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7일(일요일) 맑음 아침에 눈을 뜨니 무언가 할 일을 잊고 있는 듯 허전했다. 그렇다. 오늘은 하루 쉬기로 한 날이다. 걷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여기가 목적지이면 얼마나 좋을까? 순간 아직 반도 채 못 온 거리라는 것을 깨닫고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주일이니까 어제 걸으며 보았던 성경캠프에 갈까 생각했으나 대형 차량을 움직이기가 번거로와서 기타치며 성경읽기로 예배를 대신했다. 오후에는 전에 김운영씨가 가져다 준 삼겹살 1kg과 닭 한 마리를 삶아 모두 먹어 버렸다. 과식을 하는 게 아니까 걱정했지만 그걸 다 먹고도 탈이 나지 않았다. 아마 10여 kg 빠진 몸무게를 보충하기 위한 생리적 본능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오후 내내 캠퍼 밖에 의자를 펴고 앉아 기타치며 찬양을 하였다. 육체의 아픔으로 인해 영적으로 많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나 개인의 의지로 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예수님의 사랑을 북한 동포에게 전하고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한 것이 아닌가. 출발 때와 같이 성령이 충만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사실 요즈음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기보다는 어느새 나의 의지에 기대어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쉬는 하루의 시간이 솜사탕처럼 지나는 사이 어느덧 저물고 또 미지의 땅을 걸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공포감이 다시 나를 경직되게 했다. 7월28일(월요일) 맑음 어제 하루를 쉰 탓인지 아침나절에는 걷기가 수월했으나 지형이 험해져 높은 오르막길이 계속되는 오후가 되자 왼쪽발의 고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제 다시 와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주위의 경관을 보는 기쁨과 진통제에 의지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살고 있는 온타리오주에 이런 기가막힌 경치가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서너 시 경 미시간에 산다는 미국인 가족이 우리를 찿았다. 고등학교 교사라고 자기를 소개한 그녀에게는 나를 찿아온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한국인 남자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있었는데 톰이라는 그 애를 나에게 소개하면서 한국에 대해서 말해주고 한국인의 자긍심을 심어달라는 특별한 부탁까지 했다. 망설이던 나는 열 세 살이라는 그에게 한국에 가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내년에 가볼 계획이라고 대답했다. 젖먹이 때 와서 서양인 가정에서 자란 그에게 무어라 말을 해주어야 할지 난감했다. 얼굴과 느낌은 틀림없이 한국아이인데 알 수 없는 거리가 느껴진다. 나는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이고 일본과 같이 굉장히 발달이 되어있는 곳이라고 말해주었다. 또 한국은 오천년 역사를 지닌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양부모는 언어와 습관은 달라도 생김새만은 한국인인 그에게 뿌리를 찿아 주고자 노력하고 있는 듯 했다. 그 후로 그들은 우리가 그곳을 벗어날 때까지 두 번을 더 찿아와 사진을 찍고 성금도 내고 갔다. 그들이 돌아간 후 미스터 장이 나에게 말했다. 우리는 저들에게 엎드려 절해야한다고. 누가 저 아이를 그들처럼 따듯하게 보살펴 주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들 때문에 한시간 이상 지체되는 바람에 아픈 다리로 걷고 있는 내 마음은 더욱 급해졌지만 그 들이 한국인 입양아에게 쏟는 아름다운 사랑을 생각하니 발의 아픔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오후 5시경 한 높은 고개길을 힘들게 오르고 있었다. 말발굽처럼 나 있는 해변옆에 쏟아질 듯 서있는 커다란 바위산을 넘는 길이었다. 삼분의 일쯤 올랐을까 미스터 장으로부터 별 다섯 개 짜리 전망대에 자리를 잡았다고 무전이 왔다. 아픈 왼쪽발로 인해 기다시피 정상에 올랐다. 쓰러질 것만 같았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길 우측 머리 위에 캠퍼가 서 있었다. 아가와 베이 전망대였다. 캠퍼에 들어와 밖을 보니 정말로 기가 막힌 경치였다. 저만치 호수 위에 섬이 떠있고 그 위로 7월의 태양이 서쪽하늘에 열기를 뿜으며 걸려 있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경치도 나의 아픈 다리를 위로해 주지는 못했다. 