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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윤무영 한국 출판계의 큰 특징인 자기계발서 가운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책은 거의 다 지독한 이데올로기 서적이다. 위는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 | 책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다. 최근의 진화이론을 다루는 생물학자들은 문화와 제도의 영역을 일종의 확장된 유전자와 유사한 개념으로 다루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접근은 약간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유전자 환원론이라서 생각만큼 학계에서 환영받고 있지는 못하다. 어쨌든 문화 현상을 진화 장치의 일부로 파악한다면, 그 가운데 토막 중 가운데 토막으로 들어갈 것은 역시 책이다. 책은 사회적 기억과 함께 새로운 지식의 창작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매체 간의 소통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기능을 가진 듯하다. 문화 영역에서도 책의 존재는 거의 절대적이다.
지식사회학의 칼 만하임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영역은 존재하기 어렵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사실 책만큼 이데올로기와 가깝고, 또 이데올로기 그 자체인 물건도 별로 없다. 2008년 한국에서 책이라는 것은 각각의 이데올로기의 생산자이며 동시에 전파자이고, 이런 점에서 책들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 전쟁이 뜨겁다.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갔는가? 웃기지 마시라.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혹은 그 이후에도 이데올로기 전쟁은 사람들이 경제적 생활을 하는 한, 멈추어질 성격의 것이 아니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출간된 책 중에서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그런 ‘순수’―이것도 그 자체로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의 영역에 해당하는 책이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한 권도 없다.
만약 한국의 책 중에서 정말로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책이 딱 하나 존재한다면, 그것은 홍성대의 <수학의 정석>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지금까지 5000만 부쯤 팔린 이 <수학의 정석>은 최소한 한국에서 좌파든, 우파든, 생태주의자든, 여성주의자든, 아니면 극우파까지 모두 보는, 그야말로 이데올로기 없는 책인지도 모른다. 물론 따져보면, 이 책에도 수학 이데올로기가 있고, 진학 이데올로기가 있으며, 학벌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기는 하다.
책의 이데올로기 전쟁이 얼마나 극심한지 알아보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영화와 비교해보자. 감독이 좌파 계열이든 아니든, 예를 들면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같은 대형 국내 영화가 상영되면 전 매체가 이를 밀어주고 띄워준다. 물론 영화에도 예술영화와 B급 영화, 좌파 계열의 영화와 지독한 쇼비니즘 영화 혹은 마초 영화 같은 것들이 있지만, 어쨌든 국내 영화계 생존의 차원에서 나름 괜찮은 작품이 나오면 거의 모든 신문과 매체가 어느 정도는 다뤄준다.
이데올로기 없는 책은 없다
그러나 책의 경우는 이런 일이 거의 없다. 특히 신문 서평의 경우, 이른바 조·중·동에서 다루는 책과 한겨레·경향이 다루는 책은 거의 싸늘하다고 할 정도로 완벽하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한때는 조선일보 서평이 2000권 정도의 값어치가 있다고 추정하던 시절이 있지만, 지금은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그만큼 한국의 신문들이 이데올로기에서 확실한 자기 지형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한국 자본주의에서는 책이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어쨌든 한국에서 책이라는 것은 2007년 기준으로 3조1000억원 규모의 시장이기는 한데, 그 중에서 아동용 서적 1조원을 빼면 실제로는 2조원 정도 된다.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볼 때, 가장 밝은 곳에서 가장 공개적인 방식으로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데올로기 전쟁터의 최전선이 바로 이 출판문화 현장이다. 물론 그렇다면 흔히 생각하듯 이 이데올로기 전쟁이 사회과학 내에서 좌파와 우파 혹은 기타 서로 다른 사회에 대한 이론이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맞붙는 형국인가? 그렇게 고상한 방식으로 한국에서 논쟁이 진행되거나 사회적 논의가 전개되었다면, 지금 사회가 이 꼴은 아닐 것이다.
만약 이념적 지평에서 한국의 출판계를 나눈다면, 한쪽에 역시 사회과학으로 분류되는 책이 자리하고, 다른 한쪽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자기계발서와 경제경영 서적이 들어갈 것이다. 물론 이 경제경영서의 정식 분류는 ‘재테크 책’ 정도가 맞겠지만, 어쨌든 장하준같이 이 시장에서 버텨낸 극소수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경제경영서는 재테크와 관련된 것이다. 물론 그 내부도 분류해보면 금융자본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 한 부류, 건설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것이 또 다른 부류이다. 뭔가 기술적인 분석을 한 것 같지만, 사실 ‘증권 투자해라’와 ‘땅 투기 해라’ 따위 아주 강력한 한국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 외에는 별 얘기가 없다. 그리고 이런 재테크 서적과 쌍을 이루는 책이 바로 최근 한국 출판계의 큰 특징인 자기계발서이다. 물론 모든 자기계발서가 다 지독한 이데올로기 서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책은 거의 100% 그렇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지난 수년 동안 한국을 강타했던 <마시멜로 이야기>나 <시크릿> 혹은 공병호의 자기계발서 시리즈들은 너무나 이데올로기적이다. 이런 책들의 실제 메시지는, ‘모든 것은 네 탓이다’ 그리고 ‘사회에 절대로 반항하지 말라’ 같은 매우 단순한 코드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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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안희태 한국 책 시장은 아동용 서적 1조원을 빼면 실제로는 2조원 정도 규모다. 위는 어린이 책 진열대. | 자기계발서 이데올로기가 ‘명박 시대’ 열어
이러한 흐름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들은 흔히 인터넷 서점 같은 곳에서 사용하는 기준으로 인문학 혹은 사회학과 같은 분류 코드를 가진 책이다. 이런 책들은 많은 경우, 개인에게 무엇인가 할 것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돈이면 최고다’ 혹은 ‘우리나라 최고다’라는 말이 아닌 또 다른 것들을 독자에게 끊임없이 전달하려 한다. 어쨌든 이 두 가지 유형의 책은 모두 이데올로기적이며, 그것이 직접 이데올로기를 다루고 있든 그렇지 않든, 굉장히 사회적인 의미를 띤다. 문학 역시 이데올로기 성격이 강한데, 최근 한국의 문학들은 일본식 표현대로 사소설이라고 부를 만한 이야기가 대세를 이룬다.
올해 국방부의 불온서적 사태에서 보았듯이, 책에 대한 정부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더욱 강해질 것이고, 특히 정부 지원금을 받으면서 출간되는 많은 책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더욱 많은 책이 원천적으로 봉쇄당하는 정치 탄압이 발생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게다가 수년간 계속될 경제 위기 속에서 국민은 제일 먼저 지갑을 닫게 될 것인데, 불행히도 한국에서 도서 구입비를 별도 예산으로 소비 계획을 짜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이 심각한 이데올로기 전쟁의 결과가 사실은 다가올 한국 경제의 미래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고, 상황은 지금 매우 열악해 보인다. 어쨌든 더 많은 책을 내고, 사람들이 더 자주 책을 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회원들이 참여하는 일종의 출판생협 형태나 사회적 기업 같은 제3부문의 방식을 고민하는데, 방법이 녹록지 않다.
‘돈이면 최고다’라는 지난 4~5년간의 자기계발서 이데올로기가 ‘명박 시대’를 열었다면, 다른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돈이 최고가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책들이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필요하다. 이제 일반 시민의 지혜가 필요한 순간이 왔다. 이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정부의 돈을 사용하기는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