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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18장 1-15절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창세기 17장은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이 지난 뒤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알리셨습니다. 나아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너는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완전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완전하지 않다보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믿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있습니다. 물론 믿음 자체가 없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믿음이 있지만,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있지만,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될 만큼의 믿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통하여 받은 바가 있지만 그것으로 교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부족한 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완전한 믿음을 주시지 않았다고 해서 믿음의 부족함이, 믿음의 없음이 하나님 탓인가 할때 그렇지는 않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줘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믿음을 주지 않고 내버려 두어도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즉 믿음을 주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때문에 완전한 형태로 주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 탓을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았지만 받은 믿음조차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항상 자기 생각, 자기 소견을 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믿음 없음, 믿음의 연약함 등은 결국 인생을 탓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쨌든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자신의 약속을 상기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속의 표징으로써 할례까지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인을 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패한 것이라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은 잘라내야 한다는 것을 알리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표징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확고함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면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할례를 명하실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게 되는데, 놀라운 것은 할례를 행한 후에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라의 경우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믿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선 1절 이하 4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이때가 창세기 17장 이후의 내용인데,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창세기 17장부터가 아브라함 나이 99세인데, 100세에 아들을 낳는다고 할 때 창세기 17장부터 20장까지는 아브라함 나이 99세 때의 일로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7장과 18장을 비교해 보면 그 구조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7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웃음이 나옵니다. 그리고 창세기 18장에서는 사라의 웃음이 나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17장의 내용이라면, 오늘 본문에서는 사라를 향하여 동일한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14절에 보시면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뿐만 아니라 창세기 17장 21절에 보면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라는 말로 이삭이라는 자녀를 약속하십니다. 동일하게 18장 10절에서는 “...내년 이 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14절에서 반복하십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7장은 아브라함을 세우는 것이 중심으로 되어 있다면, 창세기 18장은 사라를 세우는 것이 중심으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위하여 다시금 약속의 말씀을 확인시키시면서 믿음을 더하여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고쳐 부르셨습니다.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로 부르셨습니다. 13년 동안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가 아브라함 나이 99세 때 나타나 아브라함을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사라를 세우신다고 할 때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세우셨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할례를 행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날이 뜨거울 때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 앉아 있었는데, 눈을 들어 보니 거기에 세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1절에서 분명히 말하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혹 이 부분만 가지고 하나님의 세 위격이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을 잘 읽어보면 셋 가운데 둘은 천사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창세기 18장 22절에 보면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때 그 사람들은 셋이 아니라 둘인데, 왜냐하면 이 내용 바로 뒤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대화하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화 이후 3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떠난 이들이 있고, 여호와는 나중에 떠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부분이 창세기 19장 1절입니다.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즉 먼저 떠난 둘은 천사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세 사람으로 나타난 이는 여호와 하나님과 두 천사입니다.
본래 하나님과 천사는 우리처럼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 보이는 방식으로 나타나셨는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타났을 때 단순히 눈앞에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영(幻影)의 방식이 아니라, 8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준비한 음식을 먹는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분명하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셨는가? 지금까지는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내용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창세기 15장에서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으로 설명합니다. 때문에 아마도 지금까지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 창세기 18장에 와서는 환상이 아니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좀 더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만큼 가까이 계신다는 것이고, 가까이 계신만큼 친근하게 대하신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결국 삼위 가운데 제 2위격이신 성자 하나님을 사람이 되게 하심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자의 성육신을 생각하여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을 성자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난다고 해서 무조건 성자께서 그런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육신의 경우는 삼위 가운데 제 2위격이신 성자 하나님에게 고유한 내용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성육신 이전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할 때는 성육신과 같은 내용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두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을 때 아브라함은 세 사람을 보고는 장막 문에서 달려가 그들을 영접하였습니다. 