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일 22기 선교사 묘역…양림동은 '예루살렘'
양림 산을 오른다. 산이라고 해야 하나, 뒷동산이 어울린다. 굳이 산이라면 해발 108m다. 100여 년 전에는 돌림병이나 괴질로 숨진 아이들을 묻던 풍장 터였다. 수더분하고 너그럽게 광주 양림동을 껴안는다. 양림산 가장 자리에 오웬과 윌슨, 유진 벨이 누워 있다. 한여름 짱짱한 잎들로 숲을 이뤄 이들을 보듬는다. 근세 호남에서 복음을 전하다 숨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묘역이다. 모두 22기가 안장돼 있다. 특정 교파의 선교사 묘지가 한자리에 있는 건 세계에서도 드물다고 한다. 그래서 양림동은 ‘예루살렘’이다.
파란 눈의 선교사들이 호남에 온 것은 1893년. 미국 남장로교 소속 테이트 등 일명 ‘7인의 선발대’가 발을 내디뎠다. 그들을 뒤이어 1895년 유진 벨 선교사가 목포에 교회를 세웠다. 이들은 미국 남부 농촌 출신으로 ‘행함’과 ‘섬김’이 몸에 배었다. 서울 등 수도권에는 지적인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파송됐는데, 결이 약간 달랐다. 남장로교는 유독 의료사업에 전력했다.
호남 남장로교 3인방은 오웬, 윌슨, 포사이트였다.1898년 11월 목포에 도착한 오웬은 바로 의료 사역에 나섰다. 불과 몇 달 동안 400여 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목포 교회의 눈부신 성장은 실상 오웬의 의료사역에 힘입은 바 크다. 1896년 반듯한 진료소가 문을 열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소외된 이들에게 의료의 손길을 내밀었다. 아픔의 치료와 공감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1904년 광주로 자리를 옮긴다. 1908년 새로운 선교사 윌슨이 부임하자 그와 함께 광주진료소를 꾸렸다. 광주진료소는 제중원, 현 광주기독병원의 전신이다.
목포진료소는 호리호리한 포사이트 선교사가 맡았다. 1873년 미국 켄터키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의대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의사였다. 1904년 8월 전주 예수병원에서 첫 의료 활동에 나섰다. 전북 일대를 돌아다니며 진료와 목회를 동시에 수행했다. 시골에 왕진을 갔다가 난데없이 강도를 만나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상처는 깊어 한국에서 치료가 어려웠다. 잠시 치료 차 미국행, 그는 모든 이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1909년 목포로 다시 돌아왔다.
다급한 한 통의 전보가 목포 선교부에 들어왔다. 오웬 선교사가 급성폐렴에 감염돼 사경을 헤맨다는 전갈이었다. 급히 행장을 꾸려 조랑말에 올랐다. 1909년 4월4일, 목포를 떠나 남평쯤 도달했을까. 길가에 여자 걸인이 쓰러져 있었다. 몸에서 참을 수 없는 역한 냄새가 풍겼다. 머리는 산발로 몇 달 동안 빗질을 하지 않은 듯했다. 손과 발은 짓물러 형태를 알 수 없었다. 그마저 한쪽 발에만 헤진 짚신을 신고 있었다. (1908년 8월 선교부 보고서 발췌)
한센병 환자였다. “살려주시요. 살려….” 걸인은 손을 내밀며 신음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침을 뱉었다. 어떤 이들은 돌멩이를 던졌다. 한센 병은 천형,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 해서 친자식도 집에서 내쳤다. 그녀를 부축해 말에 태웠다.
포사이트가 광주에 도착할 땐 이미 오웬은 운명하고 말았다. 동료 선교사를 살리기 위해 길을 재촉했으나 한센 병 환자를 거두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양림동 광주 선교부에 오웬의 부인이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다. 부인은 남편의 침대를 내주며 환자를 눕히도록 했다. 기력을 차리니 진료소로 옮겼다. 난리가 났다. 문둥병 환자를 병원에 데리고 왔다며 환자들이 거칠게 항의했다. 다른 곳으로 옮길 수밖에….
포사이트는 광주진료소를 책임지고 있던 윌슨과 상의했다. 이 환자를 눕힐 작은 공간은 정녕 없는가. 진료소 근처 오래된 벽돌가마터를 발견했다. 가마를 입원실로 지정했다. 이날이 1909년 4월7일, 사실상 광주나병원이 생긴 날이다.
