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청솔 칼럼 <윤 세원 박사의 족적> (원자력연구 초석을 놓다)
청솔/윤 덕 명
지금은 우리나라가 원자력 발전의 선도국가로 발돋움을 하였지만 육십년 전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은 원자력(原子力)의 불모지였다. 한국전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7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은 한 젊은 과학자를 불러 우리나라가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지 물었다. 대통령의 이 같은 질문이 있었던 다음해인 1958년 우리나라는 원자력법을 제정하고, 1959년에는 현재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전신인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과학자는 나중에 한국의 원자력 연구에 씨를 뿌렸고 오늘날 원전 강국의 초석을 닦았다. 그가 바로 윤세원 박사다. 윤박사는 연희전문을 졸업 했고 일본의 교토대학에서 우주물리학을 전공했으며 광복 후 국내로 돌아왔다.원자력 연구를 태동시킨 1세대 과학자인 윤 세원(1922년생) 박사는 2013년 3월16일 지병인 폐렴으로 향년 91 세로 타계했다.
서울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56년 원자력분야 첫 국비장학생으로 뽑혀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듬해인 1957년 국내로 들어와 당시 문교부 기술교육국 원자력과장을 맡으며 우리나라 원자력 연구를 개척하였다. 윤 박사는 이후 원자력연구소 원자력부장을 지내며 우리나라 첫 연구용 원자로 건설을 주도했고, 물리학회 회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경희대학교 부총장, 선문대학 총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자로서도 발자취를 남겼다. 대한민국은 2024년 기준으로 5곳의 원자력 발전소와 24기의 원자로를 가동 중이다. 발전량 기준으로는 세계6위이며 회사 단위로는 세계2위의 전자력발전회사인 한국수력원자력이 있다. 원전은 한국 내 전기 생산량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발전소는 한울, 월성, 새울, 고리, 한빛에서 가동 중에 있다.
원자력 발전소는 2001년 4월2일 설립한 한국 전력공사 계량발전회사인 한국수력원자력에서 독점운영하고 국무총리 직속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산하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인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및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을 통하여 감시감독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은 UAE 원전사업을 수주함으로써 세계6번째로 상용원전 수출국으로 부상을 하였다. 이것으로 한국은 1978년 상업형의 원전인 고리 1호기를 외국 기술로 도입하여 가동한 이후 31년 만에 우리 기술로 원전을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1958년 원자력 연구를 시작한지 반세기만에 세계 원자력 시장에서 미국, 프랑스 등의 원자력 선진국과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원자력 수출국이 되었다. 2021년 4월 상업운전에 돌입하여 한국의 설계, 재작, 시공, 운영 등 해외원전사업 능력을 전 세계에 입증하게 되었으며 신흥원전시장에서 제2의 해외원전수출의 교두보가 될 것을 기대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원자력 관련기업이 593곳에 이르고 있다.
필자가 1989년도 3월 선문대학에 부임할 때는 그 당시 천안의 삼룡동에 있는 감리교 성화신학교를 갓 인수받아 40명의 신학과로 출발을 하여서 1991년도 해외선교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증원하여 120명이 되었다. 이듬해는 4년제 종합대학으로서 선문대학이 인가 받은 그 날 윤세원 총장은 평생학술회원이 되었다.기숙사와 대리석 5층 석조건물은 그 위용을 드러내기에 충분하였다. 천안의 캠퍼스가 협소한 관계로 1993년에는 아산시 탕정면 갈산리로 본 대학을 이전하여 지금은 우람한 규모의 수많은 건물과 3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고층의 생활관도 확보하게 되었다. 윤 세원 박사는 선문대학에서 초대와 2대에 걸쳐서 연임을 하여 선문대학을 기초를 다졌고 발전을 시켰다. 설립자 문 선명 총재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시며 지금은 대학원생을 포함하여 1만 명이 훨씬 넘는 거대한 대학으로 초석을 놓는데 지대한 공적을 세웠다. 우리나라 원자력발전의 대부인 윤 세원 총장께서 성화하신지 11주년을 맞이하여 그 분의 업적을 회상해보았다.
~2편~
.< 무신호등의 오거리>
청솔/윤 덕 명
자동차가 달리는 거리에 신호등(信號燈)이 없으면 충돌사고가 나게 마련이다. 시가지에서 뿐만 아니라 고속도로의 경우에는 대형사고로 직결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의 으뜸은 인간의 생명(生命)이다. 목숨이 두 개쯤 된다면 모를 일이겠지만 누구에게나 목숨은 단 하나밖에 없는 까닭에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가 없기에 보물 중에 가장 소중한 보물인 셈이다. 내가 사는 곳은 동작구의 사당동이다. 둘째 딸의 첫 외손녀가 구로구에서 우리 집으로 유학을 온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삼학년에 진급하면서 우연찮게 학부모 가운데 교통지원단모집이 있어서 딸아이가 신청을 하였다. 2023년도 삼월 초입 입학과 더불어 아침 등교시간에 한 시간 동안 교통정리를 일 년간을 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정년은퇴 이후 가장 보람된 아침을 맞이한 한 해의 아침이기도 하였다.