미스터 장은 처음으로 토론토 이하영씨와 그토록 고대하며 시도해 왔던 햄 교신을 했다며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셀루라 전화건 공중전화건 통신 두절 지역에 들어온 지 며칠 째라 나도 소식이 궁금했으나 샤워 후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쓰러지듯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7월29일(화요일)맑음 아침에 눈을 떳으나 예감이 좋지 않았다. 피로가 풀리지 않아 몸이 무거웠고 왼쪽발의 고통은 허리에까지 번져 있었다. 발의 고통은 발을 옮길 때 뿐이 었으나 엉덩이와 허리는 서 있기만 하면 엄습해왔다. 정말로 대륙횡단 시작 후 네 번째의 가느나 마느냐의 기로에 서고 말았다. 날씨는 더웠고 지형은 험했으며 체력은 약할 대로 약해 있었으며 나의 사기는 바닥이었다.. 드디어 오후 2시경 나는 걷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었었다. 기다시피 바위 산 하나를 넘자 나는 전방에 가 있던 장승민씨를 무전으로 불렀다. 그는 나에게 사고가 생긴 줄 알았는지 캠퍼를 돌려 허겁지겁 달려왔다. 나는 고속도로 옆에 캠퍼를 세우게 하고 침대에 들어가 눞고 말았다.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우리 둘은 각자의 침대에서 눞는 순간 세상을 잊고 말았다. 무더위 속에서 얼마를 잦을까? 잠결에 누가 나를 불렀다. 재엽아! 재엽아! 지금 일어나 너의 아픈 왼쪽다리를 주물러라 지금 하지 않으면 너는 걷지 못하리라!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났으나 주위에는 밤 1시의 고요만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나는 틈틈이 읽던 성경을 펴서 로마서 12장을 읽으며 막대기처럼 경직되어 있는 왼쪽 종아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건드릴 수 없이 아픈 근육을 맛사지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이 아픈 다리를 꼭 낫게 해달라고. 한 시간쯤 후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에 다시 일어났을 땐 망망한 호수 위에 아침햇살이 찬란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7월30일(수요일)맑음 아침에 깨어나면 항상 그렇듯이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며 침상에서 내려와 발의 상태를 점검했다. 좀 나아진 느낌이 들어 강행하기로 결정을 했다. 지난밤의 일을 생각하며 왼쪽 다리가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기대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게도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어제처럼 오후가 되면 다시 아프지 않을까 염려를 했으나 오후가 되서도 10여 일간 나를 괴롭히던 그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후 정말 왼쪽발의 고통은 흔적 없이 사라졌고 다시는 찿아오지 않았다. 마치 나비가 날기 위해 겪는 허물을 벗는 아픔과도 같이. 나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감사하며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어제보다 길은 더욱 험해지고 구불거려 산세가 험했지만 거기에 비례해 경치도 좋아졌다. 캐내디언들의 자연 관리는 참 철저한 편이다. 경관이 수려하다 싶은 곳은 모두 국립 또는 주립공원으로 선포해 놓고 철저히 관리를 한다. 그 넓은 땅덩어리를 자연 그대로 보존하고자 노력하는 흔적이 역력했다. 오후에는 지나가던 영국인 여행객 부부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나의 모금 운동에 대하여 설명을 하자 그들은“Good cause"(좋은 동기)를 연발했으나 정작 성금은 하지 않고 떠났다. . 오늘 토론토에서 나의 이웃인 마리아씨 가족이 보급품을 가지고 이곳까지 우리를 찾아 온다고 했다. 왼쪽 다리의 고통이 사라지자 그 동안 고통으로 인하여 포기하였던 Jay’ Walk을 이용하여 걷기 시작했다. 나는 기쁜 나머지 하루종일 복음성가를 부르며 걸었다.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두손들고 찬양합니다 ”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예수님 영원토록 정성 다해 사랑합니다. 나의 힘 되신 여호와여 내가 사랑합니다.“ 그러다 경치가 좋은 언덕에 서면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찬양했다. 이제까지와 달리 발걸음에 힘이 있었고 횡단에 자신이 생겼다. 실로 출발 후 두 달 동안 3500km를 걷고 나서의 일이다. 저녁이 되도록 마리아씨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도로에서 쉽게 캠퍼를 발견할 수 있도록 물가 다리 옆 공터에 캠퍼를 세우고 하루를 마감했다. 