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역사를 딛고 일어선 한국 대중음악은 이후 금지로 얼룩진 암흑시대를 맞기도 했지만, 지금은 한류 열풍을 통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국내 대중음악의 해외진출 도전사는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시대별로 어떤 가수들이 어느 나라에 진출해 어떤 성과를 올렸는지 살펴보자.
일제 강점기
한국 대중 가수가 외국에 진출한 역사는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 태양악극단, 이난영, 김정구, 박향림, 장세정이 포함된 오케레코드의 조선악극단 그리고 라미라가극단 등 무수한 조선 공연단체들과 가수들이 일본에 진출했다.
한국 가수들의 해외진출 역사에서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의 존재는 중요하다. 그녀는 태양극단과 함께 1932년 일본 오사카 공연 길에 올랐다. 1934년에는 한국인 가수로는 최초로 도쿄에서 열린 전국 명가수 음악 대회에 참가한 기록을 남겼다. 또한 이난영은 국내 최초이자 조선악극단의 프로젝트 여성그룹인 저고리시스터의 핵심 멤버로 일본 무대에 오른 한국 걸 그룹의 대모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
해방 이후 195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계는 전쟁으로 인해 궁핍했지만 새로운 기회와 희망을 꿈꿨던 시기였다. 해방 이후 한국에 주둔하기 시작한 미군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서구 음악 장르가 물밀듯이 유입되며 장르의 다양화가 시작되었다. 또한 미군들의 여흥을 위해 조성된 미 8군 무대에 올랐던 미 8군 가수들은 일본이 아닌 동남아와 미국 등 여러 나라에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길옥윤 - 밀항으로 이뤄낸 해외 진출
고(故) 길옥윤은 한국 대중가요계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명이다. 그는 한국 전쟁 전인 1950년 1월에 재즈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했다.
길옥윤 60년대 일본 발매 음반
숙명 "1990년" 앨범 앞면
현지에서 요시노 밴드의 일원으로 음악 생활을 시작, 연주경력을 쌓으며 현지에서 여러 장의 음반을 발표하면서 TBC, NHK 방송에서 재즈 가수로도 명성을 얻었다. 1960년, 민단에서 도쿄 스윙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모국 공연을 왔을 때는 단장의 역할을 맡았다. 한일 동시 발매 음반도 있다.
김시스터즈 - 한국 최초의 공식 걸 그룹
1953년 결성한 한국 최초의 공식 걸 그룹 김시스터즈는 1959년 미국인 흥행사 톰 볼에 의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진출했다. 2009년에 미국에 진출해 화제를 모은 <원더걸스>보다 무려 50년 앞서 아시아 걸 그룹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사례다.
김시스터즈 미국 라스베이거스 공연(1959년)
김시스터즈 특집화보기사 미국 Life지(1960년 2월 22일자)
김시스터즈 1960년 데뷔앨범 미국 한국 대만 동시 발매
당시 미국 최고의 인기 TV 프로그램 「에드 설리번 쇼」 출연 후 현지에서 첫 앨범을 발표했다. 세계적인 사진잡지 「LIFE」 1960년 2월 호에 특집 화보로 소개되기도 했다. 미국 발매 음반은 국내 L.K.L레코드와 대만에서도 발매되었다. 미국 진출 11년 만에 귀국해 전국 투어 공연을 펼쳤는데 서울 시민회관 실황이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김시스터즈와 김브라더스 미국 하와이 와이키키 호텔 공연(1970년 12월 7일 신진)
귀국 시민회관공연실황특집 김시스터즈 앨범 앞면
릴리화 - 한국 최초로 유럽에 진출한 여가수
서울대 음대 출신 1호 여가수 릴리화(한국이름: 최정환)는 유럽에 진출한 최초의 국내 가수이다. 1959년, 서독으로 유학을 떠나 국제 유학생 경연 대회에 참가해 160여 명의 참가자를 제치고 최고상을 수상했다.
릴리화 독일 필립스사 발매앨범(1966년)
LILIFA / WIND / BEI / NACHT 앨범 앞면
이후 세계적인 레이블 필립스 레코드사에 전속된 그녀는 팝 음악과 민요 그리고 클래식을 넘나들며 폭넓은 가창력으로 ‘동양의 별’로 불렸다.
