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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모래시계형 라이프스타일>의 줄거리: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 높이, 언젠가 자장가로 들었던 나라가 있어요...새들은 무지개너머로 날아가는데 왜 나는 날 수 없는 걸까요?" 오즈의 마법사의 주제가 '무지개 너머로' (Over The Rainbow)의 가사입니다. 그런데 선민에게 '무지개너머'는 이루지 못할 꿈이 아닙니다. 다만 파랑새처럼 그리로 날아가는 대신 무지개를 땅으로 끌어오는 거지요. 안식함을 통해 모래시계 형 라이프 스타일로 살면 됩니다. 기대하세요. 지금 여기가 무지개너머가 되는 삶을.
모래시계형 라이프스타일
(에스겔 20:1~49)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나와서 광야에 이르게 하고
11.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12.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13.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에게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14.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나라들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
15. 또 내가 내 손을 들어 광야에서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그들에게 허락한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지 아니하리라 한 것은
16. 그들이 마음으로 우상을 따라 나의 규례를 업신여기며 나의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음이라
17. 그러나 내가 그들을 아껴서 광야에서 멸하여 아주 없이하지 아니하였었노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모래시계형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모래시계형 라이프스타일’
뮤지컬 오즈의 마법사의 주제가인 무지개 너머로(Over The Rainbow)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 높이, 언젠가 자장가로 들었던 나라가 있어요 /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 푸른 하늘에서 당신의 꿈이 진실이 됩니다 / 언젠가 나는 별에 기도하죠 눈을 뜨면 구름위에 있게 해달라고 / 거기는 고민이 레몬사탕처럼 변하는 곳 / 굴뚝 꼭대기보다 더 높은 저 위 당신이 나를 찾아내는 곳 / 무지개 너머 파랑새들이 날아가는 그곳 / 새들은 무지개 너머로 날아가는데 왜 나는 날 수 없을까요?”
희망과 꿈을 무지개 너머로 표현했습니다. 이 무지개 너머는 화자가 실제로 도달할 수 없는 곳입니다. 파랑새는 날아서 갈 수 있지만 화자는 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자에게 있어서 무지개 너머는 묶여있는 지금으로부터 바라보는 꿈과 이상의 장소입니다.
누구에게나 무지개 너머는 있습니다. 입시생의 무지개 너머, 취업준비생의 무지개 너머, 노총각 노처녀의 무지개 너머,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사장님의 무지개 너머, 불치병 환자의 무지개 너머, 정치인들의 무지개 너머, 목사님들의 무지개 너머 등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무지개 너머를 꿈꾸는 중에는 현재 상황과 처지에 묶여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지개 너머를 꿈과 이상으로 남겨두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다만 무지개 너머로 내가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지개를 이 땅으로 내려오게 해야 합니다.
제목에서 모래시계를 언급했습니다. 모래시계는 가운데 허리가 잘록합니다. 윗부분에 있는 모래가 잘록한 허리 부분을 통과하면서 아래에 쌓이는 모습을 쉽게 연상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의 모든 내용들이 잘록한 허리를 통해 아래로 내려오는 삶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에스겔서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시며 천국을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때에 하나님 보좌의 모습이 묘사되는데 26절에서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또 28절에서는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요한계시록 4장에서도 천국과 보좌에 대한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2~3절을 보면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에스겔과 사도 요한이 하나님 보좌의 모습을 보고 무지개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지개는 단순히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았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발산되는 빛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빛을 쐬게 되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느낀 감정이 그와 같았음을, 이들이 알고 있는 언어만으로는 차마 표현할 길이 없었기에 무지개로 표현하였습니다.
