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꽃 초록빛』(東泉社 1987)은 『洪海里詩選』(탐구당 1983) 이후의 작품을 수록한 洪海里 씨의 일곱 번째 시집으로 審美·自然·時代에 관한 종전의 관심이 다채롭게 취급되는 동시에 전체적인 균형감과 함께 탁월한 성취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때로는 과격한 언어실험을 무릅썼으면서도 현시점에서 보면 점진적 변모를 꾀했음이 드러난다. 한 시인의 장단점은 연관된 것이기에 『대추꽃 초록빛』에도 표현과 詩想 면에서 미흡한 곳이 산견되지만 전체적으로는 빼어난 작품의 빈도로 만족감을 안겨준다. 이번 시집의 다채로운 인상은 종전의 관심을 보충하는 삶의 위기(危機)의 취급과 우리 민족의 古典과 古事에 근거한 시편이 주는 점층적 효과에 있다. 다채로우면서도 시인의 연치를 헤아리게 하는 일관된 인생관의 무게도 곳곳에서 감지된다. 〈안정, 이상, 평화, 휴식〉을 표상하는 대추꽃의 초록을 기리는 마음이 이 시집의 지배적 기풍이라 하겠다. 도합 4부에 펼쳐진 작품의 일관된 인생관 및 가치관을 소묘함이 이 글의 목적이다.
1 제1부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일상사의 범주에 속하지만 투병생활과 문상(問喪)을 다룬 작품들은 가열함과 절실함으로 이번 시집의 주요한 성과를 이룬다. 인생론적인 자세와 함께 일상사의 시적 가능성은 이후에도 탐색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失明의 위기를 다룬 「절망을 위하여」, 「포기연습」, 「1986·봄」 등의 작품은 고백체 詩의 진솔함과 함께 체험에 대한 적절한 심리적 거리(距離)로 즉각적인 감동을 준다. 평명한 문체의 거침없는 흐름 속에 음미할만한 암시적 표현도 마련된다.
희망과 나락 기대와 포기 그 가는 틈서리를 왔다 갔다 하며 4월은 깊어 가는데 뿌연 하늘 아래 그 날은 언제인지 오늘도 병원으로 가는 길에 절망시편을 읊는다 나비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절망을 위하여」끝부분
이 시는 봄철 학원 소요의 현장을 지나가는 시인의 모습을 통해 혼미한 정국과 개인적 위기의 긴박함을 동시적으로 보여준다. <뿌연 하늘 아래/그 날은 언제인지>는 개인적 궁경에 근거해 나라의 장래를 우려하는 시인의 共感을 암시한다. <나비 한 마리 날지 않는다>는 짐짓 예사로운 진술도 전체 문맥상 강렬한 심경의 표현이다. 아무리 각박한 현실이라도 <절망시편을 속으로 읊는>이가 시인이다. 체험에 매몰됨이 없이 애써 그 의의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시인의 특성이다. 다음의 구절도 위기에 처한 이의 심경이 절실한 표현을 얻었다.
하나씩 하나씩 비워내고 마지막 하나까지 비운 다음 눈 감고 실려가는 수술실은 머언 먼 우주의 별.
마침내 내가 나를 만날 때 여러 이름들이 떠올랐다 허공이 망막에 가득하고 어둠 속에 점이 한 개.
-「포기연습」 중간 부분
<머언 먼 우주의 별>과 <어둠 속에 점이 한 개>의 병치는 위기에 처한 개인의 고독과 불안을 실감시키며, 자아(自我)와 타인의 불가분리한 연관을 깨닫는 상황의 역설로 가슴을 친다. <마지막 하나까지 비운>다는 수술 직전의 심경은 체념에 가까운 운명에의 승복으로 압박감을 준다. 그러나 <마침내 내가 나를> 만나야 하고 동시에 <여러 이름들이 떠>오르는 것이 개별적 생명의 기반(羈絆)이다. 그리하여 <어둠 속>의 <점이 한 개>를 확인함에 극한상황의 처절함이 있다. 평명한 문체를 활용하면서도 문맥과 암시적 표현에 의해 절실함을 얻는 순간은 <회복실 서창에> 타는 <노을의 불바다>를 상정(想定)하는 심리적 거리와, 병원을 찾는 일의 담담한 서술 후에 <쓸쓸하고> <어둡고> <춥다>를 행간을 나누어 발언함으로써 얻는 확호함, 문상(問喪)을 다룬 「남은 자리」의 한 구절 <이웃들이 하나 둘 돌아가고 나면/한 사람이 남긴 자리가 너무 넓구나>의 미묘한 깨달음 등이다.
