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 교 인 |
비 종 교 인 |
46.9% |
53.1% |
종교인을 다시 종교별로 나누면, 불교인 18.3%, 개신교인 20.3%, 천주교인 7.4%, 기타 종교인은 0.9%이다. 개신교인과 천주교인을 합친 기독교인 비율은 27.7%가 된다.
도표 #2: 한국의 종교인 분포도 (종교인 46.9%)
불교 |
개신교 |
천주교 |
기 타 |
18.3% |
20.3% |
7.4% |
0.9% |
(개신교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새길이야기 2002년 여름(5호)에 한인철(연세대학교 교목)이 게재한 내용을 인용)
그렇다면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2002년도말 476십만명 정도이니 그 간 인구증가율을 볼때 현재 우리나라 인구수는 대략 2004년도 오늘 현재 49백만명(천주교 교세통계 2003년도말 4백43만7백91명이다. 이는 인구감소와 종교인의 분포도에서 천주교의 비율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증거이다) 정도 예상한다.
우리 천주교 신자 비율이 전체인구의 7.4%를 차지한다고 계산하였을 시 아마 36십만명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이 수치는 현재 믿고 있는 절이든 교회이든 현재 다니고 있는 신자의 비율이 아니라 수계를 하였거나 세례를 받은 총인원임을 볼 때 실제로 자기가 믿는 종교에
열심한 신자의 수는 줄어들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구분 |
총인구 |
남 자 |
여 자 |
2000 |
45,985,289 |
23,068,181 |
22,917,108 |
2002 |
47,639,618 |
23,983,838 |
23,655,780 |
(2002년도 통계청 발표)
이는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젊은 층의 유입이 가장 큰 문제로 남는다. 개신교는 적극적인 포교로 젊은 층의 유입이 어느 정도 지속되어 향후 큰 문제는 없을 듯 하나 불교 및 천주교의 문제는 사뭇 다르다.
3. 천주교의 교세현황
년도 |
총신자수 |
총증가수 |
가톨릭학교 (초, 중, 고) |
19세이하 신자수 |
냉담자 |
냉담자 비율 |
1984 |
1,848,476 |
|
|
|
449,381 |
24 |
1985 |
1,995,905 |
148,429 |
|
|
448,971 |
22 |
1986 |
2,148,607 |
152,702 |
|
|
483,617 |
22.4 |
1987 |
2,312,328 |
164,963 |
|
|
538,495 |
23.2 |
1988 |
2,468,082 |
155,754 |
|
|
576,524 |
23.3 |
1989 |
2,613,267 |
145,185 |
|
|
598,982 |
22.8 |
1990 |
2,750,607 |
137,340 |
|
|
640,001 |
23.7 |
1991 |
2,923,386 |
172,779 |
위 통계 무 |
|
702,033 |
24.0 |
1992 |
3,066,733 |
143,347 |
243,040 |
|
758,337 |
24.7 |
1993 |
3,209,494 |
142,761 |
248,796 |
|
792,473 |
24.6 |
1994 |
3,338,918 |
129,424 |
281,449 |
위 통계 무 |
834,351 |
24.9 |
1995 |
3,451,266 |
112,348 |
271,660 |
817,887 |
834,351 |
24.1 |
1996 |
3,562,766 |
111,500 |
268,016 |
837,455 |
912,899 |
25.6 |
1997 |
3,711,184 |
148,418 |
234,616 |
854,373 |
1,001,993 |
26.9 |
1998 |
3,804,094 |
92,910 |
287,030 |
미확인 |
1,091,271 |
28.6 |
1999 |
3,946,844 |
142,750 |
266,354 |
864,556 |
1,249,115 |
31.6 |
2000 |
4,071,560 |
124,716 |
276,742 |
899,740 |
1,360,614 |
33.4 |
2001 |
4,228,488 |
156,928 |
270,368 |
926,635 |
1,427,520 |
33.7 |
2002 |
4,347,605 |
119,117 |
260,724 |
889,621 |
1,427,520 |
32.8 |
2003 |
4,430,791 |
83,186 |
246,169 |
793,437 |
1,524,758 |
34.4 |
(한국 천주교 교세 통계표-한국주교회의)
위 표에서 보다시피 총신자수는 1984년도 18여만명에서 20년이 지난 2003년도말에는 1984년도에 비하여 244% 증가된 44여만명으로 꾸준한 증가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1991년도를 제외하고는 미미한 증가를 보였을 뿐 특별히 많은 증가세는 이루어 지진 않았다. 허나 최근들어 2001년도에는 타 년도와 달리 조금 많은 15만여명으로 증가하였으나 2002년도에 들어 갑자기 감소세로 돌아섰다. 지난해는 20여년만에 최저치인 10만명도 안되는 증가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매년 신자수는 미미하나마 꾸준히 증가 되고는 있으나 이에 반하여 앞으로 한국천주교를 짊어지고 가야할 19세이하의 신자수는 1997년도를 정점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청소년에 대한 천주교 선교홍보에 허점과 문제점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이다. 주일학교의 학생수도 19세 이하 수와 맞물려 점차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청소년층의 감소와는 달리 우리 사회의 단편인 고령화현상에 발맞춰 노년층 신자의 현상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와 같이 노년층 신자의 수만 계속 증가하는 현상은 천주교의 한 단편을 보여주는 예이다.
