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태일문학상’ 수상에 부치는 문학평론가 임우기의 수상 시집 촌평]
박두규 시인의 ‘조태일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요즘 한국 문학의 최대 화두가 된 ‘다시 개벽’의 요체는 수운(水雲)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이요 그 실천행의 토대로서 ‘수심정기(修(守)心正氣)’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수심정기’는 문학예술의 창작과 비평에서 실천행의 핵심이랄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이 질문은 이번 출간된 박두규 시집의 문학적 의미와 함께 이 시집이 지닌 문학사적 의의를 이해하는 데에 기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의식입니다. 가령 ‘수심정기’가 과연 동학의 교리에 제한되는 것인가, 아니면, ‘동학 이후’의 수심정기는 동학에 머물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불교의 선(禪)이나 인도의 요가, 국선(國仙), 명상 등 또 다른 방법들을 포함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문학과 예술의 다시 개벽’을 고뇌하는 이는 수운의 가르침의 요체인 ‘수심정기’를 깊이 재해석하는 일과 마주하게 됩니다. 나로선, 수운 동학의 사상적 바탕인 ‘圓融會通’의 정신에 따라, 그 수행 방식의 다름에도 그 다름의 성실성(誠實性, 곧 眞實性) 여하에 따라, “각각이 다르되 하나로 통함(會通)”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의 삶 속에서 수심정기의 골자를 지키되 그 외연을 확장하는 과제를 떠안고 있는 현실에서 보면, 박두규 시인의 성실한 ‘명상 수행(冥想 修行)’이 창작의 원동력이 된 이번 시집 『두텁나루숲 뒷간에 앉아』는 매우 소중한 문학적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새 시대를 맞이하는 시 정신이 피운 꽃과 튼실한 열매가 한아름인 것이 고맙고, 이에 못지않게 지금 여기의 중대한 화두인 ‘다시 개벽’ 운동에서의 ‘수심정기’와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곧 ‘불이(不二, 不異)’의 뜻깊은 성과물이란 것이 반갑습니다. 각 개인 저마다의 고유한 삶과 마음이 서로 무궁무진하게 ‘연대’하는 ‘다시 개벽’의 새 세상도 이러한 ‘불이’의 정신과 실천행에서 가능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마도 이같이 ‘수심정기’가 스스로 내연의 심화와 외연의 확장을 이루다 보면, ‘다시 개벽’의 새 시대를 향한 무거운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지지 않을까요.
여기서 한 가지만 덧붙이면, 방금 수심정기를 짧게나마 강조했듯이, 적어도 문학예술에서는 수심정기가 우선이지 동학이 우선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설령 동학을 소재로 다루지 않더라도 수심정기의 대의와 통하면 바로 그 문예 창작이 곧 ‘다시 개벽’이요 수운의 깊은 마음, 곧 ‘시천주’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또한 ‘불이’ 정신의 발로일 터인데, 이번에 나온 박두규의 시집은 바로 이러한 ‘수심정기’의 확장된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뒷간에서 보는 세상의 의미
-박두규 시집이 지닌 시대정신의 뜻
당연한 진리를 중언부언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참다운 시의 조건은 시인의 ‘수심정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수심정기라는 말에서 ‘마음’과 ‘기운’은 따로이면서도 따로가 아닌 하나입니다. 기운이 주이고 마음은 체라 할 수 있습니다. ‘수심(修心)’ 여하에 따라 기운의 맑고 탁함이 따라옵니다. 하지만 마음이란 것도 다 같은 마음이 아니니 각자 깊고 어두운 심연을 거울 닦듯 닦아 비출 수 있는 ‘수심(守心)’의 수행(修行)이 필요합니다. 박두규 시집 『두텁나루숲 뒷간에 앉아』(솔)을 펼치면, 일단 일상적으로 꾸준한 수심, 곧 ‘점수(漸修)’의 마음으로 온통 일관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참다운 시는 맑고도 은은한 기운이 서린 심연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시를 읽는 독자의 잘 닦인 마음[修心]은 은연중에 시에 서린 맑은 기운과 깊은 교감을 나누게 됩니다. 오늘날, ‘시’라는 이름의 존재는 화려한 감각과 욕망의 매개물이 된 지도 꽤 오래지만, 참다운 시는 자기 심연에 무언가 깊은 사유의 내용을 감추고 있습니다. 이 시의 깊은 자기 사유(思惟) 또는 시가 지닌 자기 사유의 은폐성 때문에, 사려 깊은 독자에게 때론 시가 유현(幽玄)한 생령체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시는 시인의 감각과 욕망을 전달하는 도구적 언어(의미 개념)의 매개물이 아닙니다. 