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백제-부여 百済(今扶余) 1
百済(今扶余)
南史에 말하되 馬韓에 五十四国이 있으니 百済는 後에 곧 그 一이다. 後에 점점 強大하여 여러 小国을 兼하였다 하고 北史에 말하되 百済는 근본 馬韓의 属国이라 처음 百家로서 済하였다 하여 号를 百済라 하고 都는 居抜城이라 하고 또 固麻城이라고 하다.
三国史에 百済始祖는 温祚王이니 河南慰礼城에 都하고 十臣으로서 輔翼을 삼아 国号를 十済라 하니 後에 百姓이 따르기를 楽하므로 号를 고쳐 百済라 하였다.
그 世系는 高句麗로 더불어 같이 扶余에 出하므로 扶余로 氏를 하다.
温祚王 十二年에 漢山下에 柵을 立하고 十四年에 都를 遷하였으며 蓋婁王 五年에 北漢山城을 築하고 近肖古王 二十六年에 都를 漢山에 移하고 文周王 元年에 都를 熊津에 移하고 聖王十 六年에 都를 泗沘에 移하고 国号를 南扶余라 하다.
文獻備考에 百済는 所夫里郡이니 所夫里는 一云泗沘이다. 今에 扶余郡이다.
歌楼舞殿向江開
半月城頭月影来
紅龜還寒眠不得
君王愛在自温合
歌楼와 舞殿이 江을 向하여 하였는데
半月城 머리에 月影이 来하도다.
紅毯이 寒하여 眠을 얻지 못하니
君王의 愛는 自温台에 있도다.
歌楼와 舞殿은 宮姬의 歌舞하던 宮殿인데 当時의 繁華가 極함을 말함이다.
半月城은 扶余郡에 半月城이 있으니 石으로 築하였는데 周가 一万三千六尺이라 예젼 百済都城이었다.
扶蘇山을 안고 쌓았으니 両頭가 白馬江을 向하여 형상이 半月과 같다. 月影来는 詩人의 覽物을 模写함이다.
遢氆는 毛로 짠 席이니 王孫 及 貴人의 用品이다. 自温台는 扶余 西五里에 在하니 落花岩으로 부터 西쪽으로 流하면 一岩이 有하니 江가에 臨하여 可히 十余人이 坐할지라.
俗에 伝하되 百済王이 此岩에 와서 遊한즉 岩이 스스로 温한다 하여 自温이라 称한다 하였다.
- 한글
《남사》에 이르길, 마한에 54개국이 있었는데 백제는 후에 그 하나였다. 이후 점점 강대해져 여러 소국을 겸병했다고 한다. 《북사》에 백제는 원래 마한의 속국이었는데 처음에는 백가에서 비롯되어 제(済)라 불리다가 나중에 백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도읍은 구나흘성이라 하기도 하고 고마성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삼국사》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는 온주왕으로,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필받아 국호를 십제라 했다가 후에 백성들이 따르기를 좋아하자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그 세계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 성씨를 따랐다.
온주왕 12년에 한산 아래에 성곽을 세웠고, 14년에 도읍을 옮겼으며, 개로왕 5년에 북한산성을 쌓고, 근초고왕 26년에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문주왕 원년에 도읍을 웅진으로 옮기고, 성왕 16년에 도읍을 사비로 옮기며 국호를 남부여라 했다.
《문헌비고》에 백제는 소부리군이라 하였는데, 소부리는 사비를 다른 말로 이른 것이며 지금의 부여군이라고 한다.
가루(歌樓)와 무전(舞殿)이 강을 향해 있었는데
반월성 머리에 달그림자 걸려온다.
홍렴이 차서 잠 못 이루니
임금님 사랑은 자온대에 있구나.
가루와 무전은 궁녀들의 노래와 춤을 추던 궁전으로, 당시 화려했음을 말한다.
반월성은 부여군에 있는 성곽인데,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1만 3천 6자쯤 되었다. 예전 백제 도성이었다.
부소산을 안고 쌓았는데 양끝이 백마강을 향해 있어 반달 모양과 같다. 달그림자 걸려온다는 시인이 풍경을 모사한 것이다.
홍렴(紅氆)은 모로 짠 자리이며 왕자와 귀족이 사용하던 것이다. 자온대는 부여 서쪽 5리에 있는데, 낙화암에서 서쪽으로 흐르면 큰 바위가 있어 강가에 임했으며 10여명이 앉을 만했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왕이 이 바위에 와서 노닐었는데 바위가 스스로 따뜻하여 자온(自溫)이라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