냉담자의 수도 총신자수는 증가되는 비율을 2003년도를 기준하여 17배인 34%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나게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증명하는 내용의 기사가 며칠전 신문에 실렸다. 다음은 2004. 6. 16. 한국경제신문에 실린 내용이다.
천주교계에 신자 고령화 비상이 걸렸다.
전체적인 신자 증가율이 1%대로 내려간 데다 40대 이하의 젊은 신자들이 크게 줄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최근 발표한 2003년 교세통계에 따르면 50대 이상의 신자는 전년도에 비해 25.2% 증가했다. 특히 60대의 경우 증가율이 36.7%에 달했고 50대도 22.9%나 늘었다. 반면 30대 이하의 신자수는 10.6% 줄었다. 6세 이하의 감소율은 18.4%에 이르렀고, 초. 중. 고생인 7~19세는 9.1%, 20대와 30대는 각각 7.7%와 7.2% 감소했다. 60대 이상의 신자는 27만6천여명이 늘어난 반면 30대 이하의 "젊은 피"는 21만 여명이 줄어든 셈이다. 전체 신자수는 4백43만7백91명으로 전년도보다 8만3천1백86명(1.9%)이 증가했다 . 그러나 지난 94년 이후 매년 둔화돼온 증가율이 1%대로 떨어지기는 이번이 처음 이다. 2002년도 증가율은 2.4%였다.
영세자 수도 2000년 17만2천여명에서 지난해에는 13만7천여명으로 급감했다. 성직자수는 3천5백84명으로 6.1% 늘었다.
이처럼 신자들의 고령화 현상이 심화되자 천주교계에선 주일학교 교육과 청소년 및 청년 사목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타종교와 비교하더라도 18~30세 청년층의 비율히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 개신교 의 경우 청년층 비율이 46%, 불교는 33% 가량이지만 천주교는 19%에 그치고 있다 는 설명이다.
위 기사가 아니더라도 표에서 보다시피 분명히 한국천주교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문제들이 신자수를 감소시키고, 냉담자를 급증하게 만드는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보기로 하자.
4. 문제점
가톨릭 신문이 창간 70주년을 기념하며 한국천주교 성직자에 대하여 조사(1998년도)를 실시한 내용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①'신앙심을 제외하고 성직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건'을 물었을 때,
신자들은 '신자들에게 모범이 되는 영성과 기도 생활'(35.7%),
'신자들에 대한 겸손과 자상한 태도'(24.7%),
'신자들에 대한 헌신적이고 봉사적인 태도'(15.6%),
'신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폭 넓은 지식과 안목'(12.5%),
'검소하고 절제 있는 생활'(9.3%),
'맡은 소임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는 행정 능력'(1.5%)의 순으로 꼽았다.
②사도좌 순시관 사무처의 평신도 지도자 대상 조사(1998년)에서도 '성직자들이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태도'를 물었을 때,
'기도와 영성 생활에 성실한 태도'(44.2%),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 태도'(14.3%),
'가난한 이와 소외된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태도'(13.7%),
'희생적인 봉사 태도'(10.4%), '신자들에게 겸손한 태도'(9.2%) 등의 순이었다.
