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문제해결 대신 안구정화>의 줄거리:
안구정화(眼球淨化)라는 신조어를 아시지요. 멋있고 아름다운 사진, 경치, 사람 따위를 보았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임은 삶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구정화를 위해서입니다. 결국에 구원이란 안구정화인 셈이지요. 즉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영원토록 기분 좋음을 말합니다. 믿음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안구정화를 시작하는 것이고요.
문제 해결 대신 안구정화
(미가 7장 1절~20절)
1.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2.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3.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 그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
4.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 가운데에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5.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6.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문제 해결 대신 안구정화>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문제 해결 대신 안구정화’
안구정화(眼球淨化)라는 신조어를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멋있는 사진, 경치, 사람 따위를 보았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일입니다. 강릉에서 보는 늘 푸르고 깨끗한 동해바다도 안구정화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입니다. 실제로 눈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라보는 것과 기분이 직결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안구정화라는 말 자체는 신조어일지 모르지만 성경에서는 이미 안구정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 중에 하나인 변화산 사건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절을 보면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변화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 베드로와 제자들은 산 아래에서 있었던 일들을 까맣게 잊고 그 자리에서 계속 머물기만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머물 초막을 지을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을 짓고 영원히 살고자 했습니다. 오늘 본문과 연관하여 중요한 것은 바로 베드로와 제자들이 느꼈던 이 기분이 바라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교현장을 묘사한 말씀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56절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고 하였습니다.
또 요한계시록을 보면 보좌를 지키는 네 생물에 대한 언급이 나타납니다. 4장 8절을 보면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라고 하였습니다. 눈이 가득했다는 것은 곧 네 생물들이 바라보는 자들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거룩하다는 것은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만큼 최고로 좋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들에서는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바로 안구정화의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미가 선지자가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생각해보면 2700년 전인데 미가 선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안구정화라는 말이 잘 어울립니다. 다시 말해 “문제 해결을 바라지 말고 안구정화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삶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문제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하나님도 찾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문제 해결을 위한 용도로 쓰일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안구정화라는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자체로 기분이 좋아지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영생과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도 생겨납니다. 간단히 말해 영생과 구원은 곧 영원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생물이 보좌 옆에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바로 그러합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안구정화가 바로 구원의 삶이며 영생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기분이 좋다는 표현이 너무 가볍게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에 작은 저항감을 느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분은 곧 마음의 변화입니다. 마음이 좋음과 만족함의 상태로 변화하는 것이 곧 기분이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 미가 선지자는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성경 말씀들과 같은 맥락에서 기분 좋음이 바로 안구정화에서 나온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미가서가 마무리되면서 드러나는 주제의식이기도 합니다.
본문을 보면 먼저 미가 선지자의 탄식이 나타납니다. 1절을 보면 ‘재앙이로다 나여’라고 시작됩니다. 미가 선지자가 재앙처럼 여기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2절에서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납니다.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선민의 나라에서 눈을 씻고 찾아봐도 경건한 자와 정직한 자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마치 수확이 끝나 텅 비어버린 과수원 같다고 한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경건하고 정직한 자가 없는 상황을 재앙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2절 하반부에서 4절까지는 그 구체적인 타락상이 나타납니다. 지도자들은 부정부패를 행하고 형제가 서로를 해치고자 음모를 꾸미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3절을 보면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 그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재물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선민들의 생활양식을 악하게 만든 결정적 동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결과가 5~6절에서 나타납니다. 5절을 보면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뢰가 완전히 깨지고 인간관계조차 형성되지 않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본래 부부관계는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런데 배우자조차 믿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 일상인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36절에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전혀 다른 문맥에서 나온 말씀이지만 구체적인 의미에서는 미가 선지자의 언급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예수님이 받아서 인용하신 셈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경건함과 정직함이 없는 선민의 사회에서 서로가 이득을 위해서 이용하려다 보니 결과적으로 집안 식구조차 불신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게 된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의 주체를 바꾸어서 가족조차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집안 식구를 원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선민들이 상실하게 된 경건함과 정직함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경건과 정직이라는 말은 여러 용어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만 미가 선지자의 말을 따르자면 7절 말씀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경건에 대해서는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라고 하였고, 정직함에 대해서는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러러봄과 바라본다는 것은 거의 같은 말입니다만 히브리어 원문을 살펴보면 의미적으로 뚜렷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우러러 본다는 것은 히브리어 ‘아차페’로써 동사 ‘차파아’에서 파생한 단어로 ‘주의하다, 지켜보다, 둘러보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미가 선지자가 언급하고자 한 경건이란 마음으로 주의를 집중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감시하듯이 눈을 떼지 않는 것입니다.
감시에는 두 가지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나타날까봐 주의 깊게 바라볼 때가 있을 것이고, 반대로 있던 것이 사라질까봐 주의 깊게 바라볼 때가 있을 것입니다. 경건은 곧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사라질까 주의 깊게 바라보는 마음가짐입니다.
