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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 얼굴의 하나님 골고루 먹기>의 줄거리:
마음이 배부른 상태를 우리는 '만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만족하기를 우리 마음의 하나님 먹기라고 비유해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 얼굴 안에서 우리 마음의 식량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먹기에 편식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는 전능하신 만군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마지막으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로 이 마지막 얼굴의 하나님 먹기를 거북해 하는 바람에 하나님 먹기 전체에 문제가 발생하곤 합니다.
세 얼굴의 하나님 골고루 먹기
(사무엘하 14:1~24)
21.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요압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고 요압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왕이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 입은 줄을 오늘 아나이다 하고
23.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24.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오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세 얼굴의 하나님 골고루 먹기>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세 얼굴의 하나님 골고루 먹기’
우리가 ‘두 얼굴’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두 얼굴의 사나이, 두 얼굴의 남편, 두 얼굴의 아내, 두 얼굴의 여친, 두 얼굴의 남친, 범위를 넓히면 두 얼굴의 미국, 두 얼굴의 일본, 두 얼굴의 김정은 등으로도 사용하지만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두 얼굴로 사는 게 무슨 문제 일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이러한 두 얼굴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어느 하나의 얼굴을 좋아해서 함께 했는데, 다른 얼굴을 보자 수용과 용납이 불가능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좋아할 수 없는 얼굴 또한 내가 좋아하는 얼굴과 하나의 인격속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의 얼굴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 얼굴이 하나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다른 인격 자체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이혼 의절 실연 등이 일어나는데 하나님의 관계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구원은 지금 하늘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성령을 통하여 하나 되심의 연합의 관계를 맺으시는 것처럼, 우리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이 이 세상의 좋다는 것들을 다 놔두고, 즉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죽고 그 모든 것들이 내게 기쁨이 되지 않음을 믿고, 주님 안에서 주님을 따라 주님이 만나시는 하나님과 관계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을 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 머물게 되고, 주님이 만나시는 하나님을 우리도 만나며 그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는데 이것이 구원의 상태이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을 똑같이 받아들임으로서 만족과 기쁨과 평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비유적으로 하나님을 먹는다고 말할 수 있는데 문제는 우리가 마음으로 먹어야 하는 하나님의 얼굴이 셋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세 얼굴은 아브라함의 생애보다 다윗의 생애를 통해 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첫 번째 모습은 먼저 오셔서 선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두 번째 모습은 사랑으로 연합된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만군의 하나님이십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세 번째 모습의 공의의 하나님인데 이 공의의 하나님의 얼굴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군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세 얼굴은 모두 한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문제가 생기면 다 문제가 생겨서 하나님을 가질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생애를 통해서 세 얼굴을 가지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온전히 가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세 가지의 얼굴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먹음으로서 온전한 평강 가운데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압살롬이 동생 다말을 범한 이복 형 암논을 2년간 벼르다 죽이고, 아람지역의 그술의 왕이었던 외조부 달매에게로 도망을 갑니다. 3년의 세월이 흐르게 되고 다윗은 암논의 죽음으로부터 슬픔이 회복되고 압살롬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이것을 알아차린 요압은 지략을 펼치는데 마치 나단 선지자가 못돼먹은 부자를 비유로 들어서 다윗을 책망했듯이, 드고아 지방의 지혜로운 여인을 택하여 두 아들을 가진 어머니의 비유를 통하여 다윗을 설득합니다.
두 아들이 싸우다가 한 아들이 죽게 되는 과실치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형제 죽인 자를 끌어내 죽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집안의 대가 끊어지기 때문에 살려달라고 간청하는데 소설처럼 만들어 낸 이야기입니다. 그러자 다윗이 살려준다고 합니다. 실상은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다윗에게 이처럼 압살롬을 용서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 위한 길을 열어 달라는 명분을 제공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이 못 이기는 척 하고 압살롬을 귀환시키라고 명령을 내리지만 만나지는 않겠다고 합니다.
이 본문에서 주석 학자들이 주목하고 있고 우리도 의아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습니다. 형을 죽인 압살롬의 악행에 대한 다윗이 어떠한 처벌도 없고 죄를 묻지도 않았습니다. 압살롬이 도망한 것도 다윗이 추방했기 때문이 아닌 스스로 행한 일이었습니다.
애초에 다윗이 다말을 범한 암논의 패륜적 행위에 대해서 상응하는 충분한 벌을 내렸더라면 압살롬이 2년 동안이나 벼르다 암논을 죽일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거니와, 또한 암논을 죽인 압살롬에게 벌을 내렸더라면 이후에 6년 뒤에는 아버지에 대한 모반을 일으켜 국가 전체가 위기에 빠지는 일도 없었을지도 모르고, 모반을 일으키는 것도 방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다윗이 옛날의 엘리 제사장이 아들들을 방치했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보다도 아들들을 더 사랑했던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생기는데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염려와 주석가들의 해석도 사실은 빗나간 것입니다. 초점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입니다.
