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질서 속에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줄거리:
잘못된 과거의 열매를 수정하고, 생명력을 잃은 현재를 개혁하며, 미래를 향하여 혁신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는 것보다 우선 질서부터 바로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이 질서는 사회적인 질서를 말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선민 각자 사이에 있어야 하는 근원적인 질서를 의미합니다.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좌장(座長)으로 모시는 것이지요. 이 근원적인 질서잡기를 통해 좌장이 되신 하나님은 우리 삶에 넝쿨째 들어온 당신이 되십니다.
질서 속에 넝쿨째 굴러온 당신
(예레미야 20:1~18)
1.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3.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질서 속에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질서 속에 넝쿨째 굴러온 당신’
2012년에 TV에서 방영된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차윤희는 잘 나가는 전문직 여성이지만 결혼은 기피합니다. 그 이유는 시댁에 의해서 구속되는 것이 너무나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결혼 자체를 부정하거나 결혼할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차윤희의 이상형은 능력 있는 고아로써 시댁이 없는 신랑감을 찾고 있으니 결혼이 쉬울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차윤희에게 대박이 터지게 됩니다. 고아 출신의 의사 방귀남을 만나게 되어 결국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문제는 이 신랑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처럼 온갖 문제를 주렁주렁 달고 들어온 것입니다. 방귀남 자신도 있는 줄도 몰랐던 가족들이 나타나서는 어느덧 시댁이 대가족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차윤희와 방귀남이 옥신각신하면서 흥미진지하게 드라마가 진행이 됩니다.
호박은 참 여러모로 쓰입니다. 늙은 호박은 죽을 쒀먹고 애호박은 볶거나 찌개를 하고 호박전도 부칩니다. 호박의 어린잎은 쪄서 쌈을 싸먹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호박은 버릴 것이 없기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라는 속담은 뜻밖에 좋은 일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대박이 난 것입니다. 다만 드라마에서는 이 말이 반어법으로 쓰였습니다. 차윤희는 바라던 대로 결혼을 잘 한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게 기피하던 시댁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것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삶을 위한 방법으로 질서를 제시합니다.
영어로는 order인데 ‘순서, 질서, 정돈, 명령, 지시, 주문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말은 disorder로써 ‘엉망이 됨, 어수선함, 난동, 무질서, 육체의 장애나 질병’등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무질서만 없으면 됩니다. 부부관계가 엉망이지 않고 질서가 잘 잡히고, 삶의 환경이 어수선하지 않고 잘 정돈되어 있으면 됩니다. 또한 몸에 장애나 질병이 없으면 좋습니다. 무질서가 없고 질서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이 질서잡기는 인생의 100%를 투자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 괴로워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현재 삶에 흥미를 잃고 매너리즘에 빠져있거나 생명력을 상실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삶이 질서 잡히기를 바란다면 과거를 수정하는데 힘을 쏟지 말고, 현재 상태를 개혁하려고도 하지 말고 미래를 향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100% 질서만 잡으면 됩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은 “내게 나무를 벨 8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중 6시간은 도끼를 가는데 쓰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무딘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찍어내겠다고 8시간 내내 힘들어해서는 안 됩니다. 6시간 동안 도끼를 갈아서 2시간 만에 일을 해내겠다는 링컨을 넘어서서 모든 시간을 질서를 잡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대체 질서를 잡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실 질서잡기는 무척 쉽습니다. 기준점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언론에서 ‘세계 질서’라는 말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 질서를 결정하는 기준은 군사력이 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금 보유량이나 화폐의 가치가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미국의 금 보유량은 8,100톤으로 세계 1위라고 합니다. 2위인 독일은 3,300~3,700톤 정도입니다. 한편 군사력으로 세계 2위 중국은 금 보유량에 있어서는 1,100톤으로 7위정도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30위권 밖으로서 100톤 정도를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순위를 매길 수 있는 이유는 금이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금뿐만 아니라 군사력이든 GDP든 기준점이 있기에 질서정연하게 줄을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기준점을 확보할 때에 질서가 잡힙니다. 그리고 질서 잡힌 삶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기준점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기준점을 확보해서 질서를 잡으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삶을 산다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남 왕국 유다의 백성들이 기준점을 확보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드라마에서 차윤희가 그렇게 싫어하던 시댁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것처럼 멸망이 넝쿨째 굴러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질서가 잡히면 삶에 자유와 즐거움이 넝쿨째 굴러들어오고, 질서가 잡히지 않으면 멸망과 환란이 넝쿨째 굴러들어옵니다.
마음의 자유란 곧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평강입니다. 삶에 이러한 자유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기준점을 놓쳐서 질서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잘못으로 현재 어려움을 겪는다는 생각이 들 때에 해야 하는 일은 과거를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질서의 기준을 잡는 것입니다. 현재가 무미건조하고 생명력 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때에 필요한 것은 어떤 개혁이 아니라 지금 질서의 기준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가 걱정이 될 때에도 지금 질서를 잡는 것이 미래를 위한 일이 됩니다.