1960년대
60년대는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로 기록되어 있다. 트로트에 국한되었던 음악 장르가 팝, 재즈, 록, 포크 등으로 다양화되고 일반 무대에 소개되면서 대중음악의 폭이 넓어진 시대였다. 전쟁으로 무너진 국가 재건이 모토였던 시대이기에 밝고 건강한 기운이 넘쳤다. 미 8군 출신 가수들을 중심으로 해외 진출이 시도되었다.
손시향 - 미국 앨범 발매
손시향은 잘생긴 인물과 탁월한 미성으로 50-60년대를 풍미한 인기 가수였다. 고(故) 김현식이 불러 친숙한 <이별의 종착역>은 그의 노래이다.
손시향 60년대 미국 발매 앨범
손시향 앨범 뒷면
나는 믿지 않는다 앨범 앞면
1960년 미국 플로리다의 마이애미로 이민을 떠난 그는 미국에서 리 손(LeeShon)이란 이름으로 독집을 발표해 현지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미지의 한국 가수가 무려 6개 언어로 12곡을 녹음했기 때문이다. 「시카고 선 타임즈」는 "새로운 발견", 「달라스 타임스 헤럴드」는 "통제할 수 없는 위대한 매력이 담긴 노래"라고 평했다.
패티김 - 해방 후 최초로 일본에 초청받은 가수
패티김은 1960년 일본 NETTV의 초청을 받아 톱클래스 악단 스타 더스트와 3개월간 일본 전국 투어를 돌았다. 해방 이후 최초로 일본의 정식 초청을 받은 가수로 기록된다. 당시 팝송은 물론, 한복 차림으로 장고춤을 추며 <아리랑> 등을 노래했다.
패티김 60년대 일본 발매 음반
패티김 70년대 일본 발매 음반
현지에서 음반을 여러 장 발표한 패티김은 1961년 5월에 귀국해 반도 극장에서 「일본에서 돌아온 패티김 귀국쇼」를 열었다. 이 무대는 국내 최초의 리사이틀로 기록된다. 이후 패티김은 1962년 김시스터즈, 김치캣, 손시향에 이어 한국 가수로는 네 번째로 미국에 진출했다.
패티김 힛트 집(PATTIKIMHITPARADE) 앨범 앞면
패티김 1963년 4월 26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Sun지 소개 기사
한명숙 - 일본에서 리메이크된 앨범
1961년 발표되어 동남아에 널리 알려진 한명숙 노래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1960년대 미 8군 가수 시대의 신호탄이었고 일본과 대만은 물론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까지 그 인기가 대단했다. 미 8군 화양 프로덕션은 쇼 단을 구성해 1965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싱가포르, 홍콩 등 동남아 순회 공연에 올랐을 정도였다. 태국과 일본에서는 음반 녹음이 이루어졌고 일본어와 중국어로도 번안되었다.
쟈니브라더스 - 대만에 빨간 마후라 열풍
특히 60년대 대만에서는 한국 영화와 가요 열풍이 대단했다. 1965년 발표된 남성 사중창단 쟈니브라더스의 「빨간 마후라」 영화 주제가는 대만의 공군가로 사용되었을 정도였다. 대만에서는 <노란 샤쓰의 사나이>나 <빨간 마후라>를 자국 노래로 알고 있을 정도다.
노오란쌰쓰의 사나이 앨범 앞면
빨간마후라 / 황문평 작곡집 NO.2 앨범 앞면
이미자 - 일본에서 앨범 발매
1964년 국내를 평정한 <동백 아가씨>로 인해 이미자는 1966년 7월, 일본에 진출해 여러 장의 음반을 녹음했다. 당시는 한일 국교 수립 이후 반일 감정이 악화되어 이미자의 일본어 노래 녹음은 반일 감정에 거센 기름을 부으며 노래는 금지가 되었다.
이미자 동백아가씨 한국 일본 발매 음반들
하지만 그녀의 일본어 버전 <동백 아가씨>를 듣고 싶은 팬들의 호기심으로 수요가 급증하자 불법 음반까지 등장했다.
