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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들릴라' 샌드위치 신앙>의 줄거리:
투나 샌드위치, 슈림프에그 샌드위치. 치킨시저 샌드위치. 하와이언 샌드위치 등 참으로 다양한 샌드위치가 있지요. 그런데 '들릴라' 샌드위치는 못들어 보셨을 것 같습니다. 삼손이 만든 샌드위치이지요. '샌드위치 신앙'이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샌드위치 만들기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전반적으로 세상을 이기는 신바람 대신에 무기력에 빠져 있는 이유는 바로 샌드위치 만들기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겹쳐놓은 프렌치토스트여야 합니다.
‘들릴라’ 샌드위치 신앙
(사사기 16:1~22)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18. 들릴라가 삼손이 진심을 다 알려 주므로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을 불러 이르되 삼손이 내게 진심을 알려 주었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하니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그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9.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
20.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22.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오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들릴라’ 샌드위치 신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들릴라’ 샌드위치 신앙
1778년에 태평양 탐험을 떠났던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태평양에서 섬을 하나 발견해서 ‘샌드위치 아일랜드’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탐험을 후원한 사람이 바로 영국 켄트 지방의 영주였던 샌드위치 가문이었습니다. 현재는 그 섬이 하와이 섬입니다. 샌드위치 가문의 4대 존 몬테규 백작은 도박과 놀음 광이었다고 합니다. 1762년의 어느 늦은 밤에 친구들과 함께 트럼프 게임에 열중하느라 식사 시간을 놓쳤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하인을 시켜서 로스트비프와 빵을 가져오게 해서 얇게 썬 빵 사이에 식은 쇠고기조각을 끼워서 먹게 되었는데, 그 당시 식탁 예절로서는 파격적인 방법이었지만 이것을 본 다른 귀족들도 카드 게임에 열중했기 때문에 모두 이렇게 따라 먹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빵과 빵 사이에 다른 내용물을 끼워서 먹는 음식을 샌드위치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샌드위치에는 종류가 많습니다. 제가 즐겨 먹는 참치 샌드위치도 있고 찾아보니 슈림프에그 샌드위치, 치킨시저 샌드위치, 하와이언 샌드위치라는 것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들릴라 샌드위치’인데 대체 어떤 샌드위치일까요?
본문 20절을 보면 삼손이 머리털을 깎인 상태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들릴라가 삼손에게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라고 소리를 칩니다. 그러자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라고 하는데 이 상태가 바로 삼손이 들릴라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샌드위치’라는 말을 비유적으로 사용할 때에는 내가 양편에 끼는 상태를 말합니다. ‘한국의 경제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었다’고 말할 때도 있고 ‘강대국들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었다’라고 할 때도 있는데, 내가 가운데 내용물이 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삼손과 들릴라의 관계는 삼손이 빵이고 들릴라가 내용물입니다. 내용물에 따라 샌드위치의 이름이 결정되므로 들릴라 샌드위치입니다.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빵을 하나 바닥에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한 면에 내용물을 놓고 빵 하나를 위에 덮게 됩니다. 삼손은 아래에 깔린 빵이고 들릴라는 내용물이며 삼손이 찾는 하나님은 위쪽 빵이 되어서 들릴라 샌드위치가 됩니다.
