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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 11 한 구멍으로 단물과 쓴 물 - 약 3: 12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약 3: 11 한 구멍으로 단물과 쓴 물 -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
본 절의 샘의 비유는 매우 인상적이고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건조한 팔레스타인 기후에서 샘의 중요성이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많은 마을과 촌락들이 이 샘과 시내를 의존하여 형성되었다(Moo, Martin).
본문에 처음 등장하는 '메티'(어찌 ... 하지 않겠느냐?)는 야고보가 즐겨 쓰는 문학적인 표현으로,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하면서 질의하는 수사학적인 질문이다(Moo, Martin, Robertson).
야고보는 이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서 한 샘이 두 가지 맛을 낼 수 없음을 예로 들어 한 입에서 경배와 저주가 나오는 것이 부당함을 예증한다.
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구멍'(오페스)는 땅의 갈라진 틈 또는 바위 표면에 갈라진 틈을 의미한다(Robertson, Tasker, Adamson).
이러한 틈새에서 솟아나는 두 종류의 물 즉 '단 물'과 '쓴 물'은 '신선한 물'(fresh water)과 '짠 물'(salt water)을 가리킨다(NIV, RSV).
* 민 5: 24 - 여인으로 그 저주가 되게 하는 쓴 물을 마시게 할찌니 그 저주가 되게 하는 물이 그의 속에 들어가서 쓰리라.
한 샘에서 신선한 물을 내놓다가 다시 짠 물을 내놓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Moo, Martin, Adamson), 만약에 신선한 물에 쓰거나 짠 물이 첨가된다면 그 물은 이미 신선함을 잃어 효력을 발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물을 마시는 자에게 피해를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나오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혀가 사악하게 활용되었을 때 그 말은 바로 이 쓴 물과 같아져서(Moo) 비극을 초래하며 전체를 그릇되게 한다(Martin).
약 3: 12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
1]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본문 역시 부정어 '메'(아니)로 시작되어 부정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수사학적인 질문이다(Martin).
본문에서 열거되는 무화과나무, 감람열매, 포도나무, 무화과 등의 식물을 사용하는 비유는 고대 문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Martin).
신약성경에도 복음서를 중심으로 여러 번 사용되고 있다.(Martin, Adamson).
* 마 7: 16-20 -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 마 12: 32-33 -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33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 눅 6: 43-45 -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이 비유가 신약성경에서 사용될 때의 의미는 '선한 마음에서 선한 것이 나오고 악한 마음에서는 악한 것이 나옴이 마땅하다'는 것이다(Moo, Martin).
* 마 15: 19 -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 막 7: 21 -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따라서 야고보는 본 비유를 통하여 모든 나무가 자신의 특성에 맞게 열매를 맺음을 강조하고 있다.
2]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야고보는 본문에서 11절의 질문으로 돌아가 11-12절의 수사학적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앞서 언급한 이중성의 부당함, 즉 한 샘에서 두 종류의 물이 나올 수 없고 한 나무가 다른 종류의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드러낸다.
더 나아가 짠 물은 짠 물일 뿐이라는 일관된 부정적 견해 즉, 혀의 악함을 드러내어 강조하고 있다(Tasker, Moo, Martin).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 근원에 있어 나무와 열매의 비유처럼, 짠 물이 단 물의 근원일 수 없기 때문이다(Burdick).
그러므로 선한 사람의 입에서 선한 말이 나오고 악한 사람의 입에서는 악한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야고보는 자연의 이치를 들어 악한 말이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는 것을 말한다. 샘은 단 물과 쓴 물을 함께 낼 수 없다.
과일나무는 같은 종류의 열매만 맺지 한 과일나무가 다른 열매를 맺지 않는다.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어떤 샘도 짠 물과 단 물을 함께 내지 못하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성도의 언어생활은 확실히 달라야 한다. 성도가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난바 되었고 그 마음이 깨끗케 되고 새롭게 되었을진대, 그는 구원받은 자다운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의 언어생활에 대해 많이 말씀하지만, 특히 바울의 에베소서에서 우리는 몇 구절 인용해 볼 수 있다.
* 엡 4: 25, 29, 31 -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 엡 5: 4 -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3] 한 입으로 두말하지 맙시다. : 김정남 목사
< 선생처럼 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
대인관계를 올바로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를 아름답게 가꾸고 사용하는 일입니다. 사실상 언어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인간관계가 깨지는지 모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회자였던 야고보는 목회를 하면서 말로 인간관계가 어렵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선생처럼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 선생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을까요?
첫째, 말하다가 실수할 가능성이 많이 때문입니다. 말을 많이 하다 보면 계획적으로 나쁜 말, 잘못된 말을 한 것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잘못된 말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2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말에서 실수한다는 말입니다.
