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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태양에 손대다, Touch Sun>의 줄거리:
다음 달 4일 태양 탐사선 ‘파커 솔라 프로브’호의 발사를 위해 나사는 카운트다운에 돌입했습니다. 탐사를 위해 인류 역사상 태양에 가장 가까이 근접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지은 프로젝트 명이 '태양에 손대다(Touch Sun)' 입니다. 과장이 조금 심하지요? 표면 온도 섭씨 6000도의 태양에 손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혹시 아십니까? 사람의 마음은 예외 없이 이미 태양에 손대고 있고, 그래서 마음속이 까맣게 타는 채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태양에 손대다, Touch Sun
(이사야 18:1~7)
1.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
2.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이르기를 민첩한 사절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하는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태양에 손대다, Touch Sun>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당시의 구스는 애굽을 점령하여 25왕조가 지배하였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의 에티오피아를 일컫습니다. 이 구스에 대한 예언이 나오고, 3~6절에서는 또 앗수르에 대한 멸망이 예언됩니다. 그리고 7절에서는 앗수르의 멸망을 유익하게 여기는 모든 나라의 왕들이 시온으로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히스기야 왕에게 예물을 바치리라는 내용입니다.
제목의 ‘태양에 손대다(Touch Sun)’라는 말은 NASA(미항공우주국)에서 추진 중이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프로젝트의 이름입니다. 이 프로젝트의 태양탐사선 이름이 ‘Parker Solar Probe’라고 합니다. 이 탐사선을 이용해 태양을 탐사하려는 프로젝트를 ‘태양에 손대다(Touch Sun)’라는 인상적인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태양의 표면온도는 섭씨 6,000도에 이르기 때문에 근접 할 수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태양에 가장 근접했던 위성은 1976년에 미국과 독일이 함께 쏘아올린 Helios2(헬리오스2)로써 태양표면에서 4,300만 킬로미터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말이 접근이지 4,300만 킬로미터면 엄청난 거리입니다. 그런데 지구로부터 태양까지의 거리는 평균적으로 무려 1억 4,900만 킬로미터에 이릅니다. 거의 1억 킬로미터를 날아간 셈입니다.
이번에 띄우는 파커 솔라 프로브는 640만 킬로미터 지점까지 접근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 거리도 어마어마한 거리입니다. 지구의 둘레가 약 4만 킬로미터이니까 지구 둘레의 160만 배 거리입니다. 탐사선이 가야하는 거리는 1억 4,300만 킬로미터에 달합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 거리도 멀다 하고, 비행기를 타고 1만 킬로미터를 가면 미국에 도착하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공간적 거리감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리보다는 온도입니다. 태양에서 640만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의 온도는 1300도이기 때문에, 11cm 두께의 탄소복합 소재로 만든 차폐막을 이용해서 탐사선을 보호한다고 합니다. 요새 대한민국이 폭염으로 난리이고, 사막에서는 45도까지 가는 지역도 있다고 합니다만 1300도라니 아찔합니다. 이러한 곳으로 탐사선을 보내기 때문에 감히 ‘태양에 손대다’라는 프로젝트의 이름을 붙였을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640만 킬로미터가 남았기에 정말로 손댈 수는 없습니다. 손을 대면 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손을 대서는 안 되는 대상입니다.
에덴의 선악과도 그러했습니다.
선악과는 판단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은 ‘판단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판단해야 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판단은 곧 생각이기에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육체로 접촉하는 모든 사건과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절대로 ‘마음의 손대지 말라’는 말입니다. 육체로는 접촉할 수밖에 없지만 마음으로는 손대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의 요지입니다. 쉽게 말해 나의 일로 삼지 말라는 말입니다. 판단하지 않으면 나의 일이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육체로 접촉하는 모든 대상 모든 사건 모든 일 등은 손댈 수 없는 태양과 같은 존재여야 합니다. 손대면 죽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대로 우리의 마음은 판단함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으니 곧 죽음입니다. 태양에 손대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문제는 태양과 같기 때문에 손대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에게 자꾸만 손대라고 유혹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제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의 일생은 태양에 손대는 것입니다. 스스로 판단하며 살아감을 통해서 절대로 손대서는 안 되는 것들에게 마음의 손을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났고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주변에 불 칼을 두어 지키게 하셨습니다. 에덴은 곧 기쁨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가는 사업을 통해 기쁨을 얻기까지 밀고 나가려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통해 기쁨과 만족이 주어질 때까지 밀고 나갑니다. 연인은 결혼을 통해 기쁨과 만족이 주어지는 지점까지 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기쁨은 에덴에만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기쁨을 추구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에덴 쪽으로 접근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에덴은 불 칼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일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지만 에덴으로 접근하다가 마음이 불에 타게 됩니다. 우리는 배우자로 인해 속이 새카맣게 탔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자녀나 사업 때문에도 속이 새카맣게 탑니다. 그러나 마음의 공백은 채워져야만 하고 기쁨과 만족을 원하지만, 기쁨을 추구하면 할수록 마음은 불 칼에 닿아서 타버리고 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마귀는 우리 인생의 프로젝트를 ‘태양에 손대기’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본래 인간을 지으실 때에 인생의 프로젝트를 ‘태양에 손대지 않기’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손대지 않아야 하나님이 손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판단을 의미하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판단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태양에 손대서 마음이 지글지글 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구스가 언급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구스에 대한 예언은 아닙니다.