특히 여기 보면 몸을 땅에 굽혔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는 자세입니다. 나중에 보면 소돔으로 간 두 천사가 롯 에게 갔을 때 롯 역시 그들을 보고 영접하면서 땅에 엎드려 절을 하는데(창19:1), 여기서 우리가 좀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절을 한다는 것은 존경의 의미가 있지만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사들의 경우 이런 절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말하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8절과 9절입니다.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하나님의 종으로 계시의 내용을 환상으로 펼쳐보여 주었을 때 요한은 그 모든 내용을 받고 난 뒤 그것을 보여준 천사에게 엎드려 경배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하는 말이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하나님의 종일 뿐,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창세기에서는 존경의 의미로, 요한계시록에서는 경배의 의미로 말한다면 쉽게 풀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이라고 말합니다. 즉 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지금 아브라함 앞에 계신 분이 단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식했음이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아브라함이 땅에 엎드려 절한 것은 단순히 존경의 의미를 넘어서서 경배로서 행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 아브라함이 경배로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있는 대상은 세 사람 모두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천사에게 그런 모습을 하려고 했을 때 허락하지 않은 것처럼 창세기 역시 아브라함의 경배에 대하여 천사들 자신에게 행하려고 했다면 천사 쪽에서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지금 아브라함이 경배로서 엎드려 절했다고 할 때는 오직 한 분 하나님께만 이런 자세를 취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려운 것은 롯이 두 천사에게 동일한 행동을 했다는 것인데, 성경은 여기에 대해 다른 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천사 입장에서 자기에게 경배를 하는 것으로 있었다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말씀처럼 경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 하나님만이 경배를 받으셔야 할 분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라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일 뿐, 하나님처럼 경배를 받아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말씀 사역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처럼 경배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은 없습니다. 가톨릭이 말하는 것처럼 성(聖) 누구 누구를 말하면서 그들을 존중하는 것을 넘어 그들을 경배하는 자리에까지 가게 되는 것도 있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것을 거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처럼 경배받을 수 있는 대상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경배 받아 마땅한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라고 말합니다.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지만, 그리고 그 하나님으로부터만 3절 말씀처럼 주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와 함께 온 두 천사에게도 존중의 표를 나타내고 있는 부분입니다. 동일하게 5절을 보시면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발을 씻는 것, 그리고 떡을 가지고 와서 베푸는 이런 행동들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세 사람에게 동일하게 대접을 하는 그런 모습으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세 사람 가운데 누구에게 은혜를 입었는지 알고 있으며, 따라서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로서 세 사람을 대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하나님과 두 천사에게 대접하고자 할 때 하나님 편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후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위하여 분주하게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6절 이하 8절이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이처럼 세 사람은 아브라함이 준비한 음식을 먹고는 사라를 찾으십니다. 9절을 보시면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이때 사라는 장막에 있었는데, 약간 의아한 것은 아브라함은 세 사람을 대접하기 위해서 그렇게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데 사라는 준비 가운데 도움의 손길은 있지만 여전히 장막에 머물러 나오고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사라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사라를 찾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앞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을 때, 그리고 이후 할례를 명하시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금 상기시키실 때 자신이 행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그녀도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의 마음에는 여전히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 시점에서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런 사라를 하나님께서는 찾고 계시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라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찾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어디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실 뿐 아니라,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찰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창세기 16장에서 하갈조차 감찰하시는 분으로 계심을 나타내셨는데, 사라에 대해서는 어떻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하나님께서 사라를 찾으시는 것은 사라가 지금부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찾으시면서 장막 안에 있는 사라로 하여금 좀 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시는 겁니다. 한마디로 “사라야, 주목하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10절입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하시지만, 더욱 더 주목하여 듣기를 바라시는 것은 사라인 것입니다. 창세기 17장과 큰 차이가 없는 말씀을 계속해서 반복하시는 이유가 아브라함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라를 위해서이기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17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셨지만 사라 편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불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믿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나는 내가 약속한 바를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셨지만, 사라 편에서는 여전히 불신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위하여 다시금 찾아오셔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것도 사람의 모양으로까지 해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럼 왜 사라가 불신하고 있는가? 11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맨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사라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창세기 11장 30절에 의하면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즉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사라는 임신을 할 수 없는, 불임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임의 상태라고 해서 완전히 임신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라의 경우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실 때 이런 면을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아! 