저녁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할 무렵 마리아씨 일행이 찿아 왔다. 휴가를 이용하여 이곳에 오는 동안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늦었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 심재명씨는 급한 나머지 과속으로 차량을 몰다 경찰에 적발되었으나 우리를 찿아 가는 중이라고 했더니 경찰이 대략의 위치까지 알려 주며 그냥 보내주었다고 기뻐하였다. 그녀 가족과 다른 한가족, 그리고 우리 둘 이렇게 모두 10명은 궁금한 나의 가족 안부와 우리들의 대륙횡단에 대한 소식을 주고받느라 온통 법석을 떨었다. 자정 경에야 그들은 모텔에 묶기 위해 길을 떠나고 우리는 한바탕 손님과 함께 방문한 모기떼 불청객을 소탕하느라 법석을 떨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7월31일(목요일)맑음 아침나절 10여 km를 걸어가자 그들이 머물렀던 모텔이 있었다. 모두들 반바지 차림으로 나를 따라 나섰다. 오늘 나와 같이 걷겠다고 준비를 하고 나온 것이다. 우리는 걸으면서 어제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역시 누가 옆에 있어 주니까 걷기가 수월했다. 지나가는 차량들이 우리일행을 보고 경적을 울려 주며 우리를 응원하였다. 점심에는 길옆의 공원에서 그들이 준비해온 갈비 바비큐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토론토에서 이곳까지 1200km를 달려온 그들의 정성에 무어라 감사를 해야 할지 마음속이 져려왔다.. 아직 오늘의 목적지까지 20km정도 남아 있었지만 그들을 위하여 50km를 걸은 지점에 있는 화이트 휘시라는 작은 마을에 모텔을 잡았다. 오랜만에 다시 모텔에서 쉬며 그들과 저녁식사를 한 후 10시경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그들도 50km를 걸어서인지 모두 피로에 젖어있었다. 취침 전 토론토 근교 뉴 마켓에 사시는 목사님 부부가 케노라(Kenora) 에 있는 아들집에 가다가 우리 옆방에 투숙했다며 우리 숙소에 찾아왔다. 나를 보자 기독교인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우리의 캠퍼를 보고 그렇게 짐작하였노라고 했다. 우리를 위하여 성공기원의 축복 기도를 해주셨다.. 8월1일(금요일) 흐림 아침에 일어나니 벌써 마리아씨 일행은 조반 준비를 마치고 우리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한 냉면 한 그릇 씩을 비우고 우리는 그들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언제 다시 정다운 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 졌으나 나는 약해지지 않기 위해 강제로 발걸음을 옮겼다. 점심 경 출발하자는 장승민씨와 눈물을 글썽이며 못내 아쉬워하는 그들을 뒤로 한 채 나는 혼자 북쪽을 향하여 길을 나섰다. 우리의 캠퍼는 정말 오지 않았고 나의 마음은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장승민씨가 캠퍼의 경적을 울리고 나의 곁을 지나갈 때에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마 지난 20여일 간 그도 무척 힘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들을 보는 순간 모든 것 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가야만 했다. 대륙 횡단을 마쳐야 하는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 장승민씨는 대륙횡단 보조차량의 운행을 포기하고 토론토로 가려고 했으나 그들의 만류에 마음을 바꾸어 나를 따라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정말 내가 모르던 또 다른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지금 현재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내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육체적으로 무리해서도 정신적으로 나태해져도 안 되는 나 자신의 총체적 관리가 없이는 이 어려운 길을 갈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무엇보다도 정신적 의지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인간의 체력적 한계는 정신적 한계에 있다. 사실 이런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력인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튼튼한 사람도 일주일쯤 걷고 나면 지치게 마련이고 그 이후로 가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정신력의 싸움에 달려있다. 현재 나의 의지를 유지시켜 주는 명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죽어가는 북한 동포들을 도와야 한다“ 하는 무었과도 버꿀 수 없는 것이다. 