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제국 동로마제국 최후의 날
중세는 무너지고 르네상스 시대가 더욱 풍요로워지고 대항해 시대가 개막하는 계기
1453년 5월 29일. 유럽역사상 매우 중요한 날이다.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1432~1481)에 의해 함락당한 날이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유럽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그 자체였고 자신들의 뿌리와도 같은 로마의 계승자였기 때문이다.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이후 콘스탄티노플로 개칭)으로 천도하였고,
394년 테오도시오시1세가 두 아들에게 로마제국을 분할상속하면서 동서로 로마제국이 나뉘어졌다.
그로부터 80여년만인 476년 서로마제국이 무너졌고, 그로부터 1123년뒤에 천년제국 동로마 제국이 망했다.
1. 이슬람제국에 의해 포위된 동로마제국
동로마제국은 한동안 로마를 계승하여 한층 발전된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11세기이후 셀주크투르크의 침입으로 급속히 쇠퇴되고 있었다.
14세기에 셀주크 투르크를 멸망시키고 등장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1299 ~ 1922)은 동로마 제국이 장악하고 있던 소아시아 전체를 차지하였다.
이어서 오스만 제국은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우회하여 에게해를 건너 발칸반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마치 동로마제국이 오스만제국 영토에 파묻힌 것과 같은 형국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고작 콘스탄티노플 도시 그 자체, 미스트라스 요새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일부, 제4차 십자군원정 이후 흑해연안에서 살아남은 완전독립 계승국인 트라페주스 뿐이었다.
1450년경의 동東지중해 지역으로 오스만 제국에 둘러싸인 멸망 직전의 비잔틴 제국
2. 오스만제국의 메흐메트, 콘스탄티노플 정복
드디어 1453년 4월 2일, 오스만제국의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위해 출정하였다.
메흐메트 2세가 군사15만 명과 200~300척의 함대를 동원했던 반면, 콘스탄티노플의 군사는 겨우 7000명에 불과했다.
메호메트2세는 이러한 대규모 병력과 함선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육상과 해상 사이드에서 완전히 포위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무려 20km에 달하고 ‘3중성벽*’으로 메호메트 공격에 효과적인 방어체계가 되었다.
* 육지에 면해 잇는 5.5km의 테오도시우스 성벽, 금각만과 면해 있는 7km의 해안 성벽, 마르마라 해와 면한 7.5km의 성벽
메흐메트2세는 헝가리의 우르반(Urban)이라는 기술자가 주조한 육중한 대포(구경 0.9m, 길이 8.2m)를 이용해 이 성벽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수 주에 걸친 엄청난 포격에도 비잔티움의 성벽은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한편 메흐메트의 함선은 콘스탄티노플의 남쪽바다인 마드리아만을 가득 메워 포위했으나,
금각만(Golden Horn)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는데 이는 동로마제국이 만 입구에 쇠사슬을 설치하여 봉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메흐메트는 만 입구를 우회하여 산 능선에 기름칠한 통나무를 늘어놓고 그의 함대를 굴려서 금각만으로 들여보냈다.
이로써 콘스탄트노플은 안 그래도 열세인 병력을 금각만과 성벽으로 나누어 방위에 임할 수 밖에 없었다.
5월 들어 각종 땅굴공격과 포격으로 견고했던 3중성벽이 서서히 무너져가고
식량난까지 겹쳐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불안은 가중되고 오랜 공성전으로 방어군의 전사자와 부상자 역시 엄청나게 늘어있는 상태였다.
5월 29일, 오스만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약해진 성벽으로 비집고 들어온 오스만군은 성벽을 점령하고 성문을 활짝 열었다. 이렇게 열린 돌파구를 향해 더 많은 오스만군들이 밀려들고 살육이 시작된다.
붉은 황제복을 입고 백마에 올라타 끝까지 오스만군과 싸우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장렬히 전사해 시체도 찾지 못하고 실종되었다 한다.
전통적으로 정복군에게는 3일간의 약탈이 허락되었다 하나, 워낙에 약탈이 파괴적이어서 술탄은 하루 만에 약탈을 거두었다.
오스만 병사들은 반항하는 사람은 죽이고 저항하지 않은 자들은 노예로 삼았는데, 약 4,000명 가량을 살해했다.
메흐메트 2세는 시내를 둘러보고 아름다운 성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허물지 말고 모스크로 개조할 것으로 명한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을 재건하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삼아 그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었다.
3. 동로마제국 멸망 이후 세계사의 반전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중세를 서로마제국의 멸망(476)에서 시작하여 동로마 제국의 멸망(1453)까지의 기간으로 보고, 이후를 근대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발판으로 발칸반도, 항가리를 침공하여 속국으로 삼았고, 1529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포위 공격하여 유럽을 놀라게 하였다.
오스만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 유럽과 동양과의 교역이 축소되었으며,
스페인, 포르투갈을 선두로 지중해 밖으로 나가게 되어 대항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그리스 - 로마에 대한 고전학자들과 그들의 연구결과들이 서유럽으로 넘어가게 되어 르네상스가 더욱 풍요롭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가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자처하게 되었다. 동방 정교회를 이반 3세가 모스크바로 옮겨와 정비하고, 동로마 제국의 쌍독수리 문장을 이반 3세 가문의 문장으로 하였다.
그는 동로마 제국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 ‘조엘’을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정통성을 높였고, 비잔틴 제국에서 사용하던 ‘황제(짜르)’의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저ㆍ집현
첫댓글 사람의 앞날은
하늘이 계획한 것이요
사람의 뜻으로는
그 길을 알 수도
열 수도 없을 것이다
역사공부 잘합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