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전 Ⅱ
제1부 하나님과 창조
제1장 하나님
12) 창조자
3. 사랑과 희생이 서린 창조역사
종교 경전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러 현묘한 암컷이라 한다. 현묘한 암컷의 문은 하늘과 땅을 낳은 근원이라고 한다. 끊임없이 항상 있어온 듯하지만, 아무리 써도 지치지 않는다.
도덕경 6 (도교)
그때에는 유도 없었고 무도 없었으며, 공계도 없었고 그 위의 천계도 없었도다. 무엇으로 덥혀 있었던가? 어디에? 누구의 보호 아래? 물은 있었던가, 깊이 모를 물은?
그때에는 죽음도 없었고 불사도 없었으며, 밤의 표징도, 낮의 표징도 없었도다. 스스로의 충동으로, 저 유일자가 숨 없는 숨을 쉬었으니,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도다.
어둠이 있었으니, 모든 것이 어둠에 싸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혼융한 물이었노라. 그때 공허에 감싸여진 것, 저 유일자가 열의 힘으로 생기하였도다. 처음에 의욕이 저 유일한 것에 나타났으니, 이것은 생각의 첫 씨앗이었도다. 마음속 깊이 지혜를 탐구하는 현자들이 무에서 유의 고리를 찾았도다.
열십자의 금이 무로부터 유를 갈라내었으니, 그 위에 있는 것은 무엇이며, 또 아래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씨앗을 품은 자와 충만한 힘이 있었으니, 아래로부터는 잠재력이, 위로부터는 충동이.
리그 베다 10.129 (힌두교)
궁극적 존재로 제물로 신들이 희생제를 지낼 때, 봄은 녹은 버터, 여름은 연료, 가을은 공물이었다.
제물이 된 궁극적 존재요 처음으로 태어난 그를 그들은 풀 위에 흩뿌렸다. 그로써 신들은 희생제를 지냈으며, 그 사드야들과 시성들도.
완전하게 거행된 그 희생제로부터 버터에 응유를 섞은 것이 얻어졌다. 이로부터 공중의 새들과 숲 속의 동물들과 가축도 생겨났다.
완전하게 거행된 그 희생제로부터 리그 베다와 사마 베다가 생겨났으며, 찬다(아타르와 베다)도 그것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야주르 베다 또한 그것으로부터 생겨났다.
그것으로부터 말들과 아래 위에 이빨이 있는 짐승들도 생겨났다. 소도 그것으로부터 생겨났으며, 그것으로부터 또한 염소와 양들도 생겨났다.
그의 마음에서 달이 생겨났으며, 그의 눈에서 태양이 생겨났다. 그의 입에서는 인드라와 아그니가 태어났으며, 보유(바람)는 그의 호흡에서 생겨났다.
그의 배꼽으로부터 공계가 생겨났으며, 그의 머리로부터 하늘이 만들어졌다. 그의 발에서 대지가, 그리고 그의 귀에서 방위가 생겨났다. 이로써 그들은 세계들을 형성했다.
리그 베다 10.90.6-10, 13-14 (힌두교)
말씀 선집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자를 만들기 위해서 120퍼센트를 투입했습니다. 천지 창조의 근원적 사상 기반이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희생 봉사와 순종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위하게 했느냐? 위하는 원칙을 세웠다는 것은 뭐냐? 공기로 말하면, 평준화된 공기 가운데에서 완전 진공상태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절대 진공권 내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고기압은 자동적으로 저기압 쪽으로 순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의 상대를 찾기 위해서 투입하고 투입하다 보니 그 자리에 있더라도 자연히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적 근거를 중심삼고 피조물들을 쌍쌍제도로 창조했는데, 전진적으로 차원 높은 상부의 급을 통해서 인간과 하나님의 이상적 발판을 만들기 위해서 천지창조를 했다는 것입니다.
(199-276, 1990.02.20)
하나님이 왜 천지를 창조했느냐? 그것은 아무리 절대자라고 하더라도 자기 혼자로서는 기쁨을 느낄 수 없으며, 설령 기쁘다 하더라도 기쁨의 자극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자가 아무리 ‘나는 절대자다. 나는 사랑의 주인공이다. 생명의 주인공이다’ 라고 한다 해도 절대자 혼자서는 사랑의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요, 천지가 내 몸 속에 있다는 생명의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38-152, 1971.01.03)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왜 지었느냐?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지었다는 사실은,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힘을 투입했다는 것입니다. 힘의 투입입니다. 힘의 투입은 자체의 소모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도 힘을 잔뜩 뽑아냈는데 그것이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소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밥을 먹고 힘든 노동을 하게 되면 빨리 배가 고프지요? 빨리 피곤해지지요? 왜? 힘을 투입하면 주체면 주체 자신에 있어서는 마이너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만사에 손해를 보아 가면서 좋아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플러스되는 데서 좋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것은 우시기 위해서, 슬프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좋으시기 위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반드시 플러스될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플러스를 언제 찾느냐? 언제 그것을 찾아 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피조물의 완성이라는 표준이 있는 것입니다. ‘이때까지 투입하면 그때부터 돌아온다’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장사를 해도 그렇습니다. ‘이만큼 노력하면 그때부터는 이익이 난자’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만큼의 한계점까지 열심을 다해서 그것만 완전히 통과하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나에게 이익이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서 공부하잖아요? 고시니 뭐니 하는 것들도 뭘 하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노력하여 그 한계점을 밀고 넘어가게 될 때 반드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우주의 법칙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지으셨다면 왜 지으셨느냐는 것입니다.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힘을 투입한 것입니다. 자기 자체를 소모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중심삼고 투입할 수 있는 것을 완전히 투입해 가지고 완성이 되는 날에는 그것이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완성이 되는 날에는 어떻게 되느냐? 그 다음에는 돌아옵니다. 이런 원칙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데 있어서 백을 투입했는데 백보다 적은 가치의 것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하나님은 창조 위업을 계속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을 투입했으면 돌아오는 데에는 이백, 삼백 이렇게 보다 더 차원 높은 가치의 것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무한한 것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창조는 투입하면서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돌아오는 데에 어떻게 돌아와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 삼고 볼 때, 보다 차원 높은 가치의 것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그런 가치의 것으로 돌아올 때 무엇을 가지고 돌아오게 하느냐, 그것이 돌아올 때 기쁠 수 있는 것이 뭐냐?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65-22~23, 1972.11.13)
도대체 하나님이 자기만 생각한다면 천지창조를 했겠느냐? 창조라는 말은 힘의 투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술가가 있으면 그 예술가는 걸작품을 만들기를 원합니다. 예술가가 걸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온 정신과 모든 일체의 정성을 다 투입합니다. 다 투입하는 데서만이 완전한 걸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불완전 투입이 아닌 것입니다. 완전 투입, 그 이상 될 수 없다 할 수 있는 곳에서 비로소 걸작품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78-111, 1975.05.05)
하나님이 이 우주를 지을 때 절대 신앙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절대 사랑입니다. 창조주로서 사랑의 대상을 절대 사랑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 복종입니다. 절대 복종은 자기 자신까지도 다 없애는 것입니다.
완전 투입하는 것입니다.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개념조차 다 투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로 포인트(영점)입니다. 믿음도 다 퍼부었기 때문에 제로 포인트이고, 사랑도 다 퍼부었기 때문에 제로 포인트이고, 복종도 다 퍼부었기 때문에 제로 포인트입니다.
(313-233, 1999.12.19)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감사합니다.
아주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