시는 의미나 사건을 전하는 ‘도구적 언어’의 존재를 넘어서 시 스스로 자기의 안과 밖을 사유하며 독자에겐 독자성을 지닌 ‘영매적(靈媒的) 언어’ 존재입니다. 적어도 다시 개벽의 관점에서 시는 영매적 성격을 가진 존재, 바꿔 말하면, 시 스스로 ‘시천주’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때, 사려 깊은 독자는 또한 사려 깊은 시적 존재와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시적 존재’라 하는 것은 시 자체가 사유를 품은 ‘사려 깊은 생령체’라는 뜻이요, 동학의 ‘다시 개벽’의 눈으로 보면, 시라는 존재 또한 ‘시천주’의 존재라는 선언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단지 서세동점의 근대사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속세의 오염에 묻히다 보니 뭇존재에 모셔진 ‘하늘(天)’이 까맣게 잊히고, 아울러 ‘시’ 또한 부박한 감각과 욕망에 따른 ‘의미 전달의 도구’로 퇴락한 상태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이렇듯, 문학예술에서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극복하는 문제와 함께 시를 혼돈과 타락에서 구하는 일은 오늘의 한국문학이 당면한 과제인 것입니다.
이즈음 우리 겨레가 통째로 존망의 위기에 처한 구한말에 극심한 고난을 피할 수 없던 기층민중 속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수많은 민중 종교 사상, 특히 동학을 필두로 한 ‘다시 개벽’(후천 개벽) 운동의 출발점도 각자의 마음속에 감춰진 ‘하늘(天)’을 깨달아 밝히는 일에 있습니다. 수운 동학의 종지인 ‘시천주(侍天主)’에서는 ‘강(降, 降靈)’을 통한 ‘내유신령 외유기화(內有神靈 外有氣化)’, 또 여기 전라남도 곡성에서 가까운 벌교 땅에서 난 홍암 나철(羅喆, 1863~1916) 선생이 중광(重光)한 대종교(大倧敎)의 요체인 ‘自性求子 降在爾腦’(자신의 본성에서 신성을 찾아라 신성은 이미 너의 뇌 속에 내려와 있다) 등 이 땅의 민중 종교들의 공통적인 가르침은, 한결같이 천신이 마음 밖이 아닌 마음 안에 이미 존재함을 선언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참된 깨달음과 그 실천행은 자기 안의 ‘하늘’을 깨달음에서 비롯됩니다. 깨달음은 저마다 수행을 통해 자기 안에 숨겨진 깨달음의 씨앗(種子, 원효의 ‘如來藏’)을 정성껏 찾고 싹틔우며 실천행을 위한 바른 기운을 갖는 일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수운 선생은 “仁義禮智는 先聖之所敎요 守心正氣는 惟我之更定”(인의예지는 옛 聖人의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는 내가 다시 정한 것이니라.−『동경대전』)라 설한 것입니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다시 개벽’의 큰 뜻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마음 수련에서, 강(降) 또는 강령(降靈)이 중시되고 강조된다는 점입니다. 동학에서 중요시하는 ‘강령주문’과 함께, 앞서 말한 ‘강재이뇌(降在爾腦)’의 의미를 깊이 살피면, 긴 세월 한겨레가 살아온 ‘이 땅의 혼’(地靈)의 특성이요 정수로서의 ‘강(降靈)’을 어림할 수 있습니다. 생사를 넘나들고 사물의 정령과의 ‘접령(接靈)’이 가능한 것도 이 땅에서 창세(創世) 이래 면면히 이어진 한겨레의 집단무의식 속 원형(archetype)인 ‘강령’ 작용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오늘 ‘조태일문학상’을 시상하는 이 축하의 자리에서 ‘다시 개벽’의 벼리를 간략히나마 얘기하는 것은, 시는 근본적으로 마음의 근원과 원형을 아우르는 하나의 생령체라는 것을 곱씹어 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수상 시집 『두텁나루숲 뒷간에 앉아』(솔)의 표제작인 「두텁나루숲 뒷간에 앉아」(원제는 「뒷간에서 보낸 세월」)는 이러한 시의 존재론적 근본 문제를 이해하는 데 적잖게 도움이 됩니다. 시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두텁나루숲 뒷간에 앉아 있으면 강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며 강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쪼그려 앉아 바라보는 두텁나루의 아침은 또 다른 세상이다. 새들은 날아오르거나 자맥질하거나 바위에 외다리로 서 있다. 그래, 나도 그러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경이로운 풍경 속 점 하나로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이다. 그 세상은 그 세상대로 이 세상은 이 세상대로 쪼그려 앉아 다리가 저린 세상,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한 해가 가고 한 생이 간다. 그렇게 지리산 어느 구석 바위틈에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구절초 하나 홀로 피었다 진다.