하나님께서 뭔가 하고자 하시는구나!” 그래서 믿음으로 떠났던 겁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바에 대한 믿음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약해져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갈을 통한 이스마엘을 낳는 일에 대하여 주도권을 가지고 임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이나 자신이나 나이가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당시로 하자면 아브라함, 사라 나이 때에 아이를 낳는 것은 드문 그런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사라에게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사라의 경우 더 이상 임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게 된, 즉 여성의 생리가 끊어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년 이맘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을 때 사라는 속으로 웃게 됩니다.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의심의 웃음, 비웃음인 것입니다. 12절을 보시면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창세기 17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웃었습니다. 왜 웃었는가? 백 세 된 사람이 어떻게 자녀를 낳을 수 있으며, 아내인 사라 역시 구십 세나 되는데 어떻게 자녀를 낳을 수 있겠느냐는 의미에서 웃었습니다. 이때도 비웃음입니다. 그런데 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보면 내가 노쇠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내 주인, 즉 아브라함도 늙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이 처한 현실의 문제 때문에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말씀보다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미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7장 1절을 통하여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현실이 문제가 있는 것은 맞지만, 그리고 그런 현실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현실의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사라는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권능을 묵상하는 데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자신이 애굽 왕의 아내가 될 뻔했을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이끌어주신 것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자기 남편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당시 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연합군을 쫓아가 롯을 구해낸 사건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이라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것이 사실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현실이라는 벽이 얼마나 높은지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으로서 사라는 여전히 반응하더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앞에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올 때가 많습니다. 말씀 앞에 우리의 이성을 들고 들어옵니다. 말씀 앞에 소위 자연 법칙이라는 것을 내놓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믿음이 소위 자연 법칙이라는 것을 뛰어넘고, 우리의 이성을 뛰어넘고, 현실의 문제를 뛰어넘는 경우들이 많지 않습니다. 뛰어넘을 때는 꼭 자기 욕심을 채울 때만 뛰어 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섭리 부분을 보시면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통상적인 섭리 안에서는 방편들을 사용하시지만(행 27:31, 44, 사 55:10, 11, 호 2:21, 22), 그가 기뻐하실 때에는 방편들 없이(호 1:7, 마 4:4, 욥 34:10), 방편들 너머(롬 4:19-21), 방편들을 거슬러(왕하 6:6, 단 3:27) 자유롭게 일하십니다.”(제 5장 3항)
한 가지 예만 들어본다면, 통상적인 섭리 안에서 방편들을 사용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후 지구가 돌 수 있도록 계속해서 역사하셨고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과학에서는 이것을 자전(自轉)이라고 하는데, 이 말 자체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한다고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지구는 스스로 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돌리셔서 도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어떤 일도 있는가? 한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가던 지구가 멈추게도 하십니다. 그것이 여호수아 1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수10:12-14 참조). 심지어 열왕기하 20장에는 해 그림자가 10도나 뒤로 물러간 것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왕하20:9-11 참조). 즉 본래 돌리던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역으로 돌리기도 한 사건이 있었던 겁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란 겁니다. 하고자 하신다면 능히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우리는 어떤 내용까지 확인하게 되느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까지 확인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런 일들에 대하여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믿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저들 입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녀가 잉태할 수 있게 하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큼은 그렇게 역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없는 상태로 이 땅에 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우리의 현실 앞에만 오면 그런 고백이 무색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으로 살지만 그래도 떡이 있어야 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물질은 있어야 돼! 이것이 오늘날 성도들의 고백인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말하면서도 죽는 척만 하지 실제로 죽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현실의 문제로 저울질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언제나 말씀보다는 현실로 무게를 두는 것이 우리의 모습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지금 어떤 위치에 와 있는지 확인하고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100세 때 얻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입니다. 기껏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삭을 받칩니다. 사라는 어떻게 합니까? 사라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보통 어머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남편을 잡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때문에 사라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내버려뒀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는가? 히브리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기록합니다. 지금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 중 아무도 여기까지 믿음의 실천으로 가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어도 괜찮다는 자세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죽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죽음까지 내 놓는가?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것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을 따라 살아간다고 할 때 믿음을 따라 가면서도 얼마나 많이 넘어집니까? 수없이 넘어집니다. 주일 예배 드리고 집에 가면서 넘어지고, 집에 가서 넘어집니다. 