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3년(영조 19) 7월 간행된 문성공계 대동보(大同譜) 『건륭보』에는 <최씨본원(崔氏本源)>이 수록되어 있다.
“『운부군옥』에 이르기를 ‘강태공의 손자가 나라(왕위)를 사양하고 물러나 최읍에서 살았는데, 사는 고을 이름을 성씨로 삼아서 최씨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청하에서 살고, 박릉에서 살면서 나란히 저명한 성씨가 되었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이 지은 진감선사 혜소 스님 비문에서 이르기를 ‘최씨의 선조는 본시 중국 한나라에서 높은 벼슬에 오른 가문 후손이다. 대대로 산동(중국) 지방에서 살았는데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살수대첩) 고구려 예맥 땅에서 많은 장수와 병사들이 죽었다. 그중에는 뜻을 굽히고 투항하여 우리 동방 백성으로 된 사람이 있었다. 당나라가 우리나라(신라)를 네 개의 주로 나눌 때 전주 금마 사람이 되었다. 지금 전주나 금마를 본관으로 하는 사람은 모두 그 후손이라고 한다.’ [혜소 스님의 속세에서 성씨는 최씨다. 예맥은 바로 지금의 춘천, 강릉 등지다.]” {영인}
이른바 당최(唐崔)의 발원(發源)을 설명하고 있는데 앞서 <선생출처사적>의 청하최씨론과 달리 내용이 아주 구체적일 뿐 아니라 근거(根據)의 출처(出處)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가문의 역사를 유구하고 화려하게 꾸미려고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置簿)하기 어렵다. 즉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운부군옥(韻府群玉)』은 1334년(원통 2) 원나라(元) 사람 음시부(陰時夫)가 만든 중국 최초 백과사전(百科事典)으로 수록 순서를 운목[1] 순서에 맞추어 배열했으므로 운부군옥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이다. 『운부군옥』에서 崔를 찾아보면, “최, 성씨, 박릉(지명으로 보임), 각음(발음으로 보임), 제나라 태공(강태공)의 손자가 나라(왕위)를 사양하고 물러나서 최읍에서 살았다. 사는 고을 이름을 씨(성)로 삼았다. 그 후 청하에서 살고, 박릉에서 살면서 (청하최씨와 박릉최씨) 둘 다 저명한 성씨가 되었다.” {영인}
중국에서 저명한 군망(郡望) 청하최씨와 박릉최씨가 발원하게 된 뿌리를 설명하고 있는데, <최씨본원>은 『운부군옥』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진감선사 혜소 스님 비석은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대웅전 앞에 서 있는 국보 제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를 말하는 것이다.
진감선사대공탑비는 887년(진성왕 1) 세운 비석으로 비문은 경주최씨 시조 최치원(崔致遠)이 지었다. 비문은 조선 시대부터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차례 탁본(拓本)되고, 해석되었기 때문에 거의 완벽하게 해석된 신라 시대 비문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비문에는 진감선사에 관해 자세하게 적혀 있는데 당연히 진감선사의 선조에 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미묘한 도리를 멀리 전하여 우리 고장(신라)을 널리 빛내신 분이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선사가 바로 그분이시다. 선사의 법휘[2]는 혜소요, 속성[3]은 최씨다. 선사의 선대는 한족[4]으로 중국 산동성에 있는 저명한 가문 출신인데 수나라가 요동을 칠 때(살수대첩) 예맥(고구려)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또 뜻을 굽혀 그곳(고구려) 백성이 된 사람도 있었다. 당나라에 이르러 4군(한반도)을 점령하매 지금의 전주 금마[5]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는 최창원인데 비록 재가 신자이지만 출가자(스님)와 같은 행실이 있었다. 어머니 고씨가 일찍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스님이 와서 이르기를 ‘내가 어머니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서는 유리 항아리를 증표로 삼더니, 얼마 안 되어 선사를 임신했다. 선사는 태어나면서 울지 않았으니, 곧 일찍부터 소리가 없고 말이 없는 깊은 가르침(선불교)의 싹을 타고난 것이었다[6].”
