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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배고픈 사명자의 함정>의 줄거리:
점심시간에 식당을 찾을 경우, 아주 늦거나 혹은 아주 이른 때에 가게 되면 종종 만나게 되는 광경이 있습니다. 점심 서빙을 담당한 종업원들이 모여 앉아 식사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봅니다. 종업원들의 점심식사는 손님들 서빙 전이 좋을까 후가 좋을까? 상황마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으로 말하자면, 배고픈 상태의 사명 수행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빈 배를 채우려는 흡입력이 '명령'을 자기 비지니스로 변질 시키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사명자의 함정
(사무엘상 15:1~23)
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오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배고픈 사명자의 함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배고픈 사명자의 함정’
청소년들의 진로 문제를 코칭하기 위해서 심리학자 이남석 씨가 “뭘 해도 괜찮아”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중산층 연봉이라는 6,000만원이면 될까? 그런데 돈을 어떻게 벌지? 사업을 하면 될까? 사업하려면 기본적인 사업 자금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업 자금이 있으려면 부모님 재산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집에는 돈이 없는데 돈이 없다면 사람들의 투자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멋진 사업 아이디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아이디어는 어떻게 만들지? 엄마가 바라는 좋은 대학에 가면 정말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아, 뭘 해서 먹고 살지? 생각하면 한심하기만 하네. 난 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의 답으로 ‘당신이 좋아하는 것부터 관심을 기울이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도록 강요받을 것이다. 혹은 부러워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말고 진정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좋아하는 것부터 하다보면 내 인생의 궁극적인 사명도 발견될 것이라는 의도로 내용이 진행되고 끝을 맺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책들을 대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청소년의 진로 문제의 고민으로부터 탈출시켜 주고 도우려는 의도는 참으로 고귀하고 좋은데, 사고가 근원적이지를 못하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십자가 복음을 모르고 생활화하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을 향한 사고는 근원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모르더라도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상식이 되어버린 기초적인 문제들이 인문학에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생각들이 남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뉴턴의 기계적 세계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입니다. 이전에는 관찰의 대상만 문제시 삼았습니다. 꽃을 관찰한다면 꽃에 대해서만 보고,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각각 관심을 가졌다면 상대성이론은 관찰자를 문제 삼습니다. 관찰자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서 관찰하는 대상도 달라집니다.
즉 진로와 사명을 생각할 때도 무엇을 할 것인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냐를 물어야 합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부터 관심을 기울이라, 부러워하는 것이 아닌 좋아하는 것부터 관심을 기울이라’는 것이 말이 될까요? 부러워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좋아하기 때문에 부러워하는 것이지 좋아하지 않은 것을 가졌다고 해서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상대성이론에서는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행동을 하는 주체인 내가 문제입니다. 나는 죄에 찌든 죄인이고 그 죄로부터 나오는 좋아함은 다 죄악 된 것인데, 그것을 계속한다고 해서 내 인생의 사명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단언컨대 청소년 때에 좋아하는 것만 하면 인생은 파괴되고 생산성 제로의 인생이 되고 맙니다.
사명이 중요한 이유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음이 차선의 복입니다. 죄악에 찌든 마음이 하고 싶은 것이 표출되면 될수록 행복은 사라지는데 왕의 위치에 있으면서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대단한 치적을 이루었어도 그 치적과는 별도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정적들과의 싸움, 신하들과의 줄다리기, 왕비를 둘러 싼 궁내 여자들끼리의 싸움과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야 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주체적으로 이야기하며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생각하지만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생의 모든 불행은 나오게 됩니다.