이렇게 들릴라 샌드위치가 되면 삼손이 힘이 다 빠진 것처럼 신앙의 무기력증이 발생하게 되고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신앙이 힘이 없다’는 것은 이 세상을 이길 힘이 없는 것입니다. 돈이 좀 안 벌리면 시무룩해집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돈의 가치를 이기고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몸이 조금만 이상신호가 오면 벌써 기가 팍 죽어서 시무룩해지고, 자식에게 문제가 생기면 시무룩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신앙의 무기력증으로 도무지 세상을 이기지를 못합니다. 들릴라 샌드위치를 만드는 신앙일 때에는 세상의 가치를 얻어서 기뻐하는 것도 세상의 노예가 된 상태이므로 무기력증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신앙이 샌드위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군 부대에 있을 때에 며칠에 한 번씩 아침에 프렌치토스트가 나왔습니다. 두 장씩 접시에 담아서 주는데 샌드위치처럼 사이에 무엇이 끼어있지 않습니다. 보들보들하고 촉촉하고 쫄깃쫄깃한 토스트 두 장을 겹쳐주면 메이플 시럽을 부어서 먹습니다. 빵과 빵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이 모습이 진짜 신앙입니다. 샌드위치를 만드는 신앙이어서는 안 되고 프렌치토스트 신앙으로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서는 안 됩니다. 내 마음이 밑에 깔린 빵이어서 하나님을 향하려고 하는데, 이미 내 마음이 세상이라는 들릴라를 끌어안은 다음에 하나님을 찾아서 덮으면 샌드위치가 되어버리는데 이건 신앙도 아니고 신앙의 힘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들릴라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3절까지 삼손은 집이 있는 단 지파의 소라 지역으로부터 무려 57km 떨어진 블레셋 성읍의 가사로 가게 됩니다. 이유를 알 수가 없지만 이 성읍은 아스글론과 함께 블레셋의 다섯 성읍 중의 하나로, 굉장히 견고한 성읍이고 블레셋의 중심 성읍이었는데 이곳까지 내려가서 기생집에 들어갔는데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유명한 ‘삼손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블레셋의 가사 사람들이 야밤을 틈타 매복해서 삼손이 나오면 죽이려고 작정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낌새를 알고 삼손이 밤에 일어나 견고하고 큰 성읍의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다 뜯어서 어깨에 메고 60km 떨어진 유다지파에 속한 헤브론 산꼭대기에 가져다 놓았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기에 언뜻 보기에는 삼손의 괴력이 나타날 뿐인데 이 이야기 때문에 본문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해석한 것을 보면 삼손의 비도덕적인 행동과 나실인으로서의 윤리적 이탈행위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이해하려고 합니다. 물론 창녀를 찾아가는 일이 선민에게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늘 말씀드렸듯이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다릅니다. 삼손이 들릴라에게 머리털을 깎인 후에는 힘이 다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힘은 머리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힘이 빠진 것이라면, 가사의 창녀에게 들어갔을 때는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어서 성문의 문짝을 뽑아서 헤브론 산꼭대기에 세울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윤리적 초점으로 삼손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가사의 창녀 집에 들어간 이야기는 들릴라 사건을 해석할 수 있는 키를 제공해줍니다. 가사의 창녀와 들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들릴라도 신전 창녀였거나 속물근성에 절어있는 블레셋의 음녀였습니다. 삼손이 동일하게 음란한 창녀를 찾아갔지만 다른 점은 4절에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라고 합니다. 똑같은 창녀였지만 가사의 창녀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의 의미를 상징적이고 비유적으로 바라보면 너무나 놀라운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창녀’가 뜻하는 바는 우리가 이 세상을 육체로 접촉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육체가 있기 때문에 사람과 사물과 사건과 일을 접촉하며 살아갑니다. 육체가 있음으로 이 세상에서 관계를 맺게 되고 접촉하게 되는 모든 대상을 창녀로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육체가 이 세상에서 접촉하며 살아갈 때에 가사의 창녀 사건에서는 마음을 주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창녀이지만 들릴라에게는 삼손이 마음을 줘버립니다. 육체로 접촉은 하지만 가사에서는 마음을 주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힘이 그대로 남아있었으나, 육체로 접촉하는 들릴라에게 마음을 주었을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이 중단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말씀에서 읽은 대로 하나님이 떠나시는데 이것이 바로 이 말씀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선민이 이 세상을 사는 방법은 가사의 창녀에게 삼손이 들어갔을 때처럼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육체로 세상을 접촉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절대로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되고 마음은 하나님께 밀착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 밀착되어 있으면 문짝을 뽑아서 어깨에 메고 60km 떨어진 헤브론 산꼭대기에 세울 정도의 괴력이 나타납니다.
‘성의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뺐다.’는 것은 ‘그 성을 정복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유대지파의 헤브론 산꼭대기에 그 문짝을 가져다 놓았다.’는 것은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로 접촉하지만 어떤 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을 때에 하나님의 힘이 나타나면서 신바람 나는 승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들릴라는 내 아내나 남편이고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삼손이 들릴라를 세 번 속이게 되는데, 이미 하나님과 삼손의 마음 틈 사이를 들릴라가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고 있는 들릴라를 떨쳐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들릴라가 삼손의 힘의 근원을 물으며 어떻게 하면 그 힘을 꺾고 당신을 굴복시킬 수 있을지를 묻습니다. 단순히 호기심의 발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들릴라가 예쁘고 사랑스러우니 분별이 없어져서 기어코 말해주고 맙니다. 이것은 머리털에서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닌데 들릴라의 사건을 통해 나실인의 규정을 보면 머리털이 상징하는 바가 명확해집니다.