두 조사의 결과를 볼 때, 신자들이 가장 바라는 성직자의 모습은 기도와 영성 생활에 충실한 사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자들의 이 같은 바람은 어느 정도나 충족되고 있을까? 사도좌 순시관 사무처의 조사에서
①'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를 물었을 때,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생활 태도'(28.6%),
'기도와 영성 생활의 부족'(18.5%),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 태도 결여'(17.1%),
'사목 활동에 불성실한 자세'(10.3%),
'인격적인 미성숙'(9.5%),
'사치스런 생활 습관'(8.0%) 등의 순이었다.
신자들의 입장에서 성직자들이 충실해 줄 것을 가장 바라는 '기도와 영성 생활'이 부족하다는 점을 성직자들의 두 번째 고질적 문제로 지적하고 있는 점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②'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사제들의 모습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를 물었는데,
사목자(양치는 목자)라고 응답한 평신도 지도자는 약 절반 수준인 51.0%였고,
나머지는 정신적 스승(15.3%),
독불 장군(13.3%),
교구의 행정 관료(10.7%),
윤리 교사(3.4%),
수행(도)자(2.8%),
평범한 직장인(1.2%),
정치인(1.0%) 등이라고 응답하였다.
곧 평신도 지도자들은 5명에 1명꼴로 사제들을 본래 모습인 사목자보다는 부정적인 모습(독불 장군, 교구의 행정 관료, 평범한 직장인, 정치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답은 이미 나왔다. 신자들은 성직자들이 지금보다 더 사목적인 분을 원하였다. 그러나 위 설문 조사에 의하면 신자들의 눈에도 사제의 모습이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실정에서 어떻게 신자의 증가를 원할 수 있는가. 신자들의 눈에도 부정적 밖에 보이지 않는데 일반인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겠는가. 이 조사가 1998년도에 실시되어 만 5년이 지난 현 시점에 성직자들은 반성하고 회개하여 그 때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반박할 성직자는 과연 몇 명이나 될 것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5. 대안 및 해결방안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전체적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은 신자들의 바램을 충분히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은 왜 일까? 그들은 이러한 조사에 반하여 어떤 개선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저 한 통계조사이려니 하고, 어떤 이는 이 조사 자체를 모르고 전통적 습관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사제의 권위주의적 패러다임을 탈피하고 위기에 처해 있는 교회를 되살릴 수 있을까. 여기서는 생명수호, 교리, 교회공동체 등 전문적인 사항은 제외하고 오직 현실적인 것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가. 사제의 권위주의적 패러다임 탈피
1) 사제 성화
현재 사제의 권한은 본당 어디든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막강하다. 사제의 손을 거치지 않는 의사결정은 있을 수 없고, 사제의 결재 없이는 한 푼도 지출하지 못할 정도로 사제의 권한은 제왕적 권력을 자랑한다.
사제 수품시 초발심 제고와 권위주의적 사고에서 탈피를 위하여 사제 수품 15년차부터 20년차 사이의 사제는 의무적 신학교에 입소하여 1년간 또는 다년간 연수교육이 필요하다고 여기며, 이를 이행치 않는 사제는 해외 교포사목으로 이를 대신하여야 한다. 이는 사제들로부터 지탄을 받을 일이기도 하고, 이렇게 한다고 사제성화가 된다는 보장은 없으나 최소한 성화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교포 사목을 하고 돌아온 분들의 말에 의하면 외국 가톨릭의 경우 우리사정과는 확연히 틀려 사제의 제왕적 권위에서 탈피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공통된 말들을 하기 때문이다. 사제 초년병들은 그래도 나름대로 가톨릭이 발전할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하는 한편 어느 정도 사제생활에 익숙하게 되는 15년쯤 되면 모든 것이 원숙할 때임으로 극히 권위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치우칠 수 있는 행동에 대비하려 함이다.
또한 사제 수품후 신학생과 확연히 다른 부분이 하나 있는데 어른들에 대한 공경문제이다. 선배들이 시켜서인지 교수들이 시켜서 인지는 몰라도 사제 초년병들은 어른들과의 대화시 하대를 한다. 사제 수품 즉시 자기 나이에 +30을 하여야 한다며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도 반말로(어르신들은 어린 사제들이 손자 같으니 받아주는 부분도 있지만), 나이가 몇 살 위부터 아버지뻘 되는 분들에게도 반말 비슷하게 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사제의 수도 무척 많다. 수품 후 거만해지는 것도 같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에게 존댓말을 쓴다고 본인의 인품에 어떤 흠이 생기기나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신자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사제에 대한 고귀함을 느끼게 한다.