포사이트 선교사가 한센병 환자를 말에 태워올 때 이를 지켜 본 청년이 있었다. 최흥종, 그는 고귀한 선교사가 문둥병 환자를 귀한 손님 모시듯 하는 모습을 보았다. 충격이었다, 그는 훗날 선교사를 찾아가 목회자의 삶을 살겠다고 각오했다. 1921년 평양신학교 졸업 후 시베리아 제주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조선나환자근절협회를 조직, 평생을 한센병 환자와 결핵환자와 같은 소외된 이웃의 구제에 혼신했다. 거지들의 아버지로 칭송받았다. 포사이트는 목포에서 활동하다가 1911년 미국으로 돌아가 1918년 5월 45세로 숨졌다. 한국에서 걸린 풍토병이 사인이었다.
광주 한센병 환자들은 그를 못 잊어 십시일반 당시 9척 크기의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광주 봉선리에서 1926년 여수로 옮겨졌다. 한센인들이 일주일 동안 기념비를 이고 지고 130㎞를 걸어 옮겼다고 한다. 포사이트에 대한 이들의 감사의 깊이를 나는 가늠할 수가 없다. 손 발 짓뭉개진 한센인들이 돌덩이를 보듬고 가는 숭고한 행렬이 차마 그려지지 않는다. 흔히들 진정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진정성은 보여주는 게 아닌가 보다. 그저 맘과 몸으로 전율처럼 전해져올 뿐 일게다.
포사이트의 헌신은 윌슨에게 이어졌다. 1880년 미국 아칸소 주 콜럼버스 태생으로 워싱턴 의대를 나왔다. 1908년 2월 광주에 왔다. 윌슨은 한센병 치료에 나섰다. 소문이 입을 타고 환자들이 전국에서 광주로 모여들었다. 급한대로 입원실 2개를 급조해 환자를 돌봤다. 1912년 11월에야 월산면 봉선리에 건물을 지어 정식으로 나병원을 개원했다. 광주 나병원은 특이한 E자형 구조의 한옥이었다. 병원 자금을 지원해 준 구라협회 본부가 에든버러에 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에든버러 영문 첫 글자 E를 본떴다. 처음 45명에서 1920년대 초 600명으로 늘었다. 최대 수용인원이 350명인데 두배 폭증했다. 병원 주변에 환자들이 노숙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주민들이 가만 있을리 없었다. 1925년 여수 신풍리로 이주를 결정했다. 한센병 집단거주지 애양원이었다.
애양원에는 손양원이 있었다. 손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36세의 젊은 나이에 목회에 나섰다. 애양원 14호실은 손 목사의 단골 병실이었다. 의료진조차도 발길이 쉬 가지 않는 곳이었다. 같은 환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애양원은 모두 17호실이었는데, 1~10호는 완쾌중인 환자들이었다. 11~13호실은 경환자였다. 중환자실인 14호는 온 방안에 진물과 핏자국, 땀들이 엉겨 붙어 도저히 그냥 들어갈 수 없었다. 상처를 보려면 방바닥에 종이를 몇장 깔고 들어갈 정도였다. 종이라도 깔라치면 같은 환자끼리 차별한다고 난리를 쳤다. 손 목사는 맨손으로 방바닥을 치웠다. 환자의 목을 껴안고 이마를 댔다. 기도를 하고 음식도 나누어 먹었다.
손 목사 막내아들인 손동식 목사(66)는 “어버지는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아무 거리낌 없이 중환자들을 어루만지며 안아주었다. 때로 침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며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파란 눈 선교사와 손 목사의 전설은 지금도 80~90살 애양원 환우들의 말이 아닌 눈물로 증거되고 있다. 누군가는 그들을 예수라 했다.
이들만을 기억할 수는 없다. “이 밤 에 누가 가장 춥겠습니까?”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이불을 내어달라고 동료들에게 질문한 세핑 간호사도 있다. 그녀는 13명의 수양딸을 모두 교육시킨 후 결혼시켰다. 대한간호협회를 창설했으며, 이일 성경학교를 세워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베풀었다. 1934년 숨을 거두면서 자신의 시신마저 교육용으로 기증했다. 헌데, 그녀의 병명이 ‘영양 실조’라니….
다시 양림산을 오른다. ‘고난의 계단’에서 이 땅에서 숨진 파란 눈들을 본다. 거기 천사들이 있었다. <출전 : 전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