내일 볼 19~20장에서 구스와 애굽이 다시 예언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구스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오히려 앗수르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만 다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이사야는 구스를 언급하면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주신 예언을 인간의 언어를 통해 전달하면서 참 기가 막히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 이런 표현이 나올 수 있지만 문학적 재질이 탁월합니다.
당시의 역사적 정황이나 외교적 판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앗수르는 반 앗수르 정책을 펴던 북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을 쳐서 무너뜨리게 됩니다. BC.722년에 북 이스라엘이 망하고 아람은 10년 앞선 BC.732년에 사르곤 2세에 의해서 망합니다. 이렇게 되니 그 당시 애굽을 지배하던 구스 왕조는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이 망하자 구스는 남 유다를 사이에 두고 앗수르와 마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라고 하였습니다.
‘슬프다’라는 말은 앗수르의 침공을 우려하여 걱정과 슬픔의 위기의식으로 가득 찬 구스 왕과 백성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구스를 ‘날개 치는 소리가 나는 땅이여’라고 비유한 이유는, 이 지역이 나일강 상류의 지류들이 습지였기 때문입니다. 습지에는 많은 곤충들이 살았고 이들의 날개 치는 소리로 표현하였습니다.
이어지는 2절은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쉽도록 나눠봅니다.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는 구나 / 이르기를 민첩한 사절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하는도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은 구스의 특징을 표현하면서 구스를 부릅니다. 2절은 구스의 사절들이 본국을 떠나서 남 유다에 도착하는 장면입니다. 이사야는 이 사절들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듣고 전하면서 안심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들이 남 유다를 방문한 이유는, 남하하는 앗수르 침공에 대해 연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남 유다는 구스의 마지막 방어선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구스의 사절들은 히스기야와 협력하기 위해서 남 왕국 유다에 찾아왔습니다만, 이사야는 그들에게 협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안심하고 돌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을 더위에 운무 사라지듯이 조용히 앗수르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6절에서 때가 이르면 포도나무 가지를 베듯이 앗수르를 지상에서 멸절하시리라는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외교적 판도와 국제정세를 통해서 이사야는 구스와 히스기야 왕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제 히스기야 왕의 성전의 기도를 기점으로 하여, 앗수르의 산헤립 군대의 십팔만 오천 명이 멸절하게 됩니다. 그리고 산헤립은 본국으로 줄행랑을 쳤다가 두 아들에게 살해당하고 앗수르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이윽고 바벨론에 점령당해서 망하게 됩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마음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당시의 외교적 판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스는 앗수르의 위협을 느꼈지만 결국 앗수르에 직접 접촉하지 않은 상태에서 위기는 끝나버리고 맙니다. 구스와 앗수르 사이에 있었던 남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한 것을 계기로 앗수르는 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남 유다의 승리는 앗수르와 대적하던 구스에게도 승리였습니다. 이러한 승리를 얻어낸 남 유다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둔 성전이 있었습니다. 이 지구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둔 성전 기도를 통해서 구스 또한 승리를 얻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7절에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라고 하였는데 역대하 32장 23절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여러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와께 드리고 또 보물을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드린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구스가 남 유다로 인해서 손 한번 대지 않고 승리를 얻는 모습은 히스기야 왕의 마음에도 적용됩니다. 남 유다는 앗수르의 산헤립에 의한 침공을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에 히스기야 왕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였습니다. 앗수르와 자신의 마음이 접촉되는 것을 막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손대지 않았던 것입니다.