미행을 하는 요원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미행을 하던 대상이 군중 속으로 파고들면 그를 놓칠 새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추적합니다. 전화가 와도 받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을 우선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러한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놓칠까봐 모든 일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데도 다른 일을 계속한다는 것은 경건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 결과로 앞서 살펴보았던 재앙의 모습들이 나타나고 가족마저도 원수가 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원수가 달리 원수가 아니라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평강을 깨뜨리는 대상이 원수입니다. 배우자의 문제로 인해 마음의 평강이 깨지면 배우자가 원수가 됩니다. 자녀의 문제로 인해 마음의 기쁨이 사라지고 걱정과 근심이 생기면 자녀가 원수가 됩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렇게 가족마저도 원수가 되는 이유는 바로 경건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미행하고 감시하듯이 지켜보는 마음가짐이 사라졌기에 이런 재앙과 같은 일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한편 선민들의 마음이 경건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나타났을 일이 8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경건의 힘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의무가 아닙니다. 오히려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많은 분들이 경건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사장님 앞에서 몸조심하기도 힘든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까지 경건해야 한다면 나는 죽습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경건이란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그러한 형식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사장님 앞에서 몸조심하는 것은 부담이고 스트레스입니다. 그러나 경건함으로써 하나님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마음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부담과 스트레스가 다 날라 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엎드려졌을지라도 일어나고 어두운 데에 있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빛이 되십니다.
이사야 40장 31절에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또 다른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 영이신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보는 것은 우리가 바람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바람이 부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나무를 보고 바다를 바라봅니다. 나뭇잎이 흔들리고 바다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모습을 보면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람 같으신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바람이 불기 때문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파도가 해안가로 밀려오듯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타난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9절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람에게 너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한다면 바람은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도 나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라고 되물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생각하시고 뜻하시는 것들이 좁쌀만큼도 밖으로 새지 않고 예수님이 온전히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말씀이 있다는 것은 곧 그 말씀을 하신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미행하는 것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바라보는 자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왜 자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강조하는 것일까요? 모세가 구리뱀 장대를 들었던 것과 같습니다. 구리 뱀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징했듯이 예수님이 바로 바람과 하나가 되어 흔들리는 나뭇잎이며 해안가에 밀려오는 파도이기 때문입니다. 나뭇잎과 파도가 바람과 하나가 되어 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계십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으시는 영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방법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미행하는 요원의 마음으로 감시하듯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창문 바깥에서 나뭇잎이 흔들리고 파도가 치는 것을 보고 바람이 부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창문을 열면 직접 그 바람을 쐬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의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바람을 쐬듯이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온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라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이 바라본다고 번역된 말은 소망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에 이어 나타난 정직의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자신을 소망하는 것이 정직입니다.
정직은 곧 마음이 직선으로 뻗는 것입니다. 입으로 부르는 하나님을 마음으로도 바라보는 것입니다. 돈을 소망하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정직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의 형통을 소망하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정직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돈에 대해서 정직한 것이고 자녀에 대해서 정직할 뿐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굽어있고 꺾여있기 마련입니다.
이 경건과 정직을 합쳐서 생각해보면 마음에서 일어나야 할 안구정화의 의미가 뚜렷해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계속 바라볼 때에 하나님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더러워진 마음의 안구를 십자가에서 정화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인정하자마자 나와 주변이 하나님의 주체성으로 충만해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마음의 안구가 하나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첫 번째로 바라보는 대상을 소망하게 됩니다. 마음은 비어있음으로써 채워지기 위한 흡입력이 24시간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더럽혀진 마음이 죽고 주님의 부활을 따라서 하늘을 향하게 되면 하나님이 첫 번째 대상이 되고 하나님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구원입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해결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마음이 본래 봐라보아야 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바라볼수록 마음의 안구는 불결해집니다. 그 증거로 짜증, 근심, 걱정, 원망, 불평 등과 같은 감정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마음의 안구정화입니다. 마음이 기분 좋게 되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문제 해결이 되어야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면한 건강 문제를 해결하라, 지금 당면한 자녀 문제를 해결하라. 지금 당면한 돈 문제를 해결하라, 해결하기 위해서 전문가를 찾고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라.”고 하는 것은 마귀의 속삭임과 선언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끊임없이 안구불결의 상황이 이어지고 기분 나쁜 상태가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내가 죽었음을 인정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듯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모셔 들이고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소망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를 복음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마음의 시선을 결정한다면 반드시 기분 좋은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 1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유쾌하게 되는 안구정화의 상황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가 해결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은 문제는 오히려 하나님의 과제가 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 중에 내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문제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내 마음의 안구가 정화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안구정화의 효과로 하늘 기분 좋음을 누리고 있든지 아니면 이 세상 문제를 바라봄으로써 안구가 불결해져서 기분 나쁨 속에서 지옥을 살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제 해결을 위탁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원하고 계신 것은 마음의 안구정화입니다. 바로 마음의 안구정화가 이루어지는 삶이야말로 경건하고 정직한 삶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요원이 상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미행을 하듯이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자신을 소망함으로써 안구정화가 일어남으로써 하늘로부터 오는 기분 좋음에 사로잡혀 사는 천국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