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개- 밤의 미학/청야 김 민식
황홀한 저녁놀보다는 칠흑의 밤이 더 아름다워, 얼굴이 발개진 소년처럼 가슴이 울렁거릴 때가 있다.
오늘따라 가게 오븐의 열기로 견디기가 힘들다. 나이 탓인 걸 어찌하랴. 이제는 참아낼 기운마저 줄어드니. 점점 더 서글퍼진다. 가게 뒷 문, 고등학교 철조망 담장을 넘는다. 밤의 찬 공기에 어느새 몸이 사늘해지며 나의 습관이 시작된다.
목이 아프도록 길게 빼고 밤하늘을 보는 것이다.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오월의 요염한 노을이 로키산맥의 혼을 빼고, 시눅바람이 천지를 뒤흔들더니 어느새 어두움이 사방을 뒤덮었다. 칠흑의 찬 공기가 으슥하지만 밤하늘의 살가운 기운에 평온을 되찾는다.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 마냥 즐겁다. 솜털 거느린 달무리는 언제나 슬픈 모습 이자만, 여린 달빛이 애처로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다. 마음은 어느덧 고요해지고 빈 가슴이 풍성해진다. 텅 빈 공간 속으로 밤기운이 몰려오면, 마음은 밤의 향연으로 향한다.
로키산맥을 넘느라 한참을 슬피 울었나 보다.
속 빈 구름바다, 마른 눈물로, 촉촉한 여유를 이고 온다. 오만한 자태로 매우 느린 게 여유롭다. 곧 사라질 녀석, 석별의 정을 나누는 시간이다. 너와 나, 서로 사랑을 나누며 가슴을 데우지만, 표표한 고독이 엄숙한 모습으로 밀려온다. 촉촉한 것들이 틈새를 비집고 잦아든 것이다. 젓은 고독은 촉촉한 창조의 생명의 기운으로, 여명의 새로움을 찾아 나간다. 인생을 늙게 하며 삶을 슬프게 만드는 것은, 창조의 힘이 메마르기 때문이리라.
저녁 시눅바람이 한차례 휘몰아치더니 마른 목덜미에 이슬이 맺힌다. 살갗이 촉촉하다.
검붉게 마른 심장을 다독이는 가냘픈 소리가 들려온다.
짙은 안개 같기도 한, 희뿌연 무리가 밤바람을 타고 밀려 들어온다.
제 무게에 눌려 춤추지 못한 외로움을 달래려는가.
나의 얼굴에 스멀스멀 착 파묻곤 촉촉한 키스로 짜릿한 애무를 한다.
‘는개’ 향연이 막 시작되고 있다.
같은 물방울인데 안개는 끼어 있고 는개는 내린다.
안개는 밤새 현란한 춤으로 덧없는 소멸을 하지만, 봄 는개는 대지를 촉촉이 적셔가며 새롭게 만든다.
'는걔'
예지의 신비한 비밀과 정을 가득 담은 따뜻한 물방울이다.
보슬비, 가랑비, 이슬비,처럼 ‘비’ 자 돌림이 아니다. 안개보다는 조금 무겁고 굵어서
비답지 않은 여린 비, ‘축 늘어진 안개’를, 옛 선조들은 ‘는개’라고 불렀다.
는개의 간지러운 애무에 파묻혀 철조망 담장에 바짝 붙은 70년생 미루나무가 오랜만에 가로등 불빛 아래 기분 좋게 웃고 있다.
이태리포플러 교배종을 나는 미루나무라고 부른다.
가게를 인수하고 25여 년이 훌쩍 지나는 동안, 무서운 생장과 풍우의 고통, 아픔 속에서도 꿋꿋이 명을 이어온다. 미루나무 우듬지가 가로등 아래에서 반갑게 맞이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우듬지의 길이는 어느새 가로등의 2배 정도의 길이로 생장했다. 미루나무가 는개에 촉촉이 적셔진다. 미루나무는 이른 봄 는개의 물방울 은덕에 몸속의 독을 뱉어내며 봄을 예고한다. 반가움에 가지들을 한참 주무르면 주무른 양손에 고약한 독성의 악취 때문에 종일 고생을 한다. 겨우내 쌓인 노폐물을 몸 밖으로 퍼내고 는개의 새로운 물방울을 흠뻑 마시고 있는 것이다.
는개를 머금은 미루나무 잎사귀들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며 오월의 밤 향연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양손으로 한참을 비벼댄 손바닥의 미루나무 향내가 이제는 싱그럽다.
는개 속에 싸둘린 미루나무의 모습이 위엄한 자태로 다가온다. 몇년 전 늦가을 폭설로 큰 가지들이 뚝뚝 잘려나 볼품이 없던 앙상한 자태가 거룩한 어머니의 모습처럼 다가온다.
2월 겨울밤의 캘거리 는개는 싸락눈이나 상고대 눈꽃처럼 화려함을 넘어, 한순간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며. 봄의 전령사 노릇을 하지만 오월의 는개는 촉촉한 것으로 창조를 선물한다. 는개 덕분이다. 동일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더러운 것은 뱉어내고 새로운 창조를 만드는 미루나무처럼, 삶의 이 순간에, 또 뿌듯한 밑줄을 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