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이라는 인물은 한국 음악사에서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상징성을 지닌다. 본 연극이 이 이름을 현재의 젊은 무명 작곡가에게도 함께 부여하고 있는 것은 중요한 미학적 장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단절과 연속성의 경계에 선 예술가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한 세기를 가로지르는 ‘음악적 양심’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연극은 다방에서 울려 퍼지는 오르골 소리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다리 하나를 놓는다. 이 장치는 기계적 장난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인간적인 울림을 갖는다. 꿈속에서 과거의 박태준과 만나는 장면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자아의 분열과 성찰을 상징하는 중요한 극적 전환점이다. 이 만남은 마치 ‘작곡가의 영혼이 스스로를 불러낸다’는 듯한 환상적 장면으로, 연극 전체를 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술음악과 대중음악 - 진실성의 이중주
예술음악과 대중음악의 구분은 역사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복잡한 주제다. 전자는 자율성, 형식미, 음악 내부의 논리 등을 추구하며 대체로 특정 계층의 미적 체험과 연결되어 있다. 반면 대중음악은 그 본질상 공감과 접근성을 중시하며 시대와 대중의 정서를 적극적으로 포섭한다. 전자는 ‘순수’를, 후자는 ‘현실’을 택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이 구분은 고정된 경계선이 아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가 당대에는 대중적 오락이었고, 비틀즈의 음악은 형식적 실험을 통해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예술음악이 자존심이라면, 대중음악은 생존이다. 하지만 자존심 없는 생존이 공허한 것처럼, 생존 없는 자존심은 고립이다. 연극 속 젊은 박태준은 그 중간 지점, 즉 ‘음악의 진실성’이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여기서 진실성이란 곧 ‘자신이 만든 음악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내면의 목소리이다. 그것은 장르도, 청중의 숫자도 아닌, 창작자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것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음악이란 무엇인가.
1930년대 박태준이 남긴 동요와 가곡은 시대의 정서와 민족의 아픔, 그리고 희망을 담고 있다. 그 음악은 당대의 현실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순수’의 정점에 있다. 이는 마치 현실에 가장 깊이 발을 담글 때야말로 가장 순수한 예술이 가능하다는 역설을 말해주는 듯하다. 좋은 음악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은 시대의 거울이자, 시대를 초월한 울림이다. 이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인간 보편적 감정과 진실을 건드리는 음악이 바로 ‘시대를 관통하는 선율’이 되는 것이다.
연극은 이러한 보편성과 개인적 갈등을 치밀하게 엮어낸다. 꿈이라는 장치는 결국 박태준이 자신의 내면, 그리고 음악의 뿌리와 마주하는 장치이다. 다방이라는 공간 역시 상징적이다. 20세기 중반 도시의 낭만과 혼란, 다양한 인간 군상이 오가던 그 장소는 지금도 ‘예술과 현실이 만나는 접점’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울리는 오르골은, 세대를 가로지르는 선율의 메타포로 작용한다.
다방의 여인 – 시간의 심장을 품은 존재
밝고 코믹한 캐릭터인 다방 종업원 여인은 자칫 지나치게 무거워질 수 있는 작품에 밝고 활력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단순히 통속적인 설정이나 감초 같은 역할로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배우가 1930년대와 2025년을 오가며 연기한다는 설정은 시간을 초월하는 인간의 본질을 암시한다. 명랑하고 쾌활한, 그러나 과거를 안고 살아가는 현실의 여성(2025), 작곡가 박태준을 조용히 사랑하고 그의 음악에 마음을 바치는 여인(1930s), 이 장치는 두 시대의 여인을 ‘하나의 영혼, 두 개의 얼굴’로 구성하며 과거와 현재가 서로 마주 보도록 한다. 그녀는 단지 시대가 다른 인물이 아니라, ‘시간을 매개하는 존재’, 즉 이야기 자체를 움직이는 은밀한 중심축이 된다.
오르골 – 그녀가 건네는 ‘심장’
오르골은 기계적 장난감이지만, 극 중에는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작용한다. 그녀가 현대의 작곡가 박태준에게 오르골을 ‘가슴에 대고 눈을 감으면 고민이 해결된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마치 음악이 사람의 고통을 치료하는 치유의 힘을 갖고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즉, 이 여인은 음악의 원형적 힘을 품고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녀는 음악이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기억과 사랑, 회복과 시간을 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인 것이다.
