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처럼 사라진 광주읍성
광주에 읍성이 있었고, 4대문이 있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100여 년 전까지 옛 도청과 충장로, 황금동 일대에는 2.5킬로미터의 직사각형 읍성이 있었다.
광주읍성은 단종 2년(1454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처음 등장한다. “읍성은 돌로 쌓았고, 둘레가 972보이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16세기 중종대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은 돌로 쌓았고, 주위는 8253척, 높이는 9척이고 우물은 100곳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호남읍지나 광주읍지에도 이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조선시대 영조척(1척=31.24㎝)으로 환산해보면 읍성의 둘레는 약 2.5킬로미터, 높이는 약 2.8미터에 해당된다. 둘레가 약 5.4킬로미터에 달했던 부산의 동래읍성에 비하면 절반 정도의 크기이지만, 1.4킬로미터의 낙안읍성이나 1.7킬로미터의 고창읍성에 비하면 훨씬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광주읍성은 전주, 남원, 나주읍성과 함께 호남의 4대 읍성으로 꼽혔다. 그런데도 최근까지 광주읍성은 광주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지 않다. 언제, 왜 축조되었는지 언제, 왜 철거되었는지를 알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500여년 이상을 버티어 온 광주의 4대문과 읍성은 1916년, 일제에 의해 완전히 헐리고 그 자리에 도로가 난다. 이로 인해 지금 광주읍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광주읍성은 사라졌지만, 읍성의 모습은 18, 19세기에 제작된 옛 지도 속에 온전히 남아 있다.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해동지도를 보면 평지에 조성된 직사각형으로 4개의 성문이 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서문 가까이에 객사가 있고, 동헌은 그 위쪽에 있다. 해동지도는 광주읍성 밖의 모습도 자세하다. 서문 밖에는 향교와 의열사가, 남문 밖에는 경렬사가, 동문 밖에는 경양역이 표시되어 있고 북문 밖에는 공북루와 태봉산이 표시되어 있다. 가장 자세한 것은 1872년 간행된 지방도(서울대학교 규장각 보관)에 그려진 광주읍성이다. 지도는 보통 위쪽이 북쪽인데 이 지도는 위가 남쪽이다. 이는 풍수적으로 배산임수의 입지조건을 강조하기 위해 남쪽 진남문을 지도의 윗부분에 표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는 남쪽의 진남문에서 북쪽의 공북문으로, 동쪽의 서원문에서 서쪽의 광리문을 관통하는 교통로가 붉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성안의 동서남북을 관통하는 두 길이 만나는 지점은 당시 가장 북적되는 번화가였다. 그 십자 도로가 만나는 한 가운데가 지금 광주 우체국이 있는 자리다. 우다방으로 불리는 우체국 앞 4거리는 오늘도 여전히 북적되는 광주의 번화가다. 십자도로가 만나는 그 곳에 문종 원년(1451), 무진군에서 광주목으로의 환원을 경축하는 의미를 지닌 희경루라는 이름의 누각이 세워진다.
읍성 내부에는 객사, 동헌 등 많은 관청 건물들이 그려져 있다. 이는 고을 수령을 비롯하여 수령을 보좌하는 아전과 군졸이 살았음을 보여준다. 읍성 안에 살았던 자들은 이들만은 아니었다. 19세기 말 광주를 왔다 간 여행자의 기록에 의하면,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대개 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보잘 것 없는 신분, 이들이 광주의 4대문 안에 살았던 진정한 주인공들이었다. 지금의 광산동, 금남로 1~3가, 충장로 1~3가, 황금동, 궁동, 대의동 등이 옛 읍성의 성안에 해당된다. 4대문 밖의 모습도 덤으로 남아 있다.
흔적도 없이 안개처럼 사라져 문헌과 옛 지도로만 전해지던 광주읍성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1990년대 초다. 1992년 전남도청은 방문객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부지 정리를 하던 중, 뒷담 부근에서 성돌과 성벽 하부의 토축으로 보이는 유적을 확인한다. 1996~7년 광주시립민속박물관은 황금동과 광산동에서 읍성 터 일부를 발굴하여 성벽의 하부 구조를 확인한다. 성벽의 폭은 3.4미터~4미터였다. 2007년, 아시아 문화 전당을 건립하면서 지표면 아래에서 85미터에 달하는 성벽의 유허가 또 발굴된다.