-시 「뒷간에 앉아 보낸 세월」 전문
이 시에는 시인의 눈에 비친 아침 풍경이 꾸밈없이 그려져 있습니다. 지리산 자락 섬진강가의 숲 가장자리에 사는 시인의 일상은 뒷간에서 시작됩니다. 뒷간에 앉아 보는 이른 아침 햇빛 속의 세상은 무상(無常) 그 자체입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며 강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쪼그려 앉아 바라보는 두텁나루의 아침은 또 다른 세상이다. 새들은 날아오르거나 자맥질하거나 바위에 외다리로 서 있다. 그래, 나도 그러고 있을 뿐이다.” 이 아침 풍경에 대한 묘사는 담담한 듯, 시인의 깊은 마음의 경지를 감춘 상태입니다. 뒷간에 쪼그려 앉아 바깥 자연 생태를 바라보는 시인은 분별심이 멀리 떠나 있습니다. 마음을 가리운 오염들이 사라지고 청정심(淸淨心)에 눈이 떠진 것입니다. 대승불가 사상에 기대어 말하면, 수심(修心) 끝에 ‘여래장(如來藏)’(‘여래’의 씨앗)이 지혜의 빛으로 열리듯이, 뒷간에 앉아 보는 바깥 풍경이 자연의 본성 그대로 ‘새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연이 스스로 일으키는 ‘무위이화(無爲而化, 造化)’의 기운을 시인은 아침마다 뒷간에 앉아 직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미루어 생각하면, 두텁나루숲 뒷간에 앉아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한 해가 가고 한 생이 간다.”는 시인의 담담한 고백은 그 자체로 시인 박두규의 시혼의 한 경지를 드러냅니다.
이 시가 깊이 품고 있는 묘리(妙理)는‘뒷간에 앉아 세상을 보는 시인의 눈’을 이해하는 가운데 조금씩 드러납니다. 이 시를 깊이 독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왜 시인이 세상을 보는 공간이 굳이 ‘뒷간’인가, 이 질문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시의 분위기로 보아, 뒷간에 앉아 세상을 보는 화자의 마음은 똥통의 더러움과도 멀리 떠난 상태입니다. 뒷간에서 항문 또는 똥의 더러움을 여읜 상태라는 것은, 입(口)이 상징하는 온갖 세속적 탐미(耽味)와 탐욕을 동시에 여읜 상태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화자가 더러움이 있는 어두침침한 뒷간에서 오히려 인간의 입이 누리는 탐미와 화려한 꾸밈이 지배하는 인간계를 멀리하며 성찰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뒷간은 박두규 시가 자기 욕망을 정화하며 ‘나날이 새로워지는’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두텁나루숲 뒷간’은 입(口)이 상징하는 이성적인 시어, 또는 의식적이고 감각적인 시어가 만드는 ‘꾸밈 시’를 반성하고 항문이 상징하는 ‘무의식의 심연’이 낳는 시가 탄생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항문이 입의 탐미를 정화하는 역설은 그 자체가 순환하는 자연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뒷간의 더러움에서 청정한 자연의 순리를 깨친 정각(正覺)의 빛이 바로 섬진강과 지리산 자락 숲의 아침 풍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뒷간은 배설과 항문의 더러움이 함께하는 세속 생활의 공간인 동시에 깨달음의 도량(道場)을 상징합니다. 탐욕과 탐미(耽味)에 복종하는 언어, 감각주의가 부르는 언어, 또한 이성주의를 맹종하는 ‘입’의 언어를 반성하는, 곧 ‘수심정기’의 시가 탄생하는 상징적 공간. 어쨋든, 뒷간의 침침한 그늘(陰)과 더러움 속에서 수심정기를 통해 시인은 감각적 언어와 이성적 언어의 상징인 ‘입의 언어’를 꾸준히 성찰하면서 ‘탈 자본주의 문명’의 시를 낳고 있는 점이 주목되어야 합니다. 박두규 시에는 묵상(默想)의 언어인 듯이 담담하고도 정갈한 기운이 은근하게 배어 있습니다.
