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지식의 보물(知識之寶)
골로새서 2:3
盖知識之爲宝, 不俟論者而明矣. 人皆言失權之悲, 失權由於無識, 由此視之, 不必悲失權也. 實悲無識也. 個人及邦國皆然. 人皆言無食之悲, 無食亦由於無識也. 或言制度之不平, 然此制度之內, 有識者有力, 今支那人失權百年, 今有識起北伐完成, 革命成功, 今獨逸之賠償, 其數不能言, 今用또스(Dawes Plan)案, 幾可盡償, 亦有識而然也. 知識之宝有如此也. 雖有識字, 反生惰怠, 四肢不動者, 亦必失權又無食也. 勤勉識者之事, 不爲擊虛. 種則必實, 鑿則必丼, 商則必富, 農則必豊, 皆有識而得也. 今美人之機械, 最爲發達, 奴使黑人時代, 則無識野昧時也. 其後發明機械, 代黑人勞作, 故富冠天下, 知識之宝有如此也. 反此而朝鮮古代, 蓄奴婢又蓄婢妾, 十指不動, 余同宣敎師初出, 開運動會, 請我大官觀覽, 元杜宇氏等出戰庭球, 全身流汗, 大官曰何不使婢僕爲之, 而自苦流汗如此也? 實無知甚矣. 科學之知識亦爲宝於人, 況神靈之識乎? 科學之識人類發達也, 人文漸次複雜, 非科學不能生也. 아보라함時代, 電燈及汽車不必要, 松明足以代電燈, 駱駝足以代汽車也. 然靈識則尙富足矣. 天國庶幾不遠, 而今則天國漸次離遠矣. 自古偉人出現, 知識變改, 따윈種源論起, 理學一變, 盧梭(Jean Jacques Rousseau)民約論起焉, 法界一變, 아인스타인相對性論起焉, 理學界亦一變, 今制度說起焉, 社會思想一變. 靈界亦然, 摩西律法論起焉, 人以律法爲得救, 其後各先知預言盛行, 人以預言爲主, 其後耶蘇誕降, 倡天國之說, 神觀一變. 神爲父信者皆爲子女, 而入天國矣. 耶蘇知神爲父, 其中有許多奧妙代贖, 更生, 永生, 再臨, 復活 等眞理在其中矣. 吾等學主當如主之知神矣. 主時靈識有級, 바리새는認天使及復活, 而사두개則不然, 不認天使不認復活, 靈識各異也. 然神則無限, 不可測知, 靈識如行路, 在鄕之人望京而行, 數日行路京城漸近, 目的豈難得達乎? 吾學主初, 學信又學愛又學遠罪又學十字之道, 漸次前進, 則其前道有無窮之希望, 欲罷不能也. 然吾行號曰望京, 而其行退後則雖行無益也. 學生亦然, 行之合于主言而行之不已, 則終達目的也. 然行不合信法, 則雖信無益也. 知信之爲貴, 熱心行之, 則前有希望, 故信仰當學而知也. 若知道之爲貴, 則當行道不已, 知行合一則其知可謂之宝矣. 知菌爲害則當遠去, 知藥之爲利則當服藥矣. 誰不知困難之爲不樂也? 信知困難之爲利則忍耐, 誰不知榮華之爲可樂也? 信之榮光之爲害故去而不取也. 世人不信復活, 紅袍之富不信復活, 富者一離世而目見復活, 世人不信洪水, 노아知洪水必來, 預備方舟, 八口得救, 富者之知大虛也, 노아之知大眞也. 今人不信復活之理, 故未見爲復活而奮鬪者, 人皆落心, 無可奈之三字爲朝鮮人之格言, 口唱無可奈, 心思無可奈, 設爲眞無可奈矣. 實無知甚矣. 支那人知有復活, 故奮鬪數十年革命完成, 露人知有復活, 故奮鬪數十年改革完成也. 今人亦不信再臨, 主不再臨, 則信徒之在困苦, 竟歸虛地矣. 然主爲遭苦之信徒必再來矣. 在地被斬被擄被迫者, 無罪之血數千年苦待者, 主不再來則不可也. 主必榮臨, 使信伸寃也. 萬有之神在宇宙之間, 察知人間之善惡, 使有報應也明矣. 아벨之血呼訴于上天, 人類戰爭由此起焉. 暗夜殺人之盜, 無不被捉者, 以其報應之遭也. 主臨而報其信徒之遭苦者, 使人類無寬枉苦, 朴御使之暗行物語, 足證其報應之速也. 再臨者應驗也, 世人不信메시아國, 人類之理想必메시아國也. 此國卽樂園也. 人之流汗必求則入樂國, 革命改革或戰爭等, 皆欲成메시아國也. 故主曰人當先求其國與義也, 此國未知何時實現, 而必早晩間事也. 故主齊文曰 願國臨焉, 此國之律法及政治, 在馬太五章以下至七章也. 主曰用力者得國云, 吾人當用力也, 此皆宝識也.