2 투병생활의 시편이 언어의 검약을 통해 표현성을 얻었다면 제2부의 시대상을 다룬 작품들은 격렬한 표현과 함께 요설에 기우는 순간이 많다. <법이 있어도 없는 나라/도가 있어도 없는 나라> 같은 역설로 시작해 <줄 넘은 유성기판의 나라> 같은 비판적 비유를 활용한 「술나라」는 격렬한 감정을 점층적 리듬에 담는다. 불만한 현실에 대한 절망을 <까만 우주공간에 까만 문패를 달고 까만 이름을 까맣게 걸어 놓는다>의 시상에 담은 「하늘 위에 하늘 있고」는 통렬한 풍자정신의 표본이라 하겠다. <어지자지> 같은 시어의 선택에도 거친 풍자적 몸짓이 보인다. 풍자적 태도는 국어의 음향에 근거한 시상의 전개로도 나타난다. 의사전달의 어려움을 다룬 「가!」 에서는 <다시 가! 라고 말했을 때/너는 가나다의 가? 냐고 물었다>는 구절을 통해 동문서답의 원인이 무엇일까를 헤아리게 한다. 공동의 문맥이 결여된 까닭일까, 아니면 답하는 이가 딴전을 부리는 것일까. <요즘 詩들은 시들하다/시들시들 자지러드는/한낮 호박잎의 흐느낌>---「詩人이여」의 서두---에서도 음향의 묘미에 대한 감수성이 보인다. 이러한 同意異義語의 활용은 분명히 시의 활기를 돕지만, <시는 시시하고/시인은 그렇다! 고 시인만 하는> 경우는 문제의 복잡성을 활달한 언어로 단순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환기시킨다. 보다 섬세한 비판적 표현도 있다.
낮은 목소리로 낮으막히 낮으막히
낮게 낮게 말한다 낮은 데로 낮은 곳으로 물이 흘러가듯이.
「요즘들은」 도입부
집요한 반복법이 아니라면 자연의 순리를 긍정하는 구절로 들릴 수도 있겠다. 과감한 진실의 발언을 삼가는 타성적인 삶을 <형상없는 꽃이 되어 서서>, <가슴이 없는 새를 사랑하고> 등의 역설을 거친 후 자연의 리듬과 인사(人事)의 어긋남을 병치시킴으로써 통렬한 효과를 빚는다.
해 저물면 밤새도록 날 밝아도 입은 두 개 귀는 하나
진실과의 떳떳한 만남을 무작정 미루는 이들에 대한 풍자적 어조가 <해 저물면/밤새도록>의 여유에 암시되고, 윤리적 새로움이 없는 날의 밝음을 <입은 두 개/귀는 하나>의 점강법(漸降法)으로 부각시킨다. 한편 「능동과 수동」의 連作은 洪海里 씨가 여전히 실험적인 시인임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체적인 긴밀성이 부족한 것은 몇 개의 모티브가 도입되었을 뿐 충분히 전개되지 않은 까닭이다. <이 시대의 숨겨진 섬>으로 표상되는 사회적 이상, <적막한 강산을 질타하는 고요>로 암시된 양성의 결합, <하얀 백지 위에 너를 그리>는 시작의 노고, 등이 주요 모티브이지만 전체적인 긴밀성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능동과 수동」 연작의 실험성에 비해 「天上天下」는 일상의 사실(寫實)에 밀착하면서도 <종점행 차내>, <온 세상이 적막 속에 하릴없이 잠들었다>, <뒤채이는 잠 속에서 무슨 꿈을 꾸었는지> 등의 대목에 의해 심경의 상징적 부피를 느끼게 한다.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들은 이처럼 다채로운 방법으로 표현성을 향한 洪海里 씨의 꾸준한 노력을 헤아리게 하는 동시에 이러한 충동의 보다 충실한 성과도 예상케 한다.
3
蘭과 梅花에 대한 洪海里 씨의 경도는 동양의 정신이 늘 그랬듯이 윤리적 색채를 띈다. 사물의 관조는 인격의 도야와 무관치 않다. 자연친화의 정을 다룬 제3부의 작품들에도 다양한 방법이 활용되고 있다. 「蘭 찾아 無等 타며」는 47행의 여유 속에 詩想을 펼치지만 주요 모티브를 중심으로 세목을 정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초록빛 겨울은 산에 사는 난초뿐 꿩밥 아가다리 산콩나물이라 불리는 겨울에도 죽지 않고 살아 그 뜻만으로 서는 너를 찾아
「蘭 찾아 無等 타며」 부분
핵심적인 구절이다. 난초에 대한 토속 명칭의 나열에 애정이 서려 있고 〈초록빛 겨울은 산에 사는 난초뿐〉은 확고한 리듬으로 열정을 표현한다. 「蘭」은 비유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천년/면벽한/비구의/화두요〉라는 종교적 연상의 비유로 시작해 〈푸른 마당에 벌이는/끝없는/춤사위〉에서는 정물(靜物)의 동적인 파악을 통해 생명의 원초적 활력을 긍정한 후 존재의 비의(秘義)에 대한 다함 없는 찬탄을 <촛불 오르는 동안/풀어야 할/매듭이다.> 로 표현한다. 개념적 비유에 蘭의 색깔과 형상도 환기되어 있다. 「蘭아 蘭아」는 도합 50행의 작품으로 역설적 진술, 비유의 연속, 면면한 리듬에 담은 思惟 등이 결합된 빼어난 작품으로 투병 생활을 다룬 작품들과 함께 이번 시집의 대표작이다. 〈뼈가 없는 네게는/뼈가 있는데,〉〈뼈가 있는 내게는/뼈가 없구나〉의 서두의 구절부터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비유의 연속인 〈겨울밤의 비수〉, 〈대추나뭇가시〉, 〈차돌멩이〉, 〈불꽃〉도 蘭의 생김새와 함께 윤리적 연상을 상기시킨다. 후속되는 면면한 思惟도 전체적 문맥상 충실한 표현성을 지닌다. 햇빛, 바람, 물과 관련해 펼쳐지는 명상중 끝부분을 살펴보자.
