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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vietnam)에서 보낸 편지(1)
49년 전 배로 부산항을 떠나 10여일을 선상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상륙용 함정 LST를 타고 아름다운 항구 나트랑 항에 발을 디뎠다. 곧이어 대기 중인 트럭에 분승(分乘)하여 탱크의 호위를 받고 배속 부대가 ‘백마부대’인 우리들은 닌호아로 이동했다.
달리는 트럭앞길에는 낯선 풍경들이 쉴 틈 없이 펼쳐진다. 고무농장과 작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는 초록(草綠) 평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가와서는 뒤로 물러난다. 지나는 길목에 자리한 촌락을 둘러선 야자나무에서는 이국(異國)의 정취가 물씬 묻어난다.
월남 땅에 다녀 온지 어언 50년, 그때의 추억을 그 당시 유행하던 펜팔편지 형식에 담아 남겨 두고자한다.
"K양에게
초면에 어리석은 놈이 있어 이 편지를 씁니다. 제가 이렇게 편지를 쓰는 목적은 펜 벗이 되자는 바람도 아니고 걸-헌팅하자는 짓도 아니올시다. 이제 귀국일이 3개월여밖에 남지 않은 녀석이 무엇을 더 보태자고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아가씨께 구애를 하겠습니까? 단지 무료한 이 밤 잠 못 이루던 차, 이리 저리 뒤척이다, 별로 전해볼 주소도 없는 고아가 용기백배해서 언제가 기억한 K양의 주소로 이렇게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우선 하루의 일과 중 제일 멋진 경우는 대민진료를 나가는 일입니다. 파초와 선인장이 뒤섞인 평원을 지나, 야자수 울타리로 둘러 쳐진 채 비취와 맞닿아,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마을로 대민진료를 나가는 일입니다. 가서 간단한 치료도 해주고 쌀과 C-Ration을 나누어 주는 일도 합니다. 병영에서 나와 현지인들에게 봉사하는 보람 있는 일은, 잠시나마 고향의 향수조차 잊게 해주지요. 하루의 일과가 이렇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군대생활이 좋을 수만 없는 법, 일기도 불순한 날이 있듯이 태양이 열기를 마구 뿜어대는 날, 가시정글 밑을 빡빡 기어야 하는 존재인 육군병장 Y병장은 이국의 정서와 낭만만으로는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해서 고국의 다 큰아가씨들의 정감이 뚝뚝 떨어지는 사연을 듣고 싶어 합니다. 이 사연들은 여기서 겪는 모든 어려움을 다 덜어내고도 남으리라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꼭 답장을 받아서 뻥 뚫린 가슴을 채우려는 욕심 때문에, 잘 써보려고 쓰고 또 지우기를 얼마나 했는지, 동이 트고 기상나팔이 울리는 아침이 되었습니다. 또 다시 일과가 시작되는군요. 이만 마쳐야 되겠네요. 기다리는 사람입장이 되어 답장 써주시길 부탁드리면서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주님! 살아 귀국해서 50년을 무사히 지내고 오늘 이글을 쓰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찬미를 받으시고 영원히 받으소서! ‘엠꼬유 암꽁, 암꼬유 엠꽁,’ 기억이 가물가물하도다!
월남에서 온 펜팔 편지(2)
모처럼 기억한 주소로부터 답신이 왔다. 내용이 위문편지, 펜팔 편지 등과는 사뭇 다르다. 내용도 읽을거리가 있고 위안도 되는 것이 귀국하면 한번쯤 만나보고 싶은 욕망이 솟아오르게 한다. 그런 탓일까? 오전 내내 심란함과 조급함이 다스려지지 않는다. 편지지 끝에는 정성들여 붙였을 단풍잎과 꽃잎이 예쁘게 앙상블을 이루며 사나이 가슴에 불화살이 되어 다가온다.
점심식사 후 이곳 월남에서는 한 시간 동안 ‘씨에스타’ 타임(siesta time)이라고 해서 낮잠을 잔다. 오후3시쯤엔 배구장에 네트가 걸려 지고, 내무반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편이 갈라진다. 승부결과에 따라 저녁 식사 후 마시는 맥주 값 부담이 가려지고 경기가 끝나면, 샤워장에서 샤워도 하고 빨래도 한다. 이것이 의무중대 본부의 하루 일과다. 정글에서 땀 흘리는 동료 위생병들과 보병 전우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노릇이다.