현재의 주임신부 대우에 대한 문제해결도 발전방향에 둘 수 있다. 일단일장이 있겠지만 도시의 주임신부를 농촌지역으로의 배치하고 젊은 사제들을 도시에 배치하는 것이다. 젊은 사제들의 사고에서 젊은 사고가 나오는 것이지 나이 든 사제에서 젊은 생각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도시의 주임신부들은 대개 신자수가 적은 농촌지역에서 몇 년 지내면서 사목의 노하우를 쌓게 되는 장점도 있지만 그 사이 도시의 젊은 신자들은 냉담하거나 세례를 받지 않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지금의 도시소재 주임신부를 농촌지역으로 보낸다고 대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젊은 층 신자의 감소는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도록 증명하고 있다.
이와 연계하여 본당의 보좌신부가 도시든 농촌이든 청년팀 사목을 담당하게 되는데 보좌신부의 임기가 1년 정도로 매우 짧다 보니 매우 비효율적이다. 그러다보니 젊은 신자들은 보좌신부와 얼굴을 익히기도(친밀한 관계) 전에 다른 곳으로 부임하게 되어 그나마 사제와 친숙한 상황에서 성당에 다닐 수 있지, 사제와 친하지도 않고 친구들도 보이지 않는다면 성당 가보아야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젊은 층이 많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젊은 주임신부가 맡아서 생각이 같고, 행동이 같다면 젊은 층이 냉담할리도 만무하고 친구들에게 권두하지 않을 수 없어 청소년층의 증가에 한 몫을 하게 될 것이다.
2) 냉담자 회두 적극적 대처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최근 3년 이내에 판공성사를 받지 아니한 사람들이 냉담자로 규정된다고 한다.(사목 160호)’라고 되어 있다. 교세통계표에 의하면 현재 냉담자와 거주불명자를 구분하여 냉담자로 보는데 냉담자는 주소지가 확인되는 신자로 성당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고 거주불명자는 말 그대로 주소지가 불분명 한 사람들이다. 주소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회두하러 갔는데 사람이 없다보니 한두 번 방문하다 실패한 사람도 주소지 불분명으로 들어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한 이사를 하였으나 성당 다니기 싫어 교적을 옮기지 않는 이도 주소지 불분명에 속한다. 그러나 어쨌든 둘 다 냉담자인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3년씩 성사를 보지 않아 냉담자의 멍에를 스스로 쓰는 것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냉담자 중에는 성당에 대한 관심이 없어 스스로 나오지 않는 이도 있고, 결혼생활 때문에 개신교로 불교로 가는 이도 있고, 또한 타교(불교, 무속 기타 등등)에 다니는 이들 있다. 그러나 단순히 다른 종교도 믿지 않으면서 단지 교회법규를 지키고, 미사참례와 고백성사를 보기 싫어 냉담 하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또한 성직자, 대부모, 주위 신자와의 언쟁으로 자의반 타의반 나오지 않는 이도 꽤 많을 것이다.
타 종교에 귀의하는 자를 제외하고 단순히 위와 같은 사유로 성당에 나오지 않는 이에 대한 배려는 어떠한가. 처음엔 대부모들의 역할이 컷을 것이다. 여러 가지 사례를 들려주며 성당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독려하고, 다음엔 그 주위 신자분 들이 또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버틸 경우에 우리의 성직자들은 어떻게 하였나.
전화를 통하여 회두하였는가. 방문하여 회두하였는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1명의 냉담자보다 10명의 예비자를 키우는 것이 급선무다’라고 생각하여 이 들에 대한 관심조차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오늘과 같은 수치가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제들은 냉담자 회두에 적극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예비자도 점점 줄어들어 세례를 줄 사람도 없고 냉담자 회두도 않고 그냥 망하자는 얘기 아닌가.
이제는 예비자 모집보다도 냉담자 방문이 절실할 때이다. 예비자 열심히 모아서 영세 주면 몇 일 있다가 몇 달 있다가 냉담자가 되는 추세이다. 이제 천주교의 갈 길은 신자 증가에만 열성을 보일 것이 아니라 양보다 질을 선호해야 될 시점인 것이다. 세례자의 증가비율이 2%대에 머물지만 냉담자의 비율이 34%대에 있음을 교계는 인지해야 한다.