사명이 없는 삶의 문제는 인생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사명의 삶에는 외적이고 환경적인 역경이 없진 않지만, 그러나 사명의 삶에는 내적인 갈등이 없고 진정한 자유가 주어지는데 내 감정으로부터의 자유, 내 소원으로부터 자유가 주어집니다. 사람은 내 감정에 충실하고 내 소원에 충실할 때에 망하게 되고, 제자리걸음을 걷게 되고 나락으로 치닫게 됩니다. 나로부터의 자유가 자유의 궁극적인 내용이 되어야만 하는데 명령을 통해서만 나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게 나를 파괴하는 존재는 나 자신의 욕망이고 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고, 그 좋아함의 변덕이 나를 죽음으로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령의 삶은 나 자신으로부터 떠나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나로부터의 자유가 있고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生命)’은 삶을 명령 받은 것입니다. 출생도 죽음도 우리의 생김새도 태어난 나라도 부모님도 명령이므로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명령 받아 태어나서 명령 받아 죽기까지 살아야 하는데 왜 그 중간 과정을 나 자신이 주인 되어 나에게 명령하면서 살려고 합니까? 그러니 인생이 꼬이고 힘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명령자가 되어서 고민하고 결정하고 개선하려고 하면서 꿈과 비전을 갖는데 누가 꿈과 비전을 가지라고 했습니까? 환경적 변화와 난관에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평강의 삶이 주어지지 않는 이유는 명령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뭘 해도 괜찮아’라는 책에서 미국의 21세기 교육협의회에 따르면 120세까지 늘어날 평균수명에 맞게 살기 위해서는 평균 10~15개의 직업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현재 2011년을 기준으로 미국인들은 평균 7.4개의 직업에 종사하다가 은퇴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명을 가지고 살 때에 어떤 활동을 할 것인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 초점을 맞춥니다. 목사로 선교사로 사업가로 주부로서의 삶을 생각하지만 이것은 사명에 대한 접근방식의 오류입니다. 사명을 찾고 사명대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출발부터 끝까지 명령하신 하나님을 좋아함으로부터 사명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명령을 따르기 전에 명령자를 좋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명령자로 인해 기쁘고 만족하고 행복해야 하고 명령자를 사랑하게 될 때에 사명도 나오게 됩니다. 사람은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에 채우려고 하는데 이것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령자이신 하나님을 좋아함으로 마음의 배가 부르게 되면 만족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명령자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여기에서 사명이 나오는 것이고 사명적 활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명은 삼라만상이 있을 것을 명령하시고 나의 출생과 죽음과 부모님과 나라와 육체의 생김새까지도 명령하신 그 하나님을 좋아하고 그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명령자를 기뻐하기 전에는 그 명령자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명령자에게 권세와 능력을 받아서 명령을 잘 수행해도 내 마음이 명령자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만족을 위한 흡입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때에 명령의 모든 결과는 나의 만족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사명이 존재할 수 없고 사명이 깨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명령으로 시작해서 명령으로 끝나는 내 삶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 되어 삶은 고난의 연속이 됩니다. 반대로 명령자로 만족하게 되면 하루하루 해야 되는 모든 일이 사명이 됩니다. 은행에 가서 일을 보는 것도 사명이고 밥을 짓는 것도 사명이 됩니다. 룻이 하나님으로 만족했을 때에 이삭을 줍는 것이 사명이었습니다. 명령자로 만족한 자에게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울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과 완전한 결별이 일어나는 유명한 사건이 나타납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고 사울은 사명자로 길을 떠났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고, 그 승리한 결과로서 얻어진 전리품 중에 값진 것들이 있자 이것들을 다 취하게 됩니다. 이것은 배고픈 장발장이 진열장의 빵을 보자 눈이 번쩍 뜨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사울의 문제는 명령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배부를 줄을 몰랐던 것이고, 명령자이신 하나님을 현실로 마음에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에 이기자 전리품을 취하게 되는데 이것이 배고픈 사명자의 함정입니다.