이 무지개라는 표현을 앞서 살펴보았던 “무지개 너머로”라는 노래와 비교해서 생각해봅니다. 선민이라면 무지개 너머를 이상적인 상황으로만 생각하며 꿈꾸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 보좌에서 비치는 하나님의 무지갯빛 광채는 닿지 못할 이상적인 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래시계의 윗부분과 같아서 잘록한 허리부분이 막히지 않으면 땅으로 흘러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될 선민의 삶은 무지개 너머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서있는 곳을 무지개 너머로 만드는 삶입니다. 선민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꿈꾸며 산다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있는 지금 이곳이 무지개 너머가 되기를 바라시며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무지갯빛 광채가 비친다는 것의 구체적 의미가 무엇일까요?
내가 꿈을 가지면 그 꿈은 무지개 너머에 있습니다. 그 꿈을 이루려고 하는 시도들은 마치 하얀 도화지에 꿈이라는 밑그림을 그려놓고 색을 칠해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하지만 모래시계형 라이프스타일 즉 하나님의 무지갯빛 광채가 이 땅에 표현되어지는 삶은 극장에서 영사기를 통하여 은막에 영화가 투사되는 것과 같은 삶입니다. 빛이 비춰지면 영상이 나타나듯이 하나님께서 갖고 계셨던 생각이 무지갯빛으로 발산되면서 나의 삶이라는 은막에 투사됩니다.
그림에는 인상파 화법이 있습니다. 똑같은 사물이라도 빛의 정도에 따라서 시각으로 받아들여지는 인상은 다릅니다. 그 빛에 따라 바뀌어가는 모습을 포착하려는 시도를 한 이들이 인상주의 화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화가들 사이에서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물감으로 빛을 표현하려니 물감을 섞어야 하는데, 빛이 섞이는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빛이 섞이면 하얀색이 나옵니다. 그런데 물감은 섞으면 섞을수록 검은 색이 나옵니다.
그래서 점묘법 화가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팔레트에 물감을 섞지 않고 화폭에 작은 원색의 점을 무수히 찍어가며 빛을 표현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눈은 물감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자연스럽고 화사한 색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인상파 화법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꿈을 꾸고 이루겠다고 살아가는 도중에 하나님도 동원하고 부처님도 동원하다보면 어둡고 무겁고 둔탁한 물감의 색깔처럼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점묘법으로 빛을 표현 할 때에 무수한 원색의 점을 찍듯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뽀송뽀송하고 맑고 화사한 무지갯빛이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이 무겁고 둔탁해졌다면 그 이유는 내가 스스로 무지갯빛을 그려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무지개 너머로 가지 못한 채 이상으로 바라기만 하는 상태에 머무는 것입니다. 부부 관계, 자녀와의 관계, 사업과의 관계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이 일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모래시계형 라이프스타일을 살아가는 선민의 삶에는 무지갯빛깔이 비춰집니다. 당연히 삶은 가볍고 밝고 맑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에서는 에스겔을 찾아온 장로들에게 주어진 예언입니다.
에스겔은 BC. 597년에 포로로 잡혀 와서 BC. 593년에 소명을 받아 예언활동을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의 예언이 이루어진 시기는 BC. 591년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보았던 보좌와 네 생물의 환상을 본 이후로 이미 25개월이 지난 시점이었고, 두 번째로 예루살렘의 환상을 본 이후로는 11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에스겔이 이렇게 25개월 간 예언활동을 하며 말씀을 전했는데 장로들의 관심은 에스겔의 활동과는 어긋나있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서 금세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그 때가 언제인지 미래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하나님이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느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마음에서 바라는 미래의 일들을 이미 정해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쉽게 관찰됩니다.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흑자를 기대합니다. 장로들은 이와 같은 심정으로 마땅히 자신들이 고국으로 돌아가고 나라가 회복되어야만 한다는 소원을 정해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언자인 에스겔에서 와서 언제쯤이면 돌아갈 수 있을지, 언제쯤이면 다윗의 시대와 같이 찬란했던 시대가 찾아올지 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가지시는 관심은 미래가 아닌 현재입니다. 포로로 잡혀있는 지금 선민으로써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종교와 풍습에 둘러싸여 살아가면서 선민의 선민다움을 나타내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선민이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모든 계획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민이 해야 할 일은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놓인 자리에서 선민다움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시고 천국의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은 소설 같은 가공의 산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살고 있는 유다 백성들 위에 천국이 있음을 드러내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천국은 바벨론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선민들에게만 허락된 비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비밀을 알게 된 선민들은 바벨론 사람들과는 다른 라이프스타일이 드러나야만 했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보았던 천국은 사람들이 멋대로 그려낸 사후세계로서의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실재하는 천국을 백성들에게 드러내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천국의 존재를 알았으면 삶에 적용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은 뒤에 갈 곳으로 천국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지금 사는 동안 천국을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사는 동안 천국을 적용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천국 갈 것을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정말로 죽은 다음에 갈 천국이 있다고 믿는다면 지금 라이프스타일이 변해야만 합니다. 천국을 적용하는 선민의 삶은 믿지 않는 이방인과 다른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을 적용한다는 것은 곧 오늘 제목에서 말씀드린 대로 모래시계형 라이프스타일을 사는 것입니다.
