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01월 06일 주일 메시지 (예비 묵상)
시리즈 주제: 에베소서 강해11
열한 번째 설교
제목: 교회 안의 약자를 위한 바울의 기도
에베소서 3:14~21
1.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분
바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아버지는 자녀를 낳은 후에 이름을 지어준다. 자녀는 아버지로부터 이름을 받는다. 그렇게 아버지는 자녀에게 이름을 준다. 그런데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분은 그 모든 족속을 낳은 분이요, 그들에게 아버지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은 궁창에 이름을 주셔서 하늘이라고 하셨다. 물에서 솟아난 뭍을 가리켜 육지라고 이름을 주셨다. 하늘도 땅도 하나님의 만드신 것이며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늘도 땅도 바다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지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은 헬라어로 빠트리아(patria)다. 족속은 한 아버지로부터 나서 그에게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한 조상에게서 나서 생명의 호흡 곧 숨결을 같이 하는 생명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을 겨레라고 할 때, 족속을 가리키는 말 빠뜨리아는 겨레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국가공동체를 의미하며 원시림에 모여 사는 모든 크고 작은 부족공동체를 포함한다. 이처럼 바울은 그 모든 족속과 공동체에 이름을 주신 분이라고 하나님을 소개한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셨다는 말은 그들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아버지는 돌보고 주관하시는 분이다. 바울에게 모든 족속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상속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고 했는데, 여기서 이방인에는 모든 족속이 포함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세계 모든 사람이 같은 부모로부터 나서 한 가족이며 공동체라는 신념을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이라고 한다. 즉, 세계시민정신이다. 바울은 이미 세계시민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 아닌 것이 없다면 모든 민족과 족속은 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바울의 이런 생각은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 하나님 이야기만을 생각하고 유대인의 국수주의나 선민사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해로운 생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들만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그들만이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다고 여기면서 이방인들은 결코 함께 할 수 없다고 여기는 편협성은 결국 하나님의 만물에 대한 창조주 되심을 부인하는 생각이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요나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보편주재권과 다민족 포용을 선언하셨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선민사상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다.
유대인도 아니면서 유대인의 완고한 마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 받아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기독교인들인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리들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의 이분법적 사고로 사람을 나누려는 잘못을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자신들 사이에 담벼락을 세워 그 둘이 원수가 되게 했다. 그러나 유대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그들이 이방인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제사장 국가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당연히 이방인의 제사장으로서 그들의 문을 개방하고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려는 열린 마음을 가졌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자신들의 소임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부패해졌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되고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났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전철을 밟으려는 과오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일어나지 않는가 우려된다. 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우월감 속에 살아간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어디서 읽을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말과 행실에서 드러난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가리켜 하는 말을 보면 그들이 이방인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으로 자신을 인식했는가? 만약 그랬다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방인으로 낯설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부정하다거나 원수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이런 분명한 이분법적 차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요 자녀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이름을 부여하셨다. 즉, 하나님이 그들을 낳으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여야 한다.
2. 교회를 위한 바울의 두 번째 기도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교회를 위해 기도를 드린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하여주시기를 비는 기도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1)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소망을 아는 것이요, (2)우리가 물려받을 기업의 영광스러움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아는 것이요, (3)그리고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아는 것이다.
이제 에베소서 3장에서 바울은 두 번째로 교회를 위해서 기도를 드린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기도를 드릴 때 마음에 두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교회 안의 약자인 이방인이다. 유대인으로 자란 것이 아니며, 할례도 받지 않았고, 혈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신 유대인이 아니며, 율법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어떤 유대인들은 민족적 우월의식으로 대했으며, 심지어 아브라함의 자손에 합류하려면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교회 안의 이방인들에게 그렇게 강요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교회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약자의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가 중요해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가서 해결하고자 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서 당하는 차별과 배제, 그리고 무시를 해결하고자 함이었다. 그 이야기는 사도행전 15장에 소상하게 기록되었다. 그 결과 교회는 이방인들을 교회 안으로 받아들이며 율법의 멍에를 지우지 말자고 결의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서로 확증한 것이다. 다만,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 들어올 때 함께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1)우상의 더러운 것과 (2)음행과 (3)목매어 죽인 것과 (4)피를 멀리 하자고 권면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을 위한 배려요 당연한 도리였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공의회의 결의문을 들고 사방의 교회들로 다니며 교회 안의 약자인 이방인들을 맞이하여 함께 공동체를 이루라고 알렸다.