오늘은 백마 29연대 내에서 축구시합이 있는 날이다. 상품은 작전지역에서 포획한 돼지 새끼2마리를 분부중대에서 몇 달 동안 잘 키워서 오늘의 우승 상품으로 제공하였다. 물론 우리 의무중대도 출전하였고 나 또한 주전으로 출전하였다. 섭씨 35도가 오르내리는 염천에서 3게임을 계속 이기고 우리 의무중대가 우승하였다. 좋은 영양제를 많이 먹어서 잘 뛴다는 빈정거림과 함께 돼지 두 마리를 전리품으로 획득하였다.
저녁에는 우승에 대한 자축과 귀국하는 장병들의 송별을 위한 부대회식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얼굴표정은 가족을 만난다는 기대감과 함께 행복감으로 잔뜩 들떠있다. 한편 부럽기도 하고 한쪽 구석엔 '나는 언제 귀국하나' 하는 처량한 마음이 들기조차 한다. “나 열흘 있으면 김장김치 먹는 다” 는 그들의 자랑을 들을 때는 문득 고향의 산하(山河)와 가족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생각이 무사귀환에 이르자,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하늘나라에 무사귀환이 걱정된다.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예수님! 우리를 구원하소서!
월남에서 온 펜팔 편지(3)
월남은 분명 전쟁터다. 가끔 부대 울타리 외곽에서 야간에 수행되는 무력시범이나 저녁마다 쏘아지는 대포소리를 제외하면 부대 내 어느 곳에서도 여기가 전쟁터라는 느낌을 주는 표징은 딱히 없다. 부대 내에 여자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장교식당에 꽁까이 들이 근무하고 방역회사 소속 꽁가이 들은 쥐약을 놓으려 통제 하에 부대 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이렇게 평화스런 일상에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어떤 긴박한 정보가 접수되어 분석이 끝나고 어떤 작전이 수행되려는 모양이다. 우리 의무중대에서는 중대장, 후송 장교, 사병 두 명이 출동하는 사단작전이라는 전통이다. 운이 없는 건지 고참 인 나와 중고참 병장이 차출되었다.
출동병력이 연병장에 집결하여 군장 검열을 받는다. 우리의 군장 중에는 훠(four)버너와 아이스박스가 포함되어 있다. 군장검열의 목적이 불필요한 군장(軍裝)으로 인해 수송 작전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을 방지함에 그 목적을 둔다. 이 목적에 비추어 보면 아이스박스는 검열에 걸렸어야 할 품목이다. 결과는 무사통과다.
검열이 끝나기가 무섭게 포장이 모두 거두어진 무개(無蓋) GMC에 승차했다. 마치 휴양소에 가는 행색이다. 차는 계속 30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판랑 베이(bay)로 달린다. 쪽빛 바다 옆 그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잠시휴식을 취한다음 헬기(16인승)로 이동배치 되기 시작한다. 헬기 20여대가 소음을 내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은 색다른 장관을 이룬다. 백마 10호로 작전명이 붙었다.
우리는 캄보디아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랜딩(landing), 연대 지휘부를 설치하였다. 땅을 파고 마대를 쌓고 텐트를 쳐야 오늘의 임무가 끝난다. 야전삽 끝에 전해지는 느낌은 돌인지 바위인지 구분도 되지 않고 만만치 않다. 아무리 범위를 넓혀도 바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월남 신참인 후송 장교가 제일 먼저 부상을 입어, 미군 헬기에 사정사정하여 후송을 맡겼다. 중고참 병장을 여기에 따라 붙였으니 진지 작업은 나 혼자다.