천국이 모래시계의 윗부분이라면 잘록한 허리부분을 통해서 이 땅의 삶의 현장으로 그 모래가 흘러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미래를 그리고 이루어가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의 모래를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139편 17~18절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래보다 많은 하나님의 생각들을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 무지개로 보았습니다. 각종 보석으로 비유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보배로운 생각들이 지금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새삼스레 백지 위에 처음부터 그려야만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잘록한 허리부분을 통해서 떨어지듯이 하나님의 보배로운 생각이 흘러내리도록 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무지갯빛의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삶이라는 은막에 투사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에서는 그 방법으로 안식일이 제시됩니다. 24절까지 안식일이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처럼 안식일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성전이 없는 이방 땅 바벨론에서 선민의 정체성을 드러내야만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민의 과제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냐가 아니었고 언제 해방되고 언제 나라가 회복될 것이냐를 가늠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지금 주어진 자리에서 선민다움을 드러내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없는 이방 땅에서 선민다움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강조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이방인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모래시계형 라이프스타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앞부분에서는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430년 동안 사는 동안 우상숭배 한 것을 지적하십니다. 애굽에 있을 동안 행해진 우상숭배에 대한 지적은 이 부분을 제외하면 성경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다만 여호수아 24장 14~15절에서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라는 말씀이 나온 것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기 이전에도 우상을 숭배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이렇게 애굽 시절의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바로 현재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와서 노예 된 입장이 애굽에서의 시절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없는 이방 땅에서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면서도 선민 됨을 드러내야만 했습니다. 선민은 천국에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신 보좌가 있고 천군천사가 그 보좌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나의 심장이 뛰는 이 순간에도 천국에서는 여전히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존재하고 계십니다. 선민은 이러한 천국의 존재를 알고 적용할 때에 이방인들과 차별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발산되는 무지갯빛 광채 속에 나를 향하신 보배로운 생각과 뜻이 모래시계 윗부분에서 아래로 흘러내려오듯이 흘러내려오도록 해야만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자신의 인생을 도화지라 생각하고 스스로 밑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꿈과 이상을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색을 칠하면 칠할수록 색은 탁하고 무겁고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선민의 삶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뜻은 은막에 비치는 영사기의 빛과 같아서 겹칠수록 맑고 밝아집니다. 일곱 빛깔 무지개로 보여도 아름답고 그 색들이 모두 섞이면 더 밝고 유쾌하고 화사한 빛이 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관계, 자녀관계를 비롯한 삶의 모든 영역이 탁하고 무겁고 어두운지 맑고 밝은지 차이가 나타나야만 합니다. 선민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왔지만 천국을 바라보고 보좌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뜻을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안식일을 지킴을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안식일이 바로 모래시계의 잘록한 부분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본래 처음 인간으로 지음 받은 아담이 눈을 떠서 하나님을 마주 대한 날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깨우셨을 때에 아담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대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기운으로 채워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는 집안 문제도 있고 건강 문제 등도 들어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사업에 대한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관계들을 마음에 가진 