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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왜 원수지간이 되었고 한국은 어떻할까 ?
● 같은 뿌리를 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왜 이렇게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을까?
♥ 한민족이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누어졌듯이 러시아, 우크라이나, 밸라루스는 키에프 공국이란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나라이다.
♥ 키에프 공국의 수도 키에프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이다. 같은 뿌리의 국가라서 3개 나라의 언어는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서로 소통될 정도로 유사하다고 한다.
●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을까? 그 이유는 스탈린 시절 홀로도모(Holodomor)라고 불리는 대기근 사건이 주요 원인이다.
♥ 우크라이나는 세계 3대 곡창지대중에 하나이다. 우크라이나 땅은 흑토이며 뭘 심어도 잘 자라는 풍요의 땅이다.
* 그런데, 공산혁명 후 스탈린이 부농(쿨라크)을 처형하였다. 그들의 가죽을 벗겨서 비누로 만들었다.
* 쿨라크가 가진 농지를 다 몰수하고 집단농장 체제로 만들어 운영하였다. 집단농장마다 생산량을 할당하였다.
* 그러자 농산물 생산량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당연한 결과이다.
● 농사짓는 기술을 가진 부농을 다 처형했으니 그런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해도 자기 것이 안되는데 누가 열심히 농사 짓겠는가?
* 소련은 농산물이 줄어 들어도 과도한 목표량을 수탈을 하였다. 그래서 그 세계 3대 곡창지대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생겨났다.
* 1933년 어느날, 단 하루만에 28,000명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집단농장의 인구가 굶어죽는 사람 때문에 1/3로 쪼그라 들었다
* 배고품을 참지 못한 우크라이나 인들은 쥐, 개, 고양이, 벌레.... 등을 닥치는데로 잡아먹었다.
* 나중에는 사람까지 잡아먹었다.
부모들은 자식을 서로 바꾸어서 잡아먹었다고 한다.
인육을 파는 상점까지 생겼다고 한다.
●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당시에 소련은 연 천만명의 인구가 먹을수 있는 여분의 식량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소련은 식량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을 굶겨 죽었다. 당시에 약 500만~ 1000만명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 우크라이나인들은 이 대기근을 홀로도모르 라고 부르고, 매년 기념일엔 곡식 낱알을 흩뿌리며 원혼을 달랜다고 한다.
● 상황이 이렇다보니 우크라이나인들의 공산당에 대한 반감은 엄청 커졌다.
* 독일이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처들어오자 해방군이라고 오히려 환영했다고 한다.
* 아시다시피, 독일이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는데, 유대인만 죽인게 아니고 슬라브인도 엄청 많이 죽였다.
● 당시에 홀로코스트를 집행하는데 조력을 한 이들이 바로 우크라이나인들 이라고 러시아인들은 주장한다.
● 어제도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친나치 세력이라고 비난한 이유이기도 하다.
● 아무튼 이렇게 두 나라는 뿌리가 같은 나라이지만 이러한 연유로 적이 되었다.
● 최근에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역은
왜 화약고가 되었나?
우크라이나의 우측 돈바스지역은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두 지역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 이 두 지역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친 러시아인들이 많이 산다.
● 그런데 우크라이나에 친서방정권이 들어서면서 러시아어를 금지시켜 버리고, 우크라이나어만 사용하게 하고 나토 가입을 결정하자 친러시아인은 반발하였고, 돈바스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을 선포하였다.
● 그래서 우크라이나에서는 정부군과 독립선포한 돈바스지역과 내전이 발생한 것이다.
이들 분쟁지역은 민스크 협정으로 휴전을 했다.
● 중요한 협정내용은 중화기를 사용하지 못한다. 돈바스 지역은 자체 주민 선거를 실시한다. 돈바스 지역은 우크라이나에 속하지만 연방제 방식으로 자치권을 확대한다... 등등이였다.
● 그런데 푸틴이 돈바스의 2자치구(도네츠크와 루한크)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였다.