극의 주요 배경인 ‘미도다방’은 1930년대에는 신문학, 신예술, 낭만이 태동하며,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모여들던 장소였고, 2025년에는 낡고 구석진, 그러나 여전히 음악이 흐르고 따뜻한 차와 위로가 마무르는 곳이다.
이 두 세계를 한 여인이 동시에 호흡하고 살고 있다는 설정은, 결국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예술은 시간을 초월한 감정의 장소’라는 주제와 직결되며, 그녀는 무대 위에서 그 다방을 움직이는 숨결 같은 존재인 것이다.
순수하고도 절제된 선율, 그리움과 기다림
극의 중반부 어린이 중창단이 박태준 작곡의 ‘오빠생각’을 부르는 장면이 있다. 이 순간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북받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오고 말았는데, 어찌 이토록 단순한 선율과 화성 속에서 이런 감동을 주었던 것인가.
‘오빠생각’은 서구 고전음악의 형식을 절제된 방식으로 사용하되, 전형적인 5음 음계 기반으로 구성된 전통 가락 속에서 듣는 이를 정서적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또한 반복되는 Ⅰ-Ⅳ- Ⅰ -Ⅴ-Ⅰ 화성은 현대적 감성에 비하면 너무나 단조롭지만, 바로 그 단조로움이 ‘기억의 음악’으로 기능하게 된다.
가사 속의 ‘오빠’는 ‘잃어버린 존재’, ‘그림움의 대상’이며 수많은 ‘오빠’들이 떠나간 시대 속에서 외롭게 우는 뜸북새와 함께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정서, 그 기억은 세대를 넘어 ‘그리움’의 문화코드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 곡이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 그것이 특정 시대에만 머무르는 노래가 아니라 ‘감정의 원형’을 건드리는 ‘정서적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 단순한 선율과 화성, 익숙한 단어 속에 잊혀진 얼굴들, 고향, 그리고 어릴 적 마음들이 모두 담겨 있었던 것이다.
두 개의 별 – 이상과 현실이 하나 되는 순간
연극의 후반부, 배경은 1960년대로 흘러 젊은 두 박태준을 앞에 두고 노년의 박태준이 등장한다. 이는 마치 담담히 이어지던 흐름 속에서 한 줄기 낯선 공기, ‘시간의 정령’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듯한 반전과도 같았다.
그는 젊은 예술가들의 꿈과 고뇌, 시대의 상처, 창작과 침묵의 시간을 모두 겪어내며 통과해 온 존재이다. 그는 ‘두 개의 별’이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이 노래는 이 연극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를 담고 있으며 ‘세 명의 박태준’, 그들이 결국 만나야 했던 이유도 담겨 있다.
노년의 박태준이 청라언덕에 올라 별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이 지나온 모든 시간과 음악을 되돌아보는 것을 의미하며 이 때 별은 개별성과 보편성의 상징이기도 하다.(별은 각자 떨어져 있지만, 밤하늘이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 조화롭게 존재한다)
‘두 개의 별은 하나라’라는 구절은 젊은 예술가의 고뇌와 노년 예술가의 깨달음은 다르지 않으며, 예술과 대중, 고통과 위로, 이상과 현실, 그 모든 이항 대립이 결국 하나로 융합되어야 진실이 된다는 고백이다.
또한 ‘하나의 예술로 피어나리라’라는 가사는 예술의 존재론적 이유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갈등과 분열 속에서 태어났지만 통합을 향해 가는 여정 속에서 시대를 넘어서는 울림으로 예술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노년의 박태준이 부르는 이 노래는 젊은 작곡가들에게 말없이 건네는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대답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너의 고통은 나의 젊은 날이었고,
너의 질문은 내가 오래 품고 있던 노래였다.
그리고 우리의 만남은 이 별빛 아래에서,
드디어 하나의 선율이 되었다.
첫댓글 각잡으신 만큼 좋은 리뷰네요
역시
이런 리뷰들을 어디에 공유하고 노출하려면 어디가 좋을까요? ㅎㅎ 캡처해서 인스타에 올려야하나?
인스타는 외부링크가 안되더라구요. 페이스북은 되는데 그 둘의 이용자 세대가 많이 달라요.
@앞산과나코 히어로즈는 같음서포터 계정 프로필에 링크 걸어뒀어요~~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