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
" ....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 12:3). 옥합을 깨뜨려 주 예수님께 부음으로 온 집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게 되었다. 누구나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또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이 참으로 고난을 맛본 사람을 만날 때마다 - 주님과 함께 극한 경험을 하여, 주님께 "사용되기" 위해 자유러워지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오히려 기꺼이 주님의 포로가 되기를 원하고 주님의 만족을 구하는 사람 - 즉각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다. 바로 당신의 영적 감각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의 생애에 그 무엇인가가 부서지고 깨뜨려져서 당신은 그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이다.
그 날 베다니의 집에 가득했던 그 냄새는 오늘날도 여전히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다. 마리아의 향유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주님을 위해 그 옥합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단 한번의 일격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행위 - 아낌 없는 헌신과 그 향기 - 는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 자체에 대한 것이지 우리의 행함이나 설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당신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에 대한 인상을 전해줄 수 있도록 당신을 사용해달라고 오랫동안 기도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 기도는 정확하게 설교나 가르침의 은사를 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 기도는 당신이 다른 사람과 접촉할 때 하나님과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감각을 전해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친애하는 친구여, 당신이 당신의 모든 것, 당신의 가장 귀한 것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붓지 않고서는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인상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없다.
그러나 일단 당신이 그 지점에 도달하면, 외적으로 볼 때 당신이 크게 사용되는 것같이 보일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나, 하나님은 당신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 안에 기갈을 일으키기 시작하실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감지할 것이다. 가장 가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그것을 감지할 것이다. 그들은 여기에 주님과 함께 동행해 온 사람, 고난을 맛본 사람, 자기 마음대로 살아오지 않는 사람,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은 생애는 감화를 주며, 그 감화는 기갈을 일으키고, 그 기갈은 사람들을 격동시켜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의 충만함에 이를 때까지 계속 갈구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 세상에 두신 첫번째 목적은 설교하거나 주님을 위해서 일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안에 주님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땅을 준비하는 일이다.
만약에 당신이 이제 방금 식사를 마친 두 사람 앞에 맛좋은 과자를 내놓는다면 그들의 반응은 어떠할 것인가? 그 사람들은 그 과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과자의 모양을 칭찬하며, 과자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토론하며, 과자의 가격에 대해 말하는 등 그것을 먹는 것을 제외한 모든 일을 다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정말 배고픈 사람들이라면 그 과자는 얼마가지 않아서 없어질 것이다.
성령님의 일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생애에는 진실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우리는 강제로 다른 사람에게 영적인 욕구를 주입시킬 수 없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기갈을 강요할 수 없다. 기갈은 일으켜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인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다른 사람들 안에 일으켜질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수넴의 "귀한 여인" 에 대한 말씀을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 여인은 자기가 목격은 하였지만 잘 알지는 못했던 선지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왕하 4:9) 그 여인에게 그런 인상을 준 것은 엘리사의 언행이 아니라 엘리사 자체였다. 그가 단순히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 여인은 무엇인가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여인은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어떤 것을 감지하는가? 우리는 여러 종류의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즉 명철하다거나, 재능이 있다거나, 또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길 수 있다.그러나 엘리사가 남긴 인상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인상이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는 문제는 하나의 사실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의 기쁨과 관련된 우리 안에서의 십자가의 역사이다. 그것은 내가 주님의 기쁨을 구하고, 주님만을 만족시켜 드리고자 하며,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 나에게 어떠한 희생이 따르든지 간에 개의치 않을 것을 요구한다. 내가 존경하는 분이라고 말한 바 있는 그 자매님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이른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모든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그 자매님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다. 그 자매님은 위를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님의 마음을 만족스럽게 해드리기 위해 저는 제 마음이 부서지기를 원하나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부서짐을 말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로맨틱한 감정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 자매님이 처해 있던 특별한 환경에서 그 고백은 진심이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고 다른 사람들의 생애가운데 기갈한 마음을 일으켜서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꺼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깨뜨려 주님께 쏟아부어야만 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복음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스럽게 할 만한 상태를 우리 죄인들 안에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소유 전체, 우리 존재 전체를 (우리의 영적 경험에 있어서 가장 소중히 여겼던 일들까지도) 주님께 가지고 와서 주님께 아뢰자. "주님, 저는 주님을 위하여 - 주님의 사업이나 주님의 자녀들 혹은 그 외의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주님 자신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겠습니다!"
주님을 위해 허비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기독교계의 많은 저명 인사들도 이 사실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크게 사용되었다. - 과도하게 사용되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허비된다" 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우리는 항상 "쉴 새 없이 활동하기" 를 좋아한다. 주님은 때때로 우리를 감옥에 가두기를 원하신다. 사도들의 전도 여행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과감하게 그의 가장 훌륭한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는 일을 하셨다.
"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2:14) "
.... 향유 냄새가 그 집에 가득하더라" (요 12:3)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바울과 같이 우리가 이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을 때(고후 5:9) 복음은 그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첫댓글 주님을 위해 허비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주님은 때때로 우리를 감옥에 가두기를 원하신다. 사도들의 전도 여행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과감하게 그의 가장 훌륭한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는 일을 하셨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중에서-
만일 우리가 해 내지 못하고 신실하지 않으면 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택하여 이 길을 가게 하실 것이다 이것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최소한 20년이 또 걸릴 것이다.
당신은 주님께서 우리를 한쪽으로 제쳐놓으실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주님은 우리를 한쪽으로 제쳐 놓으실 수 있지만 그분에게 또 20년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20년을 절약해 드리기 바란다
주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어, 우리가 능히 할 수 있고 이것을 위하여 모든 것을 드릴 수 있기 바란다 이 기간에 우리는 무겁고 어려운 일을 통과하므로 이 길을 보게 되었다. 우리가 이 길을 버리지 않기 바란다.
1947. 8. 19
이 메시지는 -교회의 길- 부록 마지막 페이지에 기록된 워치만 니의 글이다.
워치만 니는 1952년 공산당에 의해 감옥에 갇힌 후, 나오지 못하고 끝내 감옥에서 1972년 5월 30일 순교하였는데 그 기간이 정확히 20년이다.
자신의 삶(사역)의 마지막이 어떻게 종결될 것인가를 미리 예견한 듯 기록으로 남긴 위 두 메시지를 대할 때마다 나의 마음은 경건해진다.
워치만 니... 그는 참으로 주님을 위하여 허비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