‘두텁나루숲 뒷간’은 새로운 근원으로 돌아가는 ‘반본시(原始返本의 詩)’가 창조되는 특별한 시적 공간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유컨대, ‘더러운 진흙이 맑고 아름다운 연꽃을 피우는’ 공간이 박두규 시인의 ‘두텁나루숲 뒷간’이라 할 수 있지요. 이렇듯, 뒷간에서의 시인의 시적 깨달음은 신라 때 원효(元曉) 큰스님이 『대승기신론소』에서 설파한 ‘여래장(如來藏)’ 사상의 중요한 뜻, ‘자성이 청정한 마음은 오염된 마음과 더불어 화합하여 둘이 아니게 되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것’이라는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 아라야식)의 깨달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실, 이 시에서 ‘뒷간’의 깊은 뜻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시의 깊은 독해를 위해서 더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이 시의 묘미와 묘처(妙處)는 끝 문장, “그렇게 지리산 어느 구석 바위틈에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구절초 하나 홀로 피었다 진다.”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마지막 시구에는 ‘접령의 기운’(‘外有接靈之氣’)이 알레고리 형식 속에 은폐된 상태임을 이해하는 것이 실로 중요합니다. 여기 짧은 지면상 거두절미하면, 시인의 시혼은 마치 초혼(招魂)하듯이 “지리산 어느 구석 바위틈에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홀로 핀 구절초 하나”와 접령한 상태인 것입니다. 시인의 성실한 수심정기 속에서 문득 일어난 ‘마음 귀신’이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생기(生氣)를 일으키는 것이지요. 이 끝 시구가 지닌 ‘접령의 뜻’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식민지 시대의 시인 백석(白石, 백기행)의 명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의 마지막 시문을 여기에 불러올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꿀어 보며,/ 어니 먼 산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백석 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의 끝 대목)
백석 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과 박두규 시 「두텁나루숲 뒷간에 앉아」는 겉보기엔 각자 드러낸 내용과 형식이 크게 달라 보이지만, 각 시의 마지막 시문을 서로 비교하면, 서로 일맥상통한 ‘시혼(詩魂)’의 경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멀리 떨어진 이질적인 공간에 있는 이질적인 존재-식물들(‘갈매나무’와 ‘구절초’)과의 ‘접령(接靈)의 형식’이 둘 다에서 공통성을 지니고 드러납니다. 각 시가 드러내는 시적 상상력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두 시인의 시편에는 ‘접령’의 알레고리 형식이라 할 만한 ‘영혼의 형식’이란 점에서 둘은 유사합니다. 좀 더 깊이 말하면, 각 시의 마지막 문장은 공히 ‘이 땅의 혼’의 핵심인 강령(降靈) 혹은 접령의 경지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가 닿아 있습니다. 백석 시의 경우 ‘눈 내리는 저녁 먼 산속 바위 섶에 홀로 서 있는 갈매나무’의 정령과 접령하듯이, 박두규 시의 경우 ‘지리산 어느 구석 바위틈에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홀로 핀 구절초 하나’와 접령하는 시혼이 은미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시집 『두텁나루숲 뒷간에 앉아』의 곳곳에서 감지되는 희미한 ‘흰빛’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박두규 시의 깊은 독해를 위해서 도움이 됩니다. 앞서 말한바 같이, 이 시에 내재하는 ‘접령의 형식’을 깊이 해석하면 구절초 꽃잎의 흰빛 때문만이 아니라 접령을 가능하게 하는 ‘이 땅의 혼’의 정수-곧, 한국인의 ‘창세신화에 드러나는 강신(降靈, 降神)’을 온몸으로 터득한 위대한 시인들에게 보이는 공통의 상징으로서 ‘눈(降雪)’의 ‘흰빛’-가령 백석의 ‘눈’, 김수영의 ‘눈’, 신동엽의 ‘눈’이 상징하는 ‘흰빛’이 희미한 ‘흰그늘’(김지하 시인의 개념)처럼 어른거립니다.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지리산 속 바위틈에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구절초’와의 접령(‘접화군생’의 알레고리이기도 한!),-곧 ‘마음속 강령’을 통한 ‘구절초 정령’과의 접령은 그 자체로 하늘에서 무량하게 날리는 ‘흰빛’을 띠게 됩니다. 구절초의 꽃잎의 ‘흰빛’처럼. 이런 까닭에 시집 『두텁나루숲 뒷간에 앉아』에는 ‘흰빛’이 곳곳에 두루 어른거립니다. 깊이 해석하면, 깨달음 곧 지혜가 내는 ‘흰빛’인 동시에, ‘백의민족의 집단혼collective unconsciousness’, 또는 원형archetype이 지닌 ‘하늘’의 상징으로서 ‘흰빛’(ᄇᆞᆰ·白)이 은미하게 감도는 것이지요.