그러나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관습이 회의 결정문 한 장으로 고쳐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교회들에서는 지속적으로 유대인들의 이방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 그리고 강압의 관습이 행해졌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등의 편지를 통하여 교회 안의 약자인 이방인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에베소서도 사실 그런 내용을 중요하게 다룬다. 바울은 이 두 그룹이 하나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며 함께 건물로 지어지며 동일한 민족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했다. 그것은 비밀이었으나 이제 드러난 계시라고 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교회 안의 약자인 이방인들을 포용하고 더불어 함께 미래를 열어가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바울의 열망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바울은 이제 교회 안의 약자인 이방인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린다. 그 기도의 핵심은 (1)성령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이며, (2)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굳게 자리잡게 되시며, (3)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비는 것이다. 이 기도는 교회 안의 이방인들의 속 사람이 강건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속 사람이 강건해진다는 것은 마음에 담대함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방인들도 더 이상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하나님이 예비한 새 나라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그리스도께서 그들 마음에 굳게 자리잡으셔야 한다. 이 말은 다시 그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굳게 믿고 붙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깊이 깨달아 결국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함이 그들 안에 넘치기를 바라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복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대리인이요, 새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그루터기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대사라는 충만한 자긍심과 정체성, 그리고 소명에 대한 인식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의 기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전에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적인 신분을 정체성과 소임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제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모두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해야 한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누구나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며 아브라함의 복을 받을 수 있다. 전에는 육체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시를 할례를 통해서 가졌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성령의 인이 그들의 양심이 깊이 새겨진다. 그리고 그 성령은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따르는 각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부어주신다. 그렇게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민족이 혈통과 국적을 뛰어넘어 태어난다.
결국 에베소서 1장에서 교회를 위해 기도를 드릴 때도 하나님을 앎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것이요, 에베소서 3장의 기도도 그들이 용기를 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더 이상 약자와 소외된 자들이 아니라 주도적인 참여자로 적극적으로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 동참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에베소서의 기록목적일 것이다.
3.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교회 안에 있는 약자를 향한 권면과 격려는 예수님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누가복음 12:32
기독교는 본래 적은 무리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사회적 주류가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구도자들이었다. 넓은 길이라서 많은 사람이 찾는 길이 아니라 좁고 협착한 길이다. 그것은 기득권을 포기하는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기독교회는 사회적 주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세속적인 가치관이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가치관이 교회 안에 그대로 적용되었고 그런 차별이 교회 안에 들어왔다. 그런 생각 중에는 재산과 사회적 신분에 따라 교회 안에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있다. 그리고 세속적인 경영마인드와 가치관이 들어와서 교회의 운영을 그렇게 하려는 생각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우리 시대에 교회 안을 어지럽히는 생각은 교회성장학이다. 교회성장은 바른 신앙을 추구하며 진실된 신앙인으로 살고자 하는 교회에 나타나는 결과요 열매다. 언제나 교회가 바른 신앙, 바른 실천을 하고자 하면 어려움도 겪지만 시간이 지나 그 진정성이 알려지면 교회의 정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서 교회는 성장했다. 그것이 사도행전의 이야기다.
그러나 교회성장 자체를 추구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하려고 할 때 사람은 방법과 술수를 쓰기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한국교회를 휩쓸고 지나간 총동원전도운동이나 교회성장운동이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어떻게 성장하는가는 더욱 중요한 일이다. 왜 오늘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가? 그것은 교회성장에 대한 지나친 경쟁이나 열성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배우고 그것을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데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형화 될수록 문제가 크게 불거지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성장하는 교회가 옳고 바른 교회요 성공한 교회라는 인식이 교인들 마음에 팽배해지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서 대기업은 성공한 기업이요 중소기업은 덜 성공한 기업이라는 도식과 다를 바가 없는 세속적인 가치관이다. 그런 생각에 물들면 교회는 자기 교회의 정체성과 가치관 또는 자긍심이나 핵심 가치나 과제 등을 생각하기보다는 우선 성장하고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기관이 되고 만다.
