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조명삼으면 수다는 쉬이 멈추지 않는다. 손가락만한 양초 하나로는 방을 밝힐 수 없기에 귀에 익은 목소리들은 어둠속에서 한대 뭉쳐져 메아리처럼 울린다. 몇일지 모를 소근거림은 낡고 얇은 벽을 멋대로 통과하여 꾸지람을 데려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벽속을 달리는 쥐조차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겠지
언제나처럼 싸늘한 방에 바람처럼 초조함이 돌았다. 가장 어린 신다는 무릎을 팔로 감싸고 침대에서 울먹임에 가까운 기도를 했는데 아주 두려운 숨바꼭질을 하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레일라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있지만 아무도 그가 자고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카산드라는 침대 4개로 꽉 차는 방을 용케도 돌아다녔는데 먼지가 날렸다. 방에는 눈물섞인 중얼거림과 기도, 간간히 이를 가는 소리만 울렸다. 어떤 고해와 함께 신다는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서 조금 빗겨서있는 시간에 세실은 아가씨의 차시중을 들었다. 그의 고집대로 꽃밭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듯이 자리를 만들어 티타임을 가졌는데 20분만에 꽃을 뽑고 땅을 정리하기엔 부족했는지 울퉁불퉁하고 흙먼지가 올라왔다. 16살의 낭만 넘치는 아가씨는 제 상상과는 전혀 다른 현실에 기분이 상해있었다. 한놈만 걸려봐라는 생각으로 하인들에게 이것저것 시켰는데 차를 새로 타오던 세실이 꽃 뿌리인지 돌부리인지 모를것에 넘어져버렸다. 몸이 흙투성이가 되고 자잘한 생채기들이 생기는건 문제가 아니었다. 세실의 진짜 비극은 찻물이 아가씨의 드레스에 튀었다는 것이었다.
이미 흙이 묻어있던 드레스였지만 모든 옷을 한번입고 태워버리는 아가씨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나보다. 그 자리에 있었던 신다는 아직도 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다. 이게 얼마짜리인줄 알아? 너같은게 백년을 일해도 못사! 너랑 니 가족, 친구들을 다 합쳐도 내 옷보다 싸구려라고! 제정신이긴 해? 어떻게 이런 멍청한 짓을 저지를 수 있어? 내가 그렇게 질투가 났니? 그래서 나한테 차를 뿌린거야? 시끄러워! 무슨 염치로 입을 열어! 추해서 보기 싫으니까 고개 내려! 이 드레스가 그렇게 갖고 싶었어? 차를 뿌려서 내가 버리면 네가 쥐새끼처럼 가져갈 수 있을것 같았던거야? 아, 뜨거워. 화상을 입은것 같아. 너같이 천한것이 고귀한 사람을 상처입히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너, 네 가족은 사냥개 우리에 들어가서 잡아 먹힐거야. 이제껏 너와 한번이라도 말을 섞은 사람들은 전부 쫓겨날거야! … 하지만 내가 좀 자애롭니? 너도 알잖아 나 맘 여리고 착해 빠진거. 대답 안해? 그렇지… 넌 아무런 벌도 안 받을거야, 네 주변 사람들도. 심지어 너같은 거한테 상도 줄 생각이야. 얼마나 멍청하고 한심한 사람이면 이런짓을 버리겠어? 네가 너어무 안타까워서, 네가 절대 이룰 수 없는 평생의 소원을 들어줄게. 이 옷을 너한테 줄테니 마지막 쓰임을 다해. 알지? 내가 땅을 기면서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갉어먹는 쥐새끼들을 안쓰러워 하는거. 빵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으니까 겨우 그정도 유혹도 뿌리치지 못하고 천한 본성을 드러내는거잖아? 그래서 특별히 바닥에 부스러기 한 톨 남지않도록 남은 음식은 짐승에게 주고 입은 옷은 불태우지. 자, 입어. 입고 옷을 태워. 뭐해? 너무 감격스러워?