시인 백석은 싸락눈이 흩뿌리는 흰빛 속에서 시적 영감을 통해 경이로운 시를 얻은 것에 비해, 시인 박두규는 앞서 보았듯이 ‘뒷간에서’ 보는 두텁나루숲 아침 풍경의 ‘흰빛’에서 시적 영감을 얻기도 합니다. ‘나날이 새로운 아침의 하늘’에서 내리는 은미한 기운이 저절로 ‘흰빛’을 띠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려 깊은 독자는 이 ‘흰빛’의 ‘하늘 기운’과 감응하게 되는 것이죠. 이처럼 더럽고 타락한 속세에서 청정하고 신령한 ‘하늘 기운의 내림(降)’을 가능하게 하는, 즉 강령의 시혼이 은폐된 시구가 바로 “지리산 어느 구석 바위틈에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구절초 하나 홀로 피었다 진다”입니다.
이같이, 마치 깊은 땅속에 묻힌 씨앗이 움트듯, 한국인의 심연에 감춰진 강령의 원형이 탁월한 시혼의 작용을 통해 홀연 접령의 조짐으로서 나타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산속의 구절초와 접하는 시인의 ‘접령지기(接靈之氣)’에서 박두규 시인의 ‘수심정기(修心正氣)의 높은 경지를 헤아리게 됩니다.
시에서 ‘수심정기’의 의미
-박두규 시의 경우
박두규 시집 『두텁나루숲 뒷간에 앉아』에 수록된 좋은 시들 중 아래 시 한 편을 읽습니다.
사자死者의 서書 4
−어머니
어머니는 망백望百의 나이가 된 불편한 어느 가을
단풍 구경을 가자고 하셨다.
붉은 그늘의 고요 속에 서서 먼 산을 한참 바라보시더니
‘참, 곱다.’
이파리 하나 떨어지는 속도로 이 세상에 헌사를 보내고
집에 돌아온 그녀는 늘 돌아갈 것을 걱정했다.
아름다운 生을 증거할 수 있는 건 죽음뿐이니
꽃상여처럼 화려한 죽음
죽음 너머의 세상에 첫발을 디디는데
이승의 마지막 한 마디가 따라갔다.
‘참, 곱다.’
-시 全文
시집 『두텁나루숲 뒷간에 앉아』에는 적어도 지난 반백 년 간에 걸쳐 한국 시단이 접하지 못했을 듯한 ‘맑은 시혼의 고요한 정동’을 보여주는 시편들이 적지 않습니다.
위 시의 해석을 위해 우선 주목할 것은 ‘死者의 書’입니다. ‘죽은 자의 글’이라? 그렇다면, ‘죽은 자’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일단 이 시의 화자persona의 존재와 그 성격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 시의 겉만 읽으면, 시의 화자는 고만고만한 여느 시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저 ‘望百의 나이가 된’ 늙으신 어머니와 다녀온,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단풍 구경’을 시의 모티브로 삼고 있으니. 그러나, 어머니와의 ‘단풍 구경’이 너무 일상적 행사라는 점, 바로 이 일상성에서 이 시의 화자가 지니는 특성과 시의 도저한 조화력(造化力)이 은폐되어있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시의 화자는 명상가거나 도인, 또는 초월자의 성격보다는 ‘일상인 또는 생활인’의 성격이 두드러집니다. 그렇다고 화자가 시류를 따르는 장삼이사는 아니고 일상 속의 생활인인 그의 내면에는 삶 속에서 근원의 깨우침을 구하는 구도자의 품성이 깊이 자리 잡고 있으니, 어찌 보면, 이점이 박두규 시인과 연배가 비슷한 여느 시인들의 시적 화자와 성격을 달리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박두규 시의 화자가 고뇌하는 ‘근원에 대한 사유’를 엿보려면, 박두규의 이번 시집 뒤편에 실린 시 「사다나sadhana—빛이 온다」를 보면 어느 정도 어림하게 됩니다.