냉담자 회두는 예비자를 세례 시키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또한 같은 신자의 회두로 교회로 다시 돌아오는 신자의 수는 극히 일부이나 성직자의 가정방문이나, 따스한 말 한마디,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교회에 돌아오는 신자수는 실질적, 효과적으로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제는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는 문제점이 대두된다. 사제는 오로지 하느님 사업의 대리자 역할임을 각성하고 이의 적극적 실행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것이다. 사제 또한 사람인지라 사생활 보호 등의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사제의 길을 택한 이상 그 어느 것도 사목활동을 우선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적 사생활인 취미 및 기호는 억제하고 절제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순간 나는 없고 오로지 하느님의 대리자만 있는 것이다.
사목활동에 열심이다 죽는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순교가 또한 어디에 있을까 한다. 사제가 개인적 취미생활에 열중하는 것만큼 냉담자의 수는 더욱 늘고 사목활동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3) 사목의 일부
위와 연계하여 사제는 순수한 사목활동에만 열중하고 나머지 교회의 운영은 평신도 단체에 일임해야 할 것이다. 사제가 교회의 운영에 열중한 나머지 그로 인해 불협화음이 발생될 소지가 많고 사제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수 없다. 성전건축을 포함한 교회의 재정에 관한 문제는 평신도협의회에서 관장하여 시행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 부분은 시행 초기 신자간 문제점이 돌출될 수 있으나 곧 정상화될 수 있는 부분이다.(서울교구의 적지 않은 성당에서는 이를 시행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다)
- [가톨릭 신문] 창간 70주년 기념 조사(1998년)를 보면 사제의 사목활동을 '잘못한다' 또는 '대단히 잘못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높은 순위별로 보면,
소외 계층 방문, 가정 방문, 검소한 생활, 신자 교육, 신자들과의 친교, 신앙 지도, 정결한 생활, 미사 강론의 순이었다. 미사 강론과 정결한 생활을 제외하고는 만족도가 모두 50%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가정 방문, 소외 계층 방문은 긍정적으로 평가한 응답자보다 부정적으로 평가한 응답자가 훨씬 많음을 볼 때 사제는 사목활동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지 자성해야 할 부분이다.
위 조사 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외 재정에 사제가 관여하지 않고 소외계층 방문, 가정 방문 등 사목에 관한 일들만 하기를 신자들은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제가 교회 재정에 관여하다 보니 그만큼 시간을 내기가 어렵고, 금전적 문제로 개입될 소지가 있다. 사제는 사목활동만 열심히 하다보면 훌륭한 사제로, 잘하는 사제로 칭송이 자자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4) 사제와 교회의 무소유 강조
대전교구의 노사제가 와병 중에 전 재산 5억여원을 사회복지시설에 기부하여 칭송이 자자한 한편 어떻게 사제가 그 많은 금액을 모을 수 있는가의 부정적으로 보는 이가 훨씬 많음을 상기하여야 한다. 물론 노사제는 기부하며 이러저러해서 모든 돈이라고 해명은 했지만 그 돈을 평생 모아 기부를 할 것이 아니라 돈이 생길때마다 주위의 불우한 이웃을 위해 내 놓았다면 더욱 좋았으리라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부분이다. 사제가 은퇴를 대비하여 그 후를 걱정하여 축재행위는 금지되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 교구는 은퇴 후 거주지 및 생활비 전액을 교구에서 지원 방안을 강구하여 은퇴 후에도 한 푼도 필요가 없도록 제도적 장치를 교구는 마련해야 한다.
