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일
일련의 조문객들과 한때 전쟁을 치르고 조용할 무렵 숙부와 당숙들이 한 스님을 모시고 온다 우리에게 인사를 시키는데 알고 보니 아버지 외사촌이시란다. 예전에 한두번 뵙기는 했지만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았는데 아버지와는 이런 관계이셨던 것이다
아버지가 아시는 분과 우리가 아는 사람, 한 세대가 흘렀으니 아는 사람 뿐 아니라 생활 양식 등도 많이 달랐을 것이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살아온 시대가 다르고 아는 지식이 다르고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도 달랐다
그로 인해 우리 형제와 아버지는 가끔 많이도 다른 의견으로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그러한 아버지 세대에서도 삶들은 각기 달랐을 것이다
셋째 당숙은 아버지 형제와 고향에서 어릴 땐 같이 지내셨다. 당시는 씨족사회이기에 이 동네의 대부분은 혈육으로 연결된 마을이었으니 내 집 너의 집을 구분할 정도가 아닌 한 식구 같이 지냈던 것이 몇 해 전이다. 시골에서 어렵게 지내던 당숙은 어떻게해서 서울까지 근거지를 바꾸어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을 하며 자수성가하여 학업에 매진한다. 결국 당시 보통사람들이 초등학교도 거의 졸업 못하는 그 시대 대학까지 졸업하고 대학 친구와 같이 섬유 원단 사업에 뛰어든다
박정희 정권이 계획 주도한 이 경제발전 성장과 함께 당숙의 사업도 나날이 번창하고 결국 1970년대 말에는 그래도 주변에서 알아주는 사업체로 발돋움한다
그래서 나 어릴적 당숙은 시골에서는 보지 못한 성공한 도시인이었고 한때 정치계로도 발돋움할 여력과 주변 덕망을 갖추신 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은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물거품이 되어야 했다
1972년 유신체제가 시작된 이후 한국에는 억압적인 비민주적 정치가 지속되어 197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그동안의 정치적·경제적 모순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는 유신체제가 중점적으로 육성했던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경제상황이 악화되고 있었고 고도성장으로 1인 장기집권의 정당성을 보장받으려 했지만 강압통치로 인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민심은 크게 이반(離反)되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당과 재야세력의 반독재민주화운동과 민중의 생존권 투쟁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잇단 긴급조치와 재야인사들의 구속에도 불구하고, 1978년에는 동일방직사건과 함평고구마수매사건 등 생존권투쟁이 잇따랐다. 이러한 민심을 반영하듯 같은 해 12월에 실시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 31.7%를 득표한 데 비해 신민당은 32.8%를 획득함으로써 집권 여당의 위기감을 증폭시켰다. 1979년에 들어서서 YH노조사건과 신민당총재 김영삼(金泳三) 국회의원직 강제 제명사건 등이 연속되면서 정치적 위기는 극에 달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부산과 마산에 각각 계엄령과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이미 유신체제는 반정부 데모를 막기 위해 계엄령을 발동할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위기에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일련의 사태와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직 강제 제명, 부마사태에 대한 정부의 지나친 강경대응 등은 그동안 진행되어왔던 집권층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즉 10·26사태 직전의 국내외적 상황은 유신체제가 더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한계상황이었다. 더욱이 집권층 내부의 갈등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와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車智澈)의 대립구도로 표면화되었다. 이들의 대립을 결정적으로 증폭시킨 것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의 저항, 특히 부마사태의 처리 문제였다.
여기에서 차지철의 강경노선이 박정희에 의해 채택되자 그동안 차지철의 견제로 불만이 누적되어오다 진퇴위기에까지 몰린 김재규가 10월 26일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가진 만찬 도중에 대통령과 차지철을 살해했다.
이 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학교도 휴교령이 내려졌고 며칠 동안 텔레비전에선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방송만 온종일 계속했다 물론 그런 TV방송도 동네 몇 안 되는 곳에 마실가서나 볼 수 있었던 광경이긴 하였지만.