● 이에 대해서 독일 총리는, 러시아가 돈바스를 독립국가로 인정하여 민스크 협정을 위반하였다고 비난하였다.
● 한편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민스크 협정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 이유는 자체 주민투표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자체 주민투표를 하면
● 주민들이 크림반도처럼 러시아와 합병을 결의할 가능성이 100%였다.
● 암튼 푸틴은 돈바스 지역을 독립국으로 인정함으로서 우크라이나로부터 크림반도에 이어서 돈바스 지역까지 빼앗았다.
● 따라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갈등의 주요 원인을 제공한 것은 공산주의였다. 공산주의는 파라다이스를 약속하지만 실제는 원한과 분노 그리고 질투심을 부추켜 지옥을 만들었을 뿐이다.
● 지옥으로 가는길은 언제나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동맹 없는 우크라이나를 바라보면서》
평화타령 불러대면 평화가 온다고 믿는 멍청이들이 아직도 꽤나 많은가 보다.
● 이번 우크라이나를 보라!
우크라이나에 힘이 없으면 우크라이나에 평화도 없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우리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 아무리 소리쳐도 아무 소용이 없다.
● 우크라이나 단독으로는 러시아에 대항할 힘이없으니 NATO에 가입하려고 몸부림치는 저 모습을 보라!
동맹을 간절히 구하고 또 구하는군! 그러나 러시아와 충돌을 원치 않는 NATO에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 자~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이라는 동맹을 맺은 후 69년이 지나 거의 70년, 그 동안 한국은 평화와 번영을 누려왔다.
● 오늘은 동맹의 중요성에 대해 짧은 글을 써 본다. 글의 내용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전 70년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이후 70년을 비교. 읽고 나면 뭔가 명확하게 감이 잡힐 것이다.
●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전 70년 먼저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전 70여년 동안 이 땅 안팎에 무슨 일이 터졌는지 큰 사건들 중심으로 15 개만 정리해본다.
1. 임오군란과 대원군 납치
1882년 임오군란이 터지자 이를 기화로 청나라 군대 3,000명과 일본 군대 400명이 조선으로 들어왔다. 청나라 군대는 숭례문(남대문) 밖에 주둔했는데 이 부대를 외교 차원에서 방문한 흥선 대원군을 강제로 납치, 청나라 톈진(天津)으로 압송,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였던 리홍장이 멋대로 대원군을 심문하고 톈진 서쪽 바오딩(保定)에 구금시켰다. 3년이 흘러 1885년이 되어서야 대원군을 풀어주어 겨우 귀국했다.
2. 동학란과 청일전쟁
1894년 학정에 못견딘 전라도 고부 농민들이 전봉준과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를 기화로 일본이 조선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었고 조선에서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 양국 간에 청일전쟁(1894~1895)이 터졌다.
* 이 때 일본군이 한양으로 들어와 한양 경복궁을 지키는 조선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접전 끝에 일본군이 승리하고 고종은 사로잡혔다! 일본군 소좌가 칼을 빼들고 고종을 협박했다!
● 엉터리 대한민국 국사교과서에서 침묵하는 내용들이다.
* 일본군은 이어 평양으로 진격 평양성을 지키던 조선과 청나라 연합군을 격파했고 청나라 군대는 을밀대에서 항복했다. 연이어 벌어지는 여러 전투에서 일본은 모두 승리했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했다.
* 조선 안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전쟁터는 조선땅! 전쟁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인들의 몫이었다.
3. 1895년 을미사변 청일전쟁
1895년 4월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자 조선 내에서 일본의 위세는 더욱 더 대단해졌고 동년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사무라이보다 낮은 계층)들이 경복궁에 난입, 옥호루에 숨어 있던 민비 나는 (명성황후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여자가 이 나라 역사에 저지른 죄가 결코 가볍지 않다).를 죽였다.
● 고종은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 사건을 후세 역사책에서는 '아관파천'이라 부른다.