네게는 물로 닦는 순수 물로 아는 절대 물로 사는 청빈 물로 비는 허심 물로 우는 청일 물로 빚는 여유 물로 차는 지혜가 잇다.
면면한 리듬의 즉각적인 설득력 외에도 한 줄, 한 줄을 음미하면 시상의 적의(適宜)함을 깨닫게 된다. <물로 닦는 순수>는 정화(淨化)의 상징인 물과 함께 인격도야의 과정을 상기시키기에 난점이 없지만 <물로 아는 절대>는 읽는 이 나름의 해석이 필요하다. 절대는 모든 조건을 초월하여 독립한 완전한 實在로 풀이됨으로 이 시의 경우에는 윤리적 정신이 지향하는 理想의 거리라 할 수 있겠다. <물로 아는>에는 蘭의 생태와 함께 道란 번잡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것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蘭 옆에 서 있는 시인의 상황에 근거해 보다 서정적인 심경토로에 기우는 동시에 전체적인 사유(思惟)를 요약하는 결구(結句)를 마련한다.
네 발은 늘 젖어 있고 내 손은 말라 있다
마른 손으로 너를 안으면 하루의 곤비가 사라지고 먼 산 위에 떠돌던 별, 안개 바람이 네 주변에 내려
내 가는 손이 떨리고 마취된 영혼이 숨을 놓는다
고요 속에 입을 여는 초록빛 보석 살아 있는 마약인 너,
십년 넘게 네 곁을 지켜도 너는 여전히 멀다.
어느 하루의 실내 풍경에서 시작되어 이윽고 외계의 자연 이미지로 옮겨진다. 이처럼 蘭의 개별적 생명의 환위(環圍)를 이루는 대자연의 섭리를 언급함으로써 십년 넘은 세월 동안 맺어온 인연의 신비를 유념한다. 의인법을 통해 지극한 애정을 표현하는 동시에 <여전히 멀다>라 함으로써 윤리적 이상과의 거리를 고백한다. <고요 속에 입을 여는/초록빛 보석/살아 있는 마약인 너>는 蘭의 자태와 의의를 묵상하는 이의 法悅을 힘차게 표현한 구절이다. 난과의 交感이 다함없는 성격의 것임도 암시되어 있다.
4 古典과 古事에 근거한 시작은 여러 선배 시인들이 시도해 왔지만 洪海里 씨가 가담한 「진단시」 동인들은 집단적 노력을 쏟는다는 점에서 이채를 띤다. 제4부에 수록된 열 편의 테마시는 洪海里 詩의 다양성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여타의 관심과도 밀접히 연관돼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의 中心에 속한다. <새, 하늬, 높새, 마파람결> 등의 구별과 <중다버지>, <아둔패기>, <솟대장이> 등의 어휘의 활용은 분명히 洪海里 詩의 새로운 경지이며 그의 시의 흥취를 돕는다. 동시에 주목할 바는 고전과 고사에 촉발된 그의 상상력이 기존의 관심을 새로운 문맥에서 다룸으로써 참신함과 함께 지속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서울 서낭당」의 <전철역이나 버스정류장의/수많은 서낭신/요란한 불빛만이/ 비인 도시를 지키고 있다>는 구절은 「武橋洞」 連作의 세계를 연상시킨다.---(졸저 『英美詩와 韓國詩』에 실은 「시대와 비젼」 참조) 「서동요(薯童謠)」>의 낭만과 소박한 세계에 대조되는 오늘의 시대상의 비젼도 동질인 것이다.
6월이 오면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지만 시멘트 철근의 숲은 오염에 젖어 있고 흐린 하늘 아래 아래만 살아남은 뜨거운 사랑 순간접착제 뻥튀긴 강정 불꽃만 요란하고 식은 잿더미가 골목마다 쌓인다
「薯童謠」 부분
자연과 문명의 대조, 性的인 연상의 비유가 <순간접착제>, <뻥튀긴 강정>의 설득성과 함께 단숨에 읽힌다. 현대의 졸속주의와 부박한 풍조를 힘찬 비유의 연속으로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요컨대, 옛날과 지금의 대조는 민족적 이상에서의 거리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비판적이지만 고전의 현대적 의의를 개성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민족의 연면한 동질성을 헤아리게 한다. <멧새 같은 우리 신세/뻐꾸기 알 품어보세> ---「말뚝이 타령」부분---의 푸념과 <밤이 가면 날이 새리/해 떠와라 안아보자>의 낙관은 永時代的 庶子의 체취를 풍긴다. 석금의 분명한 대조에 추가하여 공감에 의해 인물의 내면을 비추는 능력도 주목된다. 「정읍사」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흥미롭게도 고전에는 직접 話者가 아닌 <사내>의 관점도 제시한다.
