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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에베소서 6:1-6:4
제 목 : 자녀들아, 아비들아
0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0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0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0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1. 기독교의 본질
오늘은 오래간만에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지금 지구촌에 살고 있는 전체 인구가 대략 얼마나 되는지 아시는 분, 혹시 계십니까?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전 세계 인구는 대략 75억 명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이 약 13억 9천만 명으로 1위, 인도가 약 13억 4천만 명으로 2위이고, 미국이 한참 뒤떨어진 약 3억 3천만 명으로 3위를 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 세 나라를 포함해서 1억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나라는 모두 열세 나라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75억 명 인구 중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의 숫자는 대체로 얼마나 되는지 아시는 분, 혹시 계십니까? 기독교를 믿는 사람의 숫자는 약 21억 4천만 명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숫자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한 숫자입니다. 기독교에 이어 이슬람교가 약 13억 1천만 명, 힌두교가 약 8억 7천만 명, 유교가 약 4억 명, 불교가 약 3억 8천만 명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무교인 사람도 약 7억 7천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해서 약 21억 4천만 명에 이르는 기독교 신자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과연 바르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모두가 동의하다시피 기독교는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럼 21억 4천만 명에 이르는 기독교 신자들은 성경을 과연 바르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성경을 통해 궁극적으로 기독교가 말하고자 하는 것, 성경을 통해 궁극적으로 기독교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한 상태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일례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이틀 전 금요일 저녁에 카카오톡을 통해 문자를 하나 받았습니다. 제가 성도이던 시절 다니던 교회, 여러분도 잘 아시는 교회의 권사님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내용과 그 분의 장례절차를 안내하는 부고 문자였습니다. 위로예배, 입관예배, 천국환송예배, 부활대망예배 등 모두 네 번의 예배 시간과 장소를 안내해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대망예배’라는 여섯 글자가 저의 마음을 아주 많이 안타깝게 했습니다.
저는 돌아가신 분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큰 교회의 권사님이셨으니 아주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셨던 분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권사로서 신앙생활을 하셨던 이 분은 이미 부활하신 존재였습니까, 아니면 부활을 기다리는 존재였습니까? 이미 부활하신 존재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새로운 피조물이었고, 거듭난 자였고, 영에 속한 자였고, 속사람이었고, 새사람이었습니다.
이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이 분 역시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살아난 부활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을 위한 ‘부활대망예배’는 성경의 이치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이치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만약 ‘부활대망예배’가 성립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괜히 죽으신 것입니다. 만약 ‘부활대망예배’가 성립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정말 헛되이, 정말 쓸모없이, 정말 무가치하게 죽으신 것입니다. 만약 ‘부활대망예배’가 성립하는 것이라면 이 권사님은 자신이 이미 부활한 존재인 것도 모른 채 신앙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치에 맞지 않는 부고를 주고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아무 의미 없는 사역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교회가, 목회자가, 성도가 성경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 기독교 신자이건 혹은 불신자이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살아있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켜서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죽어서는 천국에 가서 다시 살려주는 것쯤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과연 그런 종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기까지 하시면서 가르쳐주신 가르침은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리고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각종 종교행위로만 기독교가 얼룩져 있습니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상한 주장만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가 세상 속 다른 종교와 하나도 다를 바 없이 되었고, 기독교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각종 비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온전한 역할을 하지 못하니 세상은 늘 그 모양 그대로인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기독교를 가리켜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켜서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종교라고 결코 선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기독교를 가리켜 죽은 사람을 천국에서 다시 살려주는 종교라고 결코 선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기독교를 가리켜 하나님을 믿으면 상을 받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벌을 받는 종교라고 결코 선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기독교를 가리켜 선하게 살면 천국에 가고, 악하게 살면 지옥에 가는 종교라고 결코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럼 성경은 무엇을 선언합니까?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죽기까지 하시며 사람을 성도 삼아주셨으니,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그 관계를 사람끼리도 서로 적용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세상 모든 일이 형통해질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천국의 삶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2. 에베소서의 흐름
