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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도헌기(臥陶軒記), 도잠(陶潛)의 삶을 사모하여 당호(堂號)를 짓다> 고영화(高永和)
고려시대 대문호 와도헌(臥陶軒) 이인로(李仁老 1152~1220)는 중국의 문장가 도연명(陶淵明 365~427) 선생을 흠모해 자신의 집이름을 와도헌(臥陶軒)이라 지었다. ‘와도헌(臥陶軒)’은 도잠(陶潛, 도연명)을 사모한 이인로가 한가롭고 고요함을 좋아한 도연명의 삶을 모델로 삼겠다며, 도잠을 따라 집안의 북쪽 행랑에 북창을 내고 지은 자신의 집 당호(堂號)였다. 북창 앞에 누워 불어오는 바람을 좋아한 도잠처럼 기대고 싶은 집, 또는 ‘도연명이 누워 있는 마루방’이라는 뜻이 ‘와도헌(臥陶軒)’이다.
실제 기록에도 이인로는 도연명에 매우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스스로 도잠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거듭 읽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와도헌기(臥陶軒記)>에서는 속세의 영화를 뿌리치고 은일했던 도연명의 의지를 동경하고 매우 높이 샀다는 내용도 나온다.
○ 한편 이인로(李仁老)는 인생과 자연을 가장 아름답게 조화(調和)시킬 줄 알았던 도연명(陶然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읽고 난 다음, <최기남에게 주다(贈崔上舍起南)>라는 오언절구를 지었다. 귀거래(歸去來) 하는 친구가 얼마나 부러웠으면 이같이 노래했으랴. “사람들이 귀히 여기는 것, 귀히 여기지 않고 사람들이 탐하는 것, 탐내지 않네. 강산의 바람과 달만이 백년 동안 탐하고자 하는 것일세.(不貴人所貴 不貪人所貪 江山風與月 是我百年貪)”라고 하며, 어떤 것에도 탐욕을 거두고, 오직 강산(江山)의 달과 바람(風與月)만 탐하고 싶다고 노래했다.
◉ 물론 그가 <와도헌기(臥陶軒記)>에서 시대를 초월해서 ‘옛사람과 사귄다(尙友)’고 말한 것은 옛사람의 고전을 읽으면서 그들과 대화하고 성현의 말씀을 본받기 위함이었다. 그리고서 옛사람에 비해 비루한 자신을 노둔한 말과 시냇물에 비유하곤, 비록 도잠에 비해 보잘 것 없지만 도잠을 늘 마음에 두고 따르려고 한다면서 언젠가는 도잠에 가까이 이를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늘 고전을 접하며 옛사람과 벗하며 그들을 따르고 싶어 했다. 이인로 선생은 도잠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어 말하며, 내가 옛사람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흉내라도 내어 보고 싶다고 했다.
어떤 이가 이인로에게 의아해하며, “자네는 도잠과 비교해 보면 같은 것은 얼마 되지 않고 못 미치는 것은 많은데 자신을 그에게 견주는 일이 옪다고 하겠는가?”고 묻는다. 이에 이인로의 응수가 여유만만이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리지만, 노둔한 말이라도 열흘을 달리면 쫒아갈 수 있다네. 시냇물도 만 번을 굽이쳐 동쪽으로 흐르면 마침내 바다에 이르는 법일세. 내가 비록 도잠의 높은 뜻에 조금도 미치지 못하지만, 계속 사모한다면 또한 도잠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고 답했다.
또한 이인로는 <와도헌기(臥陶軒記)>에서 “이름은 뜻을 규정하는 것이며 뜻은 이름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名以制義 義以正名).”라고 했다. 이는 내가 짓는 이름 하나가 나를 규정할 것이고 내가 어떻게 살겠다는 의지가 들어가 있는 것이니 “어찌 이름 하나 짓는데도 가벼이 하랴.”고 강설했다.
