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이냐시오 성인과 동료가 설립
-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 예수회 제공.
1540년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 설립된 예수회는 ‘예수의 동반자’(Companions of Jesus)라는 의미를 지닌다.
기원은 1534년 8월 15일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수도원 순교자 성당에서 거행된 서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청빈, 정결 및 성지 예루살렘에서 사도직 활동을 하겠다고 서약했다. 만약 예루살렘에 갈 수 없다면 교황의 의향에 따라 어떤 사도직이든지 수행할 것을 다짐했다.
법적으로는 바오로 3세 교황이 발표한 회칙 ‘레지미니 밀리탄티스 에클레시에’(Resimini militantis Ecclesiae)로 승인됐다. 처음에는 회원 수를 60명으로 제한했으나 4년 뒤 해제됐다. 목적은 회원 자신의 구원 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하느님과 진정한 화해를 이루고 나아가 이웃과 창조물과 화해하기를 추구하는 데 있다. 그래서 회원들은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행동양식으로 삼는다.
수도회의 모든 조직과 생활양식 및 행정은 이 두 가지 목적을 지향하며 이뤄져 있다. 바오로 3세 교황의 회칙과 이냐시오 성인이 작성한 「영신수련」(Exercitia Spiritualis), 예수회 회헌 및 역대 총회에서 제정한 규칙들과 총장들의 지침, 또 연학 규정 등은 이 목적을 구체화한 문건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행동 양식은 도전하는 길이다.”(34차 총회교령 26, 28)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이웃들이 하느님을 찾도록 돕는 일 외에는 바람이 없던, 지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수도회 설립 이전에도 스스로 정리한 ‘영신수련’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 도움을 주었고 동료들을 모아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성사를 주고 복음을 선포했다. 이런 선교사로서의 그의 신원은 일찌감치 이냐시오 성인이 정의한 예수회원의 행동양식이다.
10명의 초기 회원으로 시작한 예수회는 그가 죽기 전에 이미 1000명에 육박했고,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112개국에서 1만6000여 명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회원들은 약 80개 관구와 지역구에 속해 있으나 모두 로마 예수회 총원이 통솔한다.
이냐시오의 가까운 동료였던 예로니모 나달은 ‘세계는 곧 우리의 집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예수회원이 수도회와 교회를 넘어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수많은 사람이 있고 그들이 피운 문화와 삶이 존재하는 세상을 집으로 인식하고 그들과 함께 세상 속에 있기를 바랐다. 2008년 예수회 제35차 총회에서 장상들은 이에 답하듯 ‘전 세계가 우리가 마음을 두고 관심을 쏟는 대상’이라고 밝혔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11월 8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예수회 (하)
한국교회와 깊은 인연 맺어
-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 당시 예수회를 찾은 교황과 회원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예수회 제공.
세스페데스(G. de Cespedes,1551~1611) 신부는 예수회 회원으로서는 최초로 한국을 찾은 인물로 꼽힌다. 스페인 출신으로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그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함께 조선 땅을 찾아와 종군 신부로 지내다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 한 사람인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에 가서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을 시기에 만난 사제도 예수회 회원 그랑몽(J. J. de Grammont, 1737~1812?) 신부였다. 이승훈은 그때 예수회 마테오 리치 신부가 지은 「천주실의」 등 다수의 서적을 들여왔다.
한국과 예수회가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된 것은 1954년이다. 한국교회는 한국 젊은이들의 영적·지적 교육을 위한 가톨릭 대학 설립을 교황청에 지속해서 요청했고, 비오 12세 교황은 이를 인가해 예수회에 책임을 맡겼다.
그 기초 작업을 위해 당시 일본 상지대학에 있던 게페르트(T. Geppert) 신부가 방한하면서 학교 용지 매입 등 실질적인 작업이 시작됐다. 예수회는 미국 위스콘신 관구에 학교 설립 임무를 부여해 그 이듬해 미국 위스콘신 관구가 진출했고 예수회 한국지부가 설립됐다.
위스콘신 관구에서 파견된 첫 신부들은 1955년 6월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60년 4월 18일 166명 학생으로 서강대학교의 막을 올렸다.
이즈음 광주대교구는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대신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고 예수회에 그 책임을 부탁했다. 1962년 바쿠버(Andrew Bachhuber) 신부가 광주가톨릭대학교 초대 학장이 됐으며 이후 예수회는 1969년 교구로 이양할 때까지 학교를 운영했다.
1985년 정한채 신부를 제1대 지구장으로 독립 지구로 승격된 한국 예수회는 2005년 예수회 한국진출 50주년 기념 및 관구 승격이라는 기록을 새롭게 쓰게 된다.
현재는 서강대학교를 통한 교육 사도직뿐 아니라 영성 사도직, 사회 사도직, 청년 사도직, 매체 사도직 등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자비를 실천한다.
예수회는 2016년 제36차 총회를 통해 ‘예수회가 사도직을 수행할 때 특히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에 대해 숙고하기로 결의했다. 이어 약 2년에 걸쳐 모든 예수회원과 협력자들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공동식별 끝에 ‘예수회 보편적 사도적 선택’(UAP)을 선정했다. 한국 관구도 ‘예수회 보편적 사도적 선택’에 따라 지난해 9가지의 중장기 계획을 수립했다.
내용은 ▲ 이냐시오 영성대학 ▲ 이냐시오 영성에 기반한 협력자 양성 ▲ 이냐시오 영성 용어 소위원회 ▲ 이냐시오 영성에 기반한 사회적 의제 발굴 및 운동 조직화 ▲ 대북 협력 ▲ 청년 영신수련 모임 ▲ 영성미디어 플랫폼 개발 ▲ 청년 서강 지원 포럼 ▲ 정의, 평화, 창조보전 활동의 공식적 지지 및 지원 등이다. [가톨릭신문, 2020년 11월 22일, 이주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