몇 시간 파다가 지쳐서 다른 부대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사방을 둘러보니 놀고 있는 손이 없었다. 헬기장 건설, VHF통신 탑 설치, 포대설치, 그리고 지휘부 벙커 설치 외에 병사 자신들의 벙커를 구축하느라 옆에 눈길을 줄 틈이 없다. 할 수없이 맨땅에 텐트를 치고 하루 밤을 지냈다. 이튼 날 지휘부 경비중대로 파견된 6중대 위생병을 임시복귀 시키고 6중대 보병1개 분대의 지원을 받아 벙커를 단단하게 구축했다. 바닥은 탄약상자를 깔아 보기에도 사용에도 부족함이 없도다.
보급품을 실은 헬기가 도착한다. 라면, 콜라, seven-up, 그리고 맥주를 충분히 자대에서 보내왔다. 또 헬기가 날아온다. 이번에는 물과 얼음이 공수되었다. 임시 복귀한 위생병이 얼음과 물을 충분히 확보해서 시원한 음료를 맛볼 수 있게 되었고, 아껴서 물을 쓰면 약식 목욕도 가능했다.
오늘은 가슴 아픈 소식을 접한다. 우리 중대장님이 가정에 우환이 생겨 평소 안정제를 과다하게 복용한 모양이다. 그 결과 후유증으로 조기 귀국이 결정되고 부대로 복귀하였다. 중대장, 후송 장교가 부재중인 경우가 발생했다. 육군 병장을 달고 참모회의에 참석하는 특이상황을 경험했다.
전황은 별진전이 없이 전개되는 모양이다. 마침 물 공급이 있어 목욕을 하고 있는 중에 산자락 어디선가 우리를 향해서 자동 소총 사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얼마 후 총성이 멈추고 아군 피해는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한 시간 후 폭격기와 L19 이 떠서 네이팜탄을 투하하기 시작한다. 불길이 주변을 사른다.
이번 전투로 백마 사단이 얻은 전과는 포 6문 기타 무기 노획 등의 전과로 1개 포대 궤멸이다. 나는 이번 전투에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나 보다는 공동체가 중요함을 깨달았다.’ 6년 후 자녀로 받아 주실 계획으로 주님께서 전장에 보내신 것 같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월남에서 온 펜팔 편지(4)
백마 10호 작전이 일주일쯤 경과하자 이번에는 작전지역 이동이다. 철수와 마찬가지로 짐을 싸고 헬기에 싣고 또 내리고 그리고 마대를 쌓고 텐트를 친다. 이번에는 중고 병장도 복귀하고 6중대 위생병도 함께 작업을 해서 별 탈 없이 진지 구축을 마칠 수 있었다.
하나가 길면 하나가 짧듯이 진지 구축은 용이하게 마쳤으나 입지가 아주 고약하다. 진지 작업을 마친 후 바로 옆에 2.5인치 박격포가 자리를 잡고 어딘지도 모를 곳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다. 낮에도 귀청이 얼얼한데 밤에 잘 일이 더 큰 걱정으로 다가온다. 귀마개를 준비해야겠다.
이튿날 점심 때 방첩대 L병장이 찾아와서 탄피 통에 라면을 끓이고 있다. 말투가 좀 거칠다. 우리 중고 병장이 이것저것 챙겨서 대접하는 모습이 눈에 거슬린다. 라면이 다 끓었을 때 L병장은 탄피 통을 열었다. 펄펄 끓는 라면 국물이 L병장의 얼굴을 강타했다. 비명소리가 크고 살려달란다. 갑자기 호칭이 병장님으로 바뀐다. 탄피 통에 달린 고무바킹을 빼지 않아 생긴 사고이다.
경험으로 판단할 때 잘 처치하면 흉터 없이 완치될 것 같다. L병장은 나에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한다. 양병장님과 형님을 반복한다. 괘심하지만 치료에는 최선을 다했다. ‘돌파리’ 이지만 명색이 인술 하는 사람 아닌가? 바세린 거즈(petrolatum gauze)로 상처부위를 싸주고 한 시간 경과 후 필요한 조치를 모두 취했다. 잘생긴 인물이라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닐 성 싶다.
이동한 곳에서 별다른 상황 전개 없이 이틀을 보낸 후 1개 포병대대 궤멸이라는 전과를 월남 전사에 기록하고 우리는 무사히 자대로 귀대했다. 그날 밤 무슨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면서...