예수를 믿고 10년 지나고 20년 지나고 30년이 지나도 삶에는 절대 평강이 임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여전히 배고프고 하나님으로 인한 배부름을 경험하지 못하고 사명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이 들리지도 않고, 들려서 수행했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를 내 것으로 착복하기 때문에 사명의 삶이 진행될 수가 없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좋은 것을 취하자는 백성의 제안에 따라 행동했다’고 핑계를 댑니다. 당연히 변명이지만 제사가 나온 김에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번제와 화목제가 대표적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중시했다면 전쟁에 나가기 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어야 했던 것입니다. 계속 전쟁에 지다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림으로서 전쟁을 승리하게 되는 경우를 앞서 봤습니다.
‘번제’란 내 마음의 비어있는 상태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고자 하는 나를 죽이는 것이고 ‘화목제’는 오직 명령자이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제사를 중시해서 번제와 화목제의 정신으로 무장하여 나갔더라면 사명자의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결국 배고픈 사명자의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
사실 선민은 모두가 사명자입니다. 그러나 심지어 목사님이나 교황까지도 명령자이신 하나님으로 배부르지 않는다면 사명에서 나오는 모든 결과물들을 내 것으로 착복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누가 특별히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닌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운명입니다. 내 배가 하나님으로 부르지 않은 한 사명으로 얻어진 모든 결과물들은 내 배를 채우기 위한 것으로 변질되고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명령자이신 하나님으로 배부르지 않은 목사님이 목회를 크게 하셨다면 그 목회가 그 분을 함정에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그 함정에 빠진 결과가 사울은 사무엘과 그 주인이신 하나님과 영원한 결별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해서 성공적으로 승리를 거뒀지만 그 승리로 빈 배를 채우려고 함으로써 하나님과 결별하게 되는데 무섭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함정에 빠지지 않는 사명자가 될 수 있을까요? 제가 종종 아침을 놓쳐서 점심을 일찍 먹으러 가거나 점심때를 놓쳐서 늦게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종업원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점심시간 이전에 미리 밥을 먹은 직원들은 힘을 내서 일할 것이고, 시간 이후에나 점심을 먹는 직원들은 기진맥진할 것입니다.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 컨테이너를 빌려서 몇 집이 같이 돌아오는데 짐을 다 싣고 맨 마지막에 독일 흑맥주 두어 박스를 실어 놓고 ‘아저씨들 감사합니다. 수고해 주세요.’라고 써놓으면 짐을 옮기는 분들이 그 맥주를 마시고 아주 소중하게 일을 잘 해주십니다.
먼저 배가 불러야만 사명자는 사명을 수행하게 됩니다. 사명적 삶을 살지 못하면 내가 나에게 명령을 해야 하고 내가 결정을 하게 되는데 그러한 삶을 사는 한 평강은 없고 몸과 마음에 편할 날이 없습니다. 사명의 삶에만 평강이 있고 만족이 있고 행복이 있지만 명령자로 배부르지 않으면 사명자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이유는 세상 것으로 채워진 배는 내일이면 다시 고파집니다. 사울이 오늘 아말렉의 전리품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처럼 이 세상 것을 부러워하고 갖고 싶어질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는 주기도를 통해서 명령자이신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내가 결정할 필요 없이 하루하루 주어진 과제를 기도드리면서 수행해나가는 것이고 완전한 자유의 삶을 살게 되는데 이것이 사명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배부른 사명자가 되어서 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하루들이 모여서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될 때에 내 생애 전체는 사명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될 수도 있고 사업가가 될 수도 있지만 무엇을 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명령자로 배부른 사람이 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명령자로 배부르기만 하면 폐지를 줍더라도 사명입니다. 그 사명의 삶에 절대적인 하늘의 평강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외부적 난관이 있더라도 아무 상관없이 뚫고 나갈 수 있는 것이 사명자의 평강입니다. 이러한 명령자로 배부른 참 사명자들이 되셔서 오늘 하루도 사명의 삶을 사시며, 다른 사람들은 꿈도 못 꾸는 평강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배부름을 위해 당신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그 사랑 앞에 감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숟가락으로 하나님을 먹고 배불러서 오늘 하루도 사명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