이러한 발굴성과가 2002년 펴낸 광주읍성유허 지표조사보고서와 2008의 광주읍성보고서다. 두 보고서는 광주읍성과 관련된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읍성은 고려 우왕 4년(1378) 왜구 침략을 막기 위해 축조되었고, 1916년에 완전 철거되었음도 밝혀낸다. 당시 광주 읍성의 남문 이름이 남쪽을 진압한다라는 뜻을 지닌 진남문임을 통해서도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보고서는 4대문의 현 위치도 확인해주었다. 즉 동문인 서원문은 대의동 옛 광주문화방송국 옆 사거리, 서문인 광리문은 황금동 구 광주 미문화원 부근 사거리, 남문인 진남문은 광산동 옛 광주시청을 지나 전남대 의대 가는 사거리, 그리고 북문인 공북문은 금남로 4가 충장치안센터 앞 사거리였다. 북문 밖의 공북루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이 서 있는 사거리에 있었음도 알게 되었다.
500년 동안 광주인들과 함께 한 읍성의 흔적은 어느 정도 밝혀졌지만, 그 유허들의 관리는 정말 한심했다. 오랫동안 읍성을 쌓았던 돌은 주차장 후미진 담장 부근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전남 도경 구내 화단의 경계석으로 박혀 있었다.
오늘, 읍성 문화도시였던 광주의 옛 모습을 확인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돌보지 않는 역사는와 문화는 광주읍성에서 보듯 안개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이제 광주읍성의 옛 흔적 위에 엄청난 규모의 아시아 문화전당이 들어선다. 아시아 문화전당도 언젠가는 또 광주의 역사가 될 것이다. 새로운 것만큼이나 오랜 것도 중요하다. 천년 고도 광주에서 천년 역사를 일깨워줄만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겉모습만을 놓고 보면 광주는 1960년대 70년대에 시작된 젊디젊은 콘크리트 도시일 뿐이다. 잃어버린 광주의 역사를 되찾을 수는 없을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광주읍성, 일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없애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광주읍성의 흔적을 알리는 공북문 터에 서서 과거 가치와 미래 가치가 공존할 수는 없는지도 묻는다.
광주읍성 4대문 이름
광주읍성 4대문의 공식 명칭은 서원문(瑞元門, 동문), 진남문(鎭南門, 남문), 광리문(光利門, 서문), 공북문(拱北門, 북문)이다. 당시 성문의 이름에는 나름의 의미가 담겨 있다. 조선 시대 한양의 4대문인 흥인지문, 숭례문, 돈의문, 홍지문이 성리학 이념의 핵심인 인, 예, 의, 지를 숭상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과 같다.
북문의 이름인 공북문은 군왕에 대한 충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북문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왕도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반면에 남쪽을 진압 한다는 뜻을 지닌 진남문은 남도의 오랜 걱정거리인 왜구 격퇴의 염원을 담고 있다. 광주 중심부에 성을 쌓게 된 것도 고려 말 네 차례에 걸친 왜구 침입을 받았던 경험이 배경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학동의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교정에 있는 느티나무 옆 비석을 진남비로 불렀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동문을 서원문, 서문을 광리문이라 했던 이유는 또 무엇일까? 광주 도시 경관의 변화에 정통한 시립민속박물관의 조광철 학예연구사는 이를 주역의 원리로 풀어낸다. 주역에, 하늘은 “하늘, 곧 건은 원형리정(元亨利貞)이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은 하늘이 모든 사물의 시작이며 그로부터 모든 것이 형통하고 이로우며 최종적으로 모든 사물이 그곳으로 갈무리된다는 의미다. 광주의 동·서문도 이런 관념체계와 관련이 있다. 동문은 동쪽이란 방위에 걸맞은 주역의 ‘원’자를 취하고, 서문에는 서쪽에 해당하는 ‘리’자를 취한 후 광주의 별칭들을 수식어로 붙였다는 것이다. 즉 서원문은 동쪽에서 태동하는 상서로운 기운을 받는 문인 동시에 서석 고을의 동문이란 의미를 지니게 했고, 광리문은 만사가 형통하기를 바란다는 염원의 의미와 함께 광주 또는 광산 고을의 서문이란 뜻을 동시에 함축하도록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