이 생각 저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한 인디언이 운전하는 차가 내 옆에 멈추어 섰고 그 뒤로 백인의 차량 한대가 멈추어 섰다. 그 인디언은 나에게 십불을 건네며 힘을 내라고 하였지만 서양사람은 인디언을 보자 그대로 떠나 버렸다. 그들은 이렇게 작은 일에도 공존하기를 꺼리는 눈치다. 언제부터인지 인디언들은 그들과 우리가 닮았고 통하는 데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대단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난 그들과 허깅(Hugging)을 하며 “부라더”(Brother) “씨스터”(Sister)라고 불렀으나 전혀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도 나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이번 도보횡단을 하는 동안 나는 인디언들의 삶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같게 되었다. 오후에는 수많은 오토바이 족들이 할리 데이비슨(Harley Davidson )오토바이를 탄 채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해질녘 나는 산중의 고속도로 옆을 혼자 걷고 있었다. 우연히 앞 쪽에 길을 내기 위해 깎아 낸 돌 병풍 위를 보니 쉐퍼드와 비슷한 짐승 한 마리가 서있었다. 나는 이 산 중에 웬 개가 있는가 싶어 발을 멈추고는 동물 퇴치용 페퍼(Pepper) 분사기를 꺼내 들었다. 이 곳까지 오며 몇 번인가 개에게 물릴 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는 여유 있는 모습으로 아스팔트위로 내려와서 도로를 지나가다 말고 서서는 나를 노려보았다. 두 귀가 쫑긋 서있는 늠름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뒤를 이어 또 한 마리의 개가 뛰어 나오더니 둘이 서서 나를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저 두 마리의 개가 나에게 덤벼들면 어쩌나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때 앞쪽 산모퉁이에서 차량이 한 대 나타나자 두 마리의 동물은 길 건너 숲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개가 있으니까 근처에 마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걸음을 재촉했으나 폐허가 된 주유소에 서있는 캠퍼에 도착할 때까지 울창한 숲만이 있을 뿐, 마을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길에서 마주친 그 동물들이 늑대임을 알게 되었다. 여유 있는 모습이라던가 두 마리가 함께 다니는 것을 볼 때 틀림없이 늑대임을 확인하자 뒤늦게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 짝을 찾는 룬(Loon 오리과의 새)의 애절한 울음을 소리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며 무언가 나올 것 같은 으시시한 그곳에서 하루의 나래를 접었다. 8월2일(토요일) 맑음 아침 일찍부터 길을 재촉하였으나 오늘도 험한 산악 지대에 길은 이어져 있었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나의 옆을 지나며 경적을 울려주어 한 손은 아예 흔들면서 걸었다. 마라톤이라는 작은 도시를 지날 무렵 네 명의 어린이들이 손에 동전을 들고 길옆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이 제시, 티파니, 타이러 그리고 티모데로 남매인 그들은 우리의 소식을 듣고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성금을 내고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남을 도와주는 일을 가르치는 살아있는 교육 현장이었다. 오늘도 여러 명의 인디언들이 찾아와 성금을 건넸다. 어느 인디언은 자기 생전 처음으로 성금을 낸다며 십불을 성금함에 넣고 갔다. 저녁 무렵 도로 옆 잠자리에 도착하자 장승민씨는 미소를 띠며 나에게 말했다. 오토바이 족으로부터 성금을 받은 사람은 우리뿐일 거라고. 지나가던 오토바이 족이 되돌아와 오 불을 성금함에 넣었다는 것이다. 8월3일(일요일) 맑음 수피어리어 호를 따라 북상하던 길은 방향을 다시 서쪽으로 잡으면서 드디어 최종 목적지 뱅쿠버 쪽을 향하여 뻗어 있었다. 토론토에서 이곳까지 20여일 동안 1300여 km를 오 대호를 끼고 북상한 셈이었다. 오늘이 주일이라는 Mr.장의 말에 까맣게 세월을 잊고 있던 나는 교회를 찾으려 했으나 저녁이 다 되도록 마을이 나타나지 않았다. 길옆으로 높은 바위 병풍초럼 쳐진 길이 호수를 끼고 계속 이어져 있었다. 하루 종일 병풍 바위에 써있는 낙서들을 읽으며 걸었다. 30여년 전에 쓰여진(쓰여진 년도가 있었으므로 알 수 있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낙서를 보고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과연 희망처럼 그들이 결혼을 했을까? 만약에 이루어졌다면 그들의 사랑이 이 바위들처럼 변치 않기를 기도했다. 저녁 무렵 호수 옆 테라스 베이(Terrace Bay)라는 마을에 먼저 들어간 Mr.