하절기 폭풍우가 쏟아지는 아침의 거리는 을씨년스럽기가 그지없다. 동절기에 눈이올 때도 마찬가지다. L마트 오거리에는 신호등이 없기 때문에 세 명이서 형광봉과 수기를 가지고 바쁘게 수신호로 교통정리를 해야만 했다. 장차 나라의 제목감인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바라본다는 것 자체로도 보람찼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은 일방통행임에도 역주행을 고집하는 운전자가 있는가 하면 좌회전 신호도 넣지 않고 느닷없이 급회전하면서도 주의를 주면 육두문자를 쓰는 무례한도 개중에는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어떤 선량한 사람들은 목례를 하고 격려의 말씀을 하는가 하면 음료수나 커피를 선사하기도 했다. 유독 운전자들의 괴팍한 성격이 아침의 분위기를 멍들게 함으로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별아 별 사람이 다 있지만 그러려니 하고 잘 넘어간 것이 다행이었다.
일 년 동안의 책무가 끝나고 지난 2월6일 남사초등학교 졸업식 때 학교로부터 통보를 받고 교장실로 갔다. 전교생에게 방송으로 중계하는 가운데 일곱 명의 지원단이 교장선생으로부터 한 사람씩 감사장을 받게 되었다. 정래준 교장선생님은 정년을 이년 여 남겨 놓고 있는데 나와는 묘한 인연이 있다. 나의 막내딸이 이 학교의 6학년 반장이었을 떼 담임을 하였기 때문이다. 딸아이 결혼식 때도 참석을 하셨고 지금도 끈끈한 사제지 관계가 돈독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가치와 보람을 창출한다. 두 명의 남성과 다섯 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교통지원단원들에게 감사하고 학교 측의 배려와 지원에도 고마움을 금할 길이 없다. 인생사의 오거리에서 벌어지는 모든 갈등도 교통법규를 잘 준수함으로 무사고의 한 해가 되기를 빌어 염원해 본다.
20240206(화) 남사초등학교 졸업식 날에.
~3편~
<하늘의 별, 가슴엔 양심>
청솔/ 윤 덕 명
독일의 철인(哲人) 임마누엘 칸트는 말하기를 내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이 있다면 첫째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이고 다른 하나는 내 가슴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양심(良心)이라고 설파한 것을 기억한다. 필자의 고향은 지리산과 인근하고 덕유산에서 발원하는 영호강이 유유히 흐르는 곳! 첩첩산중으로 둘러진 경남의 최북단 거창이 내 고향이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경계선이 시가지의 중심을 동에서 서로 흘러 합천댐으로 가는 상류인 셈이다. 그야말로 산 높고 물이 맑은 대륙의 분지다. 그곳에 내 유년기 시절 나의 꿈이 있고 아름다운 추억의 강물도 흐른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고향을 떠나 객지로 떠돈 세월이 어언 반세기기 훌쩍 지났다. 소년이노(少年易老)하고 일촌광음(一寸光陰) 불가경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요즘은 온 몸으로 체감이 되고 있다.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은 누구나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공식적인 인생길을 가고 있다. 태어난 것은 분명히 나의 자의가 아닌 타의였다. 부모님 사랑의 결실임과 동시에 하늘의 뜻임이 분명하다.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무수한 선택의 기로에 봉착(逢着)한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는 인생을 정의하기를 ‘인생이란 B와 D사이의 C’라고 정의하였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출생과 죽음의 사이에서 매 순간마다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이고 있다는 삶의 곤혹(困惑)이기도 하다. 죽음이란 불가피한 삶의 한 매듭이기도 하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삶을 잘 마무리하느냐가 강건(剛健)이다. 요즘 주변에 구국의 길에서 함께 매진한 벗의 갑작스런 죽음을 보면서 인생의 가을이 짙어짐을 체감하게 된다.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 정치와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을 실로 막중한데 작금의 정치 현실에 대한 불신과 회의감(懷疑感)이 강하게 엄습해 오는 것은 나만의 우려이겠는가? 왜 그리 자신의 사리사욕(私利私慾)과 당리당략(黨利黨略)에 찌들어 국민들을 우롱하고 얕잡아 보는지 참으로 분노와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나만의 걱정이면 얼마나 좋을까? 야당의 대표라는 사람이 손바닥을 뒤집듯 돌변하는 작대를 보면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철면피(鐵面皮)의 대표주자라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양심을 전당포에 맡긴 전형적인 카멜레온의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종교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단사이비 논쟁은 어제 오늘이 아니고 사회가 혼란할수록 죄의식을 가지게 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 같아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는 노릇이다.
요즘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와 흡사한 상사형의 이념논쟁으로 좌우갈등과 남남갈등이 극에 도달했다. 특히 영호남의 지역감정이랄까 아니면 그간의 호불호를 떠나 불공평한 지역발전에 대한 불평이라고 할까 아무튼 골이 깊은 것이 사실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물론 세대갈등도 심각하다. 같은 언어지만 소통보다는 스마트 폰이라는 기계와 대화를 하는 모습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사람이면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라는 평범한 그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면서 특히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의 진정어린 각성과 양심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조심스럽게 권고해 마지않는 바이다. 양심에 털이 나고 그 양심을 전당포에 맡긴 모든 사람들이여! 한 철학자의 말을 되새겨 보면서 ‘네 탓이 아닌 내 탓’으로 여기며 본심의 모습을 되찾는 서로가 되기를 갈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