사제는 자신이 성전 한개 이상은 건축하여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사고는 이제 버려야 한다. 그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부작용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왕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당에 성당을 대규모로 건축하거나 호화스럽게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해야 한다는 사고가 머리에 박혀있어 이로 인한 부작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더 크고 더 아름답게 짓기 위해서는 신자들의 호주머니를 더 털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냉담자가 속출하게 되는 현상은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또한 그렇게 지어 봉헌한다 해서 하느님께서 과연 좋아하실까 의문이다. 성당은 작고 아름답게 건축하고 인원이 많이 늘어나게 된다면 미사의 수를 늘리고 그래도 안 되면 옆 동네에 다시 작고 실용적인 성당을 건축하면 되는 것이다. 또한 내가 성당을 꼭 지어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할 때다. 사제가 모두 그런 생각이라면 이 세상에는 사제의 숫자만큼 성당이 있어야 될 일 아닌가. 이는 유독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풍조가 아닌가 한다. 이에 반하여 굳이 독립적 성당이 필요한가에 대하여도 의문이 생긴다. 분가 초기처럼 남의 집에 얹혀살면 안 된다는 것이 교회법에 나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최근 개신교에서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무소유 교회 바람이 바로 그것이다. 하느님 성전은 아름답고 크고 내 것이어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의 집에 세 들어 살든, 조립식 건물에서 살든 하느님의 집에 내것 네것이 굳이 필요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동네가 성전을 건축할 만한 여건이 된다면 작고 실용적인 성당이라도 건축한다면 몰라도 그 만한 여건이 되지도 않으면서 성전 건축을 무리하게 강행하는 것은 온전치 않다. 우리 가톨릭에서도 개신교에서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무소유 교회를 이제는 선호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나. 청소년
최근 과학의 발달로 젊은 층은 주위에 할 일이 너무 많아 걱정인 세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형으로 쏟아지는 각종 컴퓨터계의 상품과 유흥산업이 이 들을 꼼짝 못하게 휘어잡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상품은 둘째 치고 젊은 층 어디 속박당하길 원치 않는다. 즉 구속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젊은이들이 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다. 이 들은 매 주일을 지켜야 하는 천주교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점차 이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다. 그 들은 그렇게 해야 하는 천주교리 자체를 인정하려 하질 않는다. 이 들을 성당에 붙잡아 놓기 위해서는 각종 문화행사를 빈번하게 시행은 물론 최신형 컴퓨터의 구비, 각종 오락시설을 마련으로 청소년이 교회로 다시 돌아오도록 아낌없는 지원과 노력을 쏟아야 할 것이다.
다. 사회복지사업 확대
기독교는 신앙의 참뜻인 나눔과 섬김이다. 이는 하느님의 참된 사업이다. 종교의 존립의 근거는 사랑 나눔이다. 사랑 나눔이 없다면 종교는 존립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초기 교회의 공동체 정신을 되새김해야 한다. 초기 교회의 공동체내에서는 주위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모두 합심하여 이를 도왔다. 이는 하느님 사업을 실천하는 길임을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최근 들어 교회는 이를 외면한 채 복지사업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는 예산에는 10%를 사회복지 기금에 사용토록 하라고는 하나 각 성당은 여러 가지 사정상 이를 집행하지 못하는 곳이 부지기수다. 이는 앞서 얘기한 성전 건축으로 인한 어려움이 제일 클 것이다. 대개의 성당이 건축금이 충분한 상태에서 성전 건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시작해 보고 나서 안되면 대출을 받아 건축금을 갚기 때문에 성전을 건축한 후에도 계속 대출금을 갚을 대까지 건축금을 내야 하는 형편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회복지기금 예산 사용은 어려운 실정이다. 그렇다고 빚이 없는 성당은 사회복지기금은 예산에 나온 대로 집행되느냐 인데 대개 그렇지 않다. 물론 사제에 따라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사제는 매주 미사 봉헌금의 10%를 사회복지기금으로 사용하라고 그 자리에서 빈첸시오회에 준다는 사명감과 의무감이 투철한 사제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제는 그렇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한 철저하고 명확한 예산이 집행되어야 하며 사회복지기금을 천주교유지재단에서 운영하는 복지시설로의 기부는 절대 안 된다. 사회복지기금은 성당에 위치한 지역내불우한 소외 계층에 대한 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예산의 10%가 아니라 30% 이상을 사회복지 기금으로 사용해야 한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으나 그렇다고 교회 본연의 의무인 나눔과 섬김 사업을 충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불우한 이웃을 위한 나눔이 없다면 교회의 존립도 되새겨야 할 부분이다.
라. 개방
앞서 청소년에 대해 잠시 언급은 하였지만 지역의 각종 문화, 예술행사는 성당에서 유치되도록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며, 교회 자체에서도 문화, 예술행사를 계획하고 실행되도록 탈바꿈되어야 한다. 문화 행사를 치루기 위한 장소가 성당이 최고이다. 넓은 공간과 효과적인 음향, 쾌적한 환경 등은 문화행사를 치루기 적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성당은 성스런 곳으로 미사와 천주교 관련 행사 외에 개방이 불가하다는 사고는 이제 버려야 한다. 한 명의 신자를 붙잡아 놓기 위해서는, 한 명의 청소년을 세례 시키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이 개방하여야 한다. 신자 없는 교회는 있을 수 없다.