대개 지식은 보배가 되어 다른 의논을 가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권력을 잃었다고 슬퍼하지만 권력을 잃은 것은 무식한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이로써 볼 때 권력을 잃은 것을 반드시 슬퍼할 것이 아니라 실로 무지함을 슬퍼해야 합니다.
개인이나 나라에서나 다 그러한데 사람들은 모두 먹을 것이 없는 슬픔만 말합니다. 먹을 것이 없는 것도 지식이 없는 무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떤 이는 사회의 제도가 불평등하다고 말하나, 이 제도는 유식한 사람이 힘을 쓰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날 중국 사람들은 권력을 빼앗긴지 백 년만에 유식한 사람들이 일어나 북벌(北伐)을 완성시키고, 혁명이 성공하게 되어 독일이 배상하여야 할 금액이 말할 수 없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도즈(Dawes Plan) 안을 이용하여 거의 다 배상을 하였으니 역시 유식한 사람들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지식의 보배스러움이 이와 같습니다.
비록 문자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도리어 게으름이 생겨 몸뚱이를 움직이지 않는 자는 역시 권력도 잃고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근면함은 유식한 사람의 일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하여 막대로 치지 않아야 합니다. 씨를 뿌리면 결실을 가져오고, 땅을 파면 반드시 우물이 솟아납니다. 장사를 하면 부자가 되고, 농사를 지으면 풍년이 듭니다. 이게 모두 유식한 데서 오는 소득입니다.
지금 미국 사람들의 기계는 가장 발달되어 있는데, 흑인을 노예로 시키던 시대는 무식하고 야만적이던 시대였습니다. 그 뒤로 기계가 발명되어 흑인을 대신하여 농사를 지으므로 부자로써 천하에 으뜸이 되었습니다. 지식의 보배로움이 이와 같습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 조선은 노비를 기르고, 또 첩을 두고 자신은 열 손가락을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선교사와 함께 처음 나가서 운동회를 열었는데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대관大官]을 청하여 관람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때 언더우드 목사 등이 정구 선수로 출전했는데,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그러자 대관이 이르기를 ‘왜 종들을 시키지 않고 저렇게 땀을 흘리며 몸소 애를 씁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무지(無知)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과학적 지식도 역시 사람에게 보배로운 것인데 영적인 지식[영식靈識]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과학의 지식은 인류를 발달시키고 인문(人文)이 점차 복잡하여져서 과학이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전등이나 기차가 필요 없었습니다. 솔가지 불이 족히 전등을 대신하고, 낙타가 족히 기차를 대신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천국은 가까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천국이 점점 멀리 떠나 있습니다.
자고로 위인이 출현하면 지식이 변천하였습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론[종원론種源論]>이 일어나서 이학(理學)이 크게 변하였고, 루소(盧梭, Jean Jacques Rousseau)의 <민약론(民約論)>이 일어나서 법학계[법계法界]가 새로 바뀌었고,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이론[相對性論]>이 생겨나서 이학계理學界가 또한 크게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제도설制度說>이 생겨나서 사회사상이 크게 변하였습니다.