● 당시 경복궁을 지키던 내금위 병사들은 무엇을 했을까? 일본 낭인들과 싸움에 밀려 도망 갔었다
자신들이 지키던 왕과 왕비를 버리고 도망간 조선 최고의 무사들...!!!
● 이런 내용들도 민족주의 역사관에 입각, 자랑스런 역사만을 중심으로 기록하는 순 엉터리 한국 국사 교과서에서는 철저히 침묵하고있다.
4. 1905년 을사조약 외교권을 상실
5. 1910년 한일합방.
● 조선이 망했다!
● 하지만 조선 왕족은 일본으로부터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았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조선 왕가에 대한 일본의 대우는 변치 않았다. 이런 내용도 국사 책에서는 찾아볼수 없다.
6. 1919년 3.1 운동
7. 1920년 청산리 전투
8. 1921년 자유시 사변..
9.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과 태평양 전쟁 발발
10.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11. 1945년 8월 18일 일본 무조건 항복!
12. 1945~1948 미군정 시기.
13.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14.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침략전쟁!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 개입...!!!
이 전쟁으로 300만 명 이상이 죽고 전국이 잿더미!!
15. 1953년 7월 27일 휴전
(B) <한미상호방위조약>
이후 70년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한미상호방위조약> 의 핵심은 한반도와 그 주변에 미군을 배치한다는 내용이다.
● 주한미군!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군대가 주둔한 이후 70년...!!!
● <한미상호방위조약>
이후 69년...그 기간동안 무슨 큰 난리 있었나?
● 한반도에 큰 난리 없이 70년을 지내왔다...
포항제철 삼성전자 현대조선 경부고속도로 한강의 기적 .... 세계 10대 강국....
● 그 기간동안 북한군 병사들은 의무복무기간 10년 북한 경제는 발전할 수가 없었다.
● 군대 복무기간 20개월.
젊은 애들이 일하니 당근 경제 발전!
● (C)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전 70년과 이후 70년 비교
● 미군 주둔 이전 70년과
미군 주둔 이후 70년을 비교해보라!
●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전 70년 동안 우리 나라에 난리가 나면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서 왕의 아버지를 납치해가고(임오군란)
● 우리 나라에 난리(동학란)가 나면 일본 군대가 쳐들어와서 경복궁 지키는 군대와 싸워서 경복궁을 점령하고 왕은 사로잡히고(청일전쟁) 왕비는 칼 맞아 죽고 (을미사변) 나라는 망하고(한일합방) 태극기 들고 독립을 외치면 총에 맞고 감옥가고 (3.1 운동)
● 독립군 광복군의 힘이 아닌 이승만 외교의 힘으로 간신히 독립했더니 (1945년 8.15 해방)
● 소련 중공 군대를 등에 업고 6.25 전쟁을 일으킨 북한 김일성....(1950년 6.25)... 그 6.25로 300만 명 이상이 죽었다...!!!
● 그리고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맺어진 후 69년이흘렀다 그동안 무슨 난리가 있었나? 전쟁이 있었나? 아니다!
●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수백만 명이 굶어죽은 아시아 최빈국이 되었는데 한국은 세계 10대 강국!
● 동맹이란 이렇게도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 이재명이가 중국에서 제일 큰 방송국인 관영 CCTV 인터뷰에 나와서 자신이 대통령되면 한반도에 배치된 미국 사드를 철수시키겠다고 선언했다.
● 그러면 한미동맹이 무사할 것 같은가? 한미동맹이 무너지면 그동안 누려왔던 평화와 번영이 어찌될것인가?
● 나라 자존심 운운하면서 전시작전권 회수하고
사드 철수시키고 한미동맹 무너지면 어찌 될까?
● 대한민국이 중국을 이길 힘이 있나? 러시아를 이길 힘이 있는까? 경상도 김천 성주 지역을 지나다 보니 "사드 가고 평화 오라!" 이렇게 적힌 플래카드 들이 눈에 띄더군.
● 중국 러시아 이길 힘은 없어도 북한 핵무기에 대항할 힘은 없어도 평화타령 불러대면 평화가 오는가?
