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의금부사 충헌 소애공 휘 취로 행적
임술(1682숙종8)년 ~ 경술(1740영조16)년
朝鮮崇祿大夫吏曹判書金公取魯墓(조선숭록대부이조판서김공취로묘)
元配贈貞敬夫人韓山李氏祔左(원배증정경부인한산이씨부좌)
後配贈貞敬夫人淸州鄭氏祔前右(후배증정경부인청주정씨부전우)
三配貞敬夫人唐城洪氏祔前左(삼배정경부인당성홍씨부전좌)
공의 휘는 취로(取魯)이고, 자는 취사(取斯)이며, 호는 소애(疏涯)이니 청풍김씨(淸風金氏)로 고려문하시중 증 청성부원군(高麗門下侍中 贈 淸城府院君) 휘 대유(大猷)의 후손이며, 조부는 휘 징(澄)인데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역임하시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셨고, 고(考)의 휘는 유(楺)인데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역임하시고 시호는 문경(文敬)이시다.
어머님은 정경부인 여산송씨(貞敬夫人 礪山宋氏)로 군수(郡守) 박(搏)의 따님이다.
공은 임술년(1682숙종8년) 11월 13일 태어나시고, 어릴 때부터 학문을 부지런히 닦으시어 을유년(1705숙종3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태학생들이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선생의 문묘종사의 청혼하는 소를 올릴 때 공이 주도 하셨다.
경인년(1710숙종36년)에 문과급제 하시고, 임진년(1712숙종38년) 9월에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 說書)가 되고, 이듬해에는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정6품), 문학(文學),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고, 정유년(1717숙종47년)에는 홍문록(弘文錄)에 선임되어, 수찬(修撰), 부교리(副校理), 교리(敎理), 지평(持平), 북평사(北評事)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나가지 않았음으로 세자 깨서 말씀하시기를, “김취로(金取魯)가 한 번 정택화(鄭澤和)의 배척을 당한 뒤 정세를 불안하게 여겨 관직을 단념 하는데, 참혹하게 무멸(誣衊:사실을 날조하여 욕보임.) 받은 것을 내게 이미 환하게 알고 있으니, 개석(開釋:마음에 응어리를 풀어 버림)하는바 있어야 되겠다.”고 하시고, 즉시 직무에 임하도록 엄명을 내리시니 12월에 수찬(修撰)에 나가셨고, 다음해인 무술년(1718숙종45년)에 부수찬(副修撰) 경자년(1720경종1년)에 정언(正言)이 되었으나, 임인년(1722경종3년)에는 신임사화로 울산에 유배되시었다.
영조(英祖) 을사년(1725영조원년)12월 27일 배소에서 돌아오시어 다시 부름을 받아 갑진년(1724경종4년) 2월에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시고, 이어서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 하시고, 도승지(都承旨), 대사간(大司諫),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호조참판(戶曹參判)을 거처, 다시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을유년(1725영조원년)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임명되었으나, 조고(祖考:휘 징(澄))가 본도감사 때 격렬한 논박을 받은 까닭으로 사임하고 향리에 머무시었다.
정미년(1727영조3년)에 임금께서 복직할 것을 엄히 이르시고 도승지(都承旨)에 임명하시어 나아가셨고, 무신년(1728영조4년)에는 대사간(大司諫)으로 계실 때, 함경감사(咸鏡監司)로 임명되었으나 모부인을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하니, 직이 바뀌어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제수되었다.
다음해(1729영조5년)에는 한성판윤(漢城判尹),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고, 10월에는 평안감사(平安監司)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경술년(1730영조6년) 9월에는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고, 10월에는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임명되었는데, 임금이 소대(召對:왕명으로 임금과 대면하여 정사에 관한 의견을 상주하던 일)하여 관서지방(지금의 평안도) 형편을 묻고 하교 하시기를, “경을(공을 말함) 안 것은 을사년(1725영조원년)부터인데 평안감사 때 치적의 대하여 훌륭하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오늘 날 중요한 지위(병조판서)로 임명한 것은 나라를 위함이지 사사로움이 아니니 더욱 노력하라.”고 격려 하셨고, 다음해(신해년1731영조7년)에는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하시고 임자년(1732영조8년) 2월에는 예조판서(禮曹判書)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 하시고, 9월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시었으나, 체직되어 다음해(1733영조9년) 8월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 좌참찬에, 갑인년(1734영조10년) 1월에는 다시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고 12월에는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나아갔다.