구스와 앗수르 사이에 남 유다가 있었듯이, 히스기야와 앗수르 사이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앗수르와 직면하였으나 성전의 기도를 통해서 마음에는 하나님을 모셔 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음은 육체로 접하는 것을 따르기 쉽습니다. 좋든 싫든 마음이 실감합니다. 앗수르의 침공이 히스기야의 마음에 엄청나게 실감되었을 것입니다. 이때에 히스기야는 이 판단을 죽이기 위해 성전의 번제단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던 말씀의 취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면서 일천 번이나 죽었던 것과 같습니다. 솔로몬은 백성들이 재판거리를 가져왔을 때 판단하게 될 자신을 일천 번이나 죽였습니다. 히스기야도 앗수르를 받아들인 마음을 마찬가지의 심정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성전에서는 상번제가 드려지고 있었기에 양과 동일시되어 죽는 것은 세상에 붙잡힌 마음입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마음으로 접촉하게 되었다면 그 나를 죽여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통해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육체가 접하는 대상에 마음까지 접촉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마음은 오직 하나님께 접촉해야만 하고 오직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육체가 접촉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의 군대가 누구의 침공을 받은 것도 아닌데 자멸해버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손을 대실 것입니다.
피조세계에 사는 동안에 육체로 접하는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 마음이 접촉하면 안 됩니다. 오직 마음이 접할 대상은 창조주 하나님뿐이시고, 하나님만이 육체로 접하는 대상들에 대해 손대십니다. 우리가 판단하면 반드시 우리의 마음은 타오르게 됩니다. 말 그대로 속이 새까맣게 탑니다. 걱정하고 염려하고 슬퍼하고 우울해하는 것이 다 속이 타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대로 우리 마음이 항상 쾌청하기 위해서는 육체로 접촉하는 것들에 마음의 손을 대어서는 안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것은 곧 판단하면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는 것은 이미 죽은 것이고 사망의 그늘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구스와 히스기야처럼 되어야 합니다. 구스와 앗수르 사이에 남 유다가 끼어있었듯이, 히스기야와 앗수르 사이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세상 사이에는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와 접하게 된 마음을 번제단에서 죽이자, 하나님과 마주할 수 있었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앗수르보다 더 가깝게 여기자 앗수르가 하룻강아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똑같은 선민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번제단을 찾지 않았습니다. 앗수르를 그대로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문제 해결을 위해 스스로 판단하여 아람과 연합하였지만 둘 다 멸망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손대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재정문제 건강문제 자녀문제일 수 있습니다. 사업문제일수도 있고 목사님들이라면 목회가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에게 마음으로 손대는 것은 태양에 손대는 것입니다. 앗수르와 히스기야의 사이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을 크게 느끼자 앗수르는 작아졌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크게 느낄 때에 문제들은 하룻강아지처럼 작아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태양에 손대라’고 말하는 것은 마귀의 프로젝트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이 세상일을 마음으로 접한다면 정녕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법정 스님이 난초를 기르다가 그로부터 집착이 생김을 알고 난초를 버렸다고 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일일지라도 내 마음이 손대면 마음은 타죽습니다. 기쁨은 사라지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생겨납니다. 육체로 접하는 대상이나 사건 혹은 환경들에 절대로 마음의 손을 뻗어서는 안 됩니다. 그 결과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태양은 640만 킬로미터를 떨어져있어도 1300도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 마음에 계속해서 ‘태양에 손대라’고 유혹합니다. 타 죽으라는 소리입니다.
자녀에게 자연스럽게 마음의 손을 댑니다. 어떻게든 잘 기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마음은 태양에 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 지글지글 타오르는 일만 남았습니다. 사업을 잘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은 지글지글 타오르는 일만 남았습니다.
마귀의 인생 프로젝트 ‘태양에 손대기’를 우리는 돌려놔야 합니다. ‘태양에서 손 떼고 하나님의 손대기’라고 바꾸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히스기야가 성전에서 상번제로 드려지는 어린양과 함께 죽음을 고백했듯이,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죽음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구스와 앗수르 사이에 남 유다가 있었고, 히스기야와 앗수르 사이에 하나님이 계셨듯이, 우리와 세상 사이에는 하나님이 계시게 될 것입니다.
배우자나 자녀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의 건강과 마음 사이에도 하나님이 계셔야만 합니다. 사업 결혼 승진 등 모든 문제를 붙잡았던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임으로써 우리 마음은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과 세상 사이에는 하나님이 계실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구스와의 외교적 판도를 통해서 드러내었던 신앙의 판도가 우리 마음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손대서 이루려했던 세상의 많은 일들에 대해서 온전히 손 떼게 하여주시옵소서. 잘 떼어지지 않는 죄적 근성으로 인해 세상을 붙잡고 있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내 마음과 이 세상 사이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건재하시므로 날이 갈수록 하나님을 더 크게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