학교에 등교해서도 각 면사무소 등에 마련된 빈소로 가서 잘 알지도 못하는 형식을 갖추며 단체로 조문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오늘만큼이나 전 국민이 슬퍼했다 생각한다
온통 서글픈 음악으로 동네 방송은 울려퍼지고 국가는 혹시나 북한 괴뢰도당이 쳐들어 올까 마음 조마조마하며 슬픔의 바다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때 우리는 한창 반공영화 등으로 인해 북한 사람은 돼지나 늑대, 승냥이 등으로 생긴 줄 알고 있었다. 똘이장군이라는 영화가 그런 왜곡된 생각을 갖도록 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아울러 나시찬이 나오는 전우란 드라마를 즐겨 보며 북한에 대해서 적개심을 갖고 항상 산에 올라가면 그러한 전쟁장면을 따라하며 총싸움을 했던 때가 이 때이다 그 날 밤에는 꿈속에서 집안 나무청 등에 숨어있다 들킬까 조바심 속에서 바둥대는 내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곤 결국 인민군에 잡히는 찰라 그 순간 꿈에서 깨 안도감을 가졌던 때가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시대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대대적인 국가 장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 또 다시 이 나라는 군부독재의 총칼에 장악된다 12 · 12 군사쿠데타가 또 발발한 것이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살해된 뒤 최규하 과도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대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정승화는 군 장악을 위해 윤성민(尹誠敏, 참모차장), 장태완(張泰玩. 수경사령관), 정병주(鄭炳周, 특전사령관) 등을 중용하여 지휘계통을 개편하였으며, 10·26사태에 직접 연루되었던 중앙정보부와 대통령 경호실을 축소 개편하였다.
이로써 정승화는 군에 대한 지휘체계를 확보하고 자신이 정치 일정을 이끌어 가는 데 핵심역할을 담당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군부 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가 4년제 육군사관학교 최초의 기수인 11기의 지도 아래 하나의 배타적인 파벌집단을 형성하면서 군부내 세력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金載圭)의 내란에 방조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고, 10·26사태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10·26사태 당시 정승화는 궁정동 안가의 대통령 시해현장 부근에 대기하였으며 사건 이후 김재규를 구속할 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그 수사를 지연시킨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물론 정승화가 10·26사태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후일 명백히 밝혀졌다).
정승화의 연행을 실행하기 위해 11월 중순 국방부군수차관보 유학성(兪學聖), 1군단장 황영시(黃永時), 수도군단장 차규헌(車圭憲),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뒤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朴俊炳), 1공수여단장 박희도(朴熙道), 3공수여단장 최세창(崔世昌), 5공수여단장 장기오(張基梧)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李鶴捧)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許三守),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 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전두환 합수부장의 지시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제33헌병대 병력 65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뒤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로 연행하였다.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지휘하의 육군 수뇌부는 이 사실을 확인하여 전군(全軍)에 비상을 발동하고 합동수사본부측에 정승화의 원상회복을 명령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미 1공수여단과 5공수여단 병력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였으며 9사단 병력 등은 중앙청으로 진입하였던 것이다. 이에 진압군 병력 출동을 추진하였던 육군수뇌부(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李建榮 3군사령관, 윤석민 참모차장, 文洪球 합참본부장)는 모두 서빙고 분실로 불법 연행되었다.
이와 같은 반란군의 정승화 연행과 병력이동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가 김재규와 연루된 새로운 사실(돈을 받는 등)을 발견하였으니 정승화를 연행 조사토록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승화는 후일 김재규에게 받은 돈 300만 원은 단순한 추석 촌지로서 당시 전두환도 500만 원 수령 사실을 인정했었다고 주장하였다. 대통령의 재가를 얻는 데 실패한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盧載鉉)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도록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할 수밖에 없었다. 13일 오전 9시 9사단장 노태우와 50사단장 정호용(鄭鎬溶)은 각각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 취임함으로써 당시의 군부가 반란의 주도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결국 신군부세력은 1980년 5·17쿠데타까지 주도해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그 때는 미처 몰랐어요
국가의 모습이 이렇게 엉망진창이었다는 것을
그 때는 미처 몰랐어요
어느 한 사조직에 의해 국가가 좌지우지되었다는 것을
잘못 끼워진 첫단추에 의해
대한민국에서 의로움과 떳떳함은 사라지고
온통 술수와 공작, 그리고 혹세무민하며
강압의 독재는 백성위에 군림하고
비리, 부조리, 불합리로 온통 세상을 덮고
빨강과 파랑으로 분열하도록 만들고
자신들이 애국자이고 위인인 것처럼 쇼를 하는
그들의 진위를 미처 몰랐어요
개인의 자유는 당연히 국가에 희생되어야 하고
개인의 땀은 당연히 국가를 위해 바쳐야 하고
개인의 피는 당연히 국가를 위해 흘려야 하는데
그 국가가 어느 사조직이었음을
그 때의 나는 미처 몰랐어요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고
세상은 원래 불합리하고
세상은 원래 비인격적이고
세상은 원래 진흙 투성이라는 것을
그들은 우리에게 당연한 듯 깨우치는 줄을
그 때는 미처 몰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