채로는 아담의 첫 날 같은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안식일은 우리의 마음을 아담의 첫 날과 같은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렇게 마음속에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구약에서는 상번제를 허락하셨고 우리에게는 십자가 사건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 어울려 사는 동안 세상에 물들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보는 기준은 재물이 되어버렸고 경쟁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는 동안 마음은 온통 돈 벌기에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장사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눈떴을 때와 같은 상태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매일 상번제에서 바쳐지는 어린양은 십자가 사건의 예표였습니다. 그러나 상번제를 온전히 지킬 수가 없었기에 안식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 26절에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아담이 처음 눈뜨고 하나님을 만난 순간처럼 되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온 선민들의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길이었던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한 것은 아담의 첫 날을 매일 같이 재현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의 완성인 십자가를 붙들면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고 하나님을 갖게 됩니다. 그 하나님은 나에 대한 생각을 무지갯빛으로 광채를 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빛 속에 우리에 대한 계획과 생각과 뜻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에 모든 창조를 끝내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만나신 첫 날을 안식일로 정하셨습니다. 이 날이 하나님께는 일곱째 날이었는데 아담에게는 첫째 날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속에 있던 모래알보다 많은 보배로운 생각과 계획들이 안식일이라는 잘록한 지점을 통해서 땅에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오직 하나님만이 계신 상태가 되었을 때에 이 땅의 삶에는 모래알보다 많은 하나님의 보배로운 생각들이 쏟아져내려오게 됩니다. 선민다움이 안식일을 통해서 지켜집니다. 안식일과 상번제의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선민들이 포로로 잡혀온 처지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여있든 마찬가지로 문제가 아닙니다. 설령 잘못한 일로 감옥에 들어갔어도 회개하고 선민다움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 감옥 위에도 하늘은 있고 내 삶에 대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무지갯빛 생각들이 내려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해야 되는 일은 지금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 안식일의 의미가 완성된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아담이 처음으로 눈을 떠서 하나님을 대면하듯이, 타락하기 전의 마음 상태를 유지하면 됩니다. 이 세상이 들어와 있는 내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세상이 들어와 있는 상태로 움직여가는 삶은 도화지에 물감을 칠해가는 이방인의 삶입니다. 그러한 삶은 칠하면 칠할수록 어둡고 무겁고 탁해집니다. 우리의 죽을 때까지 삶에 대한 모든 생각은 이미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추시고자 하시는 계획과 뜻과 섭리는 무지갯빛입니다. 아담이 처음 눈떠서 하나님을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모래시계형 라이프스타일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위에 있는 모래들이 아래로 내려오기 위해서는 잘록한 부분을 통과해야 하듯이 하나님의 보배로운 뜻과 계획들이 우리 삶에 내려오는 것은 십자가 생활화에 달렸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강조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서는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이것이 이방인들과의 차이이고 천국을 적용하는 방법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은 지금도 아버지를 첫 번째로 보고 계십니다. 주님과 연합한다면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첫 번째로 보게 될 것이고 안식일의 의미가 충족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모래시계의 잘록한 부분이 되어서 위에 있는 모래들이 아래로 내려와서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맑고 밝은 무지갯빛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괴로운 처지에 처해계실 수도 있습니다. 나를 울게 하는 어려운 형편이 아무렴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선민들보다 더 어렵겠습니까? 어떤 상황이라도 십자가를 붙잡고 모래시계형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함을 통해서 선민다움을 나타내시기를 바랍니다. 아담이 처음 눈을 떠서 하나님을 본 순간을 이루고 유지하기 위하여 십자가 생활화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허락하신 상황과 내가 대응해야 될 처지가 어떻든지 내 위에 하늘이 있음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보배로운 뜻과 계획이 이 땅으로 내려오기 위하여 모래시계형 라이프스타일로 살아가며 십자가만을 붙잡고 안식일의 의미를 완성시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