월남에서 온 펜팔 편지(5)
백마 10호 작전을 마치고 개선한 날 저녁 안주로 육회가 준비되고 평소 마시던 맥주 외에 양주가 특별히 마련되었다. 술 좋고 안주 좋고 젊음도 한몫 거들어서 겨우 다리를 가눌 정도로 취기가 오른다. 그날은 작전 후유증으로 입실 환자가 많이 생겨 식당에 임시 병실이 추가로 마련되었다. 나를 비롯한 10명 위생병의 숙소가 임시로 그곳에 정해졌다. 밤11시쯤 취침하였다.
4시간쯤 눈을 부쳤을까?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처럼 쉿 쉿 소리에 잠을 깬다. “불침번! 밖에 나가 무슨 소린지 알아서 보고해!” 결과보고는 로켓트 포탄이 사단 사령부 쪽에서 터지고 있단다. 침상에는 아무도 없다. 기간병도 환자도 모두가 벙커로 뛰고 있다. 업혀 다니던 환자도 혼자 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비는 억수를 넘어 양동이로 퍼붓는 듯하다.
병실의 환자도, 임시병실의 환자도 기간 장사병도 모두 벙커에 모여 들었다. 대피훈련 없어도 완벽하게 대피가 이루어졌다. 시간이 흐르자 상황은 종료하고 상황의 전말이 밝혀졌다. 베트콩으로부터 로켓트포 12발의 공격이 있었고 피해는 사단 헬기장의 경미한 파손과 수명의 병사가 파편에 의한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는 전언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치료실 위생병이 환자 환부에서 꺼낸 파편을 보여주며 귀국준비 1호라고 농담한다.
아침이 되자, 연대본부 기동타격대가 편성되고 의무중대 위생병들이 각 부대에 배속되었다. 어느 부대가 출동할 줄 몰라 나는 본부중대에 배속하기로 했다. 기동타격대가 모두 연병장에 집합하고 출동할 부대를 결정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본부중대도 출동한다. 헬기를 타고 맡겨진 지역으로 이동해서 로켓트포 흔적을 찾는 수색작전이다. 성과 없이 해가 저물어 본부중대는 2개 소대로 나누어 부중대장이 1개 소대를 맡고 1개 소대는 위생병인 나에게 지휘를 부탁하는 희한한 일이 또 벌어졌다.
나에게 맡겨진 본부중대 구성원은 이발병, PX사병 등 비전투요원들이라 여간 긴장이 되질 않는다. 크레모아 지뢰(claymore)를 설치하고 매복에 돌입했다. 잠이 올까 걱정이 되어 계속 커피를 마셨다. 담배는 피우고 싶고 잠을 못자니 그 괴로움을 어찌 표현할 길이 없다. 어쩔 줄 모르는 사이에 아무 성과 없이 날은 새고 아침을 맞았다. 그 것으로 상황은 끝이다.
월남에서 온 펜팔 편지(6)
월남에 주둔한 한국군의 서열에는 3가지 요소가 혼재되어 초창기에 여러 가지 혼란이 있었다. 군번이 빠른 ‘군번 고참’, 월남에 빨리 온 ‘월남고참’, 진급이 빠른 ‘진급고참’으로 서열을 정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기준이 왔다 갔다 했던 모양이다.
경험을 중시하자면 월남고참을 우대하여야 하고 규율을 중시하자면 계급을 우선시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의무중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러한 갈등에서 빗겨 서있지 못했다. 우리가 월남에 도착한 시기가 이러한 현안(懸案)에 직면해 있어서 이를 해결하는 책무가 우리에게 넘겨져 있었다.
나는 월남에 도착하자마자 병장으로 진급하여 계급으로 서열을 정하는 것이 유리한 입장이어서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계급중심으로 서열이 정해지는 방법을 지지하였다. 이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드디어는 관철시켰다. 파월 전 3군관구 의무참모부 근무시절 부관부 소속 여군 타자수의 손끝 실수로 일찍 달아 진 상등병 계급장이 탄탄대로를 달리는 일에서 효자노릇을 톡톡히 한다.