을묘년(1735영조11년)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시고, 5월에는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셨다. 10월에는 예조판서(禮曹判書), 11월에는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다시금 되셨다. 병진년(1736영조12년) 4월에는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하시고, 8월에는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셨다.
9월에 송인명(宋寅明)의 무고를 당하여 무주로 유배 되었으나 12월에 돌아왔다.
경신년(1740영조16년) 1월 12일 돌아가시니 춘추 54세라. 영조께서 부음을 들으시고 슬퍼 하시면서, 장례의 부의는 전례대로 하라 하시고, 특별히 상장(喪葬:장례)에 쓰는 물품을 주라 명하시고 뒤에 충헌(忠憲)이라 시호를 내리셨다.
묘소는 수원쌍고 건좌 언덕이었는데 2017년에 고묘 아래로 천장하여 있다.
공께서 벼슬하시던 숙종. 영조 년간은 당쟁이 극심하던 때이며, 형제와 당종(사촌)들이 청요직(淸要職)에 있으므로 남의시기를 많이 받아 한때는,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서 일생을 보내고저 하였으나, 임금의 명으로 복직하고, 소신껏 직무를 수행하고자 하면, 사사건건 반대당의 참소와 헐뜯음이 있었으나, 임금께서 막아주시고 바로잡아 주시어 육조(六曹)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시면서(이로써 공께서는 형조, 이조, 호조판서를 한번씩, 병조, 공조판서를 두번씩, 예조판서를 4번을 하시었다.) 훌륭한 치적을 남기셨고, 지방관으로 나아가시어 선정을 베푸시니 숭덕 하는 높은 소리는 도내에 가득하였고, 태학생으로 계실 때에는 성현을 문무종사토록 하시었고, 예조(禮曹)에 계실 때에는 백성교화에 힘쓰셨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한산이씨(贈 貞敬夫人 韓山李氏)로, 판서 한성군 정희공 기하(判書 漢城郡 貞熹公 基夏)의 따님으로 신유년(1681숙종7년) 나시고, 정해년(1707숙종33년) 4월 19일 향년27세로 돌아가시니 후일에 공과 합봉(合封)하였다. 소생으로는 따님 2분이다.
후배는 증 정경부인 청주정씨(贈 貞敬夫人 淸州鄭氏)로 사인(士人) 호(鎬)의 따님인데, 정묘년(1687숙종13년) 12월 28일 나시어 정묘년(1717숙종43년) 9월 7일 향년31세에 돌아가셨다. 소생으로 1남이 계시고 후일에 공과 합봉(合封)하였다.
삼배는 정경부인 당성홍씨(貞敬夫人 唐城洪氏)로 사인(士人) 중채(重埰)의 따님인데, 기묘년(1699숙종25년)에 나시고, 을해년(1755영조32년) 8월 1일 향년57세에 돌아가시고, 묘소는 공과 합봉(合封)하였다.
공은 1남 3녀를 두시었는데 1남은 치량(致良)은 백부 정로(正魯)에게 출가하고, 공의 아우(諱 尙魯)의 둘째 아들인 치영(致永)으로 후사를 있도록 하였으니 진사이다.
따님은 판서 홍계희(判書 洪啟禧), 교관 조정규(敎官 趙正逵), 교수 홍희영(敎授 洪希泳)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손자 증손 현손에 이르기까지 양손으로 이어오다가 5대손에서 형제분이 나셨으니, 한 분은 본 생가로 양자 가시고 후손은 번성하지 못 하였다.
슬프다! 공이 남기신 가언과 선행이며, 저술하신 글들도 많았으리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은 한 점도 없다. 다만 보첩방주의 몇 자와 왕조실록과 전래되는 말을 모아서 행적을 기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