멀어서 살피지도 못한다...망을 보라고 하였더니 벙어리 개가 되어서 야수가 와도 짖지도 못한다.”(사56:10)라고 저주하셨던 분이, 그를 벙어리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물론, 당신 말씀을 전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언제든지 입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때뿐이었습니다. 그때가 지나고 나면 다시 굳게 닫아버리셨습니다. 온갖 오해와 함께 조롱은 물론 견디기 힘든 엄청난 고난을 당할 때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게 하셨습니다. 미친 사람 취급당하게 하셨습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반드시 살아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무리 외치고 또 외쳐도 귀를 닫고 듣지 않는 성민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아내까지 졸지에 데려가 버리셨습니다. 아내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끔직한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성민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한다고 달라질 수 없었습니다.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으로 무장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굳이 그렇게 하면서까지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지도 못한 채 무조건 자신과 관련된 전부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몸에 걸친 베옷을 벗고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이사야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벗은 몸과 맨발로 다녔다.”(사20:2)라는 증거에 따르면, 거룩을 생명처럼 여겨야 하는 선지자Isaiah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무려 삼년 동안이나 벌거벗고 다녀야했습니다.
신발도 신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상태에서 사람들 앞에 서야했습니다. “들짐승들아, 와서 내 백성을 잡아먹어라. 숲 속의 짐승들아, 와서 내 백성을 삼켜라.”(사56:9)라고 외쳐야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이 짐승 같은 이방인들에게 유린당할 것이라고 외쳐야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거의 무제한적으로 자비와 긍휼과 용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각별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포도원에는 위험이나 곤란 등의 따위가 닥치지 못하도록 보호막을 쳐주셨습니다. 이제는 아니었습니다. 보호막을 제거하셨습니다. 약탈을 허락하셨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나라와 민족의 완벽한 진멸을 외쳐야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전혀 원하지 않았던 명령을 받은 선지자들은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저와 여러분은 과연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누구보다 신실했습니다. 조금은 늦은 나이에 결혼했습니다. 막 돌이 지난 아이를 두었습니다. 지방에서 열리는 찬양 집회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을 도무지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은혜가 넘쳤습니다. 늦은 시간, 그들이 서울로 출발하기 위해서 타고 있던 경차를 트럭이 밀어버렸습니다.
그들과 아이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찬양 집회를 요청한 형제자매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으며 삿대질하는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당신께 너무나 신실한 그들의 허무한 죽음을 지켜보고 계셨을까요? 신실한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하루라도 빨리 곁에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허무한 죽음을 허락할 수밖에 없으셨다는 한 형제의 말은 과연 사실일까요?
형제의 말을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고해와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만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금식하고 또 아무리 부르짖어 기도해 봐도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을 작정해서 헌금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고백해도,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봉사를 해도, 희생과 헌신까지 해봐도 마찬가지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런 상황을 만났을 때 과연 어떻게 하십니까? 손에 잡히는 것 없고, 눈에 보이는 것 없고, 힘과 위로가 되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담담하게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파수꾼은 한창 때였던 서른일곱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이 그야말로 완벽하게 파괴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뜻은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너무나 슬펐습니다. B. C. 573년이 되었습니다. 소명을 받은 B. C. 593년으로부터 약 이십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사로잡힌 지 25년째였습니다. 예루살렘이 완벽하게 멸망한 지 14년째였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새로운 성전에 대한 이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범죄로 완전히 파괴되었던 성전이, 다시는 방문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성전이, 그야말로 화려했던 예전의 영광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뚝 솟은 예루살렘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되어 있었습니다. 광야 한복판에 지어진 성전에서는 생명수 강물이 넘치도록 풍성하게 흘러나왔습니다. 이 물이 흘러들어가자 짠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온갖 생물과 물고기가 번성했습니다. 강 좌우측 기슭에는 온갖 종류의 과일 나무가 자랐습니다. 잎이 시들지 않았습니다. 온갖 종류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성민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진멸, 예루살렘 성전의 완전한 파괴, 바벨론 유수는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결론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고해 같은 인생을 고군부투孤軍奮鬪하며 살아내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무기력한 현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론이 아닙니다.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시온, 하나님 나라로 지어져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들을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거룩한 자기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결론은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시온,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하나님이 완벽한 하나가 되는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시온,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 주권과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탁월한 섭리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경륜經綸이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의 종은 거의 죽어가는 상태였습니다.