군대생활 13개월 차에 고참 아닌 신참이 고참이 되었다. 월급도 상병보다 $9이나 더타고 저녁 식사 후 한잔 마시는 멤버에도 이름을 올렸다. 벼슬 높은 즐거움 누려보지 못하면 그 맛을 알기 어렵다. 의무중대 고참병장은 연대 내에서 대접이 융숭하다. 수색중대 인사계에게 초등학교 동창생 의무실 입실부탁도 거절이 없다. 월남에 온지 3개월, 타향사리 향수병이 발병할 만도 한데 의기양양에 자리를 내준 모양이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취사장 청소가 끝날 무렵 식당에서는 밖에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소등 커버가 내려지고 에이레이션 싱싱한 고기를 원료로 참기름에 무쳐진 육회안주와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은 양의 맥주가 준비된다. 이윽고 서너 명의 고정멤버가 맥주박스를 의자삼아 둘러앉는다. 이야기를 곁들여 마시고 또 마시고 그러다 밤이 깊어지면 잠자리에 든다. 각자 무슨 꿈들을 꾸는지 알 수가 없다. 오늘 하루도 무사함을 감사하는 병사들이 몇 명 일지 자못 궁금하다.
월남에서 온 마지막 편지
여기저기서 귀국 박스 채우는 작업이 한창이다. 105미리 탄피 밑 둥에 붙어있는 신주를 잘라서 B형 박스를 채우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병기 중대 어느 장교는 A형 박스에 신주를 녹여서 담았다가 하중을 못 견딘 박스 밑창이 빠져 항구로 향하는 운반차량에 싣는데 실패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리는 失笑를 禁할 수가 없었다. 소탐대실이라는 말이 여기서는 안성맞춤이다.
나는 귀국 박스를 포기해서 한가롭기 그지없다. 탄피 구하는 번거로움도 없고 건강하게 돌아가는 것 만해도 가족들에게 큰 선물일 것 같아 이곳에서 사서 읽던 책 몇 권과 카메라, 트란지스터 등 몇 점 물품으로 ‘더불 백’(double back) 만을 채웠다.
오늘은 2대대 병력이 전투에서 기적 같은 사연들을 간직하고 귀대한다는 소식을 듣고 환영할 겸, 눈으로 직접 확인할 겸 해서 헬기장에 가보았다. 헬기가 도착하고 병사들이 내려선다. 머리를 붕대로 동여맨 병사, 가슴에 총탄을 맞은 병사, 군복바지가 총알에 여기 저기 뚫린 병사가 눈에 띈다.
그들 모두 살아있다. 들것에 실리지 않고 부축도 없이 제 발로 걷는다. 머리에 붕대를 동여맨 병사는 철모에 총알을 맞았으나 철모와 화이바가 빙글 돌아 몽둥이로 세게 맞은 충격만 받은 모양이다. 가슴에 총알을 맞은 병사는 윗주머니에 넣어둔 성경에 총알이 박혀서도 외상이 전혀 없다. 군복바지에 총알을 맞은 병사는 바지에 4발의 총탄자국이 있지만 그 병사는 아무 불편없이 절룩거리지도 않고 잘도 걷는다.
이 모두가 우연이라고 하기엔 경우의 수가 많고, 다른 피해 또한 없음으로 해서 우리 모두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압도되어 넋을 잃은 상태에서 좀처럼 헤어나질 못한다. 왜 그럴까? 이들의 수호천사는 누구일까? 이 부대는 월맹군 구정공세 時 대대장이 전사한 기록을 갖고 있는 부대이기도하다. 중령이상 전사자명단에는 월남전에서 이분이 유일하다.
무사귀환, 갑자기 시편 한 구절이 떠오른다. “어두운 밤 깊은 골자기를 간다 해도 주님 함께 하시면 나는 두려울 것이 없노라!” 나는 전쟁터 월남 땅에서 1년 동안 한 순간도 두려움이 없이 평화롭게 살았다. 주 날개 밑에서 보호받으며 살다 오늘 그리던 고국 땅 어머니계신 곳을 향하는 귀국선위 갑판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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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16년 작성된 글입니다.
누가써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