이미자 귀국 제1탄 앨범 앞면
이미자 1966년 첫 일본방문
이미자 1966년 첫 일본공연
이미자 1968년 두번째 일본방문 방송출연
1970년대
금지와 통제로 얼룩진 암흑기였던 70년대에도 어김없이 한국 대중 가수들의 해외진출은 계속됐다. 대중음악 사상 최초로 국제 가요제에서 수상을 하는 가수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반짝 이슈에 그쳤고 성공 신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당시 해외 음악 시장에 대한 체계적 연구나 대처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정훈희 - 한국 가수 최초로 국제 가요제 수상
정훈희는 도쿄, 그리스, 칠레 등 국제 가요제에서 한국 대중음악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던 70년대 한국 대표 가수였다. 데뷔곡 <안개>로 1970년 38개국 44개 팀이 경연을 벌인 제1회 도쿄 국제가요제에서 국내 가수로는 최초로 월드 베스트 10에 입상했다. 1972년 제5회 그리스 국제 가요제에서는 아시아 가수들 중 유일하게 베스트 7을 수상했다. 그 해 10월엔 이봉조 곡 <좋아서 만났지요>로 도쿄 국제가요제에서 다시 특별 가수상을 수상했다.
정훈희 70년대 일본 발매 싱글
정훈희 70년대 국제가요제 출전 모습
정훈희 1970년 제1회 동경국제가요제에 출전해 노래하는 모습
1973년 일본 킹 레코드와 계약한 정훈희는 예명을 하니 준으로 정하고 활동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당시 현지 사정을 모른 채 무리하게 일본에 건너 간 우리 가수들의 성적은 부진했다.
정훈희 1975년 국제가요제 수상 후 귀국 모습
정훈희 동경국제가요제 수상 소식을 실은 기사
김상희 - 아리랑페스티벌의 한국 대표 가수
김상희는 1970년 패티김과 함께 일본 EXPO 70의 한국 행사 도쿄 아리랑페스티발에 한국 대표 가수로 한 달 간 참여했다. 이 때 관심을 보인 일본의 캐논 음반사를 통해 여러 장 음반을 발매해 일본 현지에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 야마하 음악제에서 영어로 노래하는 김상희를 눈여겨본 미국 MGM사와 음반 계약을 체결해 화제를 모았다.
김상희 70년대 일본 캐논사 발매 음반
또 세계적인 트럼펫 주자 히노데루 마사와 합동 콘서트, 동남아 순회 공연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성음사의 수출용 음반은 김상희가 당시 팝송 곡으로 세계 진출을 모색했던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펄시스터즈 - 뉴욕 진출 시도
펄시스터즈는 일본을 발판으로 세계무대에 도전했다. 100번째 녹음 곡 <사랑의 교실>로, 입상은 못했지만 도쿄 국제 가요제 본선에 진출하며 일본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1972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간 펄시스터즈는 준과숙으로 팀 이름을 변경해 소니 CBS와 2년 계약을 맺고 데뷔했다.
펄시스터즈 70년대 일본 발매 음반
펄시스터즈 쥰&숙 7인치 싱글 1972년 일본 CBS 소니 SOLA50
일본 데뷔곡 <달빛에 젖은 꽃>은 제5회 신주쿠 가요제에서 은상에 입상하고 첫 독집 <하얀 가랑비의 이야기>는 일본 TV, 라디오 등에서 약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펄시스터즈는 캐나다와 미국 라스베이거스, 뉴욕 진출을 시도했지만 세계의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
이성애 - 일본에서 최초로 성공한 한국 가수
1976년 진출해 남진의 <가슴 아프게>를 리메이크했던 이성애는 일본 무대에서 성공을 거둔 최초의 한국 가수다. 일본 평론가들로부터 “엔카의 원류를 한국의 이성애에서 찾았다”고 극찬 받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한국 가수들의 본격적인 일본 진출의 물꼬를 튼 장본인으로서, 이후 상당수의 한국 여가수가 일본에 진출했다.
이성애 70년대 일본 발매 음반
와일드캐츠 - 싱가포르에 진출
혼성 록 밴드 와일드캐츠는 싱가포르에 진출해 디스코 캐츠(DISCOCATS)라는 팀명으로 독집 음반을 발표하며 현지인들의 사랑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