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스포트라이트 강박적인 참신앙>의 줄거리:
JYP, SM, 큐브 등 유명 연예기획사들과 소속 스타들 그리고 소속 연습생들에게 '스포트라이트'는 생명이고 존재의 이유입니다. 그러나 연일 뉴스에 나오는 비리 부패 고위 공직자들. 이들에게 스포트라이트는 생명과 존재의 파괴자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한편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포트라이트와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세 경우 모두 스포트라이트의 행복을 놓치고 있는 것이지요. 스포트라이트는 받거나 피하거나 무관심할 것이 아니라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포트라이트 강박적인 참신앙
(시편 19:1~14)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스포트라이트 강박적인 참신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스포트라이트 강박적인 참신앙’
참 신앙이라면 스포트라이트 강박관념이 있어야합니다.
요즘 연예계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나 오디션 프로그램이 범람하고 있는데, 합격하는 지망생들보다는 실패의 쓴 맛을 보고 방황하는 지망생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실패와 탈락의 쓴 맛을 본 사람들 중에 보이그룹이 있는데 비스트(BEAST)입니다. 전 세계에 한류열풍을 일으키는 K-POP스타의 하나로서 아시아를 기반으로 하여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스트가 2009년에 데뷔했을 때에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비난의 중심에는 재활용 그룹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룹 멤버들 하나하나가 오디션이나 서바이벌 프로그램, 데뷔에 있어서 실패와 탈락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윤두준 멤버는 JYP기획사의 연습생으로 “열혈남아”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탈락한 적이 있었고, 장현승 멤버도 YG기획사의 연습생으로 빅뱅멤버의 가입을 목적으로 연습하다가 가수 승리에게 밀려서 탈락했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탈락한 이들을 모았기 때문에 재활용 그룹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이 바뀌어서 재발견 그룹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제가 비스트의 노래는 하나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해외에서 비스트가 공연할 때에 노란 머리와 파란 눈의 아가씨들이 열광하는 장면을 본 것도 기억납니다. 이처럼 기획사를 통해서 스타로 군림하게 된 연예인이나 연습생들에게 있어서 스포트라이트는 존재의 이유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보겠다고 12년이나 연습생 생활을 했던 조권이라는 가수도 있습니다.
연예인들에게 스포트라이트는 생명이자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대가는 필요합니다. 연습생 시절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 최고인데 일단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하면 사생활이 없어지고 사적인 시간에는 시선을 피해 다녀야만 합니다. 고위공직자들이 비리나 부패 등으로 뉴스에 나오고 재판을 받는데 이들에게 스포트라이트는 제발 피해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군상은 스포트라이트와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은 무관하게 살아가면서 자녀나 사랑하는 사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원합니다. 이렇게 스포트라이트를 중심으로 해서 다양한 심리적 스펙트럼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는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행복하더라도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스포트라이트 강박관념입니다. 신앙의 여러 측면 가운데 스포트라이트 강박관념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것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거나 피하거나 무관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진정한 스포트라이트의 의미는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포트라이트가 될 때에 지속적이고 영원한 행복이 찾아옵니다.
스포트라이트는 어느 한 특정 부분에 조명이 집중적으로 비쳐지는 것입니다. 많은 가수들 중에서 특별히 비스트가 세간의 집중을 받을 때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집중을 받아서는 오래갈 수 없으며 그 이면에는 그림자가 항상 따라다니므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스포트라이트의 기쁨은 잠시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그림자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원죄의 속성을 가진 똑같은 죄인으로서 세간의 관심 앞에서 마냥 편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행복을 위한 스포트라이트 강박관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스포트라이트의 행복은 스포트라이트의 강박관념으로부터 나옵니다. 강박적으로 내가 스포트라이트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에 진정한 행복은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1~6절까지 다윗은 삼라만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드러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7~14절까지는 앞의 맥락과 이어지지 않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여호와의 법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0절에서는 이것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합니다.
학자들은 이렇게 차이나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작자를 나누어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한 주석서들에서는 전반부는 자연물을 통하여 하나님이 드러나시는 자연계시이며, 후반부는 하나님이 선민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특별한 도구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시는 특별계시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영적정서가 풍부한 본문의 시를 무미하게 만드는 평가입니다.
1~4절에 다윗은 하나님으로 충만한 가운데 삼라만상을 보며 노래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하는데 기가 막히는 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1절에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하는데 하늘과 궁창이 나옵니다.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구름이 떠 있고 새가 날아다니는 대기권을 말합니다. 그리고 궁창은 해와 달과 별들이 있고 은하계가 있는 우주를 말합니다. 세상을 하늘과 궁창으로 나누어 보면서 하늘아래의 모든 것이 포함된다고 보았습니다. 하늘과 하늘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하늘 너머에 있는 우주에 있는 것들까지도 하나님의 하신 일로 노래한 것입니다.
2절의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라는 말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해짐을 뜻합니다. 또한 3~4절에서도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라는 말은 말이 없어도 삼라만상과 우주를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셨다고 하는 증거가 온 땅에 통하고 있고 그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노래를 합니다. 5~6절을 보면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라고 합니다. 특별히 해를 기준으로 삼아서 해 아래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솜씨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없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절부터는 갑자기 여호와의 율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앞부분에서는 엘로힘(하나님)으로 칭하다가 뒷부분에서는 여호와로 바꾸어 부르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하늘과 궁창 그리고 하늘아래 햇빛이 닿고 있는 이 세상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지으셨고 하나님의 솜씨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가리키고 하나님을 보이게 하는 조명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백합화를 볼 때에 하나님을 떠올린다면 백합화는 하나님을 비추는 조명이 된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을 보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그것들이 하나님을 비추는 조명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삼라만상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백합화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고 선포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일까요?