◉ [중국 대문호 도연명(陶淵明 365~427) 잠(潛), 전원을 노래한 술의 성인(聖人)]
강서성 심양(潯陽)에서 태어난 도연명은 열두 살 때 아버지를 여위어 가난했기 때문에 도연명은 집안의 농사일을 거들며 학문을 익혔다. 생계를 위해 출사했으나 지방 하급 관리를 지내며 대부분 일 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그의 자유로운 성품이 관리 생활에 맞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관리 사회의 혼탁함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곤궁한 생활을 보다 못한 친척이 그를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으로 추천했고, 405년 그는 팽택령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팽택령에서의 관직 생활도 약 80여 일 만으로 끝을 맺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도연명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은거에 대한 염원을 밝혔다. 도연명은 이후 20여 년간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산수와 시와 술을 벗 삼아 전원생활을 했다. 그 사이 동진 왕조가 멸망하고 남조 송나라가 새로 건국했다. 도연명은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 이어지는 수탈과 억압이 없는 이상 세계를 꿈꾸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사상적 변화에서 탄생한 작품이〈도화원기(桃花原記)〉다. 이후 도연명은 현실에 실망할 때마다 술로 자신을 위로하고, 국화를 기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말년에는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마음껏 술을 마시지 못하는 그의 처지를 헤아려 종종 친구들이 술자리를 만들어 그를 초대하면 거리낌 없이 실컷 마시고 취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그는 427년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은 담담한 전원생활의 풍취를 담고 있으며, 중국 최고의 전원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 다음 한문수필 ‘도연명처럼 눕는 집의 기문’ <와도헌기(臥陶軒記)>는 고려 명종 때 대문호 와도헌(臥陶軒)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작품이다. 이인로가 중국의 문장가 도연명(陶淵明 365~427) 선생을 흠모해 자신의 집의 이름을 와도헌(臥陶軒)이라 짓고 기문(記文)을 쓴 것이다. 이 글은 대략 4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단락에선, 고전을 읽는 것은 옛사람과 사귀는 것(尙友)과 같다. 안자(顔子, 안회)는 선(善)을 위해 노력한 순(舜)임금을 사모했다. 둘째 단락에선, 사마상여(司馬相如 BC 179~117)는 씩씩하고 대담한 인상여의 인품을 정신적으로 사모하여 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다. 셋째 단락에선, 이인로가 도잠(陶潛)에 비해 미치지 못한 3가지는 도잠의 시적인 운치와 치밀한 문예적 상상력, 그리고 그의 자유롭고 대쪽 같은 성품과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 위엄과 명망을 갖춘 지기(知己)가 많았던 부분이다. 그리고 비슷한 점은 한가롭고 고요함을 좋아하여, 거처하는 북쪽 행랑의 북창 앞에 누워 불어오는 바람을 좋아한 점이다. 넷째 단락에선, 내가 비록 북창에 기댄 도잠(陶潛)의 높은 뜻을 조금도 따르지 못하나 만일 내가 와도헌(臥陶軒)에 기대 사모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도잠처럼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기(記)를 쓴다고 밝혔다.
*<‘도연명처럼 눕는 집’ 와도헌기(臥陶軒記)>* 이인로(李仁老 1152~1220)
(1) 옛 사람과 사귀는 것(尙友), 순(舜)임금을 사모한 안자(顔子)
그 책을 읽으며 그 세대를 고찰하고 그의 인품을 상상하여 보면, 뚜렷하게 목격한 것 같아 서로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하는 곁에서 교유할 수 있다. 이것이 맹가(孟軻, 맹자)가 이른바, “옛 사람과 사귀는 것(尙友)”이니, 정말 예와 이제라는 장벽이 없는 것이다. 옛날에 안자(顔子, 안회)는 말하기를,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대로 하면 또한 그와 같이 될 수 있다.” 하였다. 또한 순(舜)은 평범한 사람으로서 요(堯)에게서 천하를 선양 받아 50년 동안 옷을 드리운 채 천하를 다스려 지금에 이르러선 해와 달처럼 우러른다. 안자는 빈궁한 거리에서 가난하게 지낸 선비였으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닭이 울면서부터 일어나서 선(善)을 하기 위하여 노력한 것이 곧 순의 마음씀이었으니, 어찌 먼 데에 있겠는가(何遠之有哉).” 하였으니, 이것은 비록 명분은 같지 않을지라도 정신적으로 그를 사모한 것이다.
(2) 씩씩하고 대담한 인상여를 정신적으로 사모한 사마상여(司馬相如 BC 179~117)
사마장경(司馬長卿, 사마상여)은 인상여(藺相如)의 인품을 사모하여 스스로 그의 이름을 자기의 이름으로 지었다. 상여(相如)는 조(趙)나라의 용장(勇將)이었다. 구슬[璧]을 완전히 간수하여 조나라에 바쳤으나 진(秦)나라 사람이 속수무책이었고, 진나라의 왕을 호령하여 부(缶 악기)를 두들기게 하고 조나라의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이를 기록하게 하였다. 그의 씩씩한 모습과 대담한 뱃심은 오히려 시퍼렇게 살아있는 듯하다. 그런데 장경(사마상여)은 곧 한낱 백면서생(白面書生)일 뿐이니, 어찌 그와 비슷한 점을 찾아볼 수 있으랴. 그러나 그가 지은 두 가지의 부(賦)를 보면 씩씩하고 대담함이 보통이 아니었다. 곧 그의 기운은 함양(咸陽)을 가슴속에 집어삼킬 듯하였고, 진시황(秦始皇) 보기를 도마 위에 올려놓은 고기 덩이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곧 사업은 서로 다르더라도 정신으로 그를 사모한 것이다.
