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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김흥규 목사
<序: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재난의 소식>
지난 2월 18일 한국 대구에서는 큰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한 정신병자의 어처구니없는 방화로 수백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지하철 전동차의 객차 12개는 모조리 불에 타버렸습니다. 많은 승객들이 불탄 전동차 안에서 뿜어져 나온 유독가스를 견디지 못해서 질식사(窒息死)했다고 합니다. 슬픔을 당한 유족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번 대구 지하철 사고는 마음에 병든 한 사람이 불특정 다수를 겨냥해서 일으킨 방화 테러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합니다. 이 사건은 행복한 사람들의 그늘에 불행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가르쳐 줍니다. 여럿이 웃고 떠드는 사이에 가슴을 후비며 외로움에 떠는 병든 사람들이 있었음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먼저 마음의 병을 고치는 일이 이런 사고들을 막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 줍니다.
미국에서도 큰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지난 목요일 밤 로드 아일랜드 주의 한 나이트 클럽에서 불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시카고의 한 나이트 클럽에서 21명이 죽고 50여명이 부상을 당한 비극이 이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나흘 전에 있었습니다. 또한 지난 금요일 오전에는 뉴욕의 가스 시설이 크게 폭발해서 사람들이 테러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요즈음 지구촌 곳곳에서 각종 재난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를 보면 모든 것이 불안해 보입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국제 정서도 나라들끼리 서로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꾸만 미워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에 자꾸만 브레이크를 걸고 반대만 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시대 속에서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어디서 희망과 위로를 찾아야 할까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本 ①: 이사야가 보았던 '새 예루살렘'의 환상>
본문 말씀은 남(南)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뒤 일어난 사건입니다. 유다의 수도였던 예루살렘 성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망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한 30년 정도 포로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해방되었습니다. 페르시아의 국왕 고레스(Cyrus)가 바벨론 제국을 무찌른 뒤 유다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많은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와 무너진 성을 재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은 한편으로 큰 기쁨과 희망이 있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앞으로 새로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수 있다니 얼마나 가슴이 벅찼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들에게는 슬픔과 좌절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은 무너져 잡초가 무성했습니다. 당장 먹고 살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살림이 궁핍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든 것이 녹녹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불안전하고 불확실한 장래를 생각하기만 해도 걱정이 되고 비관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고, 희망과 절망이 쌍곡선을 그릴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눈부신 새 예루살렘 성이 재건된다는 약속입니다. 예전에 꿈도 꿀 수 없었던 놀라운 축복과 평화가 넘쳐날 새 나라를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장차 건설될 새 예루살렘 성은 모래나 벽돌, 모르타르 등에 의해서 건설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건축 재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마음의 터 위에 건설됩니다. 변화된 인격과 신앙의 건축 재료로 지어질 도시인 것입니다. 그러면 새 예루살렘 성에는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요?
<本 ②: '새 예루살렘 성'이 임하면>
첫째로, 19절 후반에 보니까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새 예루살렘 성이 도래하면 대구 지하철 사고나 로르 아일랜드의 화재 사건으로 자식을 잃고 남편을 잃고 부모를 잃은 사람들의 통곡소리가 들리지 않게 됩니다. 9-11 테러 사건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이들의 눈물이 사라지게 됩니다. 결국 모든 슬픔이 사라지고 모든 통곡이 자취를 감추는 기쁨의 나라가 된다는 말씀이지요.
둘째로, 20절에 보니까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가 되고 백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는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에는 날 수가 다 차지 못해서 일찍 죽는 어린 아이들이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부모는 모두 19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9명이 영아기에 죽었습니다. 그 때까지 의학이 발달하지 못해서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흔히 있었던 일입니다. 지금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미쳐 꽃도 채 피우기 전에 백혈병으로, 무슨 암으로 수없이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이 도래하면 이런 일이 없어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수한(壽限)이 차지 못한 노인도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장수하지 못하는 사람이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백 세쯤 되어서 세상을 떠나게 될 때 겨우 아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백 살을 넘기지 못하면 저주받은 사람이 될 정도로 장수가 다반사(茶飯事)가 될 것입니다. 결국 새 예루살렘 성에는 무병장수(無病長壽)하는 사람들로 차고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21절에 보니까 자기 집과 자기 포도원을 갖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집 없는 설움, 자기 농토 없는 설움을 가진 사람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셋방살이를 면하고 자기 집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람마다 남의 농토를 붙이는 소작농을 청산하고 자기 땅에서 나오는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빈곤이 사라지는 풍요한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넷째로, 22절을 보니까 부자나 힘있는 자가 가난한 자를 함부로 착취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부자나 권세 가진 자, 불의하고 강포한 자들이 남의 집을 가로채고 남의 땅을 빼앗는 일들이 근절될 것입니다. 결국 사회 정의가 실현된다는 말씀이지요.