● 평화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뉘집 강아지 이름인가? 과거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미국에 특사를 보낸 적이 있다. 그들이 주한미군 철수 운운했었다. 우리는 자주국방하겠다면서!
● 그 때 미국 국방장관이 럼스펠트였다.
한국 특사들 주장을 다 듣고 럼스펠트가 유명한 말 한 마디 했다.
●"자주국방! 그것 좋은 말이다.
하지만 우리 미국도 자주국방을 다 하지 못해서 여러 나라들과 동맹을 맺는다."
힘이 부족하면 동맹을 맺고 그 관계를 지켜야 한다. 그게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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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은 이런 것…영국이 윤대통령에게 해준 특급대우는 무엇?
■ 경북 구미를 박정희시로 지정하고 '건국과 부국' 박물관, 6.25 박물관 등을 국제적규모로 지은 다음 세계 새마을운동 수도로 만들어 외국 관광객 유치에 활용해야
■ 도고 제독이 “나에게 영국의 넬슨과 비견됨을 찬(讚)함은 감당하나, 감히 이순신 장군과 비견함은 어찌 감당합니까?
이순신 장군은 일제 이전엔 알려지지 아니했어요. 단순히 역사학자들만이 조선조 4명의 충무공(忠武公)중 1인으로 알았을 뿐입니다.
조선인들이 존재 자체를 모르는 땅 속에 있던 이순신장군을 살려낸 사람이 아이로닉하게도 일본사람입니다.
110여년전 일본은 대마도 해협에서 세계 최강인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궤멸시킵니다. 러일전쟁은 동양의 대국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완전히 넘어간 전쟁입니다. 전쟁을 승리하고 일본은 동경에서 승전파티를 열었습니다.
러일전의 승전으로 이끈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가 그 파티의 주인공이었지요. 천황도 잠시 다녀간 축하연이니 뻑적지근했을 겁니다.
도고는 우리의 이순신처럼 일본 제1의 전쟁영웅으로 일본에선 지금도 군신(軍神)으로 추앙하는 장군입니다.
그 파티에서 도고에게 헌사가 이어졌는데, 어느 참의원이 “도고제독은 가히 영국의 넬슨제독이고 조선의 이순신장군입니다” 라며 축하했습니다.
이에 도고 제독이 “나에게 영국의 넬슨과 비견됨을 찬(讚)함은 감당하나, 감히 이순신 장군과 비견함은 어찌 감당 합니까? 나는 이순신 장군의 구두끈도 묶지 못할만큼도고가 말한 “00사마의 구두끈도 묶지 못한다” 는 말은 일본인들이 겸양의 말을 할 때 흔하게 사용하는 숙어가 됐어요.)
사실 일본의 이순신에 대한 연구는 대단합니다. 우리는 비교하지 못 할 정도로 일본은 방대합니다. 일본은 이순신과 왜군의 전투상황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이순신장군의 전술 전략을 바늘귀로 꿰듯이 연구했어요. 더구나 해군들이 얼마나 상세하게 이순신을 연구했겠습니까? 연구끝에 이순신장군의 신묘한 전략전술에 감탄했던 것이지요.
도고 역시 이순신 연구에 정진하여 이순신 장군을 마음 속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했는데 어느 의원이 자신을 이순신에 비견해주니 화들짝 놀라서 감히 내가 감당 할 수 없는 분이라며 손사래 친 겁니다.