나라가 저자요 저자가 젖었으니 내 어찌 젖지 않을 수 있으랴 밝디 밝던 달빛 사라지고 어둔 길 홀로 돌아가네 한낱 꿈길이라는 인생살이 눈물나라일 뿐인가 떨어진 미투리 버선목의 때 가래톳이 서도록 헤매여도 술구기 한 두 잔에 정을 퍼주는 들병이의 살꽃 한 송이 꺾지 못하고 빈대 벼룩에 잠 못 이룰 제 주막집 흙벽마다 붉은 난초만 치네
「정읍사」 부분
삶에 대한 달관의 멋, <눈물나라>의 보편성, <들병이의 살꽃>과 흙벽의 <붉은 난초>의 대조 등이 인간미와 현장감과 함께 짙은 공감을 준다. 이런 남편을 그리는 여인의 정은 어떤 것일까. <중다버지 떠돌이 더펄더펄>로 路上의 남편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을 표현하고 <당신 계신 젖은 나라/햇빛나라 금빛나라>라 함으로써 지극한 연모의 정을 표현한다. <눈물나라>에 대조되는 <햇빛나라 금빛나라>로 순박한 서민감정과 역경을 이기는 부부애의 힘을 긍정한 셈이다. 『대추꽃 초록빛』에는 시작과 인생에 대한 일관된 가치관이 있다. 洪海里 씨는 시작의 충동을 <그리움>으로 명명한다---(「그리움」 참조). 자연의 모든 현상---<대추꽃 초록이나/탱자꽃의 하양>---은 시간 속에 소멸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현상과 인간적 연상을 다룬「너를 위하여」에서도 <산등성이 홀로 피어 있는/들국화 같은 여자> 등의 세목을 통해 존재에의 그리움을 표현한다. 존재에의 애착과 일시성의 감회를 결구에서는 <반쯤 비어 있는/그런 너>로 비유하고 있다. 인생에 대한 개괄은 洪海里 씨의 경우 자신의 삶을 직접 다룬 시편이나 시대상을 다룬 작품보다 민족적 체험을 다룬 '테마시'에 분명히 드러난다. 요컨대, 고전과 고사에 주관성을 불어넣음으로써 자신의 가치관을 피력하는 계기로 삼았다. 시인은 「裵裨將」이나 「水路」의 열정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누구도 못 다스리는/이 가슴의 바람>을 토로한다. 「온달」의 경우에도 무운을 세운 장군의 모습보다 궁핍한 시대를 사는 꿋꿋한 선비의 자세를 강조한다. 「百結歌」에는 시작과 인생에 대한 洪海里 씨의 신념이 집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늘이 반주하고/산과 바다가 노래하는/곡을> <가슴이 비어 있는 이 시대를 위하여/이 나라를 위하여> 엮겠노라는 百結의 각오는 오늘을 사는 시인의 포부이기도 하다. <가슴이 비어 있는 이 시대>는 <반쯤 비어 있는/그런 너>와 대조를 이룬다. 앞의 경우에는 존재를 망각한 타성적인 삶의 비유이다. 반성이 없는 삶, <가끔은 하늘을 올려다보고/멀리 눈을 주>는---「動動」의 부분---법을 잊은 삶이다. 「百結歌」의 결론부에는 <비어 있음>에 대한 또 한번의 명상이 있다.
배부른 귀에 들릴 리 없는 울리지 않는 곡조 가슴으로 뜯으면 세밑에서 오동나무가 운다 봉황이 울도록 여섯 줄 뼈끝으로 튕겨도 하늘이 멀어 보이지 않는다 따끝이 멀어 들리지 않는다. 아아 더 먼먼 사람의 나라 비어 있음을 위하여 이 가슴을 다 쏟아 내 영혼의 모음을 다 모아 곡을 지으리라 곡을 지으리라.
「百結歌」 제3부 전문
<먼먼 사람의 나라>는 문맥상 세속주의에 반대되는 理想主義로 풀이되고 <비어 있음>은 욕심과 산란함에 대조되는 虛心으로 풀이된다. 존재에 대한 그리움, 반성적인 삶, 진리를 향한 虛心이 洪海里 詩의 일관된 가치관이다. 이처럼 뚜렷한 인생관을 담은 다채로운 詩世界는 괄목할 만한 성취이며 이제는 표현과 예지 면의 보다 큰 증대를 기대케 한다.