장한테서 산림청 마당에 잠자리를 정하고 주차장에 설치된 전기 시설까지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무전 연락이 왔다.?. 썬더 베이(Thunder Bay)가 이백Km 쯤 남았다. 오랜만에 밤에 비가 왔다. 8월4일(월요일) Nippigon 맑음 오늘은 이제까지 온 길 중에 가장 험난 하였다. 오르락내리락 좌우로 구불구불 뱀이 지나가는 것같이 길이 이어졌다. 그러나 아침나절에 벌써 백 여불의 성금이 걷혀 기쁜 마음으로 걸을 수 있었다. 호수 옆 별장 지역을 지날 때 한 할머니가 애견과 산책을 하다 나를 보자 자기 집에 가서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나의 정중한 거절에 그 할머니는 한 시간쯤 후 차를 타고 찾아와 이십 불의 성금을 내밀었다. 몇 명은 우리를 지나쳐 갔다가 돌아와 성금을 내곤 하였다. 이제는 산길을 하루 70km이상 걸어도 지치질 않을 만큼 체력이 단련되어 있었다. 어느새 날씨도 호수로 인해서 가끔 새벽이면 춥게까지 느껴졌지만 낮 동안은 덥지도 않고 걷기에 좋은 날씨가 되었다.이제서야 걸으며 여유 있게 상상의 나래를 펼 수가 있게 되었다.. 다만 골짜기를 지날 때 바람이 강하게 불어 걷는데 지장이 좀 있었지만. 호수 위에 떠있는 큰 섬들의 모양이 인상적이다. 섬의 서쪽 편은 예외 없이 절벽을 이루고 동쪽은 아주 완만한 돌고래 형태를 닮아 있다. 빙하시대에 형성된 오 대호는 수심이 최대사 백 미터가 넘는 큰 호수이다. 그 당시 빙하의 충돌에 의해 한쪽이 그처럼 깎여진 것이란다. 니피곤(Nippigon)이란 마을 어귀의 빈터에서 하루를 접었다. 전방에 도로가 큰 산 위로 나 있어 내일은 아침부터 산을 오르게 될 것 같다. 8월6일(화요일) 맑음 지역 도로는 좁고 험하기도 하지만 곳곳에 보수공사로 길이 파헤쳐져 여간 걷기가 힘들지 않았다. 그 좁은 길로 질주하는 제지용 목재를 수송하는 대형 트레일러의 위험한 곡예운행 역시 나에게 큰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들의 무례한 운행에 몇 번인가 도로 밖으로 밀려나 식은 땀을 흘리게 하였다. 때로 방금 포장하여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길을 걸으며 새로운 기분으로 위험을 잊을 수도 있었다. 오늘은 그랜드 캐년처럼 드높은 한쪽만 깎여나간 산의 모양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정오 쯤 Mr.장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얘기인즉 말만한 무스(사슴의 일종) 두 마리가 길을 건너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는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나도 도로 옆에서 수많은 동물(주로 사슴)들의 발자국은 보았으나 낮 동안에는 그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길옆의 모래밭에 수 많은 동물들의 발자국이 있고 차에 치어 쓰러진 많은 짐승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숲 속에는 동물들 천지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캠퍼를 타고 가면서도 무서웠는지 나보고 먼저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내가 앞장서서 그곳을 지났으나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제서야 그는 캠퍼를 몰고 나를 따라왔다. 사람이 없는 이 넓은 산림 속에 동물들밖에 더 있으랴. 누군가 여름에는 동물들이 파리떼를 피해 길옆 물가에 나와 있어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아직은 그런 광경을 목격하지 못했다. 오후에 테리팍스(Terry Fox-1981년 골수 암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한 채 암 기금 모금을 위해 캐나다 대륙횡단을 하다 이 근처에서 숨을 거둔 캐나다의 영웅) 기념 고속도로의 시작을 알리는 싸인을 지났다. 썬더베이 100km 전방이다. 도로의 곳곳에 이 대륙을 개척하기 위해 탐험하다가 인디언에게 희생된 탐험가나 신부들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어서 치열했던 인디언과의 영토 싸움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석양 무렵 장승민씨는 길옆의 한 농가 앞 정원에 캠퍼를 세우고 전기를 연결해 차 안에 에어콘까지 틀어 놓고 있었다. 수센마리를 지나기 전 묶었던 농가 이후 처음으로 사람 사는 주위에서 하루를 묶게 되어서인지 그는 주인집 처녀들과 사진 찍으랴 이야기하랴 바쁜 모습이었다. 8월6일(수요일) 맑음 대륙횡단 도로 옆으로 계속해서 우리가 테리팍스 기념 하이웨이를 가고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었다. 그는 진정한 캐내디언들의 영웅이다. 신체 건강한 스포츠맨이었던 그가 골수암으로 한쪽 다리를 잃고 의족에 의지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했을 때 꿈 많던 그의 청춘은 깊은 좌절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그 늪에서 빠져 나오기 위한 그의 몸부림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였을 것이다. 