앞서 예레미야는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들의 어른들과 함께 하시드 문(깨어진 질그릇 조각)을 지나서 예루살렘 성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하시드 문을 지나서 예루살렘 성 남쪽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향합니다. 이곳은 성내에서 생기는 모든 쓰레기를 모아서 소각하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인간쓰레기로 분류하신다는 상징적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앞에서 토기장이에게 산 옹기를 내쳐서 깨뜨립니다. 이는 이제 선민들을 쓰레기로 취급하신다는 하나님의 결정을 돌이킬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보았던 사건과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19장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언을 다 마치고난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와서 성전 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똑같은 내용의 예언을 반복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지켜보던 성전의 감독관 바스훌이 이런 예레미야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예레미야를 잡아다 때리고 목에 형틀을 씌워서 하룻밤을 감금했다가 풀어줍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셔서 바스훌을 상징으로 예언을 하게 하십니다.
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본래 바스훌은 히브리어로 ‘즐거워하다, 자유를 가져오다, 자유를 확장시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골밋사빕은 ‘사방에 두려움이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바스훌은 제사장들 중에서 뽑힌 자로써 성전 내의 질서와 보안을 책임지던 감독관이었습니다. 대제사장 다음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바스훌을 일부러 자극하기 위해서 되풀이하지 않아도 되는 똑같은 내용의 예언을 반복하였던 것 같습니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처음 예언을 했을 때에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들의 어른들이 모여 있었기에 이것만으로도 상징성은 충분했습니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백성들에게 전함으로써 심판에 대한 예언의 소문은 퍼져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굳이 다시 성전으로 가서 예언을 반복함으로써 감독관이었던 바스훌을 자극했던 것입니다. 바로 바스훌의 이름과 직책을 상징으로 삼아 예언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이러한 시도는 이사야서와는 상당히 차별되는 점이기도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바스훌은 성전의 질서를 책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직책과 이름을 통해서 선민들을 쓰레기로 분류하신 이유를 예언을 통해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선민들을 깨진 질그릇처럼 돌이킬 수 없는 쓰레기로 여기시게 된 이유는 바로 질서를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질서를 잃었기에 즐거움과 자유의 확장이라는 호박을 잃고 바벨론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멸망을 경험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스훌 감독관이 하는 일은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을 오가는 사람들과 레위인들과 제사장들과의 동선이 혼잡하지 않게 하고, 부정하고 수상한 자들의 출입을 막습니다. 예를 들면 혈루병을 앓고 있는 여인이라든지 부정한 조건에 해당되는 남자나 불미스러운 일 등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때리고 감금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최우선의 현실로 여기며 하나님의 기준점에 의해 유지되는 질서를 확보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이 좌장이 되셨습니다.
성전의 감독관이 예레미야를 구속하였다는 것은 곧 성전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질서 잡힌 삶을 방해하는 형틀로써 전락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전이 질서대신 혼동을 가져다줌으로써 백성들의 삶에서 즐거움과 자유를 제거하였다는 것입니다.
본래 성전은 선민들의 기준점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과거에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가 세계 표준시로써 기준이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또한 지구의 자오선의 기준점도 그리니치 천문대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전은 선민들 각자 삶의 기준점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성전의 감독관으로 대표되는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 같은 표면적인 질서를 감시할 뿐이었지 선민들과 하나님의 질서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없어지고 질서가 자리 잡게 되는 것은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으로부터였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이 있어야만 마음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민들은 삶의 현장에서 혼동이 주어지고 무질서가 주어지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스스로 ‘빛이 있으라’고 말하는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빛이 있으라’고 스스로의 판단을 들이댑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질서가 생겨나지 않기에 자녀와의 관계에는 더욱 큰 혼동이 생겨납니다.
질서를 잡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좌장(坐杖)이 되셔야 합니다.
‘좌장’이란 곧 가장 뛰어난 어른이나 전문성이 뛰어난 어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좌장으로 모시는 삶에는 질서는 저절로 잡힙니다.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인정해드릴 때에 무질서가 범람하던 삶의 영역들에 질서가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실 때에는 넝쿨째로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라는 기준점을 통해 질서가 잡히고 나면 그로인해 내가 알지 못하는 넝쿨들을 끌고 들어오시고 우리의 삶을 채워 가십니다. 질서만 잡으면 되고 좌장을 결정하면 됩니다.