『대추꽃 초록빛』(東泉社 1987)은 『洪海里詩選』(탐구당 1983) 이후의 작품을 수록한 洪海里 씨의 일곱 번째 시집으로 審美·自然·時代에 관한 종전의 관심이 다채롭게 취급되는 동시에 전체적인 균형감과 함께 탁월한 성취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때로는 과격한 언어실험을 무릅썼으면서도 현시점에서 보면 점진적 변모를 꾀했음이 드러난다. 한 시인의 장단점은 연관된 것이기에 『대추꽃 초록빛』에도 표현과 詩想 면에서 미흡한 곳이 산견되지만 전체적으로는 빼어난 작품의 빈도로 만족감을 안겨준다. 이번 시집의 다채로운 인상은 종전의 관심을 보충하는 삶의 위기(危機)의 취급과 우리 민족의 古典과 古事에 근거한 시편이 주는 점층적 효과에 있다. 다채로우면서도 시인의 연치를 헤아리게 하는 일관된 인생관의 무게도 곳곳에서 감지된다. 〈안정, 이상, 평화, 휴식〉을 표상하는 대추꽃의 초록을 기리는 마음이 이 시집의 지배적 기풍이라 하겠다. 도합 4부에 펼쳐진 작품의 일관된 인생관 및 가치관을 소묘함이 이 글의 목적이다.
1 제1부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일상사의 범주에 속하지만 투병생활과 문상(問喪)을 다룬 작품들은 가열함과 절실함으로 이번 시집의 주요한 성과를 이룬다. 인생론적인 자세와 함께 일상사의 시적 가능성은 이후에도 탐색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失明의 위기를 다룬 「절망을 위하여」, 「포기연습」, 「1986·봄」 등의 작품은 고백체 詩의 진솔함과 함께 체험에 대한 적절한 심리적 거리(距離)로 즉각적인 감동을 준다. 평명한 문체의 거침없는 흐름 속에 음미할만한 암시적 표현도 마련된다.
희망과 나락 기대와 포기 그 가는 틈서리를 왔다 갔다 하며 4월은 깊어 가는데 뿌연 하늘 아래 그 날은 언제인지 오늘도 병원으로 가는 길에 절망시편을 읊는다 나비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절망을 위하여」끝부분
이 시는 봄철 학원 소요의 현장을 지나가는 시인의 모습을 통해 혼미한 정국과 개인적 위기의 긴박함을 동시적으로 보여준다. <뿌연 하늘 아래/그 날은 언제인지>는 개인적 궁경에 근거해 나라의 장래를 우려하는 시인의 共感을 암시한다. <나비 한 마리 날지 않는다>는 짐짓 예사로운 진술도 전체 문맥상 강렬한 심경의 표현이다. 아무리 각박한 현실이라도 <절망시편을 속으로 읊는>이가 시인이다. 체험에 매몰됨이 없이 애써 그 의의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시인의 특성이다. 다음의 구절도 위기에 처한 이의 심경이 절실한 표현을 얻었다.
하나씩 하나씩 비워내고 마지막 하나까지 비운 다음 눈 감고 실려가는 수술실은 머언 먼 우주의 별.
마침내 내가 나를 만날 때 여러 이름들이 떠올랐다 허공이 망막에 가득하고 어둠 속에 점이 한 개.
-「포기연습」 중간 부분
<머언 먼 우주의 별>과 <어둠 속에 점이 한 개>의 병치는 위기에 처한 개인의 고독과 불안을 실감시키며, 자아(自我)와 타인의 불가분리한 연관을 깨닫는 상황의 역설로 가슴을 친다. <마지막 하나까지 비운>다는 수술 직전의 심경은 체념에 가까운 운명에의 승복으로 압박감을 준다. 그러나 <마침내 내가 나를> 만나야 하고 동시에 <여러 이름들이 떠>오르는 것이 개별적 생명의 기반(羈絆)이다. 그리하여 <어둠 속>의 <점이 한 개>를 확인함에 극한상황의 처절함이 있다. 평명한 문체를 활용하면서도 문맥과 암시적 표현에 의해 절실함을 얻는 순간은 <회복실 서창에> 타는 <노을의 불바다>를 상정(想定)하는 심리적 거리와, 병원을 찾는 일의 담담한 서술 후에 <쓸쓸하고> <어둡고> <춥다>를 행간을 나누어 발언함으로써 얻는 확호함, 문상(問喪)을 다룬 「남은 자리」의 한 구절 <이웃들이 하나 둘 돌아가고 나면/한 사람이 남긴 자리가 너무 넓구나>의 미묘한 깨달음 등이다.