좌절 끝에 그는 결심하였을 것이다. 테리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암을 저주하면서 앞으로 사람들이 암으로 인해 자기와 같은 좌절을 겪지 않도록 암 퇴치 연구를 위한 기금을 마련할 생각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불사르며 걸었던 것이다. 꺼져가는 인생의 불씨를 되살리고자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며 이 길을 걸었을 그를 생각하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깨달을 수 있었다. 두발로 걸어도 힘이든 이 길을 한 쪽에 의족이라니? 그는 내가 내일 저녁이면 도착하는 그곳에서 온몸에 퍼진 암으로 인해 결국 육체를 잃고 말았지만 그의 영혼은 온 캐내디언(Canadian) 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시들지 않는 용기와 헌신으로 변화하여 오늘도 살아있다. 나는 앞으로 가는 길이 아무리 험하고 힘들어도 불평하지 않으리라 재차 다짐했다. 그리고 지금 살아 있다면 나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을 테리처럼 나 자신을 버리고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보리라 다짐했다. 내 나이 마흔 넷, 사람이 마흔을 넘기면 자의건 타의건 간에 그는 공인인 것이다. 이삼십대처럼 무슨 실수를 해도 젊다든가 철이 덜들었다는 변명으로 행동에 있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나이는 지난 것이다. 가정에서는 가장으로서 직장에서는 중견 사원으로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선배로서의 책임이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경거 망동이나 실수는 그가 속한 사회와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남길 수 있고 결국은 자기파멸로 이어 질 수 있다. 때문에 늘 책임 있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또한 40이 넘으면 이후에 세상을 떠날 때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참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이다. 무엇이 훌륭한 삶인가? 재물과 출세를 영위한 삶일까? 사람에 따라 생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남을 돕고 사는 것이 훌륭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자기게 부여된 똑같은 24시간을 자기 만을 위해 쓰지 않고 남을 위해 헌신 한다는 것이 쉽지않고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삶이 귀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8월7일(목요일) 엊그제보다는 나아졌지만 계속해서 고개가 이어졌다. 저녁 6시경 우리는 썬더베이 외곽 대륙횡단 도로 옆에 있는 테리팍스 기념관 10km 전방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길 옆에 있는 도로 공사장에 자리를 잡았다. 7시경 썬더베이에서 안면이 있는 대학 교수로 은퇴한 송 박사(Dr.송)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 왔다. 그는 20여 년 전에 나의 아내가 주 정부 살림청 직원이었던 그녀의 형부 가족과 이곳에 살 때 이웃에 살던 분으로 83년 우리가 뱅쿠버에서 토론토로 이사할 때 그의 집에서 하루 묵기도 해서 나와도 안면이 있다. 그가 우리에게 저녁식사에 초대를 하였다. 우리는 캠퍼를 그곳에 세워두고 그의 차로 선더베이의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순 한식( 우거지 된장국)으로 준비된 식사를 하고 더운물로 샤워와 빨래까지 할 수 있었다. 그는 운동생리학을 전공하여서 인지 나의 체력의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내의 체력관리에 필요한 여러 가지 좋은 조언을 하여 주었다. 자정이 되어서야 캠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밤에 수피어리어호 위로 천둥 번개가 치며 비를 뿌렸다. 역시 지명 그대로 천둥번개의 만(Thunder bay)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내일 아침엔 테리팍스기념관에서 그의 추모예배를 드릴 예정이다. 8월8일(금요일) 맑음 아침 8시경 캠퍼를 출발, 10시에 테리팍스기념관에 도착하였다. 잠시 후 선더 베이의 한 장로교회에서 시무하시는 짐 패터슨(Jim Paterson) 목사님과 그의 아내, 다른 교회에서 오신 두 분의 목사님과 장로님의 가족, 그리고 나와 Mr.