다윗은 지금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서 주변국들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이 받는 스포트라이트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백합화처럼 새처럼 해와 달과 별처럼 바닷물처럼 구름처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비추고 보이게 하는 스포트라이트가 되고 싶어 합니다. 여기에 다윗의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 있습니다.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거나 피해서 나 혼자 하고 싶은 것을 몰래 하는 것에서 영광스러워지거나 자유로워지는 것에서 행복을 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스포트라이트 강박관념으로 하나님만을 비추기를 바라므로 새를 보아도 부럽고 백합화를 보아도 부러워합니다. 저들은 고스란히 하나님의 솜씨를 드러내며 하나님의 계심을 증거하고 있는데, 도대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비추고 드러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며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거기에서 행복을 느꼈던 것인데 여기에서 다윗은 말씀을 찾습니다.
세상의 만물들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을 가리키고 하나님을 증거 하는 스포트라이트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나타내는 스포트라이트가 되기 위한 별도의 과정이 필요하므로 말씀이 등장합니다. 인간은 인격적 존재라서 하나님의 스포트라이트가 되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과정이 필요합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즉자적(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수 있지만, 인간만큼은 인격적 과정을 거쳐야 하나님을 가리키고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드러날 때의 행복은 경험을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 행복은 영원한 것이고 어떤 것에도 구속을 받지 않는 자유입니다. 유명해진 배우가 사적인 생활에서는 스포트라이트를 피하고 싶어 하는 것과는 다르게 완전한 자유로운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7절부터 하나님을 부를 때에 엘로힘에서 여호와로 바꾸어 부른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중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을 뜻합니다. 나와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관계가 없이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라는 이름은 계약을 체결해주신 하나님을 뜻하는데, 나와 하나님 간에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지 않고도 하나님의 스포트라이트가 되어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도록 창조된 인간만큼은 창조주 하나님을 넘어서서 나와 관계하시는 여호와로서 만날 때에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하는 방법이 바로 말씀입니다.
본문 7~9절까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여호와의 법도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한 마디로 말씀입니다. 말씀을 넣어서 다시 써봅니다.
7절의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라고 하는 이 구절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격적으로 상대해서 만나면 내 영혼이 소성된다.’라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라는 구절도 ‘말씀을 통해 여호와를 만나면 지혜롭게 된다.’라는 말이 됩니다.
8절의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라는 구절도 ‘말씀을 통해 여호와를 만나면 기쁨이 생기게 된다.’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이 여섯 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달리 표현하고 있는데 그 여섯 번 모두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여호와로 만나면 내게서 이러한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내가 하나님의 스포트라이트가 될 수 있다는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 스포트라이트가 되게 해주는 말씀들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금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고 말씀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개인적인 여호와 하나님으로 만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격적으로 만나면 내게서 하나님이 나타나실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며 하나님을 보게 되고 하나님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될 때에, 비로소 나의 영원한 행복은 보장될 것이며 참된 자유가 체감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한 번 의미를 살펴봅니다. 7절의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라고 하는 의미는 말씀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나 개인의 상대자이신 여호와로 만날 때에 내 영혼(마음)에는 내가 살아야 될 이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라는 의미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살아야 할 이유로 확인될 때에 내가 하는 말과 행동들이 곁길로 가지 않고 오직 지혜롭게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8절의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라는 의미는 그렇게 말씀을 통하여 여호와를 만날 때에 내 마음에 진정한 만족과 기쁨이 생깁니다. 백합화를 보시며 주님이 아버지를 생각해 내시고 공중에 나는 새를 보시고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해 내시는 것처럼, 사람들이 여호와로 기뻐하는 나를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떠올리게 되고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하려는 강박관념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나라와 주변국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에서는 아무런 기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훌륭한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그 정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면 스포트라이트에 취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강박관념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스포트라이트가 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오히려 존재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손길과 행하심을 드러내는 자연물들을 부러워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길은 오직 말씀을 붙잡는 일임을 깨닫고, 말씀을 붙잡음으로서 인격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을 때에 14절의 말씀처럼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여호와를 만났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고 말이라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비추게 하고 하나님을 보이게 하는 것이 영광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영화로운 광채가 하나님께 비추어서 하나님이 드러나시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스포트라이트가 되겠다는 강박관념이 부부간에도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사장에서도 나타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만 합니다. 신앙의 한 측면이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직장에 나가서 성과를 많이 올려서 승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월급을 꼬박꼬박 받아오는 것이 사명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스포트라이트가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 승진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잘 키워서 자녀의 형통을 통해서 만족을 얻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자녀들 앞에서 자녀들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스포트라이트가 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사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돈이 없고 병이 들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성공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들은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의 사명은 하나님의 스포트라이트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나의 강박관념이 되어야 합니다. 몸에 병이 난 채로 하나님의 조명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하나님의 조명이 될 수 있습니다.
실지로 하나님의 조명이 될 수 있었던 상황을 기독교 역사에서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아서 성도들이 다 흩어졌을 때에 완전히 노숙자이고 거지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전할 때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세상에 처음 태어났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소아시아 지역 전체로 하나님의 말씀이 퍼져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기업도 없는 거지같은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암흑 같았던 이방의 세상에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은 병들었는데 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 병들었는데 어떻게 감사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도록 하시면, 그 의문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감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스포트라이트 받고 싶어 몸부림치다가 포기하고 이제는 내 자녀들이나 그렇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스포트라이트를 피하려고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스포트라이트 강박관념이 사명이 되어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말씀의 총화인 십자가를 붙잡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 됨으로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이 보이기를 간절히 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