2 투병생활의 시편이 언어의 검약을 통해 표현성을 얻었다면 제2부의 시대상을 다룬 작품들은 격렬한 표현과 함께 요설에 기우는 순간이 많다. <법이 있어도 없는 나라/도가 있어도 없는 나라> 같은 역설로 시작해 <줄 넘은 유성기판의 나라> 같은 비판적 비유를 활용한 「술나라」는 격렬한 감정을 점층적 리듬에 담는다. 불만한 현실에 대한 절망을 <까만 우주공간에 까만 문패를 달고 까만 이름을 까맣게 걸어 놓는다>의 시상에 담은 「하늘 위에 하늘 있고」는 통렬한 풍자정신의 표본이라 하겠다. <어지자지> 같은 시어의 선택에도 거친 풍자적 몸짓이 보인다. 풍자적 태도는 국어의 음향에 근거한 시상의 전개로도 나타난다. 의사전달의 어려움을 다룬 「가!」 에서는 <다시 가! 라고 말했을 때/너는 가나다의 가? 냐고 물었다>는 구절을 통해 동문서답의 원인이 무엇일까를 헤아리게 한다. 공동의 문맥이 결여된 까닭일까, 아니면 답하는 이가 딴전을 부리는 것일까. <요즘 詩들은 시들하다/시들시들 자지러드는/한낮 호박잎의 흐느낌>---「詩人이여」의 서두---에서도 음향의 묘미에 대한 감수성이 보인다. 이러한 同意異義語의 활용은 분명히 시의 활기를 돕지만, <시는 시시하고/시인은 그렇다! 고 시인만 하는> 경우는 문제의 복잡성을 활달한 언어로 단순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환기시킨다. 보다 섬세한 비판적 표현도 있다.
낮은 목소리로 낮으막히 낮으막히
낮게 낮게 말한다 낮은 데로 낮은 곳으로 물이 흘러가듯이.
「요즘들은」 도입부
집요한 반복법이 아니라면 자연의 순리를 긍정하는 구절로 들릴 수도 있겠다. 과감한 진실의 발언을 삼가는 타성적인 삶을 <형상없는 꽃이 되어 서서>, <가슴이 없는 새를 사랑하고> 등의 역설을 거친 후 자연의 리듬과 인사(人事)의 어긋남을 병치시킴으로써 통렬한 효과를 빚는다.
해 저물면 밤새도록 날 밝아도 입은 두 개 귀는 하나
진실과의 떳떳한 만남을 무작정 미루는 이들에 대한 풍자적 어조가 <해 저물면/밤새도록>의 여유에 암시되고, 윤리적 새로움이 없는 날의 밝음을 <입은 두 개/귀는 하나>의 점강법(漸降法)으로 부각시킨다. 한편 「능동과 수동」의 連作은 洪海里 씨가 여전히 실험적인 시인임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체적인 긴밀성이 부족한 것은 몇 개의 모티브가 도입되었을 뿐 충분히 전개되지 않은 까닭이다. <이 시대의 숨겨진 섬>으로 표상되는 사회적 이상, <적막한 강산을 질타하는 고요>로 암시된 양성의 결합, <하얀 백지 위에 너를 그리>는 시작의 노고, 등이 주요 모티브이지만 전체적인 긴밀성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능동과 수동」 연작의 실험성에 비해 「天上天下」는 일상의 사실(寫實)에 밀착하면서도 <종점행 차내>, <온 세상이 적막 속에 하릴없이 잠들었다>, <뒤채이는 잠 속에서 무슨 꿈을 꾸었는지> 등의 대목에 의해 심경의 상징적 부피를 느끼게 한다.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들은 이처럼 다채로운 방법으로 표현성을 향한 洪海里 씨의 꾸준한 노력을 헤아리게 하는 동시에 이러한 충동의 보다 충실한 성과도 예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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蘭과 梅花에 대한 洪海里 씨의 경도는 동양의 정신이 늘 그랬듯이 윤리적 색채를 띈다. 사물의 관조는 인격의 도야와 무관치 않다. 자연친화의 정을 다룬 제3부의 작품들에도 다양한 방법이 활용되고 있다. 「蘭 찾아 無等 타며」는 47행의 여유 속에 詩想을 펼치지만 주요 모티브를 중심으로 세목을 정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초록빛 겨울은 산에 사는 난초뿐 꿩밥 아가다리 산콩나물이라 불리는 겨울에도 죽지 않고 살아 그 뜻만으로 서는 너를 찾아
「蘭 찾아 無等 타며」 부분
핵심적인 구절이다. 난초에 대한 토속 명칭의 나열에 애정이 서려 있고 〈초록빛 겨울은 산에 사는 난초뿐〉은 확고한 리듬으로 열정을 표현한다. 「蘭」은 비유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천년/면벽한/비구의/화두요〉라는 종교적 연상의 비유로 시작해 〈푸른 마당에 벌이는/끝없는/춤사위〉에서는 정물(靜物)의 동적인 파악을 통해 생명의 원초적 활력을 긍정한 후 존재의 비의(秘義)에 대한 다함 없는 찬탄을 <촛불 오르는 동안/풀어야 할/매듭이다.> 로 표현한다. 개념적 비유에 蘭의 색깔과 형상도 환기되어 있다. 「蘭아 蘭아」는 도합 50행의 작품으로 역설적 진술, 비유의 연속, 면면한 리듬에 담은 思惟 등이 결합된 빼어난 작품으로 투병 생활을 다룬 작품들과 함께 이번 시집의 대표작이다. 〈뼈가 없는 네게는/뼈가 있는데,〉〈뼈가 있는 내게는/뼈가 없구나〉의 서두의 구절부터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비유의 연속인 〈겨울밤의 비수〉, 〈대추나뭇가시〉, 〈차돌멩이〉, 〈불꽃〉도 蘭의 생김새와 함께 윤리적 연상을 상기시킨다. 후속되는 면면한 思惟도 전체적 문맥상 충실한 표현성을 지닌다. 햇빛, 바람, 물과 관련해 펼쳐지는 명상중 끝부분을 살펴보자.