이러한 기독교의 본질을 가장 간략하면서도 가장 세밀하게 설명해주는 대표적인 책이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바울이 열세 권의 서신서를 쓰고 여러 다른 사도들이 여덟 권의 서신서를 기록했지만 에베소서만큼 기독교의 본질을 간략하면서도 세밀하게 기록한 책이 없습니다. 과연 그런지 오늘은 지나간 에베소서의 내용을 한 번 간추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 분, 즉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로 택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분, 즉 구원 계획을 세우신 분이시고, 그 계획에 따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어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 분이시라고 선언했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업을 잇게 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의 성령을 보내주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포함하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는 분이시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풍성히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던 우리,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선언했습니다. 구원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구원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변화되어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죽었던 존재에서 하나님에 대해 살아난 존재가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또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상호간의 관계도 변화시켰다고 선언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극심한 차별이 존재했었지만 하나님께서 막힌 담을 허시고 둘로 하나를 만드사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더 이상 외인도 아니고, 더 이상 나그네도 아니며 동일한 하나님의 시민이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성도됨을 영원히 지켜주시고 책임져 주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이처럼 위대한 것이기에 바울은 에베소서 3장에서 복음을 전파한 일로 자신이 로마의 감옥에 갇히는 일이 일어났지만 자신은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갇힌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니 결코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라고 권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갇혀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모든 지혜의 결실인 교회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기에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하나님의 일은 결코 중단되지 않고 영원히 진행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성도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항상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에 계시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성도들이 사랑 가운데에 뿌리가 박히고, 그 터가 굳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가 얼마나 넓은지, 그 길이가 얼마나 긴지, 그 높이가 얼마나 높은지, 그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이 성도들에게도 충만하게 채워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선언하고 그 사역의 내용과 의미를 성도들이 풍성히 알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바울은 성도들을 향한 권면에 들어갔습니다.
바울의 권면을 정리하면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권면은 [에베소서 4:1],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권면이었고, 두 번째 권면은 [에베소서 4:17],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행하지 말라는 권면이었습니다. 세 번째 권면은 [에베소서 5:1],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권면이었고, 네 번째 권면은 [에베소서 5:8],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권면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권면은 [에베소서 5:16],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는 권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권면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권면은 특정 행동을 반드시 해야 한다거나 특정 행동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권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권면은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처럼, 복음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특정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삶의 원리에 관한 것이었기에 그 권면에서 구체적인 무엇을 끄집어내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3. 피차 복종하라
우리들의 이러한 고민을 모를 리 없는 바울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해준 권면이 바로 [에베소서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였습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피차 복종하라’라는 권면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시겠다는 분, 계십니까? 아마 안 계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권면,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행하지 말라는 권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권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권면,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는 권면을 쉽게 표현해서 바울은 ‘피차 복종하라’라고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차 복종하라’라는 권면은 아주, 매우, 정말로, 진짜로 쉽고도 어려운 권면이었습니다. 즉 힘이 없는 자, 물질이 없는 자, 권력이 없는 자, 지혜와 지식이 없는 자, 나이가 어린 자들이 복종하며 사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이지만 힘이 많은 자, 물질이 많은 자, 권력이 많은 자, 지혜와 지식이 많은 자, 나이가 많은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복종하며 사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차 복종하라’라는 권면은 어차피 복종할 수밖에 없는 약한 자들, 없는 자들을 향한 권면이 아니라 결국 있는 자들, 많은 자들, 강한 자들을 향한 권면인 것입니다.
그래서 ‘피차 복종하라’라는 권면의 세 가지 예로 드는 것이 모두 대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가 [에베소서 5:22-33]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고, 두 번째 예가 [에베소서 6:1-4]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고, 세 번째 예가 [에베소서 6:5-9] 종과 상전의 관계에 관한 예입니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모범으로 해서 이 관계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관계에서 우리가 더욱 더 눈 여겨 보아야 하는 것은 남편이고, 부모이고, 상전입니다. 왜냐하면 두 관계 속에서 이들이 더 있는 자, 더 많은 자, 더 강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살펴본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에서 [에베소서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라고 하며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의미하는 복종은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라 복종해야 하는 대상의 완전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남편이 완전한 경우에 아내는 그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남편의 완전성을 요구하는 표현이 바로 [에베소서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드린 이 말씀이 남편의 사랑이 먼저이고 아내의 복종이 나중이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 남편은 사랑만 하는 존재이고 아내는 복종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피차 복종해야 하는 관계이고, 남편과 아내는 피차 사랑하는 관계여야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더 강자로 인식되는 남편의 역할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4. 자녀들아, 아비들아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 관한 내용도 동일합니다. 이 내용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모범으로 하고 있는 내용이고, 피차, 즉 서로가 서로에게 행해주어야 하는 내용이고, 강조의 초점은 자녀가 아니라 부모입니다. 이 말씀을 조금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제가 오늘 본문에 내용을 조금 더 추가했습니다.
