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여행 이튿날 보길도 일대 관광
보길도 예송리 해수용장 아침시간...
↓ 다시마 건조 중.>>
아침은 완도에서 유묭한 전복 죽으로 >>>
그런데 예상외로 죽에는 전복이 잘 보이지 안 았어요>>>
↓ 분명히 전복 죽인데 전복은 어디로 가고 !
가뭄에 콩 나듯이...
보길 윤선도 원림 문학관 관람.
▽ 보길 윤선도 원림 문학관을 뒷배경으로 찰칵!!
▽ 자매님으로만 촬영 !
↓ 여기는 형제님만 찰영>>>
↓ 철, 모르는 코스모스
↓ 보길 윤선도 원림 문학관
↓ 보길 윤선도 원림 문학관
↓ 야매로 윤선도 원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는
전 산악대장 다니엘.
▽ 윤선도 원림 주변으로는 온통 아름다운 꽃들이
만개하여 화려 합니다.
↓ 세연정, 세연지 가는 길.
▽ 세연정 과 세연지 (못)
▽ 이 다리는 물길을 막은 판석보
↓ 세연정의 소나무는 역사가 오래된 나무인데 >>>
▽ 세연정 현판의 글씨는 어느분의 글씨인가요?
▽ 세연정앞 세연지에는 바위가 일곱개가 있다고 하여
칠암이라고 하는데요.~~ 맞는지 자세히 세어보세용
▽ 세연정
▽ 접시꽃
▽ 쌍둥이 죽순 ~~
고산 윤선도는 서울의 동숭동에서 태어나 지금의 명동성당이 있는 명례방(明禮坊) 북달재의 큰집에 양자로 들어갔는데 광해군 당시 정치적인 문제로 고난의 길을 걷다가 만년에 전남 보길도에서 인생을 마무리했다.
본관 해남(海南). 호는 고산(孤山). 조선시대의 문신이며 시조 작가이다. 정철·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서인(西人)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한편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남긴
보길도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에 은거하려다 보길도의 자연 경관에 반해 1637년(인조 15) 이후 세연정 – 낙서재 – 동천석실을 짓고 윤선도가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윤선도는 “낙서재에서 아침이면 닭 우는 소리에 일어나서 후학을 가르치고, 수레를 타고 악공을 거느리며 세연정이나 동천석실에 가서 자연을 벗 삼아 즐겼다”고 한다. 윤선도는 51세부터 85세에 작고할 때까지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하면서 13년 동안 보길도에서 머물렀다.
보길도 세연정은 고산 윤선도(1587~1671)가 병자호란때 왕의(인조) 항복으로 울분을 토하며 제주도로 가는중에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매료되 머물며 13년간 지내며 ‘어부사시사’와 같은 훌륭한 시가문학을 완성한 곳.
인터넷에서 퍼온글 참조 하세요.
▽ 漁父四時詞 (春詞)
앞강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밀려가고 밀물은 밀려온다
찌거렁 찌거렁 어여차
강촌에 온갖 꽃이먼 빛이 더욱 좋다.
▽ 낙서재 : 시문학을 창작하고 강론 하던 곳.
↓ 곡수당은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거주하며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조성한 곳.
▽ 곡수당 뒷 산들은 능선이 완만하게 굽어져 있다.
▽ 오전 보길도에서 여행은 끝나고 노화읍 동천항에서 완도로 이동하기 위해
배편을 기다리는 중에>>>
▽ 무슨 양식장일까?
▽ 마침 배에서 전복을 트럭으로 옴겨 싣고 있습니다.
▽ 동천항 입니다.
보이는 다리는 소안1교라고 하네요.
▽ 전복이 많은섬.!!
▽ 동천항에서 완도를 가기위해..
▽ 땡볕아래에서 무슨 이야기를 ~~
▽ 배 시간을 기다리다가
웬 ~~ 아이스크림은
회장님에 사주셨습니다.~~ ㅋ
↓ 공짜 먹는 아이스크림맛이 엄청 좋아요!
첫댓글 몽돌해변 풍광, 원림풍경, 지나쳤던 부분들까지 세세하게 보여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