(3) 내(이인로)가 도잠(陶潛)에 미치지 못하는 3가지, 그러나 비슷한 1가지
저 도잠(陶潛 365~427)은 진대(晉代)의 사람이요, 나(이인로 1152~1220)는 1천여 년이나 뒤에 난 사람이다. 말소리도 서로 듣지 못하였고 얼굴도 서로 대하지 못하였으며, 다만 책을 통하여 때때로 서로 대하게 되어 그의 인품을 상당히 익숙하게 알게 되었다.
그런데 도잠은 시를 짓는데 수식을 숭상하지 아니하면서도 저절로 자연스러운 특수한 운치가 있었다. 메마른 듯하나 사실은 풍부하였고, 엉성한 듯하나 사실은 치밀하였다. 시인들은 그를 쳐다보기를 공자(孔子)의 문하에서 백이(伯夷, 은나라 충신)를 보는 것과 같이 생각하였다. 그런데 나는 시를 지은 것이 수천 편에 달하였으나 말이 어색한 것이 많고 자칫하면 무리로 꾸며댄 흔적이 있다. 이것은 내가 첫째로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도잠(陶潛)은 군수로 있은 지 80일 만에 곧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이르기를, “내가 쌀 닷말 때문에 시골 어린이에게 허리를 굽힌단 말인가.” 하고 관인(官印)을 풀어놓고 떠나 버렸는데, 나는 벼슬살이 30년에 낭서(郞署, 하찮은 관리)에서 머뭇거리면서 수염과 머리털이 허옇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악착스럽게 올가미 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둘째로 내가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도잠은 명망과 뛰어난 행적이 한 시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바가 되어 자사(刺史)인 친구 왕홍(王弘)같이 위엄과 명망이 있는 이도 친히 오는 중간 지점까지 마중을 나오게 했으며, 여산(盧山)의 승려 혜원(慧遠)같이 도(道)가 높은 사람도 오히려 백련사(白蓮社)에 불러들였다. 그런데 나는 친구들에게 모두 버림을 받고 외롭게 홀로 있으면서 언제나 하루 종일 같이 얘기할 사람이 없으니, 이것은 내가 셋째로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어려서부터 한가롭고 고요함을 좋아하였으며, 사람을 방문하는 데에 게으르고 북으로 난 들창 앞에 높이 누워서 저절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을 좋아하였으니, 이것은 곧 도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살고 있는 집의 북쪽 행랑을 넓혀서 거처하는 곳으로 만들고, 이어 황산곡(黃山谷, 黃庭堅)의 시집 가운데에 나오는 와도헌(臥陶軒)이란 말을 가지고 이름을 붙였다.
(4) 북창에 기댄 도잠(陶潛)처럼 나도 와도헌(臥陶軒)에 기대 그를 사모하리라.
어떤 사람이 이에 대하여 의심하여 말하기를, “그대와 도잠을 비교하면 서로 같은 것은 얼마 없고 따르지 못하는 것이 많은데도 스스로 그에게 견주는 것이 타당하다 할 수 있느냐.” 하였다. 나는 그에게 대답하기를, “천리마의 발이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데, 노둔한 말이라도 10배를 달리면 따를 수 있고, 개천의 물도 만 번을 굽이치면 동쪽으로 흐르다가 마침내는 바다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내가 비록 도잠의 높은 뜻을 조금도 따르지 못하나 만일 그를 사모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곧 또한 도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마음으로 순(舜)을 사모하고 정신적으로 인상여(藺相如)를 그리워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이태백(李太白)의 시에 이르기를, “현령인 도잠은 매일 술에 취하여 오류(五柳)에 봄이 온 줄 미처 모르네. 맑은 바람 북쪽으로 열린 창에서 태고적 사람이라 자칭한다지.(陶今日日醉 不知五柳春 淸風北窓下 因謂羲皇人)”라 하였으니, 이것은 나에게 해당시켜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 기(記)를 쓴다.