장 이렇게 여덟 명이 모여서 16년 전 캐나다 대륙 횡단도중 이곳에서 26살의 생을 다한 테리팍스의 추모 예배를 드렸다. 패터슨 목사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반응이 미온적이라며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기념비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막 떠나려는데 크로니칼(Chronical) 신문사의 기자가 찿아 왔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한시간이나 늦게 나타나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심문하듯이 취재를 해갔다. 그나마 신문보도 용이라기에 시간을 할애하여 그에게 지난 일들을 설명하여 주었다. 그러나 약속하였던 그 곳 유일한 TV 방송국 기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불쾌한 기분으로 시청을 향하여 행진하여 들어갔다. 언론과는 달리 시민들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교차로를 지나갈 때 사방에서 손을 흔들며 울려대는 경적 소리로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한 시민은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왜 이곳 언론에서 제대로 보도를 안 했는지 언론사에 항의를 하겠다며 차를 돌리는 이도 있었다. 사실 우리는 조직된 홍보계획을 갖추지 못하고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가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언론사에 통보하여 취재부탁을 하거나 캐나다 곡물 은행에서 우리가 도착하기 전 현지 언론사에 우리의 도착 날자를 통보하는 식으로 홍보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뒤늦은 언론 보도로 인해 모금 활동에 상당한 지장이 초래되었다. 언론을 통하여(대부분 시내 행진 후 저녁 뉴스 및 다음날 신문을 통하여 보도됨) 우리의 모금횡단이 알려졌을 즈음에는 우리는 일정상 이미 도시를 벗어난 상태였기 때문에 성금을 접수할 수 없었다. 때문에 종종 기부자들이 고속도로를 달려와 성금을 주거나 우리를 찿아 헤매다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접수 창구의 부재로 인해 모금활동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시민들의 항의 때문이었는지 도시 외곽으로 나갈무렵 이곳의 유일한 TV방송국인 TBT에서 찿아와 취재를 하였다. 도시를 다 나오도록 빨래 방을 찿지 못한 우리는 짐 패터슨 목사님댁에 연락하여 세탁기 사용을 부탁했고 그는 쾌히 승낙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저녁까지 대접받고 빨래, 샤워를 끝냈다. 보급품을 보충한 후 교회 주차장에 캠퍼를 세우고 하루를 묵었다. 8월9일(토요일) 맑음 아침 일찍 짐 목사님 댁을 떠나 시외로 나오자 다시 산과 나무와 호수뿐인 대자연이 펼쳐졌다. 나는 한 주유소에 들려 조간신문을 펴보았다. 혹시나 우리의 기사가 실리지 않았나 해서였다. 그러나 신문에 우리의 글은 실리지 않았다. 조그만 동양사람이 테리의 신화를 깨고 만 것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일까? 나는 이 일을 더 열심히 걸으라는 채찍질로 받아들이려고 애썼지만 영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어째든 대륙횡단의 반을 지났으니 이제부턴 내리막이다. 점심때쯤 우리는 카카베카(Cacabeca)폭포에 도착하였다.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큰 규모는 아니었으나 꽤 웅장한 모습이었다. 캐나다에 나이아가라 폭포가 없었다면 이 정도면 유명한 폭포 관광지가 되었을 텐데... 그러나 비가 내려서인지 물은 벌건 황토색이었다. 마침 토론토에서 여름 휴가를 이용하여 록키에 간다는 한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이곳 어딘가를 가고 있을 우리를 찿고 있었다며 반가와 하였다. 오후 서너 시경에는 한 노인이 나의 곁에 와 차를 세웠다. 그는 며칠 전 국영 CBC라디오 뉴스에서 우리 소식을 듣고 이틀 전부터 우리를 찿아 헤매었다고 했다. 그는 결국 경찰에 문의하여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찿아 온 것이었다. 이런 분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아름답게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며칠을 찿아 헤맨 끝에 결국 20불에 정성을 담아 전달하고 떠나는 그가 너무도 고마웠다. 오늘은 일찍 모텔에 자리를 잡고 쉬기로 했다. 이제부터 약 800여 km 거리의 위니펙(Winipeg)까지는 큰 도시가 없기 때문이다. 마침 저녁 내내 비가 쏟아져 모텔에 머무르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저녁 내내 성경을 읽고 기타를 치며 찬양을 했다. Mr.