도고가 이순신의 위대함을 어느 자리에서 설파했는데 [나와 넬슨은 전국가적으로 일치단결된 지원을 받아 전투에 임하여 뒷걱정 없이 승리했으나, 이순신장군은 왕의 끝없는 의심과 ㅈ동료장군의 끝없는 음해를 받아 고문을 받고 백의종군하는 등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는 신고(辛苦)의 고통 속에서 정부의 지원도 없는 가운데 23회전을 완벽하게 승리로 이끈 장군이다..나와 넬슨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전신(戰神)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도고의 그 발언이 조선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그후 일제 때 조선인 식자들에게 이순신 장군에 대한 숭앙이 퍼졌고 든든한 마음속 영웅으로 간직했던 것이지요. 지금도 일본 식자층에서는 이순신장군에 대한 존경의 념(念)을 숨기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은 일본의 개화를 이끈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등 자국을 패퇴한 적국의 장군이라도 존경 할 영웅은 존경합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일본육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전술에 대해 배웠을겁니다. 그래서 그분의 마음속에도 이순신장군에 대한 남다른 존경이 이박정희 장군이 대통령이 된후 충남 아산의 현충사와 통영의 제승당을 정비하는 등 이순신 장군에 대한 대대적인 숭모(崇慕)를 벌인 겁니다.
우리의 영웅 이순신장군은 1차 일본인 도고가 어둠속에서 일으켜 세웠고, 2차 박정희 대통령의 숭모로 빛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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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은 일제 이전엔 알려지지 아니했어요. 단순히 역사학자들만이 조선조 4명의 충무공(忠武公)중 1인으로 알았을 뿐입니다.
조선인들이 존재 자체를 모르는 땅 속에 있던 이순신장군을 살려낸 사람이 아이로닉하게도 일본사람입니다.
110여년전 일본은 대마도 해협에서 세계 최강인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궤멸시킵니다. 러일전쟁은 동양의 대국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완전히 넘어간 전쟁입니다. 전쟁을 승리하고 일본은 동경에서 승전파티를 열었습니다. 러 일전의 승전으로 이끈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가 그 파티의 주인공이었지요. 천황도 잠시 다녀간 축하연이니 뻑적지근했을 겁니다.
도고는 우리의 이순신처럼 일본 제1의 전쟁영웅으로 일본에선 지금도 군신(軍神)으로 추앙하는 장군입니다.
그 파티에서 도고에게 헌사가 이어졌는데, 어느 참의원이 “도고제독은 가히 영국의 넬슨제독이고 조선의 이순신장군입니다” 라며 축하했습니다. 이에 도고 제독이 “나에게 영국의 넬슨과 비견됨을 찬(讚)함은 감당하나, 감히 이순신 장군과 비견함은 어찌 감당 합니까? 나는 이순신 장군의 구두끈도 묶지 못할만큼 미미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후 도고가 말한 “00사마의 구두끈도 묶지 못한다”는 말은 일본인들이 겸양의 말을 할 때 흔하게 사용하는 숙어가 됐어요.)
사실 일본의 이순신에 대한 연구는 대단합니다. 우리는 비교하지 못 할 정도로 일본은 방대합니다. 일본은 이순신과 왜군의 전투상황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이순신장군의 전술 전략을 바늘귀로 꿰듯이 연구했어요. 더구나 해군들이 얼마나 상세하게 이순신을 연구했겠습니까?
연구끝에 이순신장군의 신묘한 전략전술에 감탄했던 것이지요.
도고역시 이순신 연구에 정진하여 이순신 장군을 마음속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했는데 어느 의원이 자신을 이순신에 비견해주니 화들짝 놀라서 감히 내가 감당 할 수 없는 분이라며 손사래 친 겁니다. 도고가 이순신의 위대함을 어느 자리에서 설파했는데
[나와 넬슨은 전국가적으로 일치단결된 지원을 받아 전투에 임하여 뒷걱정 없이 승리했으나, 이순신장군은 왕의 끝없는 의심과 동료장군의 끝없는 음해를 받아 고문을 받고 백의종군하는 등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는 신고(辛苦)의 고통 속에서 정부의 지원도 없는 가운데 23회전을 완벽하게 승리로 이끈 장군이다 나와 넬슨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전신(戰神)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도고의 그 발언이 조선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그후 일제 때 조선인 식자들에게 이순신 장군에 대한 숭앙이 퍼졌고 든든한 마음속 영웅으로 간직했던 것이지요. 지금도 일본 식자층에서는 이순신장군에 대한 존경의 념(念)을 숨기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은 일본의 개화를 이끈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등 자국을 패퇴한 적국의 장군이라도 존경 할 영웅은 존경합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일본육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전술에 대해 배웠을겁니다.그래서 그분의 마음속에도 이순신장군에 대한 남다른 존경이 있었을 겁니다.