[讀其書 考其世 想見其爲人 怳然如目擊 相與遊於語默之表 此孟軻所謂尙友也 誠不以古今爲阻 昔顔子曰 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 且舜以匹夫 受帝堯之禪 五十載垂衣而理天下 至今仰之如日月 而顔子陋巷中一瓢之士也 自以爲鷄鳴而起 孜孜爲善 卽舜之用心也 何遠之有哉 此雖名分不同 而以意慕之者也 司馬長卿 慕藺相如之爲人 自以爲名 夫相如 趙之勇將也 完璧還趙 而使秦人束手 叱秦擊缶 而令趙史亦書 其雄姿偉膽 凜凜猶生 而長卿迺一介白面生耳 豈可以得其髣髴哉 然觀其二賦之作 雄偉不常 則其氣足以呑咸陽於胷中 而視秦皇 不啻如机上肉 可知矣 此則事業不同 而以氣慕之者也 夫陶潛晉人也 僕生於相去千有餘歲之後 語音不相聞 形容不相接 但於黃卷閒 時時相對 頗熟其爲人 然潛作詩 不尙藻飾 自有天然奇趣 似枯而實腴 似踈而實密 詩家仰之 若孔門之視伯夷也 而僕呻吟至數千篇 語多滯澁 動有痕纇 一不及也 潛在郡八十日 卽賦㱕去來 乃曰 我不能爲五斗米 折腰向鄕里小兒 解印便去 而僕從宦三十年 低徊郞署 鬚髮盡白 尙爲齪齪樊籠中物 二不及也 潛高風逸迹 爲一世所仰戴 以刺史王弘之威名 親邀半道 廬山遠公之道韻 尙呼蓮社 而僕親交皆棄 孑然獨處 常終日無與語者 三不及也 至若少好閑靜 懶於參尋 高臥北䆫 淸風自至 此則可以拍陶潛之肩矣 是以闢所居北廡 以爲棲遲之所 因取山谷集中臥陶軒以名之 或者疑之曰 子於陶潛 所同者無幾 而所不可及者多矣 猶自以比之宜歟 僕應之曰 夫騏驥之足 一日千里 駑馬十駕亦至 溪澗之水萬折而東流 終至於海 僕雖不及陶潛高趣之一毫 苟慕之不已 則亦陶潛也 不猶愈於以意慕舜 而以氣慕藺者乎 李太白有詩云 陶令日日醉 不知五柳春 淸風北䆫下 因謂羲皇人 雖於我亦云可也 記]
[주1] 상우(尙友) : 책을 통(通)하여 옛사람을 벗으로 삼는 일.
[주2] 순(舜)임금과 안자(顔子) : 중국 태고의 천자 ‘순(舜)’을 임금, 공자의 수제자 안회(顔回)
[주3] 사마장경(司馬長卿) : 중국 전한시대의 유명한 부(賦) 작가 사마상여(司馬相如 BC 179~117)의 자는 장경(長卿)이다.
[주4] 인상여(藺相如) : 중국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승상. 조나라를 강대하게 만듬.
[주5] 함양(咸陽) : 중국 산시성 함양. 진(秦)의 효공(孝公)이 도읍을 정하고, 시황제(始皇帝)가 확장해서 큰 도성을 만든 이래의 고도(古都)
[주6] 도연명(陶淵明 365~427) : 강서성 심양(潯陽)에서 태어난 그는 본명이 잠(潛), 자가 원량(元亮) 또는 연명(淵明)이다. 동진, 유송 대의 은둔시인, 술의 성인(聖人), 전원시인으로 당나라 이후 남북조 시대 최고의 시인이다. 대표작으로는 〈오류선생전〉, 〈도화원기〉, 〈귀거래사〉 등이 있다.
[주7] 황권(黃卷) 책 : 옛날 책이 좀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황벽나무로 내피(內皮)를 염색한 황색 종이를 썼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통칭하여 말한다.
[주8] 머뭇거리다 저회(低徊) : 고개를 숙인 채 머뭇거리는 것을 말한다.
[주9] 새장 번롱(樊籠) : 새장. 자유롭지 못한 처지
[주10] 백련사(白蓮社) :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백련사를 결성(結成)하고 서신으로써 도연명(陶淵明)을 초청하니, 연명의 답서에“나의 천성(天性)이 술을 즐기는데 법사께서 술 마시는 것을 허락한다면 곧 가겠다.”하였다. 혜원이 이를 허락하자 연명이 마침내 찾아갔는데, 그가 입사(入社)할 것을 권유하니 연명은 눈썹을 찌푸리고 돌아갔다.
[주11] 황산곡(黃山谷) : 중국의 화가·서예가 황정견(黃庭堅 1045~1105), 북송대의 문인, 소동파의 친구.
[주12] 오류(五柳) : 도잠이 자기 집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스스로 오류 선생이라 일컬었다. 그러므로 오류는 도잠이 거처하는 곳을 가리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