‘사다나’는 ‘영적 수행’의 존재입니다. 가령, “(…)모든 목숨들은 저항하며 살고 있고 존재 자체가 저항이다. 우주에는 저항 없는 물리적 존재는 없으며(...) 저항은 완전성을 성취하려는 것이며 우주의 중심핵과 하나가 되려는 끝없는 노력이며 이것이 사다나다. 사다나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적 수행이며 이렇게 지고의 존재에 집중하면 무지에서 벗어나 점점 또렷해지는 세상이 보이고 마음은 균형감각을 갖게 되어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다.” 박두규 시의 화자가 지닌 존재의 성격 곧 ‘사다나’의 존재가 드러나고, 다소 도식적 해석일 테지만, ‘어머니’는 세속적 인연을 맺은 화자persona의 어머니이면서 또한 동시에 영적 수행 속에서 만난 ‘지고의 존재’로서 삼인칭 ‘그녀’라는 것. 이 시에서 ‘어머니’를 ‘그녀’라고 쓴 화자의 존재론적 변화를 먼저 이해하면서, 아래 인용 시구를 다시 찬찬히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
단풍 구경을 가자고 하셨다.
붉은 그늘의 고요 속에 서서 먼 산을 한참 바라보시더니
‘참, 곱다.’
이파리 하나 떨어지는 속도로 이 세상에 헌사를 보내고
집에 돌아온 그녀는 늘 돌아갈 것을 걱정했다.
시 제목이 「死者의 書」인 점을 감안하고 인용된 시구를 읽으면, 시의 화자는 죽음과 함께 세속적 일상 세계에서 늙은 어머니의 마지막 ‘단풍 구경’을 깊이 ‘관찰’하고 있음이 보입니다. 대개 독자들은 화자와 어머니가 모자간(母子間)으로 읽기 쉽지만, 화자는 어머니의 아들이기에 앞서 영적 수행자로서 관찰자(觀察者)의 ‘눈’을 가지고 있는 점을 간파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어머니를 ‘그녀’라고 호칭하는 것에서 문득 서늘한 느낌이 드는 만큼, 화자인 ‘나’를 포함한 우주 자연의 운행을 직관(直觀)하는 눈(眼)이 냉철하고 비상합니다. ‘명상적 시안(詩眼)’이랄까. 바로 이점, 시인은 명상 수련을 통해서건 무슨 수심을 통해서건, 화자가 가진 냉철한 ‘관(觀)’의 성격이 먼저 이해되어야, 이 시의 심오한 주제인 마음공부[修心]와 더불어 기의 단련(丹鍊, 正氣)을 통한 천지간의 숨결[造化, 無爲而化]을 ‘보는’ 시적 경지가 차츰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용 시구에서, “붉은 그늘의 고요 속에 서서 먼 산을 한참 바라보시더니” “이파리 하나 떨어지는 속도로 이 세상에 헌사를 보내고/ 집에 돌아온 그녀는 늘 돌아갈 것을 걱정했다.”라는 시구는, 어머니와의 효심 어린 동거 속에서도 화자가 명상을 통해 삼라만상의 이치를 통관(洞觀)하는 수행자적 정신의 힘을 잃지 않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화자의 존재성에 은폐된 ‘명상의 눈’, 순수한 의식이 우주의 불멸불변의 숨(아트만, atman)의 지고하고 지극한 존재를 ‘어머니라는 존재’ 속에서 보는 눈을 지닌 것입니다. 따라서, 삼인칭 ‘그녀’는 지고하고 지극한 존재로서의 ‘대지적 모성’의 표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인으로서 시의 화자가 보여주는 통관력이 맑은 빛을 발하는 이 시에서 실로 경이로운 ‘시의 묘처(妙處)’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단풍 구경’ 중에 어머니의 ‘한 말씀’에서 찾아집니다. ‘참, 곱다.’라는 한 말씀!