노련한 하녀는 벌벌떠는 신다를 안으로 데려갔다. 그랬기에 신다는 세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세실은 해가 저물어도, 저녁시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인들은 시도때도 없이 소각장을 오갔다. 그리고 이 시각까지 누구도 대형 소각물을 보지 못했다. 세 하녀는 그 사실을 간절히 붙들고 희망을 외웠다
발자국 소리가 복도를 울릴때 레일라는 가장 먼져 몸을 일으켰고 신다역시 다리를 풀고 일어날 준비를 했다. 걸음소리가 일정하지 않음을 알게되자 카산드라는 문을 거세게 열고 방을 나섰다. 잠시후 세실이 카산드라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세 하녀는 세실을 침대에 눕혔다. 종아리에 화상을 입어 엎드려 누워야 했다. 세실의 보름달같던 눈동자는 퉁퉁 불다 봇해 다 부르튼 눈가에 가려졌다. 너무 울었는지 목도 다 쉬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일라는 상처를 확인하며 미리 받아온 약재를 챙겼다. 카산드라 역시 물수건으로 세실의 상처를 닦아주고 미지근한 물을 천천히 먹였다.
이곳에 하녀로 일한지 두달도 채 되지 않은 신다만이 혼란에 빠졌다. 아가씨의 패악질에 대해 모르고 온건 아니었다. 한달이 좀 넘는 시간동안 전부 겪은줄 알고서 이정도면 할만하다 했던건 제 착각이었다.
“세실은 어느정도 회복이 되면 제대로 퇴직금을 받고 저택을 나갈거야. 이건 첫째 아가씨가 정한 베르젤트 남작가의 규율이니까.”
첫째 아가씨? 신다는 처음듣는 이야기다. 남작가엔 지금의 아가씨 한분만 계신게 아니었나?
“그래봐야 그분도 귀족이지, 뭐든 돈으로 해결하려 들잖아.”
“카산드라. 그분도 그분 나름대로의 노력을 한거야. 그분이 계셨을때를 생각해봐. 적어도 이런일은 없었어.”
“... 그럴거면 끝까지 있던가! 혼자 도망이나 치고…”
“카산드라… 신다, 아무래도 물이 부족할 것 같아. 다녀와줄래?”
신다에겐 처음듣는 이야기였고 처음보는 광경이었고 처음느낀 분위기였다. 어찌되었든 도망치고 싶었던 신다는 냉큼 기회를 잡았다.
한밤중이었고 당연히 사람은 없었다. 중간중간 경비가 있긴 했지만 그들은 특별히 말을 걸거나 제지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고 멀찍이서 신다를 바라보았다.
우물가는 건물과 꽤 떨어져 있어서 컴컴했다. 평소라면 무서웠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도 없다. 우물 옆에 웬 사람이 있던것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급하게 물을펐다. 방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늑장을 부릴 일도 아녔다.
“이 밤에 물은 어디에 쓰려고?”
“세실이 다쳤어, 아가씨가 엄청 괴롭혔나봐. 무서워 죽겠어 정말…”
“마가렛이?”
“헉!”
신다는 나무통을 그대로 우물에 빠뜨릴뻔 했다. 저택의 사용인 중 누구도 아가씨를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심지어 그 카산드라도 혀가 잘릴까 말을 아낀다.
그리고 가장 신다를 놀라게 했던건 아주 충격적인 사실이었는데, 바로 이 저택에 신다가 말을 편하게해도 괜찮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혀가 잘리는건 자신이 될수도 있었다!
어쩌지? 어쩌지! 떨리는 눈으로 눈 앞의 사람을 보았다. 얇은 옷을 입은 여자였는데 어두워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어? 그럼 저쪽에서도 내가 안보이는거 아니야? 도망칠까!
“마거렛이… 심하게 군거니?”
“네? 네네… 더이상 일할 수 없데요…”
“죽었어?”
“아뇨! 그런건 아닌데.. 화상을 심하게 입은 것 같아요.. 전 자세히 못 보긴 했는데…”
“그렇구나…”
뭐지 진짜 뭐지. 찬 바람이 불었다. 으슬으슬하고 척추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좋지, 무서워지기 시작했어. 저 사람은 유령이 아닐까.
“알려줘서 고마워.”
“네? 아, 아뇨. 아니에요.”
“그 아이 이름이 세실이라고?”
“네에…”
여자는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우물가에서 멀어졌다. 그 모습을 멍하게 보고 있다가 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방금 있었던 일을 언니들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날 아주 조용히 밤을 세웠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남작부인이 병상에서 일어나셨다. 부인은 아가씨를 근신 시키고 세실을 불렀다고 한다. 근신을 받은 아가씨는 아주 조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