그러나 다 그렇게 성장병에 걸린 것은 아니다. 부흥열병에 걸리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고 건강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소그룹이더라도 적은 무리일지라도 그 안에서 바르고 올바른 신앙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금도 건강한 작은 교회를 만들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국 사회에 대기업 우선 정책이 경제와 정치 그리고 사회 전반에 얼마나 많은 부작용을 낳았는가! 이와 동일한 부작용이 대형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금의 사태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왜 예수께서 적은 무리들아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셨는지 생각해야 한다.
4.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하나님
바울은 에베소서라는 편지를 쓰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그의 바람은 하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은 한 때는 비밀이었으나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알려진 것으로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 핵심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더불어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하며, 함께 미래를 열어가는 하나님의 약속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둘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아울러 그 다양한 민족이 하나의 건물처럼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인 성전으로 지어지는 것이다.
그런 바람을 가진 바울은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예상했을까? 아마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이 그 모든 족속을 그처럼 하나로 묶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한반도에서 자신의 편지를 읽고 기도하고 설교할 세상이 오리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바울의 시대에 만들어진 세계지도를 생각하면 아메리카나 아시아의 구체적인 그림은 빠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결국 바울이 아는 세계는 유럽과 소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하나님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처럼 이렇게 넘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의 꿈은 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은 구약성경에 기반을 둔 것이며, 지극히 성경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 꿈은 마침내 이렇게 풍성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 있다. 그것은 온 세상의 교회가 하나 되어 한 몸을 이루고 한 지체를 이루고 하나의 건물처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하는 세상이다. 그 교회들은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며, 그 교회들은 다양한 교파를 아우를 것이며, 그리고 개신교회와 천주교회를 아우를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과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받드는 무슬림도 하나의 형제가 되어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살아가는 세상이 올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동방에서 하나님을 상제로 섬기던 유교에 속한 동양인들도 하나의 지구시민으로 하나가 될 날이 올 것이다. 이미 400년 전에 중국에 왔던 그리스도인 마테오 리치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과 중국인들이 상제라고 섬기는 분이 동일한 분임을 간파했다. 그러면 홍익인간의 정신을 그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단군사상도 결국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는 것 아닐까?
바울이 구하고 생각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이었다. 그 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때에 그 영광스러움이 얼마나 클 것인지 그는 생각만 해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은 바울의 그런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고 결국 바울을 죽이고 말았다. 그러나 바울이 가르치고 꿈꾸고 하나님께 간구하던 그 세상은 오늘날 이렇게 우리 시대에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바울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바울의 기도와 생각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음질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크게 분열되었고 서방교회와 개신교회의 분열이 있었다. 그리고 개신교회 안에 수많은 분열이 있었고 교회들은 교단 안에서 서로 하나 됨을 이루지 못했다. 나아가 종교전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근본주의적 교리에 사로잡혀 종교간에 상호 배타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바람에 세계는 더욱 평화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그 둘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세상을 바라보았던 바울의 기대와 생각과는 반대가 되는 것이다.
나의 주장은 개신교 일각에서 말하는 WCC를 통한 종교통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한스 큉의 의견에 동의하여 종교가 그 근본정신으로 돌아가면 서로 대화할 수 있으며 그 대화를 통해서 종교는 마침내 세계평화에 가장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오늘 이런 꿈을 꾸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하나됨을 꿈꾸고 기도하던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 나는 그 둘 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는 이상주의적인 생각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기도의 끝부분에서 담대하게 말한다. 우리가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나는 다시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를 기억한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천사: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마리아: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천사: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천사: (그 말을 듣고 떠나가니라)
누가복음 1:26~38
(신년 첫 주일 메시지를 위해서 예비 묵상을 해 보았다.)
에베소서 강해11 교회 안의 약자를 위한 바울의 기도(예비 묵상).doc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