<진감선사대공탑비문>은 매우 오래된 금석문(金石文)으로 지은이가 저명인사 최치원이라는 점 외에도 많은 사람이 분석하고 해석하여 사실 여부가 대체로 검증되어있다. 또 <진감선사대공탑비문>과 관련하여 비교 검증할 수 있는 역사책 『자치통감(資治通鑑)』,『삼국사기(三國史記)』 등도 있어서 기록된 내용은 대부분 이미 검증이 끝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고구려가 망하자 귀족 안승[7]이 유민(遺民) 4000여 호(戶)를 인솔하고 신라로 귀부(歸附)해 왔으므로, 신라 문무왕이 금마저(金馬渚)에 고구려국(高句麗國)을 세워 정착시키고, 당나라(唐) 및 웅진도독부(백제)군과 전쟁에서 방패막이로 삼았다. 전쟁이 끝나자 고구려국을 없애고 보덕국(報德國)으로 만들었다가 그마저도 없애버렸다. 흔히 역사학자들은 안승과 고구려 유민을 보덕국세력(報德國勢力)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감선사대공탑비문>을 요약해보면, 진감선사 아버지 최창원(崔昌元)의 조상은 원래 중국 산동성에서 살았던 중국최씨 인데, 당시 군망을 확인할 수는 없다. 전주최씨 가문에서 청하최씨 후손이란 기록을 찾을 수 있기는 하지만, 조상미화(祖上美化)로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여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중국최씨가 수양제(隋煬帝)의 고구려 침략군 일원으로 고구려에 들어와서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 고구려최씨가 되었다가, 고구려가 멸망하자 안승을 따라 신라로 귀부하여 금마저에 세워진 괴뢰국(傀儡國) 고구려국(보덕국)에서 금마최씨가 되었다.
뒤에 신라 조정에서 보덕국을 없애고 금마저를 금마군으로 바꾸고 완산주에 배속(配屬)시켰고, 그 이후에 최창원이 태어났으므로 최창원은 완산최씨라고 말할 수 있다. 최창원뿐만 아니라 금마최씨 전체가 완산최씨로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완산최씨는 완산주가 전주로 바뀌면서 전주최씨가 되었다. 즉 중국최씨에서 고구려최씨, 금마최씨, 완산최씨, 전주최씨로 변천했다는 것이다.
<진감선사대공탑비문>은 대단히 신뢰도가 높은 금석문(金石文)이지만 과연 그대로 믿어서 문제가 없는지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고구려에는 한성화(漢姓化)된 성이 없었다. 신라 또한 7세기부터 왕족과 귀족들이 한성화된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왕족도 귀족도 아닌 고구려 유민(遺民)으로 흘러든 금마저 난민(亂民)이 성을 사용할 수 있었는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살수대첩은 612년(고구려 영양왕 23) 일어난 사건인데, 진감선사(眞鑑禪師)가 774년(신라 혜공왕 10) 태어났으므로 최창원은 750년 무렵에 태어났을 것이다. 또 『삼국사기』에 최초로 최씨가 수록된 것은 822년(헌덕왕 14)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崔雄)인데 진감선사와 비슷한 나이로 추정된다. 살수대첩에서 최창원 혹은 최웅의 아버지까지 기간이 대체로 140년 정도에 이르는데, 5~6세대가 흐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당히 긴 세월이다.
고구려 유민은 난민이기 때문에, 포로(捕虜)와 비슷한 가장 하층민(下層民)일터인데, 귀족도 성씨가 없었던 고구려는 물론 일부 귀족을 제외하면 아무도 성씨를 사용하지 않는 신라 사회에서 과연 5~6세대에 이르기까지 최씨 성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여부는 반드시 검증되어야 할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 각주 ------------------
[1] 韻目. 시(詩)에서 사용하는 운자(韻字)를 한 묶음씩 묶어서 배열한 목록.
[2] 法諱. 돌아가신 스님의 이름.
[3] 俗姓. 스님이 속세(俗世)에서 살 때 성씨.
[4] 漢族. 민족 개념이 아니고 중국인이란 뜻. 당시는 민족 개념이 없었다.
[5] 金馬渚. 전북 익산시 금마면.
[6] 而得遠傳妙道廣耀吾鄕豈異人乎禪師是也禪師法諱慧昭俗姓崔氏其先漢族冠蓋山東隋師征遼多沒驪貊有降志而爲遐甿者爰及聖唐囊括四郡今爲全州金馬人也父曰昌元在家有出家之行母顧氏嘗晝假寐夢一梵僧謂之曰吾願爲何阿方言謂母之子因以瑠璃甖爲寄未幾娠禪師焉生而不啼迺夙挺銷聲息言之勝牙也.
[7] 安勝. 보장왕의 서자, 외손자,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등 기록이 다양하게 산재해 있어서 검증은 불가능하지만 일단 귀족으로 보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