네게는 물로 닦는 순수 물로 아는 절대 물로 사는 청빈 물로 비는 허심 물로 우는 청일 물로 빚는 여유 물로 차는 지혜가 잇다.
면면한 리듬의 즉각적인 설득력 외에도 한 줄, 한 줄을 음미하면 시상의 적의(適宜)함을 깨닫게 된다. <물로 닦는 순수>는 정화(淨化)의 상징인 물과 함께 인격도야의 과정을 상기시키기에 난점이 없지만 <물로 아는 절대>는 읽는 이 나름의 해석이 필요하다. 절대는 모든 조건을 초월하여 독립한 완전한 實在로 풀이됨으로 이 시의 경우에는 윤리적 정신이 지향하는 理想의 거리라 할 수 있겠다. <물로 아는>에는 蘭의 생태와 함께 道란 번잡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것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蘭 옆에 서 있는 시인의 상황에 근거해 보다 서정적인 심경토로에 기우는 동시에 전체적인 사유(思惟)를 요약하는 결구(結句)를 마련한다.
네 발은 늘 젖어 있고 내 손은 말라 있다
마른 손으로 너를 안으면 하루의 곤비가 사라지고 먼 산 위에 떠돌던 별, 안개 바람이 네 주변에 내려
내 가는 손이 떨리고 마취된 영혼이 숨을 놓는다
고요 속에 입을 여는 초록빛 보석 살아 있는 마약인 너,
십년 넘게 네 곁을 지켜도 너는 여전히 멀다.
어느 하루의 실내 풍경에서 시작되어 이윽고 외계의 자연 이미지로 옮겨진다. 이처럼 蘭의 개별적 생명의 환위(環圍)를 이루는 대자연의 섭리를 언급함으로써 십년 넘은 세월 동안 맺어온 인연의 신비를 유념한다. 의인법을 통해 지극한 애정을 표현하는 동시에 <여전히 멀다>라 함으로써 윤리적 이상과의 거리를 고백한다. <고요 속에 입을 여는/초록빛 보석/살아 있는 마약인 너>는 蘭의 자태와 의의를 묵상하는 이의 法悅을 힘차게 표현한 구절이다. 난과의 交感이 다함없는 성격의 것임도 암시되어 있다.
4 古典과 古事에 근거한 시작은 여러 선배 시인들이 시도해 왔지만 洪海里 씨가 가담한 「진단시」 동인들은 집단적 노력을 쏟는다는 점에서 이채를 띤다. 제4부에 수록된 열 편의 테마시는 洪海里 詩의 다양성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여타의 관심과도 밀접히 연관돼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의 中心에 속한다. <새, 하늬, 높새, 마파람결> 등의 구별과 <중다버지>, <아둔패기>, <솟대장이> 등의 어휘의 활용은 분명히 洪海里 詩의 새로운 경지이며 그의 시의 흥취를 돕는다. 동시에 주목할 바는 고전과 고사에 촉발된 그의 상상력이 기존의 관심을 새로운 문맥에서 다룸으로써 참신함과 함께 지속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서울 서낭당」의 <전철역이나 버스정류장의/수많은 서낭신/요란한 불빛만이/ 비인 도시를 지키고 있다>는 구절은 「武橋洞」 連作의 세계를 연상시킨다.---(졸저 『英美詩와 韓國詩』에 실은 「시대와 비젼」 참조) 「서동요(薯童謠)」>의 낭만과 소박한 세계에 대조되는 오늘의 시대상의 비젼도 동질인 것이다.
6월이 오면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지만 시멘트 철근의 숲은 오염에 젖어 있고 흐린 하늘 아래 아래만 살아남은 뜨거운 사랑 순간접착제 뻥튀긴 강정 불꽃만 요란하고 식은 잿더미가 골목마다 쌓인다
「薯童謠」 부분
자연과 문명의 대조, 性的인 연상의 비유가 <순간접착제>, <뻥튀긴 강정>의 설득성과 함께 단숨에 읽힌다. 현대의 졸속주의와 부박한 풍조를 힘찬 비유의 연속으로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요컨대, 옛날과 지금의 대조는 민족적 이상에서의 거리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비판적이지만 고전의 현대적 의의를 개성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민족의 연면한 동질성을 헤아리게 한다. <멧새 같은 우리 신세/뻐꾸기 알 품어보세> ---「말뚝이 타령」부분---의 푸념과 <밤이 가면 날이 새리/해 떠와라 안아보자>의 낙관은 永時代的 庶子의 체취를 풍긴다. 석금의 분명한 대조에 추가하여 공감에 의해 인물의 내면을 비추는 능력도 주목된다. 「정읍사」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흥미롭게도 고전에는 직접 話者가 아닌 <사내>의 관점도 제시한다.