오늘 본문의 초점은 다윗이 아들들에게 행해야 했던 공의로움이 초점이 아니라, 다윗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암논이 다말을 범하고 압살롬이 형 암몬을 죽인 패륜적 범죄를 공의롭게 대처할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아들들이 저지른 이러한 사건들이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암논과 압살롬을 책망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사랑한 하나님에 의해서 다윗 자신에게 행해지는 하나님의 공의가 암논의 패륜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다윗에게는 재앙입니다. 이 재앙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보다 자식들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징계를 가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먼저 아들들을 사랑했다면 당연히 그 멸망의 죄악 된 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징계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이 다윗이 세 얼굴의 하나님을 가지기 위한 내용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사람이 골리앗을 먼저 마음에 가져서 벌벌 떨고 있을 때에, 소년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먼저 하나님을 가졌습니다. 이때에 다윗이 가졌던 하나님은 전능하신 만군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천지를 창조하신 모든 것들에 대해 명령과 뜻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왕위에 오를 때에는 선택하시고 영원한 언약을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가졌습니다. 그랬던 다윗이 하나님을 잃고 밧세바를 범하고 밧세바를 범한 사건의 장애가 되는 우리아를 죽이는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목숨을 용서받은 상태로 그 범죄의 죗값을 짊어진 상태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되찾게 됩니다. ‘회개를 했다’는 것은 골리앗 앞에서와 왕위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죄악의 죗값을 짊어지고 하나님을 먼저 가졌는데 그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12:10~12절에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공의가 선언되는데, 다윗은 죗값을 짊어진 채로 이렇게 죄에 대해서는 머리털 하나도 남김없이 청산하시는 완벽주의적인 하나님의 얼굴을 가지게 된 것인데 이제 큰일 났습니다. 이 얼굴을 가지신 공의의 하나님을 갖는 것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것처럼 암논이 다말을 범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였는데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습니다. 자기 죗값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아들들의 죄를 처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나를 처벌하심에 대해서 내가 처벌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처벌을 내가 처벌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재앙이었지만 암논과 압살롬의 사건은 일어나지 말아야 했던 사건인데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의 의미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전능하신 만군의 하나님, 찾아오시고 선택하시고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의의 하나님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죗값을 조금도 용서하시지 못하시는 하나님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다른 이방민족들을 쳐서 죽였던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던 것이지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다윗의 편을 드셨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할 뿐이지 하나님께서 치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 심판과 치심의 손길을 다윗에게 돌리시는데 다윗은 자신을 치시는 하나님을 끌어안았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자기를 치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을 아들들보다도 먼저 끌어안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들에게 벌하지 못했던 것이고 이러한 다윗의 태도가 그대로 십자가 생활화로 옮겨지게 됩니다.
우리는 왜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못하고, 다윗이 골리앗을 칠 때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다윗을 왕으로 삼으시는 것과 같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느끼기에 거북한 공의의 하나님의 얼굴을 먹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나의 죄를 날마다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죄의 패턴이 우리에게서도 날마다 반복되고 있는데 그런 적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마음의 밧세바는 돈이나 사업이나 건강이나 자녀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들어오면 갖고 싶어 하는데 방해물이 생깁니다. 밧세바를 갖기 위해서 우리아와 같은 방해물이 생기면 없애려고 합니다.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고 승리를 향해 나가는 것을 진취적이고 긍정적이고 모델적인 인간상으로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마음에 들여놓고 그것을 갖고 싶어서 장애를 극복해 나가는 것이 죄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을 먼저 마음에 갖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 땅에서 이루고 싶으신 것들에 대해 전능하신 만군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그 능력으로 골리앗을 무찌르듯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상에서 갖고 싶어 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목사님들이 목회를 잘 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자 했던 것과 똑같은 생각이고 암논이 다말을 범한 것과 똑같습니다.
밧세바를 마음에 들여놓고, 밧세바를 갖고 싶어 하고, 우리아라는 장애를 없애려고 하고 극복하려고 하는 과정이 우리 삶의 과정인데 이 패턴대로 살면 우리의 삶에는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의 체질은 하나님보다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을 마음에 들여놓게 됩니다. 들여놓는 것들에 대해 마음이 침을 삼키게 되고, 방해물이 생기면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 십자가를 쥐어서 그러한 나를 죽이시는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늘에서 가지시는 관계에 나를 참여시키실 수 있고 사랑의 하나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공의의 하나님을 갖지 않으면 안 되고 공의의 하나님을 가지려면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내 죄를 알고 나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십자가를 쥐게 됩니다. 나를 죽이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십자가를 쥘 필요가 없고 하나님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치듯이 나를 치시겠다고 하시는데 그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끝나버립니다.
내가 죄인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공의의 하나님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면 부활시키시고 승천시키셔서 예수님과 하나님의 교제에 참여하게 하시고 자녀로서 부르십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 하늘에 계시다가 땅으로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처럼 전능하신 만군의 하나님을 갖게 되고, 그 만군의 하나님께서 나를 장갑으로 끼시는 일이 나타날 것입니다. 십자가로부터 공의의 하나님을 가지면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사랑의 하나님을 갖게 되고 그럴 때에야 이 땅에서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일들을 통하여 전능하신 만군의 하나님을 갖게 됩니다.
다윗은 암논과 압살롬에 대한 처벌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더 먼저 사랑했기 때문이고 자신의 죗값으로 인해 공의의 하나님을 맞닥뜨려야 했으며, 공의의 하나님이 내리시는 죗값의 처벌을 징계를 재앙을 옳게 여겨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끌어안을 때 사랑의 하나님으로, 만군의 하나님으로 다윗에게 허락한 모든 언약이 유효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가지기는 십자가 생활화로부터 시작합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이유는 내가 내 죄를 보고 공의의 하나님을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죄를 보고 싶지 않고 부인하는 사람은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 얼굴의 하나님을 골고루 먹게 해주심으로 온전한 평강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