다섯째로, 23절을 보니까 누구나 다 복받는 후손으로 태어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노동한 것이 헛고생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전쟁과 같은 재난이 일어나서 아이를 못 낳는 일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누구나 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축복의 자손들이 될 것입니다.
여섯째로, 24절을 보니까 기도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새 예루살렘 성이 도래하면 굳이 소리내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을 부르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기 때문이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리를 들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째로, 25절에 보니까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뛰어 놀 수 있는 평화의 나라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원수지간인 이리와 어린양이 화해합니다. 육식동물인 사자가 소처럼 초식동물이 됩니다. 사람을 무는 독뱀이 흙을 음식으로 삼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 성이 도래하면 이라크와 미국이 화해하게 될 것입니다.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어린양처럼 순해질 것입니다. 북한과 미국이 친구가 될 것입니다. 핵무기가 장난감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어떠한 상함이나 해함도 찾아볼 수 없는 평화의 세상이 도래할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런 나라가 이 땅위에 도래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아닐까요? 각박하고 냉엄한 현실로 비추어 볼 때 거짓 환상에 지나지 않을까요? 누구 말대로 'IMPOSSIBLE POSSIBILITY,' 즉 '불가능한 가능성'이 아닐까요?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말한 'UTOPIA'--'NO PLACE'--, 즉 이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어떤 공상적(空想的) 이상 세계가 아닐까요?
아마 그럴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비전이 이 세상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비전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만 합니다. 언젠가 이 땅위에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비전을 가슴에 품고 오늘의 암담한 현실을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本 ③: 미래의 힘이 되시는 '젊은 하나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연상할 때 흔히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지팡이 하나 잡으시고 긴 턱수염을 기르신 근엄하시고도 지혜로운 할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기 쉬운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나이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늙다 젊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性)도 없으십니다. 그래서 남성이다 여성이다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 대개 젊고 힘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노쇠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힘있고 발랄하고 늘 새것을 만드시는 젊은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끝없이 새것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창조된 이래 하나님은 끝없이 우주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생동감 넘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독일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는 하나님을 '미래의 힘'(the power of future)으로서 정의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 있는 우리들에게 오늘도 찾아 오셔서 미래를 건설할 지혜와 능력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은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창조된 이래 끝없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오셨습니다. 노아의 방주를 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망했을 때 이스라엘 역사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은 자들(remnants)을 통하여 새 이스라엘을 건설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사람들은 기독교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후에 부활이 시작되었고, 연이어 새로운 기독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 당했을 때 이방 선교의 희망은 무참히 꺾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절망했지만 하나님은 달랐습니다. 인간의 희망이 끝난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폐허가 된 도시를 보면서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새 예루살렘 성의 청사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시작은 곧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 때 된다고 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십시오!
<結: 다시 또 다른 시작을 꿈꾸며>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대구 지하철 사고로 죄없는 분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로드 아일랜드에서도 많은 분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전쟁의 위기 앞에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핵무기의 위협 앞에 떨고 있습니다. 도처에 피흘림과 반목과 증오와 불신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이사야가 보았던 환상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막다른 골목길에 이를 때마다 끝없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땜장이가 영국 감옥에 갇혀서 12년 간이나 고생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그의 운명은 끝난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자포자기했더라면 그 유명한 「천로역정」(天路歷程, Pilgrim's Progress)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존 버년(John Bunyan)은 시련과 치욕의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크고 놀라운 일을 시작하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 역사상 불멸의 고전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이래 끝없이 새 것을 만드시고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오늘 모든 것이 두렵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또 어떤 일을 시작하실지 지켜볼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 (빌 1: 6)
"희망 속에 사는 사람은 바이올린의 반주가 없이도 춤을 춘다."--"He that lives in hope dances without a fiddle." (아랍인의 격언)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