둘째, 자기도 실천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선생인 것처럼 말하면 그 말한 만큼 실천하지 못할 가능성이 아무래도 많아집니다. 말은 그럴듯하게하고 그 말한 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더 야단맞을 거리가 됩니다.
셋째, 남을 오도할 가능성이 많이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교육은 실천이 앞선 교육이고, 스스로 모범을 보여주는 교육입니다. 그런 삶에서 바른 교육이 나옵니다. 그러나 선생처럼 말을 많이 하면 실생활에서는 적용할 수 없는 추상적인 교육의 가능성이 커지고, 자기는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면서 남에게만 강요하는 위선적인 교육의 가능성이 커지고, 다른 사람들을 오도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러므로 선생이 된 것처럼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새 가끔 신문에서 속보경쟁을 통해서 잘못된 보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문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도지침이 있습니다. “남보다 많은 보도를 하지 못하고 남보다 속보 경쟁에서 뒤지는 한이 있어도 최대한 오보를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을 할 때에도 너무 말을 많이 하고, 너무 선생처럼 다 아는 것처럼 말하면 오도의 가능성이 많습니다. 10번 말을 잘해도 1번 말을 잘못해서 오도하면 듣는 사람들에게 큰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이 된 것처럼 말을 많이 하는 태도를 주의해야 합니다.
< 혀는 놀라운 위력이 있습니다 >
우리는 살아가면서 말이 얼마나 큰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아마 말의 위력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건강진단을 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습니다. 혈압을 재고, 맥박을 재고, 간단한 검사를 하고 혈액을 채취했습니다. 혈액을 채취할 때 평소에 운동이 부족해서 혈관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간호사가 한 마디 했습니다. “손님! 혈관이 너무 약해요. 건강관리 잘 하세요.” 그 말을 듣고 두려움이 엄습해서 불안에 떨다가 불면증에 걸려 6년을 고생한 사람이 있습니다.
혀가 작아도 놀라운 위력이 그 안에서 나옵니다. 때로는 그 모습을 보면 정말 신비한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 신비한 능력을 선용할 것인가, 악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의 태도에 딸려 있습니다.우리는 말로 큰일을 이루어낼 수 있고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혀는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본문은 혀의 위력을 강조하기 위해서 3가지 도구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1. 첫째, 재갈입니다. 본문 3절에 나오는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라는 구절에 쓰인 ‘말’이라는 단어는 ‘타는 말(horse)'을 말합니다. 재갈은 길길이 날뛰는 말(horse)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말(word)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2. 둘째, 배의 키입니다(4절). 배에 비해 엄청나게 작은 키가 결국 배를 움직이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3. 셋째, 불입니다(5-6절). 혀는 뼈가 없고 부드러워서 겉으로는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단단한 이빨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모든 것을 태우는 불 이상의 놀라운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은 좋은 것을 태우는 나쁜 역할도 하지만 나쁜 것을 태우는 좋은 역할도 합니다.
말의 위력을 잊지 마십시오. 말은 생명을 죽이는 위력도 있지만 생명을 살리는 위력이 있습니다. 온유한 말은 상처에서도 새 살이 돋게 하는 위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먼저 가서 부드러운 말로 사과해야 합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 못하느냐고 하면 그렇게 하면 상대방이 정말 자기가 잘한 줄 알고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기고만장하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 보기 때문에 사과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잠언 15장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보시는데 손해 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말의 위력을 생명을 죽이는 힘으로 각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힘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 좋은 말이 나오는 입을 만드십시오 >
그러고 나서 본문 7-12절은 말로 인한 축복과 저주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문제를 다루면서 야고보는 말로 저주하는 일이 없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라도, 혹시 맞아죽는 한이 있더라도 입으로 저주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가끔 교회를 옮겼다고 저주하는 목회자, 저주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교회에 오면 “할렐루야! 잘 오셨습니다.”라고 환영하는데, 반대로 교회를 떠나면 “앞으로 잘 사나 두고 보자!”고 저주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경우를 꽤 많이 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반응을 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기준으로 반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가는 것이 절대 안 되면 오늘 것도 절대 안 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만약 오는 것을 환영하면 가는 것도 기쁨으로 보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모습이 없기에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를 옮기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 교회만 주님의 교회가 아니고, 저 교회도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옮길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면 기꺼이 보내주어야 합니다.
새들도 먹이를 찾아 국경을 넘습니다. 하물며 영혼의 갈급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교회를 옮기는 것이라면 그 영혼을 저주하는 말로 얽어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을 가지고 복을 빌어 주고 축복하기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입술을 가지고 한 가지 종류의 말만 하십시오. 하나님 찬양하는 입으로 다른 저주의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눈과 귀는 두 개이기 때문에 때로는 두 가지 종류의 상황을 보고 두 가지 종류의 말을 들으면서 분별력을 키워야 할 때도 있지만 입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 한 입으로 두 가지 말을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항상 입술을 아름답게 지킴으로 포용력 있는 삶의 주인공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