때로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넘어집니다. 우리의 실상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의 은혜를 따라 믿음을 선물로 받았지만, 그 믿음을 우리 스스로 유지할 힘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 주지 않으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라를 찾으시고, 그런 우리를 찾으십니다. 본래부터 믿음이 좋아서 우리를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남다르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도 없고 남다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점과 흠이 얼마나 많은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으로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알리시고, 하나님 자신의 뜻을 말씀하고 또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을 통해 우리 속에서부터 역사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소망이 있는 겁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리고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분께만 우리의 모든 소망이 있는 겁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으면서 속으로 웃었을 때 그 사실을 하나님께서 모를 리 없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 그분에게는 모든 것이 다 드러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속마음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더불어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14절을 보시면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는 말씀은 창세기 17장 1절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너희는 내가 하는 말에 대하여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믿는 것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웃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전혀 없다. 때문에 처음부터 약속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 나아가 그 일을 위하여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이삭이라는 자녀를 약속한 것에 대하여 반드시 이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장막 문에서 듣고 있는 사라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의 병폐는 우리의 이성에다 하나님을 끼워 넣는 데 있습니다. 내가 경험한 바에 하나님을 끼워 넣고 있고, 보편적인 것에 하나님을 끼워 넣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통상적인 섭리 안에서 방편들을 사용하시지만, 그가 기뻐하실 때는 방편들 없이, 방편들 너머, 방편들을 거슬러 자유롭게 일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일하실 수 있는 능력 또한 가지고 계십니다. 온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인지 못하시겠습니까?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께는 능하지 못한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때문에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반드시 이루신다. 그러나 이것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방도로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기 때문에 오병이어를 가지고도 수천 명을 먹이실 수 있어!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왕이 되셔야 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용한 이들이 예수님 당시 무리라고 불리는 자들이었던 겁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땅의 임금을 삼으려고 할 뿐,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구원의 은총을 받은 자는 극히 적었을 뿐이었던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붙들어야 합니다. 그분이 약속하셨다면 그분이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셨다면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은 그분의 말씀하신 바에 대한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의 웃음을 아시고 자신의 뜻을 다시금 밝히셨지만,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라는 다시금 자신의 죄를 숨기는 자세를 취합니다. 15절을 보시면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물론 여기에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 알고 있으니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이 결국 거짓을 고하게 되는 모습으로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죄를 숨길 수 있는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끝까지 자기 자신의 죄악을 시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할 수만 있다면 숨기고 또 숨기려고 합니다. 맨 처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특히 자신의 죄를 숨길 때 무엇이 동원되느냐? 거짓이 동원됩니다. 죄를 인정하면 그 죄만 짓게 되지만 죄를 숨기려고 할 때는 또 다른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죄가 죄를 낳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오히려 숨길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께는 우리의 죄악을 숨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하나님을 피해 숨으려고 하는 것도 아셨습니다. 모른 척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지만, 물으셨다고 해서 모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감찰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이 최선의 길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잔꾀를 부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마치 인간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두려운 분으로 계십니다. 두렵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숨기고 싶은 마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는 심판하시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에 대하여는 사랑하시고 또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용서해 주신다고까지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 심판을 행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심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온전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완전 앞에서 죄는 점과 흠이요, 점과 흠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점과 흠을 지우기 위해서 때로는 심판이라는 것을 우리 앞에 가지고 오시는 겁니다. 그러나 영원한 심판이 아닙니다. 영원한 저주가 아닙니다. 일시적입니다. 그 일시적인 심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하게 만들고자 하십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8절은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사생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친아들이기 때문에 징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징계를 통해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명한 그 말씀을 친히 이루고자 하시는 겁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늘 아브라함과 사라와 같은 모습으로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현실 앞에서 그 믿음을 발휘하는 경우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찾아오셔서 설득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징계를 행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요, 우리의 완성을 위해서입니다.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하나님, 그분은 바로 우리를 위해 지금도 그 능력을 행사하고 계십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는 더욱 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의 목적이 내 목적이 되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