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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
전도서 5 : 1 - 7
그 동안 전도서 1장에서부터 4장까지 전도자 솔로몬은 지혜와 학문에 대해서 또는 인간이 누리는 쾌락, 명예 권세 또는 사업들을 말하면서 이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임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이란 허무한 것 뿐인가? 아닌게 아니라 인간이 지혜나 학문 쾌락이나 명예, 권세, 사업 이런 것들만을 위해서 산다면 정말 허무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셔서 이 땅에 살다가 죽으면 흙에서 왔던 것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에게는 짐승과 달리 영혼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특권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죄의 용서함을 받고 참 생명을 얻을 때 참된 만족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귀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간을 구원하고 그 형상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인간의 죄를 자유케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와서 다 얻고 다른 일은 많이 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이 사람은 그가 가진 지혜나 학문, 명예나 권세, 큰 사업이 아무 소용이 없는 허무한 것 뿐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생 얻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야 하겠는가 하는 것을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5장 1절을 보십시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로다 .”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솔로몬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이 성전은 그가 막대한 경비를 들여 친히 지은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했던 다른 모든 사업들은 유감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전도서 2장 3-5절에 보면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식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으며...”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사람이 하루를 즐겁게 살려면 이발을 하고, 한 달을 즐겁게 살려면 장가를 들고(Honey moon) 일년을 즐겁게 살려면 새 집을 지으면 된다” 사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즐거움 영원한 보람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경우 자기가 했던 다른 모든 사업은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성전을 건축한 일에 대해서만은 후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일을 회상하면서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일을 언급하지 않은 까닭은 자기가 자만심을 가지고 돌이켜 보는 것처럼 여겨질까 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세상의 헛됨을 더 많이 알고자 하는 자들과 피조물 속에서 쓸데없이 행복을 구하려고 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전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시편 73편 16-17절에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은 내가 깨달았나이다.” 그는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혼자 고민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로부터 회답을 얻곤 하였습니다. 이거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신앙 생활이 다른 것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앞에서 고민하며 몸부림치다가 하나님께로부터의 해답을 얻고 새 힘을 얻고 소생하는 체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것 피조물에서 실망을 당하게 될 때 우리의 눈을 들어 주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말씀에 의지하고 그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주님께 상의하며 그에게 간청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에는 모든 상처를 낫게 하는 향유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 우리가 처신해야 할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진지하고 신중하게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에서 네 발을 삼가라.”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엄숙하게 멈추고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고 성급하게 굴지 말아야 합니다. 당황하거나 급하게 서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성경 해석자는 “네 발을 삼갈지어다”하는 말씀을 복종과 경외의 상징으로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신 명령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령 출애굽기 3장 5절에 보면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였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하였습니다.
여호수아 5장 15절에도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0장 19절에는 “네 발을 깨끗이 하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은 거룩한 곳 거룩한 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신을 벗어야 합니다. 발을 삼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면 먼저 세상을 끊어 버리고 나서는 결단이 필요하고, 그 다음은 나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내 발의 신을 벗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 모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누가 깨끗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의 문을 통과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우매자의 제사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잠언 15장 8절에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신이신 고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정성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의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맡긴 것 뿐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열의 하나를 바치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정성을 바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성전에 예배하러 온 사람 중에 아주 대조적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가난한 과부요 다른 한 사람은 돈 있고 권세 있는 부자였습니다. 가난한 여인은 자기의 가진 것이 엽전 두잎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서 다른 사람 보는데는 부끄러우니까 남몰래 헌금 통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돈 많은 부자는 그 많은 부자는 그 많은 돈 가운데서 손에 잡히는 대로 얼마를 아무런 생각없이, 있다면 그가 내는 많은 액수를 다른 사람이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헌금 통에 넣었습니다.
예수님의 결론은 그 부자의 헌금은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가난한 여인이 드린 정말 하나님께 바친 이 헌금을 받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성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 성도들의 십일조 헌금, 감사 헌금이 점점 더 늘어납니다. 사실 십일조 헌금하지 아니하고 신앙생활 바로 한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칠 줄 모르는 사람, 세상에서는 이것을 탈세한다고 해서 형사상 법에 걸리는 일인데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서 복을 받겠다면 되겠습니까?