“늘 돌아갈 것을 걱정”하는 어머니가 문득 혼잣말처럼 낸 ‘참, 곱다’에서 먼저 ‘곱다’의 뜻을 깊이 헤아릴 필요가 있습니다. ‘곱다’라는 말은, ‘보기 좋다’ ‘산뜻하다’ ‘아름답다’ ‘순하다’ ‘착하다’ ‘상냥하다’ ‘너그럽다’ ‘부드럽다’… 같은 여러 뜻을 포함합니다. ‘곱다’는 세속적 의미를 가지면서도 세속적 의미의 경계를 넘어서는 ‘말소리의 울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단풍 구경을 하시곤 ‘참, 곱다’ 하신 말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빌렸을 뿐, 삼라만상을 움직이는 천진난만한 기운의 소리, 천지자연의 순리(順理)와 하나로 통한 ‘근원의 소리’에 빗댈 수 있습니다. 굳이, 명상, 숨, 아트만의 존재로서 어머니의 목소리를 따로 규정할 것도 없습니다. 이 글의 맨 앞에서 말했듯이, 수심정기의 연장에서 보면, 시의 화자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우주 자연 속에 가득한 생명의 의지(生意), 곧 천지간에 충만한 생명력의 화신(化身)인 창세신화 속의 모성(母性)의 목소리와 방불한 것으로도 들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 반복되는 시구인 ‘참, 곱다.’는 그 두 목소리는 서로 같은 듯 다르고 또 서로 다른 듯 같기도 합니다. 앞의 ‘참, 곱다.’는 이승을 사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라면 뒤의 ‘참, 곱다.’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와 분별심이 사라진 삼인칭 ‘그녀’(母神)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니, 이 시의 화자는 ‘어머니(모성)’ 목소리를 통해 천지 만물의, 생명의 근원인 숨(아트만) 혹은 무위이화(造化 기운)의 순리를 보여줍니다. 이 또한 시인 박두규가 체득한 수심정기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성실한 독자들은 이 시에서 ‘참, 곱다.’라는 시구가 어머니의 목소리이면서도 천지간 가득한 생령이 내는 ‘소리’임을 깨닫는 중에, 시 자체도 생의를 품은 존재임을 시 스스로 드러내고, 이렇듯이 스스로 기화하는 시의 조짐을 속 깊은 독자들도 ‘알게 모르게’ 감지하고 마침내 깊이 감응하게 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시 읽기 과정은 인식론적으로 ‘모호함’ 속에서 시작되지만, 성실한 독해를 통해 이윽고 이 시가 머금은 근원적 ‘생기’와 한 기운 속에서 교감하게 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독자들 각자의 성심에 따라서 이 시가 지닌 생의와 더불어 한 기운(一氣)의 은미한 조화력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시는 일종의 ‘영매’로서, 시와 독자는 더불어 기화하는-정화(淨化)하는- 시적 체험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한 말씀 “‘참, 곱다.’”는 이 시가 성실한 독자들에게는 ‘은연중에’ 삶과 죽음이 따로 구별되지 않는 신령의 조화 속에 드는 계기, ‘마음 귀신’이 깨어나 작용하는 묘처(妙處) 혹은 영처(靈處)라 하는 것이지요.
오랜 수심정기(修心正氣)에서 나오는 시적 영감(靈感)의 표현이라 할 이 어머니의 ‘말소리’를 창생(蒼生)을 살리는 조화(造化)의 기운과 ‘한몸(一體)’으로서 파악하는 시인은 아마도 만물의 근원을 숨(호흡, 아트만)과의 연관성 속에서 체득하고 있을 듯합니다. 아마 한국 문단에서 희귀한 맑은 영혼인 고 송기원 작가의 생전에 남긴 행적 중에 자기 주검을 미리 전시(傳屍)한 ‘초현실적 사건’을 시인이 「死者의 書 3」에 남긴 것도 이러한 천지 만물의 근원인 기(氣息)의 작용인 ‘숨’의 존재를 은폐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기’의 본성이 ‘숨’으로 드러난다면 인물은 물론 만물은 지극한 기의 조화가 무수한 변화 속에서 현상하는 가상인 ‘아바타’들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중요한 것은 결국 감각과 욕망의 절제와 숨의 조화(調息)와 수심(修心)을 통해 조화의 기운 속에서 만상(萬象)을 보는 ‘눈’을 구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박두규 시인의 이번 시집이 명상 속에서 걸러져 나온 시편들이 많다는 사실은 이러한 맑은 기운과 하나가 된 수심정기의 ‘눈(觀)’을 얻은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