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 글을 쓰는 자
서울의 밤은 길었다.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 잠에 들었지만, 창문 하나엔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그 방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윤민호, 작가 지망생. 그러나 그는 그 이름이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다. "작가"라는 단어는 꿈꾸는 자에게는 찬란해 보이지만, 현실 속에서 그 의미는 언제나 잔인했다.
윤민호는 5년째 서울에서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었다.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그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대학 시절 몇몇 문예 공모전에서 상을 받은 적도 있었고, 동아리 선후배들 사이에서 “곧 성공할 재능 있는 신인”이라 불렸다. 그러나 서울이라는 도시는 그에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상은 가혹했다. 아침에는 작은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후엔 카페에 앉아 글을 썼다. 하지만 글은 생각처럼 써지지 않았다. 매일 노트북을 열고, 자판을 두드리며 몇 시간씩 고심했지만, 쓸만한 문장은 몇 줄도 나오지 않았다. 불안은 점점 커져갔고, 자신이 정말 글을 쓸 수 있을지 확신이 사라져갔다.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맞는 걸까?“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부모님은 그가 안정적인 직업을 찾기를 원했지만, 민호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 선택을 한 게 벌써 5년 전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이제는 스스로도 확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 글을 쓰고 있는지, 그 끝에 어떤 결과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민호는 작은 고시원 방 안에 앉아 다시 노트북을 켰다. 하지만 문장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짜증을 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가 진짜 글을 쓸 수 있을까?”
방 한쪽에는 출판사로부터 반송된 원고 더미가 쌓여 있었다. 몇 번의 거절을 당하고 나니, 출판사에서의 희망도 점점 사라져갔다. 그는 다시 원고를 살펴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벽에 갇힌 듯한 기분이었다.
그날 밤, 민호는 글을 포기하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불빛들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불빛을 바라보며 민호는 생각했다. 왜 다른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면서도 자신은 이토록 무기력한지. 왜 자신의 글은 이 도시에서 인정받지 못하는지.
"서울은 꿈을 이루는 곳이 아니라, 꿈을 깨뜨리는 곳일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거대해 보이는 서울에서, 민호는 그저 한낱 작은 먼지처럼 느껴졌다. 그는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이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뭔가 특별한 것이 필요했는데, 자신에게는 그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민호는 오랜만에 대학교 동아리 선배인 재훈을 만났다. 재훈은 몇 년 전부터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와 마주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던 민호는 차마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 재훈은 자신의 성공담을 늘어놓았고, 민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넌 어떻게 지내냐?” 재훈이 물었다.
민호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냥… 뭐, 글 쓰고 있지.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지만.”
재훈은 민호의 말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만 현실을 좀 보는 게 어때? 작가로 성공하는 사람 몇이나 되겠냐? 네 재능을 더 좋은 데 써보는 건 어때? 기자나 광고 카피라이터 같은 거 말이야.”
그 말이 민호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재훈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성공하지 못한 작가 지망생에게 기자나 카피라이터가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민호는 그 길을 선택하지 못했다. 글을 쓰지 않으면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좀 더 버텨보려고. 아직 포기하고 싶진 않아.” 민호는 작게 말했다.
재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하지만 너무 고집부리진 마.”
다시 밤이 찾아왔다. 민호는 작은 방 안에서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여전히 글은 써지지 않았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손가락은 멈춰 있었다. 하지만 그때, 문득 민호는 생각했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고통과 혼란, 이 처절한 몸부림이야말로 글로 써야 할 것이 아닐까?“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글은 완벽하지 않았다. 엉성하고 부족해 보였지만, 민호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고통, 외로움, 그리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글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느껴왔던 모든 감정을 글로 쏟아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고, 창밖으로는 여전히 서울의 불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그 불빛 속에서 민호는 더 이상 자신이 외롭지 않다고 느꼈다. 비록 이 글이 세상에 나가 읽히지 않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 그가 쓴 글은 그에게 의미가 있었다. 그건 단지 성공을 위한 글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날 이후로도 민호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고시원에서 살았고, 여전히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며 글을 썼다. 하지만 그가 쓴 글은 조금씩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가 겪었던 좌절과 외로움,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글을 써 내려가는 그 힘은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 날, 작은 출판사에서 민호의 원고를 받아들이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 순간 민호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올랐다. 성공의 기쁨이라기보다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자신에게 주는 작은 위로 같았다.
서울의 밤은 여전히 길고 차가웠지만, 그 속에서 민호는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다. 꿈은 늘 먼 곳에 있었지만, 그 길은 이제 조금 더 명확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