‘포도주의 소산이나 독주에 취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육체로 만나는 대상에 취하지 말라’는 것인데, 싫어해도 좋아해도 마음을 두기 때문에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6절에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번민한다.’는 것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으로 달달 볶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하나님과 내 마음사이에 그것이 끼어 들어와서 자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에 들릴라 샌드위치가 되어서 하나님은 위쪽 빵이 되고 나는 아래쪽 빵이 되고 가운데 내용물이 끼어들게 되어서 무기력해지고 마는데, 가사의 경우에서처럼 육체로 접촉하는 어떠한 것에도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샌드위치 상태로부터 프렌치토스트 같이 하나님과의 밀착상태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들릴라 대신에 돈을 바라보면서 ‘야! 돈이 참 좋다’라고 생각한다면 자나 깨나 돈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녀나 일도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들릴라처럼 들러붙어서 끈질기게 내 마음을 찢어놓는데 이것을 끊기 위해서는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남북한을 가르고 있는 38선을 넘어가면 월북인데 보통 위험한 게 아니고 월북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38선으로 마음이 세상으로 넘어가느냐 마느냐를 알 수 있는 경계선입니다. 우리는 월북을 하듯이 월세상하면 절대 안 됩니다. 마음은 주님이 만드신 십자가로부터 승천까지의 동선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육체로 만나는 세상 것이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들어와서 샌드위치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들릴라가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자꾸 내 마음을 뺏어가는 일들이 있습니다. 한 가지 기억하실 것은 100일 동안 내가 전적으로 고민하고 생각하고 결정해서 행동에 옮기는 것과, 99일 23시간을 하나님과 밀착해 있다가 1시간을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효과가 크고 훌륭한 결실을 맺겠습니까? 99일 23시간을 하나님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100일 동안 세상일을 생각할 필요 없이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삼손이 충동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마다 행동하는 것이 선민의 삶의 비결이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데 절대로 마음은 십자가를 넘어서 세상으로 가면 안 됩니다.
삼손이 57km나 블레셋 안으로 깊이 들어갔듯이 우리의 육체는 세상 깊이 들어가 살면서 갖가지 대상들을 접촉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육체로 접촉하는 대상들에 절대로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창녀가 뜻하는 바는 말씀 속에서 육체의 접촉을 극명하게 상징화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자면 내 자식도 창녀가 될 수 있습니다. 육체로는 접촉하지만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되는데,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는 그 무엇도 들어와서는 안 되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끊어져버리고 맙니다.
들릴라에게 머리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나실인의 속 규정인 머리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은 선악과를 따먹을 때를 생각하면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타락 전의 아담의 인생의 머리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삼손의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것은 하나님을 머리로 삼은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들릴라에게 밝힌 것은 들릴라가 삼손의 마음에 들어와 있기 때문인데 이런 관계를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만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는 나실인의 규정이 뜻하는 바대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펼쳐질 수 있고 승리가 주어질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필요한 힘이 나타날 수 있고 신바람 나는 활력 있는 신앙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이 세상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걱정하려고 할 때에 깊이 빨려 들어가지 마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안에서 죽어있는 나를 보세요. 삼손이 잠을 자다가 머리 깎인 채로 하나님을 찾듯이, 우리는 자꾸 밑바닥에 깔려서 내 마음 위에 세상을 얹고 하나님을 찾는데, 이러한 샌드위치 신앙으로는 그 무기력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세상 것을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차원에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차원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펼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사랑해서 마음에 붙어있는 들릴라를 떼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이 되시고 맙니다. 선민이라면 그것을 뜯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자식이든 사업이든 육체의 일이든 마음에서 뜯어내려고 하시는데 왜 그런 일을 당하면서 삽니까? 십자가로 미리 끊어내서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프렌치토스트 두 장을 겹쳐놓은 것과 같은 신앙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나를 바라보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나를 바라보며 승천하신 주님 안에서 나를 찾음으로, 육체로 접촉하는 이 세상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내 마음을 주지 않아 샌드위치 만드는 신앙 대신에 프렌치토스트 신앙으로 이 세상을 승리하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내안에 밀착하려 하는 창녀에게 절대로 마음이 빼앗기지 않을수 있는 십자가의 길을 매일 기쁘게 준행 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