박정희 장군이 대통령이 된후 충남 아산의 현충사와 통영의 제승당을 정비하는 등 이순신 장군에 대한 대대적인 숭모(崇慕)를 벌인 겁니다.
우리의 영웅 이순신장군은 1차 일본인 도고가 어둠속에서 일으켜 세웠고, 2차 박정희 대통령의 숭모로 빛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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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사과할 필요 없다
[지만원 메시지(72)]
윤 대통령 직설 화법이 시원하다
100년 전 일본 조상이 한 행위에 대해 100년 후손이 왜 자꾸 사과해야 하나. 이는 내가 2003년부터 우리 회원들하고 나누던 대화였다. 당시 나는 시클(시스템클럽)에 김구를 ‘오사마 빈라덴’이라고 표현하여 공격을 당한 적 있다. 그 공격은 남빨이라는 정신병자들의 행태라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의 80% 이상이 과거에 식민지였다. 이들 나라는 지배국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미개한 조상들에게 문명을 선사했기 떄문이다.
윤통 공격하는 남빨들에 질문한다
질문1. 이성계의 후손들 27명이 왕이 되어 518년 동안 통치했다. 남긴 유산이 무엇인가? 전염병, 악취나는 우물, 거리의 똥오줌, 초가집, 오솔길, 서당 등이 전부였다. 27명의 왕이 518년 동안 통치해서 남긴 재산이 1945년 당시 얼마로 계산됐는가? 5억 달러였다. 그런데, 일본이 36년 동안 건설한 문명의 이기가 무엇이었나? 악취 나는 우물 대신에 수돗물, 서당 대신에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선진교육, 초가집 대신에 신신/화신 백화점, 소로 대신에 을지로 종로 등 서울 거리가 일본 동경수준에 버금가게 발전했다. 일본이 남기고 간 사회간접자본과 우리가 물려받은 대기업들은 그 가치가 23억 달러였다. 조선 임금들이 518년 동안 남긴 자산 5억 달러의 16배였다. 20:80. 이 23억 달러가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은 단연코 없었다. 좌빨들에 묻는다. 이래도 일본이 한국을 착취했다고 계속 선동을 할 것인가?
질문2. 조선은 10%의 양반과 90%의 노예였다. 노예를 3,000명 거느린 양반도 있었다고 한다. 노예신분의 여성은 아무런 대가 없이 양반의 소모품이었다. 낳은 딸들이 너무 많아 딸인지도 모르고 성을 착취했다. 이런 90%의 노예를 해방시켜 호적을 만들어 준 존재가 일본이다. 조선 왕들이 부리던 노예를 일본이 해방시켜 준 것이다. 좌빨들에 묻는다. 조선 왕조와 일본 총독 중 누가 당신들의 조상을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는가?
질문3. 조선 왕조에서는 인권이 없었다. 억울한 사람을 끌어다 불 인두로 지지고 볼기를 쳐서 살점을 뜯어냈다. 그런데 일본은 어떻게 했는가?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쏘아 죽인 안중근까지도 검사, 변호사, 판사의 사법시스템을 통해 법대로 대우하지 않았는가? 입만 열면 인권을 외치는 좌빨들에 묻는다. 조선시대가 좋았는지 일본시대가 좋았는지?
질문4. 연산군은 조선어를 사용하는 백성을 엄벌에 처해 조선어를 종이에 쓰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일본 총독은 조선어 시험을 보게 하고 합격한 사람에 조선어 수당을 지급했다. 10월 9일을 한글날로 지정해 주었다. 이에 더해 ‘후쿠자와 유키치’는 영영사전을 영/한문사전으로 제작해, 조선의 개화파 청년들에게 한문을 한글로 바꾸어 사용하도록 가르쳤다. 오늘의 영한사전의 시조였던 것이다.