또한 신자들의 단합과 친목을 위해 식당을 항상 개방하여야 한다. 식당 개방시 물품의 조달 및 여러 가지 불편사항이 뒤따름에 따라 특별한 행사 이외에 개방 하지 않는 것은 이제 버려야 한다. 개신교의 경우 아침에 교회에 오면 점심은 물론이요 어떤 때는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하루 종일 교회에서 살다가 집에 간다는 의미이다. 그러자면 교무금과 봉헌금을 상당이 많이 할애하여야 할 것이나 개신교처럼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신자들의 단합과 친목에 보탬이 된다면 수시로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항상 개방하여야 할 부분이다. 신자 10명이 어느 집에 가서 식사를 하기엔 너무 불편함이 뒤따른다. 허지만 교회 내에서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고 교회나 성당이 더러워지는 것은 절대 아님은 물론이고 매주 마다 많은 인원이 식당을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행사가 있을 경우만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마. 신자교육
교회의 본질과 이상을 현실 속에서 구체화하기 위하여는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모두의 노력과 변화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미래가 달린 참으로 중요한 것이 교육이다. 한국천주교회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은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서 함께하는 교회로’(한국천주교 사목국 발표) 거듭나야 함은 물론이고 평신도단체의 빛과 소금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천주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세상과의 유대이며,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는 신자들의 교육을 보다 합리적이고 체계화하여 기존의 보수적 삶에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현실에 부합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힘써야한다.
복음적 증거의 삶을 드러내는 선교 활동에 관한 전문적인 교육, 연구 및 교구와 본당을 연결시켜 선교 활동의 구체적 방향 제시를 지속적으로 전담할 부서의 필요성이 요청된다. 현실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선교율을 증가시키기 위한 전문적인 선교사 양성, 냉담자 비율을 감소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 성숙을 위한 신자 재교육 등을 담당할 전담 부서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신자재교육은 시대와 상황에 맞는 새로운 복음화의 시각과 방법으로 복음화의 주역이신 성령과 더불어 인간과 그 세계를 그리스도화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신자들은 보다 능동적이고 모범적인 사회생활을 실천함으로 일반인들에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자연스런 선교가 되도록 스스로 재교육을 적극적으로 수강하여 변모하는 세계에 적응토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냉담자 예방은 물론 냉담자 회두, 예비자 모집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냉담자의 1차 책임은 신자들의 몫이다. 교회는 철저한 교육으로 능동적인 냉담자는 절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 주5일제에 대한 대비
2004년 7월 1일부터 1000인 이상 기업체에 대한 주5일제 근무를 시작하고 2007년 7월 1일부터는 전 국민이 주5일제 근무를 시행함에 따라 우리 교계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대비책을 급히 마련해야 할 것이다. 주5일제 근무를 시작함에 따라 신자들도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야외로 타도시의 방문이 빈번해질 것은 분명하다. 그럴 경우 주일미사 참석이 문제로 대두되는데 행락지 근처에 성당이 있어 주일미사에 참여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냉담으로 연결될 수 있는 부분으로 금요일 특전미사를 신설하든지 여기에 대한 대비책을 하루빨리 마련하여 주일미사를 궐하여 냉담자로 이어져 가뜩이나 냉담자의 수가 급증하는 마당에 이들까지 합세해서는 안 될 것이다.