영계(靈界)도 역시 이와 같으니 모세의 <율법론律法論>이 일어나서 사람들은 율법으로써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행하게 되어 사람들은 예언으로써 주장을 삼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탄생하시고, <천국설天國說>을 선포하셨으니, 하나님을 보는 관념인 신관(神觀)이 새롭게 변하였습니다. 곧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신자는 자녀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며, 그 가운데서 허다한 대속의 오묘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갱생(更生)과 영생, 재림과 부활 등의 진리가 그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배우는 것은 마땅히 주님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이 해야 합니다. 주님이 계실 적에는 영적 지식에 차등이 있었습니다. 곧 바리새인은 천사와 부활에 대하여서는 인식하였으나, 사두개인은 그렇지 못하여 천사도 모르고, 부활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영적인 지식이 각각 달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이 없으므로 헤아려서 알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지식은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시골에 있는 사람이 서울을 바라보고 가는 데, 며칠을 걸어오니 서울에 가까워졌습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가 그리 어려운 일입니까? 내가 주님을 처음 배우는데, 믿음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죄를 멀리하는 일을 배우고, 또 십자가를 지는 도를 배웠습니다. 이렇게 하여 점점 나아가면, 그 앞길에 무궁한 희망이 있어서 그만 두려고 해도 그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는 목적지가 서울이라고 하면서 반대쪽으로 간다면 아무리 가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배우는 일도 이와 같으니 주님의 말씀에 부합되게 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가고 또 가야 마침내 목적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법칙에 맞지 않게 가게 되면 아무리 믿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이 귀중한 것을 알고 열심히 가게 되면 앞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마땅히 배워서 얻는 것입니다. 만일 가는 길이 귀한 줄을 알고 그 길을 끊임없이 가게 되어 아는 것과 가는 것이 하나로 합치게 되면 그 알고 있는 것을 보배라고 할 것입니다.
병균이 해로운 줄을 알면 마땅히 멀리 버려야 하고, 약이 이로운 줄 알면 마땅히 복약을 하여야 합니다. 곤란이 즐겁지 않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 곤란이 이로움이 되는 줄을 진실로 알면 인내하게 됩니다. 영광이 즐거운 줄을 누가 모르겠습니까마는 그 영광이 해로움이 된다는 것을 안다면 틀림없이 그 영광을 버리고 가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홍포를 입은 부자도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세상을 떠난 뒤에 눈으로 부활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홍수가 올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홍수가 반드시 올 것을 알고 미리 방주를 준비하여 여덟 사람을 구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부자의 지식은 큰 거짓이 되었고, 노아의 지식은 진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부활의 이치를 믿지 않으므로 부활을 위하여 분투하는 자를 보지 못하고 사람들은 모두 낙심합니다. 그리하여 어쩔 수가 없다는 뜻의 ‘무가내(無可奈)’ 세 글자가 조선 사람의 격언이 되었습니다. 입으로 ‘무가내’를 부르짖고, 마음으로 ‘무가내’를 생각하여 참으로 ‘무가내’가 되도록 설정하고 말았습니다. 실로 무지(無知)함이 심합니다. 중국 사람은 부활을 알고 수십 년 동안 분투하여 혁명을 완수하였고, 러시아 사람들도 부활을 알고 수십 년을 분투하여 개혁을 완성하였습니다.
오늘날 사람은 또한 재림(再臨)을 믿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지 않으면 고난을 당한 신도는 마침내 헛된 곳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은 고통을 받고 있는 신도를 위하여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지상에서 죽임을 당하고, 포로로 잡히고, 핍박을 받고 죄 없이 피를 흘리며 수천 년을 고통스럽게 기다린 자에게 주님이 다시 오시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주님은 반드시 영광스럽게 임하시어 신도로 하여금 원통함을 풀도록 해 줍니다. 만유(萬有)의 하나님께서 우주 가운데서 인간의 선악을 살피어 아시기 때문에 응당한 보답을 받도록 분명히 해 주십니다. 아벨의 피가 하늘에 호소하여 되어 인류의 전쟁이 이로부터 일어났습니다.
어두운 밤에 살인한 도둑이 잡히지 않는 자가 없는 것은 그 죄 값이 보답을 받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임하셔서 고통 받는 자에게 보답해 주십니다. 그것은 인류에게 잘못 된 고통을 그냥 너그럽게 넘어가주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서입니다. 옛날 박 어사(御使)의 암행 일화는 그 보답에 응하는 신속함을 족히 증명하는 것입니다.
재림은 보답에 응하는 증거입니다. 세상 사람은 메시아의 나라를 믿지 않지만 인류의 이상은 메시아의 나라에 있습니다. 그 나라가 바로 낙원입니다. 땀을 흘리며 노력하여 구하면 낙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혁명이나 개혁이나 또는 전쟁 등도 다 메시아의 나라를 만들고 싶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나라는 어느 때 실현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조만간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기도문에 ‘나라가 임하옵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나라의 율법이나 정치는 마태복음 5장 이하 7장에 있습니다. 주께서 ‘힘쓰고 애쓰는 자가 그의 나라를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힘을 다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다 보배로운 지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