물론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가족이 있고 애인이나 친구나 직장동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을 좌장으로 모시는 삶에는 자유와 즐거움이 넘쳐나게 됩니다. 대면하고 있는 사람보다도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내 판단대로 ‘빛이 있으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전은 본래 이렇게 스스로의 판단으로 ‘빛이 있으라’고 말하는 마음을 죽이는 곳이었습니다. ‘빛이 있으라’고 말하는 이유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사라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기에 그 자체로 무질서가 됩니다. 우리는 자꾸 삶에 주어진 문제에 질서를 부여하려하고 인생의 문제가 질서정연하게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무질서이기 때문에 질서가 나올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스훌의 직책과 이름을 통해서 이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통해 하나님을 기준으로 질서가 잡혔다면 자유와 즐거움은 넝쿨째 굴러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인생에서 삶의 좌장이 되셔야 합니다.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될 이유는 질서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돈의 노예가 되고 사업의 노예가 되고 자녀의 노예가 되고 건강의 노예가 되는 이유는 질서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질서가 깨진 이유는 하나님이 아닌 내가 질서를 세우는 기준이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상사와 갈등이 생겼습니다. 과장님이 나를 괴롭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판단하는 대상이 나여서는 안 됩니다. 나와 과장님과의 관계 속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중에서 제일 어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제일 어른 말을 들으면 됩니다.
문제를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문제보다도 먼저 계셨습니다. 내가 20년간이나 지긋지긋한 지병을 앓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병보다도 먼저 계셨습니다. 그러면 순서에 따라 하나님을 좌장으로 인정해드리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마치 바스훌 같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어른이시라는 사실에 대해 형틀을 걸고 감옥에 가둬버립니다. 그리고 20년 앓고 있는 지병을 어른으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최우선으로 삼는 대상이 내 인생의 좌장이 됩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사건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최우선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돈보다 하나님이 먼저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바꾸고 책임지려 하지 말고 개혁하려고 하지도 말고 미래를 향해 혁신을 시도하는 것이 우선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라는 기준을 통해 삶의 질서를 잡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문제 앞에서도 하나님을 가장 어른이신 좌장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오시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질서만 잡으면 호박은 넝쿨째 굴러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질서가 생겨납니다. ‘빛이 있으라’고 하시면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내 삶에 오시면 그 뜻대로 창조를 해나가십니다. 이러한 삶을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뒷부분 14절 이후를 보면 예레미야의 탄식이 나타납니다.
예레미야가 욥처럼 자신의 출생을 탄식하는데 믿음이 없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바로 앞서 13절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탄식은 답답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선민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삶의 현장에서 느끼지 못했습니다. 바스훌이 예레미야의 목에 형틀을 걸어서 감옥에 가뒀던 것처럼, 선민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삶의 기준이 되신다는 사실을 형틀에 걸어서 감옥에 가두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되어서 자신의 출생을 탄식했던 것입니다.
성전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있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준점으로 만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감옥에 가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에서 이루어져야 했던 일은 내가 최우선으로 여기고 삶의 좌장으로 삼았던 세상 것들에 대한 죽음입니다.
세미나를 가보면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강단의 교수님만을 바라보면서 교수님에 의해서 이끌려 갑니다. 우리의 삶도 세미나와 같습니다. 언제나 좌장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삶에는 질서가 잡히고 하나님께서는 내 삶에 지시하실 것입니다. 내게 해야 할 일을 가르치실 것이고, 내가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오더를 내리실 것입니다. order가 ‘질서, 지시, 명령’이라는 뜻도 가진 것처럼 하나님의 질서가 받아들여진 마음에는 하나님의 지시가 내려옵니다. 내가 대하는 사람들과 상황과 문제들에 대해 오더를 내리시고 지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은 단순한 서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얼쑤 좋다!’라고 하실 정도로 감탄하시는 모습이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좌장으로 인정해드리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삶이 됩니다. 하나님의 지시가 이루어지는 삶은 우리에게는 기쁨이고 즐거움이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좋은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선민의 모습은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탄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좌장으로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세상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 자체가 무질서이고 그들의 삶에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덮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민들은 성전의 상번제를 통해 무질서를 향해 가는 마음을 죽여야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무질서를 향해 가는 마음을 죽여야만 합니다. 스스로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는 삶은 무질서를 향해 갑니다. 세상 문제를 향해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무질서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나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좌장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머슴으로 부리려는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민들은 그 결과로 멸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삶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복잡하게 느껴지는 문제라도 태초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하나님의 ‘빛이 있으라’는 지시에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마음에서 하나님을 제일 먼저 바라보고 삶의 좌장으로 인정해 드릴 때에 질서는 생겨납니다. 모든 마음을 하나님께 투입하기 위하여 모든 관심사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을 좌장으로 모시고 인생의 기준점을 확보한다면 우리의 삶은 넝쿨째 굴러들어온 당신이신 하나님을 통해서 이끌어져 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삶이 복잡한 것 같고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직 내 마음이 삶의 좌장이신 하나님께 몰입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환경에 대해십자가에서 죽게 해주셔서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