6. 결론
이상을 종합하면,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충실한 기도와 영성 생활을 함으로써 신앙과 영성을 지도해 주는 사제, 본당 운영 등 사목 활동에서 독선적이지 않고 평신도의 신원 특성을 존중하고 협력하는 사제,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보살피는 데 적극적인 사제를 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체로 현재의 성직자들에 대해 만족하고 있으나, 불만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성직자들의 기도와 영성 생활 불충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 부족 등에 대한 불만은 성직자의 신원에 비추어 하루빨리 개선되어야 할 점이라고 여겨진다. [가톨릭 신문] 창간 70주년 기념 조사(1998년)
교회사를 통해 볼 때,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외부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면 동시대의 변화에 부응하기보다는 뒤쳐지면서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키려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교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쇄신하는 가운데서 교회의 본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얼마전 한국을 다녀간 신학자 한스 큉은 이를 “세계를 위하여 존재하는 교회가 세계사의 변화 속에서 그 근원적 본질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은 부동성(immobilismo)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응성(aggiornamento)에 있다.”라고 말했다. 교회는 항상 역사와 인간 생활의 변화에 적응해야 하며, 개혁과 쇄신을 통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쇄신에 대한 노력과 이에 따른 제도적 개혁이 따르지 않는다면, 교계 제도의 진정한 권위는 권력화 될 것이고 많은 신앙인들이 교회를 떠날 것이다. (한국교회의 회개! 권위주의의 패러다임 바꾸기. 경동현 안드레아 우리신학연구소 사목조사컨설팅센터 연구원)
'내 눈에 교회와 절, 성당은 장사하는 장소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땅의 종교인은 자신의 밥줄을 옭아매는 위기가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는데 계속 호황을 누릴 줄 알고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 하며 기독교와 불교·천주교·유교 등 한국의 대표적 종교 행태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나선 그는 한국 종교가 권위주의에 빠져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비전을 제시하기는커녕 표류만 거듭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타교는 생략함)
천주교에 대해선 비교적 호의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유럽의 사고 중심으로 짜인 교단의 폐쇄성과 신부의 보수성에 일갈한다. “천주교는 무엇보다도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조직이 빈틈 없어 많은 한국인이 종교적인 위안을 천주교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천주교 성직자를 만날 때마다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장벽을 느낀다.”
신부는 겉으론 부드러운 것 같지만 안으론 철옹성 같은 벽을 지니고 있으며 이 나라 국민이기 보다는 이탈리아 로마 교황의 신민처럼 행동하고 다른 종교의 전통을 은근히 내려다보는 경향이 없잖다. 워낙 자신들의 조직이 크다 보니 다른 종교나 사회에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그 반대 입장에서 신학을 하려는 극소수 신부는 교구청 눈 밖에 나서 교계에 아무런 영향도 못 미친다.(1998/08/20 뉴스메이커. 제목 한국 종교는 망한다. 이는 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가 최근 서강종교연구회에서 발행한〈종교의 이해〉에 실린 ‘한국의 한심한 종교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할수록 종교의 역할이 불분명해진다. 어떤 이는 이로 인하여 더욱 종교에 귀의하거나 심취할 것을 예견하고, 어떤 이는 과학적 이해를 따져 앞으로 종교가 없어 질 수도 있다는 견해를 내 놓은 학자도 있다.
그러나 지금 종교의 존폐를 논하기 보다는 당장 어떻게 해야 한국천주교가 살아남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개신교의 우리보다 한 발 아니 한참 앞서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앞서 한스 큉이라는 신학자는 “세계를 위하여 존재하는 교회가 세계사의 변화 속에서 그 근원적 본질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은 부동성(immobilismo)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응성(aggiornamento)에 있다.”고 했듯이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물질문명 세계에 어떻게 빨리 대응하고 적응하느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른 종교는 날면서, 뛰면서 현실에 적응하려고 하는 이 시점에 가톨릭은 아직도 변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오히려 옛것을 지키려는 전통적, 보수적 사고에서 벗어나고 시도조차 않는다는 것이다. 변화하려는 노력조차 하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 천주교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고 더욱이 젊은 층의 유입이 심각하게 감소되고 있는 실정을 보아 머지않아 한국천주교는 문을 닫을 경우가 생길 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제 없이 이 땅에 뿌려진 순교자의 피는 아무런 가치 없이 허황됨으로 끝내려는가 다시 한번 오늘의 천주교를 되새겨보며 다음말로 결론을 맺는다.
“살아남는 자(종교)는
가장 힘센 자(종교)도 아니고
가장 똑똑한 자(종교)도 아니고
오직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사람(종교)이다.”
첫댓글 공잔지 노잔지는 확실치 않으나 한 문장을 만들려면 200번은 고쳐야 제대로 된 글이라고 하였으나 이 글에 너무 많은 시간이 허비되어 거칠고 다듬지 않은 문장을 그대로 게재합니다. 내용이 비판성이라(본인은 비판을 통해 발전을 기대) 혹 보기 힘든 부분은 너그러이 양해바랍니다.
수녀님이 얼른 보시기만 하면 삭제합니다
산사람님! 오랜만에 뵈어 반가웠습니다. 이 글 그냥 두시면 안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