정성을 드려야 합니다. 쓰다 남은 것이 아니라 먼저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드리는 제물이 우매자의 제물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찢긴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제물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말라기 1:6-10).
그런데 이것 보세요.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하는 것을 생각하기보다 그저 생각 없이 되는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예배를 드리려고 하면 “하나님께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가령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경이 봉독될 때 말씀이 선포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알려졌으면 거기에 부합하게 살기 위한 생활이 따라야 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순종”을 의미합니다.
구약 사무엘상 15장 22절이나 이사야서 1장, 15, 16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말씀하소서. 당신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런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5장 2절을 봅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경건되게 예배드림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에 있는 것을 기억하고 몸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그를 향하고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향하시는 순간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늘 생각하면서 예배드리십니까?
그런데 어떤 분은 이것을 미처 의식하지 못해서 예배 시간에 근들 건들 조는 분이 없나, 옆의 사람과 공연한 잡담을 하는 분이 없나 도무지 세상 임금 앞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들리는 말이 “갈보리 교회는 예배의 분위기가 엄숙하고 좋아서 예배에 참석만 해도 그 분위기에서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좋은 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좀더 힘써서 정말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를 드려야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했는데 얼른 생각할 때 ‘하나님은 너무하시다’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요새 세상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맘대로 할 수 없이 입을 막아 놓았는데 하나님께나 좀 속시원하게 털어놓아야 살겠는데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면 어떻게 살란 말인가?
여러분, 여기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불평, 불만,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기쁠 때 찬송을 금하신 것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찬송할 것입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간구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겠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편 50편 15절)하셨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시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혹시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신 분은 “아니, 그것은 하나님도 유신 헌법에 의한 체제나 긴급 조치 9호를 발동하는거나 반대하면 법에 저촉되게 되었는데 그거다 하나님이 가르친 것인가? 하나님은 그런 독재인가?”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독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지배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조금이라도 반대의 의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다릅니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우리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완전한 분이 통치하는 곳에는 독재 이상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이 통치하는 이 세상에서 독재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 나라에서 소위 유신 체제를 영구적으로 지속할 수도 없거니와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이렇게 특수한 상황 속에 있으니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 당분간 우리의 자유를 소위 유보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보세요. 교회는 민주주의의 본산입니다. 누구나 자기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의견이 일치될 때는 그것으로 결정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시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시끄럽게 그러는 것이 귀찮아서 아예 “내 말은 하나님의 뜻이다. 내가 기도했더니 이렇게 하라신다”하고 하나님의 뜻이다. 내가 기도했더니 이렇게 하라신다“하고 내미는 독재형이 있는데 아마 일하기는 쉬울 것입니다. 누구도 반대 못하니까요. 그러나 그런 교회 얼마 오래가지 못합니다.
교회는 민주주의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왜요? 보이는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목사가 신령하다고 해도 하나님은 아닙니다. 목사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바로 잡아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잠잠해야 합니다. 원망이나 불평은 용납되지 아니합니다. 2절 마지막 부분과 3절 하반에도 “말을 적게 하라”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꼭 필요한 말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을 아껴서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끼리 말하는 것처럼 조심성 없이 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중언부언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이 말은 기도를 길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밤이 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한 달에 한번은 철야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조심없이 마음에도 없는 기도를 드리는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 대화에도 말 수가 너무 많은 사람이 더러 있는데 말 수가 많을수록 별로 요긴한 말은 없습니다.
잠언 25장 11절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잠언 15장 23절에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하였습니다.
끝으로 본문 4절에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말라,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하였습니다.
시편 50편 14절에도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하였습니다.
가정 생활에서든지 교회 봉사하는 것이든지 하나님께 약속한 것 있으면 그대로 갚는 것이 마땅합니다. 나는 약속을 못 지키면서 하나님더러 약속 지키라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신발을 벗고 발을 삼갑시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 말을 삼가야겠습니다. 불평 말고 순종합시다.
셋째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것은 갚으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