‘아니, 제가 뭔데 성경을 제 마음대로 바꾸고 그래! 제 마음대로 성경 내용을 넣다 뺐다 할 수 있는 거야!’ 이렇게 노여워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노여워하지 마시고 끝까지 들어보시면 여러분도 충분히 수긍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4절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앞의 [에베소서 5:22-30]로부터 연결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어드리는 본문을 들으시며 여러분의 눈은 [에베소서 5:22-30]을 따라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2 자녀들아 자기 부모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부모가 자녀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자녀들도 범사에 자기 부모에게 복종할지니라 25 아비들아 자녀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아비들도 자기 자녀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이러고 [에베소서 6:1-4]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0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0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0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0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라는 본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하시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한 것을 모범으로 하여 피차 행해야 할 것을 권면하되, 강조는 아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녀를 향한 권면이 세 절이고, 아비를 향한 권면이 한 절이라고 해서 강조가 자녀에게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쭈어 보겠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라,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권면했는데 이것이 자녀들만을 향한 권면입니까, 부모들을 향한 권면도 되는 것입니까? 부모들을 향한 권면도 되는 것입니다. 즉 부모도 자식에게 순종하고, 자식을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양육하라고 권면했는데 이것이 부모들만을 향한 권면입니까. 자녀들을 향한 권면도 되는 것입니까? 자녀들을 향한 권면도 되는 것입니다. 즉 자녀도 부모를 노엽게 하지 말고 부모가 나이 들어 힘이 없을 때에 부모를 양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보다 부모가 자녀에게 순종하고, 자녀를 공경하고,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 어려운 일을 먼저 부모부터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의 이런 차원 높은 의미를 다 잊어버리고 성경 말씀을 언제나 자기 입맛에 맞게만 적용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다툼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부모가 자식에게 ‘성경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그랬어. 성경에 부모를 공경하라 그랬어. 너는 지금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있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이에 자식도 지지 않고 맞섭니다. ‘성경에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랬어요. 아빠 엄마도 지금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있는 것이에요.’라고 말합니다. 성경 말씀이 이렇게 자신의 상황만을 변론하는데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부모 자식 간에도 피차 순종하고, 피차 공경하고, 피차 노엽게 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5. 주 안에서, 주의 교훈과 훈계로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온전히 순종하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온전히 공경하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상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기준까지도 명확히 제시합니다. 그 기준이 1절의 ‘주 안에서’이고, 4절의 ‘주의 교훈과 훈계로’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으로, 하나님의 가치와 원리로 순종하고, 공경하고,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 말이 더 어려워요’라고 말합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보다 ‘주의 교훈과 훈계로’라는 말보다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 하나님의 가치와 원리라는 말이 더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잘 아시는 훨씬 더 쉬운 말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 안에서’, ‘주의 교훈과 훈계로’라는 말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고, 서로 공경하고, 서로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의 소유주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을 위해 죽으셨던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가 [에베소서 6: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입니다. 이 말씀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녀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이 결코 아닙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 통용되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 하나님의 가치와 원리로 행할 때 사람 상호간의 관계는 잘 되고 장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누려야 할 최대의 가치 자유와 평화와 안식과 행복이 찾아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실 수 있는 분, 아멘 하시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삶의 현장을 돌아보면 이렇게 하는 것은 말에 지나지 않고, 이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어나갈 때 세상이 쓰는 대표적인 방식, 일벌백계 즉 한 사람을 본보기로 삼아 여러 사람에게 교훈을 주는 방식, 또 신상필벌, 즉 잘 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주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성도는 적고 죄인은 많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더 많은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사람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피해 보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일벌백계가 필요하고 신상필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을 사용하더라도 알고 하자는 것입니다. 부득이 이런 방식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이런 방식이 그렇게 옳은 방식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이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사람을 온전히 바꿀 수 없고, 세상을 온전히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백 번 하던 것을 열 번으로 줄일 수 있고, 열 번 하던 것을 한 번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즉 나부터 서서히 변화되어 가는 가운데, 다시 말해 내가 서서히 성숙되어 가는 가운데 내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삶이 바로 이런 삶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성도에게 완벽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존재적으로는 완벽한 존재이나 언제나 죄에게 노출되어 있기에 결코 완벽을 행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이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서 성도를 보호하시고, 성도의 삶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성도로서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지만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자책하는 대신에 성경을 많이 읽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 가시는 일에 매달릴 수 있기를 권면해 드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지식이 내게 쌓여갈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삶,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행하지 않는 삶, 하나님을 본받는 삶,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삶,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즉 피차 복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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