나라가 저자요 저자가 젖었으니 내 어찌 젖지 않을 수 있으랴 밝디 밝던 달빛 사라지고 어둔 길 홀로 돌아가네 한낱 꿈길이라는 인생살이 눈물나라일 뿐인가 떨어진 미투리 버선목의 때 가래톳이 서도록 헤매여도 술구기 한 두 잔에 정을 퍼주는 들병이의 살꽃 한 송이 꺾지 못하고 빈대 벼룩에 잠 못 이룰 제 주막집 흙벽마다 붉은 난초만 치네
「정읍사」 부분
삶에 대한 달관의 멋, <눈물나라>의 보편성, <들병이의 살꽃>과 흙벽의 <붉은 난초>의 대조 등이 인간미와 현장감과 함께 짙은 공감을 준다. 이런 남편을 그리는 여인의 정은 어떤 것일까. <중다버지 떠돌이 더펄더펄>로 路上의 남편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을 표현하고 <당신 계신 젖은 나라/햇빛나라 금빛나라>라 함으로써 지극한 연모의 정을 표현한다. <눈물나라>에 대조되는 <햇빛나라 금빛나라>로 순박한 서민감정과 역경을 이기는 부부애의 힘을 긍정한 셈이다. 『대추꽃 초록빛』에는 시작과 인생에 대한 일관된 가치관이 있다. 洪海里 씨는 시작의 충동을 <그리움>으로 명명한다---(「그리움」 참조). 자연의 모든 현상---<대추꽃 초록이나/탱자꽃의 하양>---은 시간 속에 소멸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현상과 인간적 연상을 다룬「너를 위하여」에서도 <산등성이 홀로 피어 있는/들국화 같은 여자> 등의 세목을 통해 존재에의 그리움을 표현한다. 존재에의 애착과 일시성의 감회를 결구에서는 <반쯤 비어 있는/그런 너>로 비유하고 있다. 인생에 대한 개괄은 洪海里 씨의 경우 자신의 삶을 직접 다룬 시편이나 시대상을 다룬 작품보다 민족적 체험을 다룬 '테마시'에 분명히 드러난다. 요컨대, 고전과 고사에 주관성을 불어넣음으로써 자신의 가치관을 피력하는 계기로 삼았다. 시인은 「裵裨將」이나 「水路」의 열정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누구도 못 다스리는/이 가슴의 바람>을 토로한다. 「온달」의 경우에도 무운을 세운 장군의 모습보다 궁핍한 시대를 사는 꿋꿋한 선비의 자세를 강조한다. 「百結歌」에는 시작과 인생에 대한 洪海里 씨의 신념이 집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늘이 반주하고/산과 바다가 노래하는/곡을> <가슴이 비어 있는 이 시대를 위하여/이 나라를 위하여> 엮겠노라는 百結의 각오는 오늘을 사는 시인의 포부이기도 하다. <가슴이 비어 있는 이 시대>는 <반쯤 비어 있는/그런 너>와 대조를 이룬다. 앞의 경우에는 존재를 망각한 타성적인 삶의 비유이다. 반성이 없는 삶, <가끔은 하늘을 올려다보고/멀리 눈을 주>는---「動動」의 부분---법을 잊은 삶이다. 「百結歌」의 결론부에는 <비어 있음>에 대한 또 한번의 명상이 있다.
배부른 귀에 들릴 리 없는 울리지 않는 곡조 가슴으로 뜯으면 세밑에서 오동나무가 운다 봉황이 울도록 여섯 줄 뼈끝으로 튕겨도 하늘이 멀어 보이지 않는다 따끝이 멀어 들리지 않는다. 아아 더 먼먼 사람의 나라 비어 있음을 위하여 이 가슴을 다 쏟아 내 영혼의 모음을 다 모아 곡을 지으리라 곡을 지으리라.
「百結歌」 제3부 전문
<먼먼 사람의 나라>는 문맥상 세속주의에 반대되는 理想主義로 풀이되고 <비어 있음>은 욕심과 산란함에 대조되는 虛心으로 풀이된다. 존재에 대한 그리움, 반성적인 삶, 진리를 향한 虛心이 洪海里 詩의 일관된 가치관이다. 이처럼 뚜렷한 인생관을 담은 다채로운 詩世界는 괄목할 만한 성취이며 이제는 표현과 예지 면의 보다 큰 증대를 기대케 한다.