과부의 아들은 완전히 죽은 상태였습니다. 백부장은 죽어가는 종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나갔습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종을 고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과부는 이미 죽은 아들을 위해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저 슬피 울고 있었을 뿐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가려는 마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기대를 이미 완전히 접었습니다. 포기했습니다. 사람들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보일 때는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 판단될 때는 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백부장과 과부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주셨습니다.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셨습니다. 특히, 과부는 먼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장례 행렬로 다가가셨습니다. 관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죽었던 청년을 살려내셨습니다. 풍성한 긍휼을 부어주셨습니다. 불가능하게 보였던 일을 시원하게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십니다. 해결하지 못할 불가항력적인 문제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당신께 가지고 나온 모든 문제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미처 가지고 나오지 않았거나 도무지 가지고 나올 수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었던 사람들은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의 문제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해결해주셨습니다. 당신 안에 충만한 능력을 풍성하게 베풀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한계를 완벽하게 뛰어넘어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해결하지 못한 채 짊어지고 있는 문제들을 온전히 맡길 수 있어야합니다.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긍휼과 도와주심을 구할 수 있어야합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이후, 평소 습관처럼 찾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세 번씩이나 “나의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제게서 이 잔을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길 원합니다.”(마26:39b)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완벽한 하나였던 아버지 하나님과의 완벽한 단절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는 피조물인 저와 여러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이때 이미 초죽음이 되셨습니다. 당신을 잡기 위해서 산을 올라오던 유다의 무리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당신을 스스로 내어주셨습니다. 로마 군사들이 인정사정 보지 않고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채찍을 무기력하게 맞아내셨습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엄청난 고통을 무기력하게 당해내셨습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비웃음과 조롱과 멸시를 당해내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모든 문제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해결해 주셨던 심지어 이미 죽어 썩은 자까지도 살려내셨던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무기력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입을 열어 말을 청산유수처럼 쏟아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몇날며칠이 되었든 입을 굳게 닫고 말하지 말아야할 때가 있습니다. 살아야할 때가 있습니다. 죽어야할 때가 있습니다. 반드시 이겨야할 때가 있습니다. 무조건 져야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고 또 부르짖어도 어떤 응답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 내동댕이쳐진 상태에서 아무렇게나 방치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때도 있습니다. 빛과 소금은커녕 비웃음과 조롱거리로 전락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 은혜 안에서 값없이 선물로 받은 믿음이 어떤 위로와 힘도 되지 않는, 의미조차 없다고 느껴지는 때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인생은 온통 이런 일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의 삶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의 삶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한 거룩한 희생제물이 되기 위하여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시는 대림절 절기 첫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기력한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났습니다. 때로는 응답 없음이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응답이 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배와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습관처럼 고백하고 있는 믿음의 실체實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Paul는 거듭나기 전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잡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길 위에서 이방인과 임금들과 유대인을 위한 특별한 일군으로 거듭났습니다. 이후, 그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유대교의 미래였다가 하루아침에 변절한 그를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던 유대인들 때문이었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으로 숨어들어갔습니다.
삼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도하며 지내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사도들이 그의 갑작스러운 회심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살기 역시 여전히 식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형제들은 안전하게 피해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았습니다. 당분간은 고향인 다소로 가 있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사도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발 2000미터에 이르는 산Mt, Amanos 기슭으로 들어섰을 때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마음에 품은 청운靑雲의 꿈을 반드시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다짐과 함께 힘차게 넘었던 산이었습니다.
그 산을 다시 넘는 지금은 청운의 꿈을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요? 절망적이지 않았을까요? 비참하지 않았을까요?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무려 13년 동안이나 누구도 찾아주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잊혀 졌습니다.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를 사도로 구별해 주셨던 하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그런 상황 속에 버려져 있어야 하는지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히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습니다. 하루 세끼 밥이나 축내고 있는 천덕꾸러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일분일초가 아까운 청춘이 의미 없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고 한다면 믿음을 수십 번이나 더 내려놓아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비참한 하루하루를 살아야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주어진 지극히 열악한 상황을 자기 성숙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바나바가 찾아왔을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시 떠났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끝내놓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시137:1)라는 시인의 고백에 따르면, 성민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포로로 잡혀갔을 때 비로소 시온 곧 예루살렘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던 여호와로부터 떠나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통곡이 쏟아졌습니다. 특히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시137:4)라는 시인의 고백에 따르면, 그때 성민 이스라엘은 예배와 찬양과 기쁨이 넘치는 삶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노래도 부를 수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시인의 고백은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아, 너는 말라비틀어져 버려라.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 예루살렘을 내가 가장 기뻐하는 것보다도 더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 혀야, 너는 내 입천장에 붙어버려라.”(시137:5-6)라고 이어집니다. 반어법입니다. 오른 손의 재주를 잊을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을 잊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혀가 입천장에 붙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나라와 민족을 잃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더라면 가질 수 없었던 깨달음입니다.
시온 곧 예루살렘을 잃어보지 않았더라면 가질 수 없었던 깨달음입니다. 잃어버린 다음에야 비로소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자신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습니다. 간절하게 사모했습니다. 뜨겁게 그리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멸당하는 그들을 모르는 척 버려두셨던 이유입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더할 나위 없는 진짜 사랑입니다. 은혜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요? 가슴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얼마나 많은 날들을 혼자 끙끙 앓으셨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당신 백성을 위하여 때로는 부어주셨던 축복을 잠시 빼앗아가기도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을 살려내기 위하여 무기력한 죽음을 선택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주심도 은혜입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거둬 가심도 은혜입니다. 믿음이 어떤 의미도 없다고 느껴지는 절망적인 상황에 방치하듯 오랫동안 아무렇게나 버려두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 모든 상황은 결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선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무조건, 반드시, 필연적으로 거쳐야할 너무나 소중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흠과 티를 찾을 수 없는 정금으로 빚으시기 위한 너무나 거룩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겨운 상황 속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믿음을 놓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오히려 기꺼이 받고 죽은 듯 살아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과 시온 곧 하나님 나라로 거듭나는 복된 삶, 오늘도 여전히 끙끙 앓으면서도 하나님은 없다고 외치는 인류 구원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드리는 복된 삶, 믿음을 찾기 어려운 세상에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