사과 요구는 누워서 침뱉기
1995년 나는 김대중과 함께 중국에 있었다. 중국 국영연구소 사회과학원 연구위원들과 저녁 파티를 했다. 내가 앉았던 테이블에는 중견 남녀 연구위원들이 함께 있었다. “중국은 일본에서 사과를 받았는가?”, “중국은 일본에 사과도 배상도 요구하지 않는다. 한 때 못나서 당한 것인데 사과를 하라, 배상을 하라 요구하면 중국이 못났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아닌가? 누워서 침 뱉기다. 중국은 자존심을 지킨다.” 일본에 사과하라 배상하라 하는 인간들은 도대체 생각들이 있는 인간들인가? 과거에 식민지로 살았던 나라들 중 지배국에 사과하라, 배상하라 요구하는 나라는 아마도 한국 밖에 없을 것이다. 남빨들은 입버릇처럼 "독일 독일" 하고 입에 올리는데, 일본과 독일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중국의 처지가 바로 우리 처지에 해당한다.
일본 없었으면 한국경제는 없었다.
1965년 일본이 한국에 공여한 유상무상 8억 달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내는 쌈지돈이 되었다.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소양강 댐, 정유공장, 비료공장들이 일본의 자금과 일본의 기술지도로 건설됐다. 창원, 구미, 인천, 안산 등에 설치한 공단은 일본기업들이 와서 가득 메워주었다. 일본의 부품과 소재와 자본, 그리고 기술이 없었으면 한강의 기적도 없었다. 만일 일본이 아프리카 희망봉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한국경제도 없었다. 일본이 이웃에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전두환 시대, 나카소네 수상은 안보 무임승차가 미안하다며 전두환 대통령에 무려 40억 달러나 주었다. 전 대통령은 그중 10억 달러를 헐어 오늘의 아름다운 한강을 건설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올림픽도 그 돈으로 치렀다. 그 돈으로 IT산업, 반도체 산업, 통신 산업을 육성하여 오늘날 우리가 먹고 사는 먹거리를 마련했다. 이런 사실,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 이 나라에 몇 명이나 될까? 설사 알고 있다 해도 이를 공론의 공간에 책과 게시물을 통해 알린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이런 내용들을 대통령실이 발표했다면 윤 대통령은 지금쯤 기립 박수를 받고 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정말 훌륭한 결단을 내렸으면서도 야당에 밀려 점수를 잃고 있는 것이다.
보도자료, 해명자료 하나 못 쓰는 윤 정부의 문장력
4월 24일 조선일보 31면 태평로 칼럼에는 안용현 사회정책부장의 글이 실렸다. “무슨 내용인지 쓴 사람도 모를 보도자료, 해명자료 쏟아내 놓고, 국민탓, 야당탓” 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제까지 윤 정부가 내놓은 정책을 제대로 설명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하기에 잘한 것을 잘 못한 것으로 뒤집어 쓰는 것이다. 소통은 무엇이고 커뮤니케이션은 무엇인가? 통신장비 없이 부대를 지휘하는 부대장과 다를 게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전두환의 비운 전철 밟는 윤 대통령
윤 대통령은 지금 전두환 대통령과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빛나는 업적은 국민에 소통되지 않고 오로지 야당의 음모론만 먹혀들어 선한 양이 늑대로 인식됐던 것이다. 윤 대통령도 이와 빼닮은 길을 걷고 있다. 검찰공화국, 검찰대통령, 일사불란 독재, 원맨 플레이, 이런 이미지들이 윤 대통령을 칭칭 휘감고 있다. 통신참모가 없는 지휘관 윤통이 당할 운명은 전두환 대통령의 비운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전두환 대통령이 억울하게 망가진 이유 역시 통신참모의 부재 때문이었다. 대책이 시급한 것이다.
2023.4.25. /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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