장은 캠퍼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끝내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마 그의 취미인 햄 통신을 하기 위해서인 듯 했다. 8월10일(일요일) 어제 일찍 모텔에 들어가 쉬었고 지형 또한 평지의 곧은 길로 변하였기 때문에 오늘은 해질 무렵까지 쉽게 70여 km를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루종일 가도록 인가가 보이질 않았다. 오늘도 지나가는 기차의 경적을 기다리며 자연의 적막이 깨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오후에는 길에 떨어져 있는 지갑을 주었다. 아무 증명서도 없이 메모지 몇 장과 50불짜리 지폐가 한 장 들어 있었다. 나는 차에 도착하여 Mr.장에게 지갑과 돈을 보여주었다. 내가 이 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자 그는 경찰에 보내자고 했다. 나는 경찰에 갖다 준들 지갑에 증명서가 없는데 어떻게 찿아 주겠느냐고 되물으며 성금함에 넣을 것을 주장했다. 그는 계속 주인을 찾아 줄 것을 주장했으나 나는 다른 생각을 하며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돈을 성금함에 넣어 버렸다. 정부보조 이백 불까지 합치면 그 돈은 모두 이백 오십불이 되어 북한의 굶주리는 열가정에 한달 먹을 식량을 보낼 수 있지 않은가! 본인에게 찿아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증명서가 없으니 그럴 수도 없고 이곳 사람들의 50불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영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양심이 좀 찔리기는 했지만 사람의 생명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길이 좋고 산지가 없어져 한숨을 돌리는가 했더니 이번엔 대신 마파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바람을 거슬려 걷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만큼이나 힘이 들었다. 길 양쪽에 우거진 침엽수림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가 상당히 북쪽에 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늑대나 곰이 나올 것 같은 석양 무렵 산 속의 적막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 시작할 즈음 멀리 길옆에서 비상등을 켠 채 나를 기다리는 캠퍼를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양해를 구하고 조그만 모텔옆의 빈터에 캠퍼를 세웠다. 압살라(Absala)라는 이곳의 날씨가 벌써 서늘해진 느낌을 준다. 8월 11일(월요일) 맑음 대륙 횡단을 시작한지 70일째, 토론토를 떠난 지는 한 달이 되는 날이다. 그동안 3700km를 걸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제대로 걷지 못한 날들이 많아서 예정보다 뒤져있다. 오늘아침은 캐나다에선 보기 드물게 화창하고 아름다운 날씨였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복음찬송을 힘차게 부르며 왔다. 점심 식사 전 앞에 가 있던 Mr.장으로부터 긴급 무전 연락이 왔다. 황급히 도착하여 보니 도로 옆 모래밭에 캠퍼가 빠져 있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사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한쪽 바퀴가 모래속으로 점점 빠져들며 차가 한쪽으로 기울어 넘어지기 직전이 되어 있었다. 이런 대형 차량을 꺼낼 장비가 이 산 중에 있을 리가 없었다.나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 지고 있었다. 계획의 차질은 물론 막대한 경비가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몇 대의 차량들이 지나가다 우리를 도우려 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트럭 한대가 지나가기에 불러 세우고 구조를 요청했더니 뜻밖에도 그에게서 철도 복구 차량이 이곳을 향하여 오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차가 나타나자 나는 도로 한가운데를 막아서고 도움을 청했다. 우리의 사정을 들은 그들은 우리의 차를 끌어내기 시작했지만 워낙 캠퍼가 모래밭에 깊숙이 박혀 전복의 위험이 있어 수 차례의 시도 끝에 가까스로 끌어낼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저녁 8시경까지 걷고 나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캠퍼가 모래에 빠지는 와중에 긴장한 탓인지 오늘은 몹시 피곤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잉글리쉬 리버(English River) 근처 숲 속의 밤은 적막하기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